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89화>
***
또로록-.
식은 땀이 무라모리의 축 쳐진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턱끝까지 내려온 땀을 좀 닦아내고 싶었지만, 오체투지의 자세로 얼어 있던 무라모리는 차마 고개를 들어 땀을 닦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고 조선왕과 눈이 마주친다면, 자신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멎어버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물론 바람에 그칠 뿐이었다.
“누가 더 낫겠냐고 물었다.”
꿀꺽.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은 모르쇠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번다.
무라모리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책이었지만······.
채앵-!
벌떡 일어난 조선왕이 검을 겨눴다.
“내 지금 사관까지 물린 마당에 너와 장난을 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냐?”
“정녕 무슨 말인지 모른단 말이렷다?”
“···송구하옵니다. 신이 비록 조선말을 익히긴 했사오나 폐도(대마도)에서는 소용이 크지 않다보니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 할 수가 없사옵······.”
“그래?”
“송구하옵니다.”
자꾸 모르쇠로 일관하려는 무라모리에 융은 부아가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놈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자고 칼을 침소에 들인 건 아니었다.
칼은 그저 놈을 압박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내 너에게 기회를 주고자 함인데 자꾸 모른다··· 송구하다···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다면 내 어찌 너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는 마음이 티끌이라도 남겠는가. 군신의 의리와 외방으로서의 도리를 먼저 저버린 것은 바로 너희이니 내 더 이상 너희를 고집할 까닭이 없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무라모리는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독기 가득한 조선왕의 눈을 마주하자, 절로 흡! 하고 헛바람이 들이켜졌지만 섬을 생각한다면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세종대왕과 부왕께서 너희 선조와 했던 약조는 이제 없다.”
침묵이 감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맥을 파악한 무라모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신이 어리석어 무슨 말씀이신지 잘은 모르겠사오나, 다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섬은 척박하옵니다. 또 섬사람이란······.”
“그래, 척박하지. 늘 척박하지. 너희 섬이 아조(우리 왕조)에 입조한 이래, 신하를 자처한 이래 척박하지 않았던 적이 있더냐? 너희는 늘 척박하고 늘 곤궁하다면서 떼를 쓰지 않았더냐?”
“···예. 말씀대로 척박하고 곤궁하여 조선이 없다면 생계가 어려워지옵니다. 본시 고상한 선비도 사흘 밤낮을 굶으면 이웃의 담장을 넘는다 하였는데, 우리 섬사람들은 오죽하겠사옵니까?”
“겁박이냐? 아니, 새삼스럽지도 않다. 너희는 늘 교묘한 말로 나와 선왕들을 기만하였으니 지금 네 하는 말이 어찌 새삼스러우랴?”
“···교묘한 말로 기만한 것이 아니오라 섬의 척박한 사정을 신하된 자로 주달한 것이옵니다. 지금 섬사람들이 갑자기 생계가 끊긴다면 무식하고 무지한 이들이 할 줄 아는 거라곤 칼을 들고 설치는 일 밖에 없으니, 과연 처자가 굶는다면 어찌 되겠사옵니까? 이들이 독자적으로 날뛴다면 신은 제어 할 수가 없사옵니다.”
“제어할 수가 없다?”
“예.”
잠시 제어라는 단어를 곱씹던 조선왕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막지 마라.”
무라모리는 순간 얼이 나갔다.
막지 말라니······.
“네가 끝까지 날 기만하고 능멸하려 드는데 내 어찌 너를 사(赦)한단 말이냐? 막지 말라. 절대 막지 말아야 한다.”
막지 말라도 아니고 절대 막지 말라니··· 이건 무라모리가 기대한 말이 아니었다.
더욱이 지금껏 조선이 자신과 선조들을 어루만진 까닭이 무엇이던가?
섬사람들의 준동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용서하고, 아무리 방자하게 날뛰어도 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막지마라?
어안이 벙벙해진 무라모리가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잠시 뜸을 들인 조선왕이 말했다.
“너희가 아조의 신하를 자처한 세월이 몇 년이냐?”
“조, 족히 90년은 다 되었을 것이옵니다.”
“내 그 90년의 의리로 하나만 일러주마.”
“하교하소서.”
조선왕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조심스레 무라모리에게 다가왔다.
혹 조선왕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까 멈칫한 무라모리였지만, 여기서 나약함을 증명하는 건 협상의 실패로 이어질 터였다.
그는 애써 담담한 양 굴었다.
그리고.
“너희 대마도 종자들은 말하기를, 섬이 척박하여 곡물을 심어도 잘 자라지 않아 곤궁하다면서 본조에 입조했다. 우리 선왕들께서 너그러운 마음씨로 너희를 받아들였는데 이 은혜를 갚긴 커녕 조금만 너희들 마음에 차지 않으면 왜구를 보내 도적질을 일삼았고, 우리 백성을 위협하고, 곡식을 약탈하고, 조운선(세금을 운반하던 배)을 나포해가고, 고아와 과부를 낳게 만들었다. 그뿐이랴? 사내대장부로서 처를 빼앗기는 것은 곧 나라를 잃은 것과 매한가지의 설움이고 치욕일텐데 너희 도적놈들은 여자들을 마음내키는 대로 끌고가 지아비가 보건 말건 겁간하고, 윤간하고, 백성의 집은 모두 전소시켰다. 지금 네놈이 신하를 자처한 세월이 90년이라 했지만, 아니다. 네놈들이 신하를 자처하는 기만을 하고서 우리 백성들을 약탈한 세월이 90년인 것이다. 들어라.”
“···”
“내가 선왕들과 같은 것 같으냐? 선왕들처럼 어질고 죄지은 사람도 포용하는 것 같으냐 말이다. 나는 선왕들처럼 어질지 못 하고 덕이 있지도 않다. 오히려 네놈들처럼 마음 내키는대로 날뛰는 바가 있어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인다. 하여 신하들은 나를 미치광이라 부르는데, 과연 이 미치광이가 할 짓이 뭐가 있으랴?”
살떨리는 말에 무라모리는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하지만 왕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선왕들은 백성이 침학을 당해도 수수방관하고, 백성이 약탈을 당해도 너희와 척을지지 않으려 어루만졌겠지만, 그래서 그것이 곧 군왕의 도리라 생각했지만 나는 다르다. 군왕의 도리란 백성이 침학을 당하면 백곱절로 돌려주는 것이 군왕의 도리요, 백성이 약탈을 당하면 똑같이 약탈로서 되돌려주는 것이 군왕의 도리다. 상황이 이에 이른 즉. 너는 속히 너희의 굴혈로 들어가 대비하라.”
꿀꺽.
“내 지금 마땅히 십만대군을 일으켜서 너희 섬으로 짓쳐가게 만들 것이다. 너희 섬의 사내들은 왜구짓을 했건 안 했건, 모조리 목을 쳐버릴 것이고 나이 어린 남아들은 모조리 노예로 삼을 것이다. 계집들은 나의 백성들이 당했던 것처럼 모두 겁간을 당할 것이니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가 없을 것이다. 너희의 가옥들은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그리하여 앞으로 후세에 대마도란 섬에 사람이 살았는지 모르게 할 것이다. 이는 의리로서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천번이고 만번이고 대비하더라도 모조리 격파시킬 수 있다는 자신에서 포고하는 것이니 너는 속히 돌아가서 대비하라. 내 정확히 내년 봄에 거병하리라.”
조선왕이 자리를 박차고 침소를 빠져나갔다.
아니,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왕은 깜빡한 게 잊다는 듯 무라모리를 돌아봤다.
“아.”
“···?”
“네 머리는 미리 소금에 잘 절여두어라. 되도록 웃는 얼굴로.”
***
무라모리가 비틀거리며 동평관에 들자 가신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주군! 괜찮으시옵니까!”
“오, 오키히데······.”
오키히데는 흠칫 몸을 떨었다.
평소의 신경질적인 주군이라면 괜찮냐는 말에 이게 괜찮은 걸로 보이냐며 되려 호통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풀이 죽은 것도 모자라 사색에 질린 주군이라니······.
오키히데는 주군의 어린 시절을 포함해 25년을 곁에서 모셨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은 보지 못 했다.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어찌하면······.”
“갔던 일이 잘 안 되신 것이옵니까?”
오키히데의 물음에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뜯던 무라모리는 강녕전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일러주었다.
“···그래서 내년 봄에 거병을 하겠다고 했는데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이냐.”
가신단 모두가 침묵했다. 갑작스러운 선전포고였다.
“오키히데.”
“예, 주군.”
“지금 조선이 1만의 군사만 일으켜도 섬은 쑥대밭을 면치 못 할 것이다. 너도 잘 알지 않더냐?”
주군의 말은 사실이었다.
쓰시마는 오우치(대내전)와 쇼니(소이전)의 전쟁에서 쇼니의 기치아래 섰었다.
물론, 전쟁 결과는 쇼니의 대패.
그 과정에서 쓰시마가 입은 피해는 금전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금전적인 피해는 언제든 복구시킬 수 있다.
문제는 병력 소모.
당시 전쟁에 참전하면서 2천의 군사를 잃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이 군사를 일으킨다면······.
꿀꺽.
파국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어쩐단 말이냐? 이제 어째야 한단 말이냐!”
털썩 주저앉은 무라모리는 제 머리를 쥐어뜯기만 했다.
주군의 자학에도 오키히데를 비롯한 가신단은 말릴 엄두를 내지 못 했다.
가장 먼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건 오키히데였다.
“이, 일단 주군······.”
“묘안이 있는 것이냐, 오키히데? 있는 것이지?”
벌떡 일어나 묘안을 운운하는 무라모리에 오키히데는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일단 뭐라고 말이라도 꺼내보려 주군을 불렀지만, 사실상 묘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주군. 걱정마십시오. 조선왕이 허장성세를 부린 것일 것이옵니다. 조선이 어찌 군사를 일으키겠사옵니까?”
눈치없는 무네모리가 위로를 건넸지만 그게 더 화를 돋궜다.
“네놈이 조선왕을 대면했더냐! 네놈이 조선왕이 퍼붓는 말을 들어나 봤냔 말이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네놈은 과거에도 스케모토(쇼니 가문의 당주)님이 필시 대승을 거둘 것이라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었더냐!”
“···”
“주, 주군. 일단 고정하시옵소서.”
“내 대에 섬이 파탄나게 생겼는데 어찌 고정하란 말이냐!”
“하지만 무네모리 공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거병을 마음 먹었다면 어찌 주군과 신들을 가만 놔뒀겠사옵니까?”
이곳저곳에서 일리가 있다는 듯 호응하자, 무라모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조선왕은 상식의 범주에서 판단 할 수가 없는 자다.”
“어인 말씀이신지······.”
“왕이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우릴 치려는 걸 미리 알려준 것이 우리가 천번이고 만번이고 대비해도 모조리 격파 할 수 있다는 자신 때문이라 했다. 오히려 나더러 섬에 들어가 잘 대비하라더구나.”
“···”
“오키히데, 이제 어쩐단 말이냐? 지, 지금 너희는 왕을 보지 못 했기 때문에 그런 태평한 소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은 정말로 군사를 일으킬 참이다. 군사를 일으키면 섬은 끝장이다, 끝장! 정녕 방책이 없단 말이냐?”
“···송구하오나 다시 입궐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어떻게 보면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 그래. 그래야겠다. 머리에 피가 나도록 쿵쿵 찍으면서 용서를 구하면, 그러면 설마 내치기야 하겠더냐. 어, 얼른 준비해라. 너희들 모두!”
부랴부랴 준비를 서두른 무라모리는 가신들과 함께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무라모리는 바짝 엎드린 채 죄를 빌었다.
기이한 광경에 수문군들이 수군거리며 쳐다보자, 무라모리는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죄를 빌었다.
“···하였으니 지금 제가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니 무슨 말을 아뢰야겠사옵니까만 부디 예궐(입궐) 하여 죄를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신과 대마주의 백성들은 실로 반심(叛心)같은 건 없사옵니다. 차라리 신을 견책하여 주신다면 백골이 난망한 은혜겠사옵고, 신을 불경죄로 다스려주신다면, 천만다행한 일이겠사옵니다. 하니 어떤 벌이든 내려주시옵소서. 어떤 벌을 내리신다 한들 신하된 도리로 따르겠사오니······.”
그렇게 한참 목소리 높여서 죄를 성토하던 그때였다.
“도주 아니십니까?”
누군가 아는 체를 해오자, 무라모리는 고개를 돌렸다.
“대, 대군 공(公) 합하!”
아는 체를 해온 인물은, 안면이 있다 못 해, 어쩌면 자신과 섬을 살려줄지도 모를 진성대군이었다.
석고대죄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무라모리는 벌떡 일어나 진성대군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하, 합하! 소인좀 살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