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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90화 (19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90화>

    ***

    “그래서?”

    “그래서는요. 눈물, 콧물 빼면서 저더러 살려달라던데요.”

    형님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살려달라?”

    “네. 입궐하는 김에 저더러 전하께 태수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제발 입궐좀 시켜달라 대신 아뢰달라고, 울며불면서······.”

    절레절레.

    나는 최근에 그런 추태는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평생토록.

    “놈이 겁을 단단히 먹었나 보구나.”

    “저라도 겁 먹었을 걸요.”

    형님은 흐뭇하게 웃으시면서 꽈배기를 집어드셨다.

    그래, 나라도 겁을 먹었을 거다.

    아니, 겁만 먹겠어?

    오금이 저리다 못 해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르지.

    나도 처음에 형님이 대마도주를 길들이기 위해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계획을 말씀하셨을 때, 모골이 송연하다 못 해 오싹했었으니까.

    내막을 알고 있는 나도 계획을 듣고서 오싹했는데 대마도주는 오줌 안 지린 게 오히려 용할 지경이다.

    “어떻게 하시려구요?”

    “으음··· 어떻게 할까?”

    “병(丙) 계획대로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번 프로젝트는 대신들도 모르게 기획이 됐다.

    이 프로젝트를 알고 있는 사람은 형님과 나, 그리고 상선 대감, 세 사람이 전부였다.

    굳이 대신들도 모르게끔 기획한 건, 너무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이고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인지라 반대가 나올 수도 있는 상선 대감의 말이 주효했다.

    솔직히 그렇다.

    이번 프로젝트는 거의 권모술수에 프로젝트다.

    그 권모술수를 임금이 기획하고, 진행한다.

    이게 또··· 형님이 일국의 임금이시니 체통 문제도 있잖나.

    조정대신 태반이 형님을 지지하는 왕당파라 해도 체통 문제는 또 다르다.

    임금의 호령이란 게 어떻게 보면 체통에서 나오는 건데, 형님 스스로 체통을 떨어뜨리실 필요는 없거든.

    좌우지간, 비밀리에 진행 된 이 시크릿 프로젝트의 플랜은 갑을병정, 그러니까 A~D 플랜 까지 존재했다. 내가 말한 병 플랜은 C 플랜을 말했다.

    뜬금없는 선전포고에 도주가 깜짝 놀라 용서를 구할 때, 어떻게 나가야할지에 대한 계획이기도 했다.

    “음··· 병 계획 보다는 정(丁) 계획이 낫지 않을까?”

    정 계획, 그러니까 D 플랜은 도주가 선전포고에도 굴하지 않고 배짱을 부릴 때를 대비한 플랜이다. C 플랜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불경죄로 잡아 들이자구요?”

    D 플랜은 도주가 선전포고에도 안 쫄고 배장을 부릴 때, 불경죄로 일단 신병을 확보하고 불경죄를 공론화시키는 것이었다.

    그 다음?

    그 다음은 조정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도주를 쓱싹- 하든 대마도를 꿀꺽- 하든, 아니면 용서를 베풀든.

    셋 중 하나였다.

    “도주가 병 계획대로 움직여 줄 지는 몰랐지 않더냐.”

    그건 그렇다.

    나는 도주가 D 플랜대로 움직일 거라 예상했었다. 내가 대마도에서 본 도주는 강단이 있어 보였거든.

    신공과의 일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아무리 중앙의 감시가 소홀해 밀무역이 성행한다고 하지만, 신공과 아무렇지 않게 밀무역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대마도주다.

    당연히 그만한 강단이 있으니 밀무역까지 했다고 생각했고, D플랜대로 움직일 거라 예상한 것이다.

    “그건 그렇죠.”

    “지금 갑자기 병 계획대로 도주의 자죄를 받아들이고 관용을 베푸는 모습은 그림이 썩 좋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그, 뭐냐. 굼뱅이도 밞으면 꿈··· 아니, 지렁이도 밞으면 꿈틀거린다고 했는데 지금 불경죄로 잡아들이면 왜관에 있는 도주 부하들이 반발 할지도 모릅니다.”

    “으음.”

    “어차피 목적은 길들이기 아니십니까?”

    “그렇지.”

    “길들이는 데에는 당근과 채찍이 제격인데 그러자면 병 계획이 딱 이죠.”

    “그럴까?”

    “예.”

    형님이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알았다. 하면 네 말대로 하자꾸나.”

    ***

    강녕전을 나와 광화문이 점점 가까워지면 질수록.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도주는?”

    수문장에게 묻자, 수문장은 눈빛으로 말을 대신했다.

    수문장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옮기자 광화문 한켠에 도주와 가신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최대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도주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합하!”

    비에 쫄딱 젖은 개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던 도주는, 제 주인을 반기는 개새끼처럼 후다닥 뛰어왔다.

    이런 겁 많은 위인이 어떻게 신공과 밀무역을 했나 싶기도 한데··· 또 따지고 보면 일견 수긍이 간다.

    도주는 신공과의 밀무역으로 인해 경상도 해역이 무방비 상태임을 알았을 텐데도 왜구를 안 보냈다.

    그만큼 겁이 많았다는 설명이 될 수도 있다.

    “아직도 계셨습니까?”

    “예··· 어찌 되었사옵니까?”

    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도주가 아··· 하고 탄식을 내뱉는다.

    그에 나는 도주의 눈치를 적당히 살피다가 말했다.

    “도대체 형님께 어떤 말씀을 하셨길래 형님이 저리 화가 나신 겁니까?”

    “예? 아니, 저는······.”

    “제 평생 형님께서 저리 화가 난 건 딱 한 번 봤습니다.”

    “언제 말이온지······.”

    “도주도 알고 계시지요? 몇 년 전에 역적이 발호한 거.”

    “알고 있지요.”

    “역적들이 발호할 때 저렇게 화가 나셨던 거 빼고는, 저리 화 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거, 원··· 도주 말 듣고 중재하러 갔다가 질타만 받고 나왔습니다.”

    “지, 질타요?”

    끄덕.

    “도주도 들어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랑 형님은 막역한 사이입니다.”

    “알지요. 알다마다요.”

    “그래서··· 한 번도 저를 꾸짖은 적이 없으셨단 말입니다? 한데 이번에는 노발대발을 하시면서 당장 군사를 일으키네 마네 하는 거, 간신히 말렸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하셨길래 형님이 저럽니까?”

    “벼, 별 말 안 했습니다.”

    “별 말 안 했는데 저리 화가 나실 리가 없는데.”

    나는 경복궁을 한 번 쓱, 흘겼다.

    “좌우지간, 저번에 대마도에 머물면서 도주께서 저를 접대해주신 게 너무 고마웠던지라 작게나마 은혜에 보답하고자 도주의 뜻을 형님께 전달하긴 했습니다만, 이거 원··· 좀처럼 화가 풀리실 것 같진 않습니다.”

    “···”

    “이건 도주께만 드리는 말씀인데······.”

    “예?!”

    “아, 아니다.”

    “어, 어떤 건데 그러시온지······.”

    “아닙니다. 이런 거 괜히 말씀 드렸다간 저만 혼날 테고··· 저는 이만 가보렵니다. 크흠.”

    뒷짐지고 걸음을 옮기려 하자, 도주가 날 낚아챘다.

    “하, 합하! 이리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하, 안 되는데··· 쓰읍, 뭐. 그래, 까짓거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 어떤 것이옵니까?”

    “제가 막 강녕전을 나오던 참에 말입니다.”

    “예, 나오던 참에?”

    “예조판서 신수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예조판서요? 병조판서가 아니라?”

    “도주.”

    “예, 합하.”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갑니까?”

    “···”

    “명나라 황제폐하께서 돌아가신 건 아시지요?”

    “···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국상 중입니다. 국상 중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건데 병조판서가 필요하겠습니까, 예조판서가 필요하겠습니까?”

    “그, 그 말씀은······.”

    “아마··· 새로 황제에 오르신 폐하께 대마도 문제를 주청드리려는 것이겠지요.”

    “···”

    도주가 그대로 얼어 붙어버렸다.

    언제까지고 얼어붙어 있을 것 같던 도주는 술래인 내가 땡 하지도 않았는데 금세 해빙(?) 되더니 무릎을 꿇었다.

    “합하. 지금 제가 믿을 건 합하 밖에 없사옵니다. 부디 저와 섬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어떻게, 전하께 말씀을 좀······.”

    “그랬다가 저도 욕 먹고 왔다니까요?”

    “···”

    “그래도, 그 뭡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는데 계속 잘못을 뉘우치신다고 하시면 형님께서도 마음이 조금 풀어지시지 않겠습니까?”

    “구, 구체적으로 말씀을 좀 해주시겠사옵니까?”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아까 말씀드린 역적이 발호 했을 땐데. 구수영이란 역적 놈 때문에 형님께서 고생을 이만저만 하신 게 아니셨거든요.”

    “예예!”

    “근데··· 이놈이 갑자기 제놈들 세가 불리해진 걸 깨닫고 투항을 하려지 뭡니까? 원래 형님이 잘못 저지른 사람은 가차없이 참수 시켜버릴 만큼 냉정하시고, 또 뭐냐··· 한 번 버린 사람은 두 번 다시는 안 쓰시는 분인데, 이 구수영이는 달랐다 이 말입니다.”

    “다, 달라요?”

    “뭐, 구수영이는 역적 주동자 중 하나였으니 참형 되는 걸 피할 순 없었는데, 구수영의 족친들은 모두 화를 피해갔지요. 도주도 아시죠? 역적은 구족을 멸하는 거.”

    “예, 압니다. 알고 말구요.”

    “근데 딱 구수영의 족친들. 다른 역적 주동자들은 사돈에 팔촌까지 끌려와서 화를 입었는데, 구수영의 족친들만 화를 피했다는 거 아닙니까.”

    “어, 어떻게 말이옵니까?”

    “어떻게는 어떻겝니까. 죽을 죄를 지었다고 아주 석고대죄도, 그런 석고대죄가 없을 만큼 청했고··· 역적 주동자 놈들 수급을 갖다 바치고, 또 뭐냐. 하여간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근데 지금 도주를 보세요. 구수영이도 싹싹 빌어서 감형을 받았는데, 도주의 잘못이 역적 구수영과 비교한다면 더하겠습니까? 도주가 싹싹 빌면 설마 전하께서 모른 척 하시겠냔 말입니다. 대마도하고 우리 조선하고 90년 의리가 있는데.”

    “그,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런 의미에서 소인이 이런 일에는 어둡사옵니다. 혹 합하께서 도움을 주시면 안 되겠사옵니까? 정말 지금 심경으로는 혀를 콱 깨물고 자결하고 싶은 심정이옵고, 전하께 상심을 안겨드렸다는 마음에 칼을 거꾸로 쥐고 배를 갈라버리고 싶은 심정 뿐이옵니다. 부디 이 마음을 합하께서 잘 헤아려주셔서······.”

    “하. 안 되는데, 진짜.”

    “합하······.”

    애걸복걸하는 도주에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물론 계획된 뜸 들이기다. 덥썩 물면 도주가 의심 할 수도 있으니까.

    “안 되는 거 아시죠?”

    “알지요. 알다마다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대마도하고는 전쟁이 안 났으면 하는 사람중 한 명입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대마도하고 우리 조선하고 의리가 90년이고, 에··· 또, 뭐가 있을까?”

    “대마도는 조선의 시, 신민 아니겠사옵니까?”

    “그래. 대마도는 조선의 신민인데 이걸 무력으로 징벌하는 건 좀 내키지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막말로 둘이 전쟁나면 둘 다 손해 아닙니까, 둘 다.”

    “예예! 합하의 말씀이 천번이고 만번이고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그래서 도와드리려는 건데.”

    “말씀하시옵소서.”

    “일단 제가 지금 욕 먹고 나왔는데 다시 입궐해서 형님을 알현하는 건 명분이 없지 않겠습니까?”

    “며, 명분 말이옵니까?”

    “예, 명분.”

    “하면 소인이 어찌하면 되겠사옵니까?”

    “일단은 딱 이틀만 더 석고대죄 청합시다. 이틀이면 형님께서도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으실 테고, 그때 제가 입궐해서 형님께, ‘대마도주가 저렇게 반성하고 죄를 뉘우치고 있지 않습니까?’ 하면 그나마 면이 좀 서겠지요?”

    “예, 과연 그렇겠습니다. 아, 하온데.”

    “응?”

    “혹 그 이틀 사이에 전하께서 주청사를 명에 보내거나, 제신들을 불러들여 전쟁을 논하신다면······.”

    “아, 그건 일단 제가 최대한 막아보겠습니다. 도주는 진실되게 석고대죄청하고 계세요.”

    “아, 알겠사옵니다. 하오면 소인은 합하만 믿겠사옵니다.”

    “너무 믿진 마시고.”

    그렇게 말한 나는 석고대죄를 다시 청하는 도주를 뒤로한 채, 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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