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92화>
***
“어라?”
뭔가 이상하다.
이상한 걸 넘어서 의아하기 까지 하다.
“이놈을 내 당장 압송시켜 본보기로 삼았으면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역적의 굴레를 쓰고 전가사변된 자가 감히 상언을 올려 어심을 흐렸으니 백번이고 천번이고 압송함이 온당한 처사일 것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또 생각해보면 정북진 만호 민천동(敏川洞)은 감히 역적 자손이 올린 상언을 가감하지 않고 올린 바가 있었으니 이게 어인 영문이겠사옵니까? 천동이 공신이긴 하나 그 죄를 묻지 않을 순 없사오니 체임(遞任)하소서.”
민천동은 억수 씨와 함께 아이진에서 대립질 하던 분이다.
알다시피 김운열의 악행을 몇 백리 길을 뛰어와 아뢴 분이기도 하다.
그 공으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다가, 사진이 설치 될 즈음, 정북진 만호로 부임했다.
아, 원래 성 없이 천동이란 이름만 쓰다가 민씨는 뭔가 싶을 수도 있는데 형님이 공신회맹제에서 사성(賜姓)해준 성이다.
좌우지간.
정북진 만호 민천동을 체임하라는 말에 이구동성으로 상언을 올린 역적을 성토하던 편전 분위기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눈치가 없이 공신을 체임하라 한 이분은 모두들 알고있는 노공필이다.
내가 일찍이 반박무새란 별명을 붙여준 분이기도 한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계신지는 나도 의문이다.
이런 거 보면 사주팔자가 있는 것 같다니까?
필터링 같은 거 없이 말을 막 내뱉으시는데 명줄이 참 기셔.
쾅!
“그 일과 공신을 좌천시키는 건 대관절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역적이 창궐했을 때, 금부지사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몸을 사려겠지만 만호 민천동이는 별충위에 속해 근왕하는데 힘썼다. 그런데 감히, 뭐? 누굴 체임해?”
형님의 권위가 무소불위에 가까워졌다는 걸 증명하는 게 바로 이거다.
예전 같았으면 노공필의 말에 이리 대놓고 면박 같은 건 안 주셨겠지만, 요새는 아예 대놓고 면박을 주시거든.
보통이라면 이런 면박에 다른 대신들이 ‘고정하시옵소서.’라고 브레이크를 걸만도 한데 지금은 다들 가만히 있는건 형님의 눈치를 살펴서가 아니라, 진짜로 노공필이 눈치 없는 짓거리를 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제법 총명했던 분인 걸로 아는데··· 지금 내 눈엔 권력의 중심에 있다가 그 밖으로 미끄러지니 어떻게든 복귀하려 안간힘을 쓰는 걸로 밖에 안 보인다.
사람이 간절해지면 눈치도 없어지고 망언도 많이 하잖나.
“그런 의미가 아니오라······.”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이냐!”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한없이 움츠러드는 노공필 할아버지를 보면 동정심이 인다.
그래도 옛날에는 행세 깨나 하시면서 어깨에 힘도 좀 주고 다니셨던 분인데, 지금은 이래저래 욕을 많이 잡수신다.
몇 달 전에는 김감 아저씨한테도 욕 오지게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정확히는 탄핵을 당했다.
무능한 이는 조정에서 내치는 게 좋은데 무능의 표본이 노공필이라면서······.
심지어 좀 답답한 원칙주의자이자이면서도 하관이든 임금이든, 누구에게도 공평히 대한다는 평이 있는 대사헌 김전 조차, 김감의 탄핵소에 동조를 했을 지경이니 말 다했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지부사(지중추부사)가 의욕이 과해 실언을 한 듯 하옵니다.”
에전에 면신례에 대한 일과 역적이 창궐했을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노공필이기에, 지금도 그에 대한 인상이 썩 좋지만은 않지만 나라도 나서줘야지, 어쩌겠나.
“크흠. 도제조가 그리 말하니 내 지사가 실언을 한 거라 생각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지만 실수와 실언은 한 번이면 족하다. 무릇, 입은 곧 재앙의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라(舌是斬身刀), 했으니 이것이 공신에게 국한되는 말이겠던가, 노신에게 국한되는 말이겠던가.”
누가 보더라도 너에게만 국한된다는 협박이셨다.
“소, 송구하옵니다······.”
“아무튼 간에 지금 역적 유순정의 자제이자 전가사변되어 정북진에 묶여있는 유홍이가 감히 이같은 상언을 올렸으니 어찌 본보기를 삼으면 좋겠는가?”
형님이 말씀하신 ‘이같은 상언’이란 말에, 나는 내앞에 있는 필사된 유홍의 상언을 읽어보았다.
역시나 처음처럼 이상하고 의아하다.
다만 나만 그런 건지,
“신이 학식이 비루하고, 법을 아는 바가 어두워 어찌 말씀을 아뢸지 모르겠사옵니다만 지금 사진으로 내쳐진 자들은 특히나 전하의 성은을 입은 자들이옵니다. 성은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어찌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 할 수 있겠사오며,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온데 지금 이리 방자한 글을 올려 조정을 분란케 하는 것은 과연 그 씨앗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옵니다. 참하여 본보기로 삼으소서.”
“그렇사옵니다. 본시 상언이라 함은 백성이 올리는 글을 뜻하는데 천하의 온나라를 둘러보더라도 역적이 어찌 백성이겠사옵니까? 이는 백성이 올린 글이 아니라, 역적이 올린 글이니 도적들이 붙이는 벽서 축에도 못 끼는 것이옵고, 오히려 역적이 붙이는 괘서(掛書)에 가깝사옵니다. 참하여 종사(나라)의 본보기로 삼고, 그 목은 사진에 돌려 효수하소서.”
“경들의 뜻이 참형에 있다지만 참형으로는 이를 바로잡을 수 없고, 또한 본보기로 삼을 수 없을 듯 하다. 내 이놈을 능지처참하지 않고서는 화가 누그러지지 않을 듯 하니, 놈을 압송하여 저자에서 능지처참시키고 그 목은 정북진에, 몸통은 우록진에, 팔다리는 호례진(浩禮鎭)과 무창진(茂昌鎭)에 나누어 보내 역적들이 경계케하였으면 하는데, 이는 어떤가?”
보다시피 모두들 유홍이 올린 상언을 성토하고 있다.
나만 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영의정 허침이다.
“그래, 영상. 다른 방안이 있는 것인가?”
“지금 신이 이런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참으로 주저되옵고 망설여지오나 신은 일국의 정승이기 이전에, 글을 닦는 선비이기도 하니 목숨을 내놓고 간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니, 무슨 말을 하려기에 목숨까지··· 해보라.”
“지금 역적 유홍이 올린 상언에 전하께서는 필시 상심하셨겠고 분노하실 것이옵니다. 어찌 아니 그러겠사옵니까. 하오나 유홍이 말한 ‘강너머 연변에 있는 땅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면 천번 엎드려 절할 일이겠습니다’ 라는 부분은 자세히 볼 필요가 있사옵니다.”
형님은 화를 내시기 보다 설명을 들으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선왕 시절 조정에 있으면서 북정과 서정에 종군한 일이 있사오니 비록 변경의 일에 해박하지는 않더라도 유홍이 말한 강너머가 어떤 곳인지는 아옵니다.”
“한데?”
“신이 좌승지로 재직하며 도원수 허종에게 전쟁의 일을 전달하러 가면서 그곳의 지리를 둘러본 바가 있는데 과연 상언에 나온대로 낙토였사옵고, 농사 짓기에 적합했사옵니다.”
뜬금포 하나 날리자면 허종과 허침은 형제다.
“또한 변경의 군사들을 둘러보면 하나같이 말하기를 ‘저곳에 들어가 농사 짓는다면 필시 곡물이 잘 자랄 터인데.’하는 아쉬운 소릴 들었으니 당시에도 그곳의 풍요로움은 익히 알려진 바가 있었사옵니다. 하여 선왕께서도 그곳에 백성을 이주시켜 살게 하면 어떤가 하는 논의를 대신들에게 하게 만들었는데, 역적 이세좌가 반대하면서 흐지부지 된 일이 있사옵니다.”
“금시초문이다. 계속하라.”
“당시 역적 이세좌의 반대도 나름의 논리가 있긴 했사오나 신이 둘러본 연변은 실로 천참(천혜의 요새)였사옵니다. 더욱이 이번에도 전하께 부월을 하사받아 도원수로 그 지역을 지나쳤는데 과연 모든 지역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강에 둘러싸여있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던데다 지금 설치된 정북진과는 통하기가 용이하니 북과 동, 서만 잘 방비한다면 너른 평야를 얻을 수 있는 지형이었사옵니다.”
“평야?”
“예. 하니 지금 그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전가사변된 역적의 자손들로 하여금 들어가 농사 짓게 한다면 감히 오랑캐 기병들도 설치진 못 할 것이니 오히려 북방이 평안할 것이옵니다.”
역시!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내가 지금 유홍이 올린 상언을 보면서 이상하고, 의아하다고 했던 게 바로 이 부분이다.
알다시피 나는 부원수로 활약··· 솔직히 활약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가긴 갔다.
물론 나는 벽동에 파진했고, 벽동과 정북진의 거리는 제법 되지만 나도 명색이 지휘부의 수뇌였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이 갈 진격로라던가, 그 일대의 지도는 받아봤었다.
수뇌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토박이를 불러다 그 일대의 소문이라던가, 지형도 들었고 심지어는 풍습까지 들었었다.
당시에도 난 내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꽤 괜찮은 땅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누차 말하지만 그래서 이상하고 의아하다고 한 거다.
형님은 뭐, 역모의 당사자시니 어쩔 수 없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거든.
“하지만 영상이 어찌 역적의 자손을 변호 할 수 있단 말이냐?”
“비호함이 아니오라 비록 역적의 자손일지라도 그곳의 지리를 잘 파악하고 있으니 동조하는 것이옵니다.”
“다른 사람이 어찌하여 놈을 쳐죽이라 말하는 것이겠는가? 영상이 말한 바는 내 잘 알겠지만, 모두가 반대하는 일이니······.”
“저기, 전하.”
“···?”
“지금 이 타이··· 아니, 이 시점에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참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독대를 좀 할 수 있겠사옵니까?”
내가 생각해도 무례한 독대 신청인 건 맞는데, 만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저는 반대 안 하고 영상대감 말에 찬동하는데요?” 라고 하는 게 더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됐다.
게다가 지금이 아니면 말씀 드리기가 애매할 것 같았다.
“뭐··· 안 될 것도 없지. 경들은 모두 물러가고 일식경 뒤에 다시 찾아오라.”
***
“허침의 말에 찬동한다?”
드디어 형님과 단 둘이 남게 된 편전이다.
형님과 독대하자고 다른 사람들을 내쫓은 게 죄송스럽긴 한데··· 사람들 다 보는 공적인 자리에서 차마 형님의 말을 반대한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예.”
“하지만 어찌? 놈의 상언은 너도 보지 않았더냐. 무례하고 공손하지 못 한 것이 태수 저리 가라였다.”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제가 예전에 경연했을 때, 형님이 하신 말씀 기억하세요?”
단 둘이 있는 자리지만 차마 임금을 가르쳤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어, 경연이라고 에둘렀다.
진퉁 경연관들이 들으면 땡중놈이 불도들 모아놓고 성경 가르쳤다고 말할 만큼 터무니 없는 가르침들이긴 했지만······.
어쨌건.
“하도 많은 말을 했던지라 뭘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나는 일단 엿듣는 귀가 있는지 주변부터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그래도 혹시 몰라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왜, 예전에 제가 경연만 했다하면 말씀하셨잖습니까. 나는 전하가 아니라 폐하라 불리고 싶다고······.”
경연을 하면서 내가 가장 크게 놀랐던 대목이기도 했다.
형님께서 날 이렇게 신뢰하시나?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고··· 아니, 그전에 이런 야망이 있었나?
하면서 말이지.
“지금도 변함은 없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쬐끄만 땅덩어리가 정녕 내가 다스리는 조선이 맞다면, 저 중국처럼 넓히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러자면 유홍이 말한 강너머 땅이 제격인 겁니다. 형님께선 그저 유홍이나 다른 역적의 자손들을 저 땅 너머로 이주하는 걸 윤허만 하시면 되는 거죠.”
“음.”
“그럼 저길 시작으로 형님이 영토를 넓히고자 하는 꿈이 시작 되는 겁니다.”
“시작 말이냐?”
“저곳을 전진 기지 삼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