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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91화 (19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91화>

    ***

    “아시다시피 공신을 우대하는 법도는 조종조 이래 이어져 오던 옛법이라 지금 과격하게 폐지 할 수 없다는 여론이 있었사옵니다. 다만 지금 면세의 특혜를 누린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므로, 면세는 당대에만 국한하는 것으로 정해봤사옵고······.”

    사헌부 장령직과 더불어 병무도감의 감조관(監造官)을 겸하고 있는 안처직의 브리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먼 산을 바라봤다.

    여기 말로 모꼬지(소풍) 가고 싶어지는 날씨다.

    “문제는 세법인데······.”

    모꼬지 가면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던 사이.

    말을 흐리는 안처직에 나는 상상의 나래는 머릿속에 쳐박아두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세법 말입니까?”

    “법리에 따라서 연분구등법으로 세법을 지정함이 옳지만 공신전이란 대감께서도 아시다시피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사옵니다.”

    맞는 말이다.

    오히려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다.

    형님께 공신전을 하사 받았을 때, 알짜배기인 금석리 땅을 한꺼번에 받았으니까.

    물론 금석리 땅은 형님께 받은 공신전 중의 일부고··· 따지고 보면 공신전이랍시고 받은 땅들 중에는 해남에 있는 땅도 있었다.

    함흥에 있는 땅도 있었고.

    안처직의 말처럼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는 게 바로 공신전이다.

    “그렇죠.”

    “예. 그런데 이를 법리에 따라서 적용한다면 혼란이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되었사옵니다. 이에 의견을 구하니 호조정랑 최세절(崔世節)이 연분구등법의 중하년 기준으로 1결 10두를 징세하자 주장하였사온데 1결에 10두는 반발이 클 듯 하여 1결에 6두로 감하자는 의견이 대두 되었사옵고, 모두들 이견은 없었사옵니다.”

    호조정랑 최세절 역시 감조관 중의 한 사람이었다.

    “1결에 6두도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안처직은 1결 10두의 반발을 염려해 1결 6두로 줄였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염려가 됐다.

    가진 사람은 저희들 가진 거 조금만 가져가려 해도 반발하기 마련이니까.

    “많은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지금이 적기이옵니다. 전하께서 크게 의욕을 보이고 계시니 설령 지주들이 반발 한다 한들 역심을 품고 반발 하겠사옵니까?”

    설득 당했다.

    확실히 요즘 같이 형님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는 감히 반발을 못 하겠지.

    반발도 못 하는데 반역?

    꿈도 못 꾼다.

    “음.”

    “여기서 제기 된 문제는 특수전이옵니다.”

    “특수전?”

    “공신전이 오곡을 기르는 전답만 포함한 게 아니지 않겠사옵니까?”

    하긴.

    내가 형님께 받은 공신전 중에도 과전(과수원)과 곽전(미역밭), 태전(김밭), 염전(소금밭)이 소수나마 포함돼 있다.

    당연히 이 특수전들의 수확이란 건, 과수원일 경우 과일이 될 테고, 미역밭일 경우에는 미역이 될 텐데 이를 곡물로 대체하기란 힘들다.

    “그렇겠군요. 특수전에 대한 사목은 정해지지도 않았을 테니까.”

    “예. 해서 과전과 곽전, 태전, 저전(닥나무밭) 등의 특수전은 아직 사목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조정에서 사목을 정하도록 논의케함이 좋겠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사옵고, 지금 당장 염전은 염세(鹽稅)라는 사목이 있으니 이를 참고하여 1좌(坐)에 소금 3석을 걷게하는 것으로 결론 지었사옵니다. 대감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를 토대로 전하께 주달할 참이옵니다.”

    “문건으로 작성한 거 있지요?”

    “예.”

    “따로 챙겨두세요, 제가 전하께 주달할 테니까.”

    “알겠사옵니다. 아, 그리고 대감.”

    회의가 끝나 주섬주섬 문서들을 챙기고 일어나려는데 안처직이 날 부른다.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인지라······.”

    “예, 뭐.”

    다른 사람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모두 빠져나가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개인적으로 하실 말씀이란 게?”

    “아까 말씀드린 역심 말이옵니다.”

    “역심? 네, 그게 왜요?”

    “지금은 모두 전하의 위엄에 압도돼서 함부로 상소 조차 못 올리고 있지만 따지고 본다면 역적 박원종과 졸개들이 어찌 창궐했겠사옵니까?”

    “방심해서?”

    “···예, 뭐. 비슷하지요.”

    “그래서 말이온데 금군의 정원을 늘리도록 함이 어떨지요?”

    “형님께서 금군의 정원을 늘리는 건 당분간 삼가라지 않으셨습니까?”

    꼭 금군에 국한 된 문제는 아니었다.

    당분간은 갑사들의 시재(시험)도 금하라 명하셨다.

    새로 군인들을 뽑는다 한들 병무도감으로 인해 혁파가 되면 처리할 문건만 더 늘어날 테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음.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형님께 따로 주달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날 좋네.”

    안처직이 물러가고 홀로 남은 회의실.

    날이 너무 좋다.

    원래라면 날이 너무 좋아서 모꼬지나 갈까 싶었는데, 안처직 말대로 금군의 정원 문제부터 주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병조를 빠져 나온 나는 경복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부디 신의 읍소에 비답을 내려주시옵소서. 지금 전하께오서 아무런 비답도 내려주지 않으시니 신은 그저 황망하옵고, 두렵사옵니다. 어떤 비답이라도 좋으니······.”

    아, 맞다. 깜빡하고 있었다.

    대마도주.

    도주한테는 한 이틀만 석고대죄 더 청하고 있으라 했는데 오늘이 사흘째다.

    병무도감의 일이 너무 바빠서 깜빡하고 있었다.

    “도주.”

    “대군공 합하!”

    “전하께서 비답이 없으시옵니다······.”

    “아··· 마침 제가 전하께 도주의 문제를 상의드리러 입궐하는 참이었습니다.”

    울상이던 도주가 반색한다.

    “참말이시옵니까?”

    “예.”

    “그럼 잘 부탁드리겠사옵니다.”

    손까지 마주잡고 부탁 운운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피가 말렸나 싶기도 하다.

    ***

    “병무도감의 일처리가 똑부러지니 국가의 미래가 밝다. 모두 너의 덕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나는 형님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을 하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이제는 별 감흥이 없다.

    칭찬도 재물과 같은 것 같다.

    “모두들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겠지. 그래, 도주는 아직도 광화문에 죽 치고 있더냐?”

    “예. 여전히 울상이던걸요.”

    형님이 파안대소를 터뜨린다.

    “도주의 담이 그리 작을 줄 누가 알았을까?”

    “도주도 반성하고 있기도 하고··· 더 시간을 끌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테니 불러들이는 게 어떠십니까?”

    “음. 네 말대로 해야겠다. 선전도 충분히 했으니.”

    형님이 말하는 선전은 다른 게 아니다.

    광화문은 다른 의미로 번화가의 한 곳이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거리가 쭉 뻗어 있으니까.

    그 말은 온갖 관리들이 드나든단 소리다.

    도주의 읍소는 왕의 위엄을 또 한 번 나타내는 일이었다.

    “아, 그리고 안처직이 금군의 정원을 늘리자는 의견을 냈는데 말입니다.”

    “정원을?”

    “네. 아무래도 공신전 때문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반발이 크긴 하겠지.”

    지금도 조정은 지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서 광화문을 점거하고 시위할까봐서.

    공신전 문제를 논하고 있는 지금도 이 정도인데 시행이 되면··· 최악의 경우에는 정말 역적이 창궐할지도 모른다.

    물론 최악의 경우에.

    “네 생각은 어떠하냐?”

    “저는 나쁠 건 없어보입니다. 금군이란 게 어차피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습······.”

    금군이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나는 흠칫했다.

    확실히 나 조선인 다 된 것 같다.

    금군과 왕권의 등호 설명도 할 줄 알고.

    “왜 말을 하다 마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좌우지간, 나쁠 건 없어 보입니다. 지방에서 들고 일어나려는 기미를 보이는 선비들한테 시위도 할 수 있구요.”

    죄인의 목을 장대 높이 매다는 건, 이걸 구경하라는 게 아니라 너희도 이렇게 될 수 있으니 경계하라는 차원에서다.

    같은 맥락에서 금군도 마찬가지다.

    금군의 정원이 늘었고 왕권도 너희 생각 이상으로 비대해졌으니 함부로 날뛸 생각은 하덜덜 말라는.

    근데도 꼭 들고 일어나는 놈들이 있긴 한데, 그런 놈들은 이제 매가 약이지.

    “알겠다. 네 뜻도 정 그러하니 내 빈청에 논의하라 하마.”

    라고 형님이 긍정적인 답변을 내려주시던 그때였다.

    “전하, 도승지 권균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지금 대군과 종사를 논하고 있으니 나중에 들라 하라.”

    “사진의 일로 급사(急事)한 일이라 사체를 돌볼 겨를이 없다 하옵니다.”

    “사진?”

    “예, 어찌하오리까?”

    “들라하라.”

    잠시 후.

    도승지 권균이 들어왔다. 나는 권균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사진의 일이라던데 무슨 일인가?”

    “그게······.”

    권균은 자꾸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의미인지는 넌씨눈인 경덕이도 알아 먹겠다.

    형님과 둘이 얘기하게 나가 달란 소리다.

    조용히 일어나려하자,

    “됐다. 사진을 개척케 한 것은 대군의 의견이기도 했으니 굳이 말을 아낄 필요 없다.”

    “아, 하오면··· 그, 사진의 역적 후손이 참람하게도 상언을 올렸사옵니다.”

    쾅!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따로 있나! 기껏 목숨을 살려줬더니 감히 상언을 올려 임금의 심기를 불편케 해? 그놈이 누구냐!”

    “유홍(柳泓)이라 하옵니다.”

    “유홍이라면··· 허, 이런 쳐죽일 놈이 있나. 당장 패초를 보내 중신들을 모두 소집하라.”

    “예, 전하.”

    아무래도 사진의 일 때문에 또 시끌벅쩍해질 것 같은데, 도주한테 하루, 이틀만 더 읍소하고 있으라고 해야겠다.

    불쌍한 도주.

    ***

    폐사군 이후 설치 된 사진의 일부인 정북진(征北鎭).

    이 정북진으로 전가사변된 사람들중 하나인 유홍은 거적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아사인가?”

    사인을 짐작한다는 듯 묻자 함께 거적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가여운 사람 같으니··· 이자의 이름이 뭔가?”

    “가도이라고 하옵고, 소싯적 박운(朴雲)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자이옵니다.”

    박운은 유홍의 아비와 함께 역적질에 가담한 박원종의 자제였다.

    전가사변되면서 역적들의 노비 일부도 함께 전가사변 됐는데, 다만 주인과 종이 함께 전가사변되면 또 불측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해서, 주인과는 따로 별거하게 만들었다.

    박운이 사진의 일부로 설치된 우록진(麀鹿鎭)으로 내쳐졌으니, 그의 종인 가도이는 이 정북진에 내쳐진 것 같았다.

    ‘극락왕생하시게.’

    유홍은 조용히 가도이의 넋을 빌어줬다.

    따지고 보면 가도이가 무슨 죄가 있겠나.

    주인 잘못 만난 죄였다.

    “가도이를 포함해서 마흔명이옵니다······.”

    그와 함께 정북진에 내쳐졌고, 함께 고생하고 있는 박질이의 말에 유홍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박질이가 말한 마흔명은 모두 아사자다.

    가뜩이나 험지에 농사도 잘 안 되는 정북진인데 올 농사가 모두 망쳐버렸다.

    당연히 피죽도 못 먹는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지금처럼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북진의 만호에게 군량미를 좀 내어달라 청할 수도 없었다.

    만호가 매정해서가 아님을 유홍은 잘 알았다.

    만호는 그저 어명을 따르고 있었다.

    사진으로 내쳐진 자들에겐 절대 구휼을 명목으로 곡식을 내주지 말라는 지엄한 명이 있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저 강 너머에 내쳐졌다면 사정이 나았을 텐데요······.”

    박질이가 강 너머를 응시하며 뇌까리듯 말했다.

    인생 한끗 차이라지만,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전가사변돼서 군사들의 감시를 받는 마당에 강 너머를 가본 적은 없지만, 순찰차 강 너머를 가본 군사들에 의하면 강 너머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있다고 했다.

    박토인 이곳과는 달리 낙토라는 말도 했었다.

    ‘전하께 간청을 한다면······.’

    불현듯 치민 생각에 유홍은 잠시 망설이다가 머잖아 어딘가로 향했다.

    정북진 만호가 있는 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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