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88화 (18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88화>

    ***

    편전.

    “지금 부민고소를 폐한 연후 경기도의 수령 신고건을 보면 모두 67건이었사옵니다. 이 신고로 율에 의해 다스려진 수령이 삭녕군수 김진조, 안성군수 윤삼계(尹三繼), 영평현령 임계창(林繼昌), 포천현감 김대문(金大雯),음죽현감(지금의 이천시) 박혜(朴慧), 도합 5인이오니 이들 모두 죄가 율로 다스려질만 하여 파직 된 것이었사옵고, 다만 67건 중에 무고가 9건 있었사온데 또 그 9건 중에 3건은 수령이 훼방하여 무고로 알려진 경우였사옵니다.”

    “결국 진실로 무고한 일은 6건 밖에 없다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허. 부민고소금지를 작금에 폐지하면 수령의 무고가 빗발칠 것이라더니······.”

    당시 반대 여론의 명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무고건 다수 발생 -> 수령의 권위 약화 -> 왕의 대행인 수령의 권위 약화로 인한 왕권 실추.

    하지만 막상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시행한 결과.

    무고는 고작 6건 밖에 안 됐다.

    “지금 그 6건의 일도 안핵(자세히 조사함)하여 보면 2건은 무고인지 아닌지 파악이 애매한 경우이옵니다. 하니 엄밀히 따진다면 진실로 무고한 일은 4건 밖에 아니 되는 것이옵니다. 지금 기호(경기도)에 부민고소를 철폐한 지 벌써 1년이 지나 2년차가 되었는데도 무고가 고작 4건이니 어찌 전국으로 확대시키지 아니 할 수 있겠사옵니까?”

    “과연 그러하다. 더욱이 기호는 서울과 지척에 있어 수령들이 함부로 백성을 수탈하기 어려운데도 67건의 신고가 접수되지 않았던가? 저 먼 제주나 변방은 오죽하겠는고?”

    “···”

    “내 비록 선대왕들의 업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자라고 어찌 옳은 말만 했겠으며, 요 임금 역시 70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면서 어찌 백성이 편한 정치만 꾀했겠는가? 지금 부민고소의 무고건이 이러하니 전국적으로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전하의 분부가 윤당하오니 속히 철폐하소서.”

    임사홍의 선창과 함께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철폐하소서, 외쳐댔다.

    “의정(삼정승)들은 속히 이 일을 빈청에서 논하도록 하고 품의(서면보고)하라.”

    “예, 전하.”

    “그리고······.”

    “하문하소서.”

    “오키나······.”

    “예?”

    융은 피식 웃었다.

    유구국을 언급하려다 저도 모르는 사이 오키나와라고 말하고 말았다.

    진성이 유구국을 늘 오키나와라 부르다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 입에 밴 모양이었다.

    “유구국 말이다.”

    “예, 전하.”

    “지금 대내 문제가 대략 매듭 지어졌고 병무도감이 모병안을 실행에 옮긴다 해도 시일이 걸릴 테니 속히 지금의 정병들로 하여금 유구국에 파병을 보냈으면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유, 유구국 말이옵니까.”

    “그래. 진성대군이 중산왕(유구국왕)을 만나면서 약조한 바가 바로 파병이었으니 어찌 파병을 논의치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오나 전하.”

    고개를 돌리자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긴 김전이었다.

    진성이 병무도감 도제조로 제수되며 함께 옮겨갔다.

    그리고 융은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긴 뒤로는 더 발광하는 김전에, 또 너냐? 라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김전이 기특하게도 군제 개혁을 위한 효율적인 안들을 제출하긴 했다만, 한 번 사람이 싫어지면 어떤 일을 해도 싫어지는 법이었다.

    “지금 대행황제(죽은 황제)의 일로 성복을 입게 되었사옵고 전하께서 거애하신 게 바로 엊그제이온데 군사를 일으킴은 온당치 못 한 일 같사옵니다.”

    “도리에 어긋난다는 뜻인가?”

    “예. 지금 대국의 일이 유구국에도 알려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알려진다면 필시 이해를 해줄 것이옵니다. 더욱이 새 황제께서 등극하신지 반년도 안 됐는데 군사를 일으킨다면 어찌 속단하실지 신으로서는 우려가 크옵니다.”

    “그럼 나더러 중산왕과의 약조를 어기라는 것인가?”

    “어, 어찌··· 미루자는 말씀이옵니다.”

    “전쟁을 미룬다고 미룰 수 있더냐. 지금 유구의 상황이 앞으로는 왜구에 뒤로는 호족이 발호하여 풍전등화라는데, 파병을 미뤘다가 유구에 피해가 발생하면 나와 중산왕의 신의는 뭐가 되는 것이냐?”

    “하오나······.”

    “경은 사의(事宜)를 알지 못 하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황제 앞에 사의는 헌신짝처럼 버려도 된다는 것인가! 본시 큰 일을 수행함에 있어 때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예정대로 조처하지 않았다가 화가 미친다면, 그 뒤에는 큰 일을 도모하려고 해도 어렵게 됨을 진정 모른단 말이냐?”

    “···전하의 뜻이 정히 그러하신다면 신이 어찌 감히 파병 가부를 입에 올리겠사옵니까? 다만 청컨대 파병은 새로이 등극한 황제께서 사신을 보내오신 이후라야 가능하겠사옵니까.”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빼액 소리친 융이 연신 씩씩거리자,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임사홍이 읍하며 아뢨다.

    “전하. 파병에 관한 일은 차후 다시 논하도록 하옵고 지금 당면한 문제는 대마주 태수이오니 이를 논함이 어떻겠사옵니까?”

    충신이자 총신이기도 한 사홍의 말에 융은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되물었다.

    “태수?”

    “예.”

    “하면 말이 나온 김에 말이다.”

    “하교하소서.”

    “이참에 대마도도 쓸어버리는 것이 어떠한가?”

    “저, 전하!”

    “경도 어제 보지 않았느냐. 이놈이 앞으로는 그저 숙배를 위해 상경한 것이라더니 말을 뱉고 나니 아차 싶었는지 안절부절 못 해 하지 않았던가.”

    “···”

    “경이 말한대로 대내전(오우치)과 연관돼 있음이 분명하다. 이놈이 지금 상경한 까닭은 필시 대내전과 교역을 막기 위함인데,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려고 왕을 기만하고 있으니··· 이놈들에게 기만 당한 세월이 선왕과 나의 치세에만 수십년이 넘는다. 그런데 이 박쥐 같은 놈들이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도 기만을 하고 있으니 내 어찌 참아야 한단 말이냐? 마침 놈이 입조해있으니 놈을 볼모로 삼으면 대마도가 어찌 대처하랴?”

    “하, 하오나 지금 갑자기 군을 일으키는 것은 명분이······.”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인 일! 태수가 여태 공순하지 못 한 서계를 올려 과인의 심기를 언짢게 한 바가 있었고, 또한 조정에 입조한 뒤에도 감히 나를 기만하고 있음이니 불경이 아니겠느냐.”

    꿀꺽.

    “···”

    “9차례다! 이 박쥐 같은 종자들이 올해에만 9차례 토산물을 바쳤단 말이다!”

    토산물을 바치면 자연히 조정에서는 최소 그 곱절에 달하는 물품을 딸려 보내야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그 빈도가 늘어나는가 싶더니, 올해에는 벌써 9차례나 토산물을 갖다 바쳤다.

    사실 조선 조정이 만만하다는 증거기도 했다.

    “이것들이 왕을 기만해도 분수가 있는 법이거늘··· 이런 땡중들 뒷간의 각시궐(똥막대기)만도 못 한 것들이 있단 말이냐?”

    대신들은 눈빛을 주고 받았다.

    진노한 왕에 선뜻 나설 수가 없었음이리라.

    총대(?)를 멘 건 임사홍이었다.

    “저, 전하. 하오나 지금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어, 어렵사옵니다.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안다! 알아서 내 더 화가 나는 것이야, 빌어먹을 상판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못 하는 처지가 얼마나 비루하단 말이냐? 놈의 수하들이 노예로 잡아간 백성들이 내 치세에만 수백은 될 것인데 백성들의 피눈물은 누가 씻어주고, 그 억울함과 분통함은 누가 풀어준단 말이냐?”

    연신 씩씩거린 융.

    그는 뭔가 번뜩 떠오른 게 있었는지, ‘아니지, 아니야.’ 말을 흐렸다.

    그리고.

    “태수놈은 뭘 하고 있다더냐?”

    “동평관에서 한 발 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하옵니다.”

    “그래?”

    “예.”

    “나는 이 왜구 두령 놈을 한시라도 도성에 더 있게 하고 싶지 않은데 경들은 어떠한가?”

    뜬금없는 질문에 말문을 잃은 대신들이 어버버 거리자, 융은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놈의 간사한 계책을 알고 있는데도, 왜구를 두려워 하면서 이를 담판 짓지 않는 것은 종사와 후세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내 오늘 놈과 담판을 지어야겠으니 속히 놈을 데려오라.”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혹 어떤 담판을 말씀하시온지······.”

    “모든 것이다.”

    “···전하, 어심을 번거롭게 하는 듯 하여 실로 죄스러운 마음입니다만 지금 만약 태수를 불러들여 옛일들을 꾸짖고, 지금 상경한 일이 갑자기 대내전 때문이냐 묻는다면 놈이······.”

    “왜, 대사헌(김전)은 태수가 이 일을 수치로 여기고 왜구라도 일으킬까봐, 걱정 되는 것이냐?”

    “···”

    “내 알아서 할 터이니 속히 불러들이라!”

    임금이 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중신들은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

    동평관.

    무라모리는 가신들 볼 면목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왕을 배알하고 온 이후 객사에서 칩거만 했다.

    대책을 강구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대책이 안 떠올랐다.

    “젠장.”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가신들 볼 면목도 없지만, 조상들 뵐 면목은 더더욱 없었다.

    조상들이 어찌 이룩한 섬이란 말인가.

    피로서 이룩한 섬이었고, 피로서 지킨 섬이었다.

    그 섬이 자신의 대에 파탄나게 생겼으니, 무라모리로서는 부끄럽기만 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만 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찌 이러시오?”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무라모리가 밖으로 나가자 창칼을 높이 빼든 군인들이 동평관을 점거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권균이란 이름의 인물이 서있었는데, 기억이 맞다면 도승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여기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어명이오.”

    “어명? 기별도 없이 무슨······.”

    “전하께서 귀하를 뵙고 싶다 하신데 기별이 따로 필요하오?”

    무라모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만 너무 갑작스러운지라······.”

    “갑작스러운 게 태수의 상경만 하겠소.”

    “···”

    “안 갈 것이오?”

    뒤늦게 상황을 들은 가신들이 뛰쳐나왔지만, 무라모리는 애써 가신들에게 걱정말라 말하고는 권균을 뒤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강녕전.

    앞전에 본 편전과는 다른 곳이었다.

    권균은 이곳이 왕의 침소라는 말을 해주었다.

    “전하. 대마주 태수 종익성 들었사옵니다.”

    “들라하라.”

    내관을 따라 안으로 들자, 침소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불측한 생각을 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 저 목을 졸라버릴 수도 있을 텐데······.

    ‘겁을 상실한 건지 간이 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상대의 의도가 뭔지 모르는 만큼 무라모리는 지극한 예를 표했다.

    “전하, 신 종익성···!”

    마음을 다스리고 인사를 하던 무라모리는 눈을 부릅떴다.

    조선 왕은 군복 차림이었다. 게다가 한손에는 칼까지 쥐어들고 있었으니, 무라모리로서는 간담이 서늘해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앉아라. 내 일부러 너와 독대하고 싶어 사관도 물렸다.”

    “···예.”

    “내 지난 세월 너의 서계를 받아보며 느끼건대 너희는 글에 조금의 공손함도 표하지 않고, 방자하게 생각한 바를 서슴없이 속기하여 보냈다. 하니 나도 굳이 예는 차리지 않고 묻겠다. 네가 섬에 틀어 박혀 있던 세월이 수십년인데 왜 갑자기 상경을 한 것이냐?”

    “아··· 그것은 신이 앞전에 아뢨다시피 숙배를 위해······.”

    “숙배?”

    “예, 전하.”

    “너는 지금 왕을 기만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털썩!

    “신이 어찌 전하를 기만하겠사옵니까? 무슨 일로 노여워하시는지 모르겠사오나 부디······.”

    “내 가만히 생각 해보았다.”

    “···”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것 아니겠더냐?”

    “어인 말씀이신······.”

    “대관절 어느 나라 신하가 임금의 말을 끊는단 말이냐!”

    흡!

    “소, 송구하옵니다!”

    “다시 묻겠다. 어찌 상경한 것이냐?”

    “말씀 드렸다시피 신은······.”

    스르릉-.

    “내 여기서 널 벨 수도 있다. 보는 눈이 없으니 너가 왕을 해하려 했다 하면 과연 옳고 그름이 어디서 나오겠느냐?”

    “···숙배를 위해 왔사옵니다.”

    피식거린 왕은 빼든 칼을 도로 검집에 넣었다.

    “정말로 숙배를 위해 찾았다?”

    “예.”

    “그럼 내 태수가 온 김에 하명할 일이 있다.”

    “하명하시옵소서.”

    “내 세견선(무역선)을 줄이고 여러 포구의 왜관도 모두 폐할 참이다.”

    “그게 무슨······.”

    “내 생각을 해보니 말이다.”

    “···”

    “나와 선왕들이 너희를 어루만진 것은 실로 왜구들 때문인데··· 너희는 왜구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지도 않고, 방관한 세월이 수십년이다.”

    “하, 하오나 신은 진실로 왜구를 박멸하려······.”

    “이놈!”

    “···”

    “나와 선왕들이 왜구를 막지 못 한 일을 힐책 할 때 마다 너희는 ‘우리 섬은 척박하여’라고 말하면서 물품을 요구하거나, ‘우리 섬은 사람이 없어서’ 라고 변명을 하지 않았더냐! 이것이 기만임은 본도(대마도)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거늘, 뭐라?”

    “···”

    무라모리가 마른 침만 꼴깍거리자, 왕은 칼만 만지작거렸다.

    당장이라도 칼을 빼들어 목을 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태수.”

    “예, 전하······.”

    “너는 사냥을 하느냐?”

    “가끔 하옵니다.”

    “사냥개도 쓰는가?”

    “쓰지 않사옵니다······.”

    “나는 사냥을 나갈 때면 사냥개를 푼다. 근데 이 사냥개란 놈들은 말이지, 제 구실을 못 할 때가 많아. 그럼 어떡해야겠는고?”

    “더 용맹한 사냥개로 바꿔야하지 않을는지요···?”

    “맞다. 그래서 말인데, 너와 대내전을 비교하면 누가 더 용맹한 사냥개 같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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