<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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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전.
“···내 가만 보니 상언이란 것은 결국 공사천을 가리지 않는 것인데 편견을 가지고 읽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
“그, 《예기》에서 말하건대 임금의 말은 실과 같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 윤(綸)과 같다고 했고, 다시 임금의 말은 윤과 같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 동아줄과 같다고 했다.”
“···?”
“이게 무슨 의미인가, 말을 뱉자마자 천하에 알려져 온갖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임금의 말이란 의미렷다. 그래서 《예기》에서는 임금이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가 다시 번복한다면 백성들이 기준으로 삼기 어렵게 되니 특히 임금으로서 삼가야 할 것이 말이라 하였다. 하지만.”
“···?”
“본시 군주의 도리는 잘 살피고 헤아려서 판단을 하는 것이지만, 군주가 잘 살피고 헤아려서 판단 했을지라도 틀린 것이 있다면 속히 인정하고, 미천한 사람의 말일지라도 그것이 장차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일아면 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에 있다 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
“임금은 독단에 빠지기 쉽고 독단은 편견에 치우치기 쉬우니 임금 된 자의 체통만 고집하여 나라를 좀먹지 말고 하찮은 자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 아니겠던가.”
“···”
“그래서 말인데, 크흠.”
“···하교하시옵소서.”
“그, 상언 말인데··· 내가 처음에는 아까 말한 편견에 치우친 게 아닌가 싶은데 경들의 뜻은 어떤가?”
불과 한식경 전만 해도 이 상언을 올린 놈을 찢어발기네 하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사지를 다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사진에 효수하겠다고 하신 임금의 갑작스런 태세전환(?)에 모두가 어리둥절해 했다.
사람이 원래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히는 법이다.
대신들이 그랬다.
모두들 입을 꾹 다물고만 있자 오히려 융은 그게 더 민망한지 괜히 헛기침을 터뜨렸다.
“생각해보면 혈기란 것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편견에서 혈기가 발동하기도 하니··· 에, 아마 그런 의미에서 내가 잔인한 말을 서슴지 않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만··· 그, 지금 또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해보면··· 에, 아무리 전가사변해서 내친 자라고 해도 정북진에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기도 하고··· 또, 보면 임금의 도리는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우선이니······.”
개똥이처럼(?) 횡설수설을 늘어놓던 융은 한참을 횡설수설하다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눈살을 찌푸리고는 진성대군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그 형에 그 아우답게 눈치 빠른 진성은.
“전하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하시옵니다. 지금 유홍을 능지처참하면 당장은 속이 후련할지 몰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에 찝찝함만 남게 될 것이옵니다.”
라는 말로 융을 벌떡 일어서게 만들었다.
“옳거니! 내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저것이다. 나는 일국의 임금이다. 임금이 백성 하나의 말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체통을 지키지 못 한 일일 텐데, 하물며 그 백성을 잡아다가 능지처참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영상.”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에, 다른 대신들과 함께 얼이 나가있던 영의정 허침은 두 번의 부름이 더 있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예를 갖췄다.
“예, 전하. 하교하시옵소서.”
“아까 경이 하던 말이 인상이 깊다. 뭐라 했었지? 유홍이 말한 압록강 연변은 토지가 비옥하고, 천참이니 오히려 정북진 보다 야인 오랑캐들을 막아내기 쉬울 거라고 했던가?”
압록강 연변이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고, 토지가 비옥해 너른 평야를 얻을 수 있으며, 사민(이주)을 펼치면 오랑캐들이 함부로 설치진 못 할 거라는 말은 했어도 정북진 ‘보다’ 오랑캐들을 막아내기 쉬울 거란 말을 했었는지는 영의정 허침도 의문이었다.
다만.
“신이 나이가 들어 기억이 예전만 못 해, 정확히 전하께서 하신 말씀을 아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압록강 연변이 정북진 보다는 수비가 용이할 것이옵니다. 애당초 지금 정북진의 형세를 살펴보면, 정북진에 국한 된 수비에는 용이할지 몰라도 다른 지역과 공조해서 수비하기란 어렵사옵니다.”
“공조해서 수비하기 어렵다는 말은 예컨대 어떤 의미인가?”
“당장 정북진에 오랑캐 기병이 쳐들어온다면, 그 수가 소수일 경우 정북진의 병력으로 막아낼 수 있겠지만 수백의 기병이 달려든다면 결국 주변 진영들의 도움이 절실할 텐데 도로가 깨끗하지 못 하고, 또한 산이 가로막고 있어 곧바로 구원하기가 어렵사옵니다. 다만, 압록강 연변은 다르옵니다.”
“계속하라.”
“애당초 정북진과 우록진, 호례진과 무창진에는 적호보다는 관직을 제수 받아 호의적인 이들이 더 많사옵니다.”
맞았다.
비록 역적들의 발호로 북정이 실패하긴 했지만, 군사를 한 번 일으켰다는 자체가 폐사군 일대의 오랑캐들에겐 큰 위협이었던지, 그 이후로 12개 부락이 더 귀순하며 관직을 청했었다.
“오히려 적호는 압록강 연변에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조차 전하의 북정으로 모두 몸을 내뺐거나 이주해서 세가 약해진 때이니 지금 연변에 사민을 펼치고, 성을 쌓고, 군사로서 수비케 한다면 능히 거진(큰 진영)으로 삼을 수가 있는 것이옵니다.”
“거진으로 말이냐?”
“예. 정북진은 농경지도 적고, 땅 자체가 농경에 적합하지 않아 수용 할 수 있는 인구가 제한적이지만 신이 언급한 압록강 연변의 평야 지대는, 비록 쌀농사는 짓지 못 해도 그 외 잡곡 농사는 크게 지을 수가 있으니 수용 할 수 있는 인구도 정북진에 비할 바가 아니옵고 천혜의 요새이니 굳이 성을 크게 쌓아 적호를 대비할 필요가 없사옵니다. 작게나마 진성을 지어 수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마침 옛날에 지어진 성터가 있으니, 그 성을 중수해서 사용 할 수도 있는 것이옵니다. 정북진이 천여명의 여진 기병이 쳐들어온다면 수천의 병력이 있을지라도 그 지형과 험한 산세 때문에 수비가 용이하지 못 하다면, 압록강 연변은 비록 천여명의 기병이 쳐들어오더라도 수성에 용이한 지형 때문에 단 오백의 수비군으로도 격파 할 수 있으니 그곳을 거진으로 삼는다면 적호들이 어찌 준동하겠사옵니까? 과거 선왕께서 압록강 연변으로 사민을 펼치고자 하셨던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오니 사세를 헤아려본다면 어떤 것이 더 장차 나라에 이익이 되겠사옵니까? 지금은 사체(사리와 체면)를 따질 것이 아니옵고, 진성대군이 말한대로 유홍을 처단하는 일이 당장은 후련함을 가져올지 몰라도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 이롭지 못 한 일이니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끔뻑끔뻑.
갑작스런 임금의 태세전환.
그리고 속사포처럼 내뱉는 허침의 사민정책.
이 둘의 상관관계를 눈만 끔뻑거리며 살피던 대신들은 뒤늦게 이해가 됐는지,
“토,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영상도 그리말하고, 다른 이들도 그리 말하니 내 마땅히 임금으로서 말을 번복했다는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따라야겠다. 유홍이 상언에서 청한대로 이주를 윤허하도록 할 것이니 빈청에서는 속히 논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빈청.
“전하께서 왜 갑자기 말씀을 바꾸셨을까요? 전하께서 변덕이 원체 심하시긴 하셔도 이런 일에 변덕을 부리진 않으셨는데 말입니다.”
“본관도 잘 모르겠소이다. 상언을 다시 읽어보고 마음이 바뀌실리는 없고··· 아마,대감과의 독대 때문 아니겠소이까?”
“아무리 그래도···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군왕이 말을 번복한다는 것은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만큼 대감이 독대 때 하신 말씀이 주효했을 수도 있고, 뭐··· 말을 번복하실 만큼 대감을 총애한다는 뜻 아니겠소.”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을 즈음.
정신 못 차린 넌씨눈 노공필이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사관을 물린 것도 이해가 안 되오. 아니, 이해를 떠나서··· 요새 부쩍 사관을 물리는 일이 잦아지셨는데 대관절 사관을 물리면 사초는 어찌 기록한단 말이오? 게다가, 아무리 대군이라시지만 편전에서 갑자기 독대를 여쭙는 것은··· 흐음.”
노공필이 말을 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대자, 다른 사람들은 그런 노공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노인 공경과 노신 우대 차원에서 다들 따끔한 소리를 마다하고 있을 뿐이지, 입을 오물거리는 게 따금하게 한 마디 하고 싶은 모습들이었다.
다만 모두들 노신이라서 참는 건 아니었고, 얼마 전에도 김전과 충돌이 있을 만큼 임금과 진성대군에 있어서 만큼은 상선 저리가라 할 정도로 과하게 반응하는 김감은, 이번에도 콧방귀를 뀌며 노공필을 냉소했다.
“거, 지부사께서는 무슨 불만이 그리 많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반정 땐 코빼기도 안 보이셨고, 전하께서 심병을 앓아 누워 계셨을 때 역시 코빼기도 안 비추셨던 분이······.”
“아니··· 크흠. 그게 왜 지금 나오는 것이오?”
“사람을 파악하려면 그 행적을 보라 했습니다. 앞뒤가 다른 분이 불만을 하니 영 이해가 안 돼서···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구요.”
“대제학, 말씀을 가려하시오.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건 내 익히 알고 있는 바이나, 그게 방자하게 말을 해도 된다는 면책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오.”
나름 딜을 해보겠답시고 총애 운운했지만, 모름지기 딜이란 건 상대가 기분 나빠해야 할 주제를 던져야 하는 법이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는 김감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딜이었다.
“저라면 후인들이 보기 민망해서라도 진즉 사직했습니다.”
“뭐, 뭐요!”
노공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이를 제지한 건, 영의정 허침이었다.
“그만하십시다. 대제학도 그만하시오. 지부사께서도 다 뜻이 있으시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으셔서 불만이라면 불만인 일을 토로한 것인데 후인으로서 이를 트집 잡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소이다.”
앞전의 노공필에게 보인 모습과는 상반되게 김감은 몹시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대감.”
“다들 어찌 생각하십니까?”
“연변에 사민하는 일 말이옵니까?”
“예.”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의지가 있으시니 따름이 온당하겠지요.”
“더욱이 압록강 연변의 일은 영상대감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선왕대에서도 논해지던 사안 아닙니까?”
“역적 이세좌가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당시에 사민되고도 남았지요. 여기 계신 분들도 듣거나, 두 눈으로 보아서 아시겠지만, 역적 이세좌가 어찌나 발버둥치며 반대를 했습니까?”
당시 이세좌의 논리가 부족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에는 타당했다.
다만 아무리 결과가 좋을지라도 과정이 좋지 못 하면, 결과는 아름답지 못 한 법.
이세좌의 반대가 그랬다.
반대를 위한 반대였으니까.
“지금 연변으로 사민하면 가장 큰 일이 무어라 생각들 하십니까?”
“여진 오랑캐의 문제보다는 탈주가 가장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탈주요.”
“예. 이 역적의 자손이란 것이 어찌 역적의 자손이겠습니까. 이미 스스로 파륜하여 강상의 법도를 뒤흔든 자들인데 하물며 기군망상이야 못 하겠습니까?”
연변으로 이주해서 살겠다고 말한 뒤, 여진족 영역이나 어디 산으로 도망 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실제로 변경의 군사들중 탈영한 자들 일부는 여진족에 동화되기도 했다.
“영감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역족의 자손들은 본시 학문을 가까이 하던 이들입니다. 개중에 주인 따라간 박복한 노비 년놈들이 꽤 있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들을 통솔하는 건, 역적의 자손들일 텐데 이 역적의 자손들이 설마 여진족의 영내로 도망하기야 하겠습니까?”
“음.”
“탈주 문제도 탈주 문제지만, 그보다 시급한 건 구휼 아니겠습니까?”
“구휼이요.”
“통상 사민을 하고 나면 면세를 한다던가, 수확을 하기 전까지 나라에서 얼마간 곡식을 내줘서 생계하게 하는데, 이번에 전가사변 된 자들의 경우는 그런 게 없었잖습니까. 연변으로 이주한다 한들 나라에서 쌀 한톨 내어주지 않는다면 모두들 아사할 겁니다. 듣자니 이번달에만 정북진에서 아사자가 서른명이 나왔다지요?”
“전하께서 노하실 텐데요.”
“최소한의 곡식이라도 딸려 보내야 할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모두 아사 할 텐데, 사민을 하나마나 아니겠습니까?”
“흐음. 탈주와 구휼 말고 또 다른 문제는 없겠습니까?”
“성을 쌓는 일도 문제지요.”
“성은 역적의 자손들을 부역에 동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 말이 나온 김에 부역에 동원시키고 곡식을 좀 나눠주면 되겠습니다. 그리 한다면 전하께서도 노하시긴 해도 설마 윤허를 아니 내려주시겠습니까?”
“으음.”
“군사를 쪼개는 일도 문젭니다. 성을 쌓는 건, 영부사의 말씀처럼 할 수 있다지만 군사는 어찌 쪼개야겠습니까? 이미 정북진, 우록진, 호례진, 무창진 이 사진을 새로이 설치하면서 변경의 군사들을 쪼개 입번시켰는데 여기서 더 쪼갠다면 허술한 곳이 나올 겁니다.”
“지금 마침 별충위와 의흥위 갑사 270명이 입번을 제때 못 해 예차(예비군)로 있으니 이들을 동원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러면······.”
빈청의 논의가 조용하지만 신속하게 진행될 즈음.
강녕전에서는 조용하지만 신속하게 짜고치는 고스톱이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