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86화>
***
명(明)은 대국이었다.
제후를 여럿 거느렸고 명실상부 천하의 중심에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과연 중국(中國)이란 별칭에 걸맞았다.
그런 나라의 황제로 등극한 주후조(朱厚照)였지만 그는 태자 시절보다 더한 따분함만 느꼈다.
“···하므로 영토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인민이 있사옵고, 인민이 있으면 반드시 임금이 있어 통치를 하는 것이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갑작스럽게 큰 일을 당해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마땅히 황제로 등극하셨으므로 풍성한 덕으로 만백성을 돌보시옵고, 탕탕한 정치로 성덕을 내비치시며, 또한…….”
특히 이게 제일 따분하다.
따분한 소릴 잘도 늘어놓는 인물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 양정화(楊廷和)였다.
후조의 스승이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턱을 괸 채 정화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후조는 짐짓 따분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디 짐이 잘 한다고 만백성을 잘 돌 볼 수 있겠는가? 나라가 발전하는 것은 신하의 잘함에 있으니, 그만하라.”
“···.”
“왜 이리 따분한 것이냐.”
“폐하, 상복을 벗은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사옵니다.”
“황고(皇考, 부친상)를 당한 건 짐이거늘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은가?”
정화를 일별한 후조는 환관 하나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무슨 재미난 일이 없다더냐?”
“암컷 코끼리가 오늘 새끼를 낳을 것 같다고 하옵니다.”
“오호, 새끼를?”
“예.”
“하면 내 봐야지. 그만한 구경거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난 후조는 환관을 뒤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코끼리 우리였다.
환관의 말처럼 곧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지 암컷 코끼리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후조는 넋 놓고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예의 환관에게 물었다.
“코끼리가 순산할 기미를 보이니 이 바로 상서(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가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아, 맞다.”
“하문하시옵소서.”
“동호대장군(東虎大將軍)은 괜찮더냐? 오늘은 뭘 좀 먹더냔 말이다.”
동호대장군이란 말만 들으면 무관의 직책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후조가 아끼는 호랑이의 별칭이었다.
태자 시절부터 보살펴(?) 오던 호랑이인데, 황제에 등극한 뒤로는 아예 동호대장군이라 부르며 총애(?)하고 있었다.
다만 며칠 전부터 먹이를 입에도 안 대고 있어, 후조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신이 아침 일찍부터 대장군께 가서 안부를 여쭸는데, 애석하게도 오늘도 먹이를 입에 안 대신 듯하옵니다.”
“저런. 아! 얼마 전에 색목인(서양인)들이 진상한 낙타가 있지 않았던가?”
“예.”
“낙타를 동호대장군에게 주면 좋아하지 않겠나?”
잠시 고민하던 환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예. 아마 그러실 듯하옵니다.”
히죽 웃은 후조가 말했다.
“그럼 얼른 그 낙타를 별식으로 동호대장군에게 하사하라.”
“예, 폐하.”
환관이 떠나고, 후조는 싱글벙글한 채로 코끼리의 순산을 지켜봤다.
마침내 암컷 코끼리가 새끼를 출산하자 후조는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내질렀다.
***
빈청.
“누가 와요?”
대사성 김전이 눈살을 찌푸리자, 예조판서 신수영이 말했다.
“대마도주 말이오. 경상도 관찰사 허집(許輯)이 막 사람을 보냈는데 도주가 입국했다지 뭐요.”
“도주가 실성을 한 것 아니오?”
“설마요.”
“그게 아니면 사람을 보내온 것도 아니고 입국을 해요? 허··· 세상 오래 살고 볼일입니다.”
“좌상대감. 전하는 어디 계십니까?”
신수영의 말에 임사홍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애하고 계시지 않겠소?”
“아··· 예, 거애하고 계시지요. 하고 계신데··· 지금의 일이 급박하니 아뢰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머금고 있던 사홍은 신색을 가다듬고 신수영을 바라봤다.
“그래, 어찌 입국했다는 말은 없었소?”
“서계를 함께 보내긴 했는데 읽어 보진 못했습니다.”
“흠. 이놈들이 또 간계를 꾸밈이 아니겠소?”
“간계요?”
“대마도는 왜구의 굴혈(소굴)이오. 하물며 도주는 산채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으니 이것들이 모략질 한 게 어디 한 두 번이겠소? 더욱이 직접 입국까지 했으니 더더욱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소이다.”
좌의정의 말에 빈청에 모인 대신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놈들은 약삭한 종자들이었다.
“예판.”
“예, 대감.”
“확실히 어찌 입국했다는 말도 없었고, 뭘 요구한다는 말도 없소?”
대마도 종자들은 틈만나면 요구를 해 댔다.
속된 말로 조선이 봉이라도 된다는 듯.
특히 최근에는 그 빈도가 늘어서 세견선을 늘려 달라는 청을 하거나··· 호피를 1천장이나 요구하거나, 명주 1천필을 요구하거나, 삼포의 왜인 호수를 늘려 달라거나, 심지어는 구휼미 좀 보내달라거나…….
이만하면 봉도 이런 봉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걸 다 들어 줘도 해안이 평안하냐.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잊을라 치면 왜구가 남해안 일대를 노략질 했다는 장계가 올라온다.
백성이 왜구에 잡혀갔다는 장계가 올라오고, 적왜를 놓쳤다는 장계 역시 올라온다.
왜구란 게 사실 대마도 왜구만 있는 게 아니니 만큼 속단 할 수는 없겠지만, 전체 왜구중 7할은 대마도 왜구라 해도 무방했다.
왜구의 우두머리인 대마도주가 부하들이 조선으로 가는 걸 몰랐을까?
절대 아니다.
이것들은 저희들 부탁을 들어 주지 않으면 왜구로 변장해서 노략질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그럼 또 조선에서는 하는 수 없이 들어 주게 되는데, 결국 잠깐의 평화를 돈 주고 얻게 되는 셈이었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아주 찢어발겨도 시원찮을 놈들이었다.
“예. 허집(경상도 관찰사)도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쫓아내야 합니다. 이놈들이 조선에 머물면서 상행위를 좀 하더니 아예 조선땅이 제놈들 땅인 줄 아는 게 아니겠습니까? 예가 어디라고 왜구 두령 따위가··· 허어.”
“예판. 전하께 서계는 전달했소?”
“예. 바로 전달해 드렸는데 ‘거애’하고 계신지라 받아 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서계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악의 수도 염두에 두고 대책을 논해봅시다.”
임사홍의 말에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길한 징조인지 흉한 징조인지 모두들 알 수 없었기에 불안감만 증폭되는 회의였다.
***
「조선국 대마주 태수 종익성(宗杙盛)이 성상의 동지(動止)가 만복하시기를 바라며 인사 올립니다. 성상께서는 인자하심이 대내에 넘치고, 덕화는 외방에 미치시니 요순의 고풍이 바로 우리 조선에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지금 서계를 올려 성상을 번거롭게 하는 까닭은 특별한 전지 없이 부산포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신의 선조들은 선왕들의 덕치에 감화되어 일찍이 외방을 자처하였고, 신 역시 선왕과 성상의 덕치에 감화되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만, 숙배(肅拜)를 한 적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늘 특송(사신)만 보내 숙배케 하였으니 이런 결례가 어디 있겠습니까? 신이 지금 성상을 만나뵈옵고 숙배하면서 친히 주달(임금께 아룀)할 말씀이 있사오니 바라옵건대 상경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여긴 편전이다.
꽈배기와 함께 형님과 게이트볼을 치던 순간.
승정원 관리가 헐레벌떡 찾아왔다.
그러고는 대마도주가 서계를 올렸다면서 형님께 전달했다.
서계를 받아보신 형님은 곧바로 대신들에게 패초를 보내라 명하셨고, 얼떨결에 나도 편전에 들게 됐다.
들게 됐는데…….
“어찌…….”
“전하. 도주가 간계를 획책함이 분명하옵니다.”
“간계?”
“도주가 지금 실성을 한 게 아니라면 어찌 이런 글월을 올려 조정에 분란을 일으키겠사옵니까?”
“그렇사옵니다. 게다가 숙배라니요. 이놈들이 지금 조정을 염탐하려 함이 분명하옵니다.”
보다시피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니면 도주가 보낸 서계는 엄청 공손한데.
설마 공손한 게 문제일리는 없잖아?
“전하께서는 이리 공손한 도주의 글월을 받아보신 적이 있사옵니까?”
“···없지.”
공손한 게 문제라고?
“이놈들은 늘 공손한 척 굴면서, 또한 신하를 자처하면서도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사옵니다. 한데 지금 보시옵소서. 어찌 이리도 공손하단 말이옵니까?”
확실히 공손한 게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왜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거애’ 하는 사이 경들이 대책을 마련했다고 하던데 정말로 간계를 획책하고자 함 같던가?”
“예. 신유년(1501년)의 일을 떠올려 보시옵소서.”
신유년의 일?
뭔가 궁금했지만 이 분위기에 그 일이 뭔지 물을 순 없겠다.
넌씨눈인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죄인을 왜구라 속여 압송시킨 일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조정에서 녹도에 상륙한 왜구의 진상을 알게하자, 이놈들은 진왜가 아니라 가왜(假倭)를 보내 조정과 전하를 기만하였사옵니다. 전하께서 성은을 내리시어 일을 힐책하지 않으셨습니다만, 놈들은 성은을 베푸셨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이 가왜들을 잡느라 수하들이 죽거나 다쳤다면서 감히 물품을 요구하지 않았사옵니까? 필시 신유년처럼 간계를 획책하고자 함이옵니다.”
“아니면 혹 신공과 밀무역을 한 것이 도주의 귀에도 들어간 것 아니겠나?”
제법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는지 길길이 날뛰던 대신들이 잠잠해졌다.
내가 생각해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다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어찌?”
“신공의 일이 도주의 귀에 들어갔다 한들, 지난 도주의 성품으로 보건대 가만히 일이 지나가길 기다리거나 혹 조정에서 일을 논책해도 사신만 보내 해명을 했을 터인데 어찌 입조까지 하는 강수를 두겠사옵니까?”
대사성(김전) 아저씨의 말도 일리가 있는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대사성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한데 나는 숙배하면서 아뢸 말이 있다는 게 걸린다. 어찌들 생각하는가?”
“···.”
“진성대군.”
뭘까 고민하던 사이 날 부르신 형님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에? 예, 형님··· 아니, 전하.”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제 생각이요?”
“그래.”
대신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됐다.
여기서 뭔가 그럴싸한 추론을 내놓지 않으면 망신거리가 될 것 같았다.
조만간 형님이 날 병무도감 책임자로 제수하실 테고, 그리되면 또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여기서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어 버리면…….
‘앞에서도 수군거릴 것 같단 말이지.’
그건 형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되는 일이다.
생각하자, 생각.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
나는 유구국에서 돌아오면서 잠깐 대마도에 들렀던 때가 떠올랐다.
‘도주가 분명 대내전(오우치 씨)인가 뭐시기가 상경했다고 했었는데…….’
그러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제깟놈이 몇 개국을 손아귀에 넣으면서 승승장구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다면서.
혹시 그 일이 아닐까 싶었다.
설령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럴싸한 추론이니까.
“제가 대마도에 있을 때 말입니다.”
“대마도에 있을 때?”
“예. 유구국에서 돌아올 때 잠깐 기항한 적이 있잖습니까. 그때 도주랑 담소를 좀 나눴었는데, 도주가 대내전이 뭐 상경을 한다 어쩐다 했었습니다. 그러더니 콧방귀 뀌면서 이제 곧 자금이 떨어져 패퇴를 거듭할 거라고 했었는데··· 혹시 그 일이랑 관련 된 거 아닐지요?”
내 말에 편전 분위기가 싸해졌다.
왜 이러나··· 싶던 그 순간.
좌의정 아저씨가 다급히 입을 여셨다.
“전하, 혹 대내전이 우리와 교역하려 함을 도주가 간파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간파?”
“지난 경신년(1500년)에 도주가 왜주들의 작란을 알리면서 소이전(쇼니씨)과 대내전(오우치씨)의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하였사옵니다.”
“한데?”
“그 이후 대내전이 사신을 보내 원숭이를 바친 적이 있지 않았사옵니까.”
“내 대내전이 바친 원숭이는 받지 않은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하옵니다. 당시에 사신들은 구리와 원숭이, 쇠를 바치며 ‘우리에겐 구리와 쇠가 많으니 조선과 교역하고 싶다’ 하였사옵고 역적 이극균이 반대한 일이 있었사옵니다. 기억하시옵니까?”
“그래. 기억난다. 쇠와 구리는 나라에서 금한 물품이니 쉽사리 무역을 허락하면 분란이 일어난다면서 반대했었지.”
“하온데 지금 도주가 말한대로 대내전이 전쟁을 거듭하다가 자금 문제로 골머리를 안고 있다면 그 입장에선 어찌하겠사옵니까?”
“다시 사신을 보내 교역을 요청하··· 오호라.”
“대내전과 대마주 태수는 서로 원수보듯하는 사이니, 대내전이 사신을 보내려 함을 도주가 간파한 것이옵니다. 우리 조선이 대내전과 교역을 하게 되면 도주로서는 손해가 막심할 터이니 이를 막고자 입조한 것이라면, 도주의 갑작스러운 입국도 설명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과연 좌상의 말이 맞다. 이놈들이 늘 간계만 획책하더니, 푸하하하.”
경신년의 일이니 소이전이니···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는 나는 잠자코 있었다.
“진성아!”
“예, 전하.”
“잘 했다, 아주 잘 하였어! 푸하하!”
머쓱타드하다.
아직도 뭔지는 잘 모르지만, 분위기를 보면 내가 한 건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