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85화 (18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85화>

    ***

    편전.

    임금의 권위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던 일은 바로 어제 있었다.

    두 달 가깝게 지지부진하던 모병안.

    찬반이 하도 극렬해 일선의 무신들에게 까지 찬반을 묻게 했던 그 일은 임금의 말 한 마디에 곧바로 병무도감(兵務都監)이 설치되었다.

    왕의 위엄을 새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는데, 이제 남은 건 병무도감의 책임자를 임명하고 군제를 본격적으로 개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갑자기 날아든 부음(訃音) 때문이었다.

    갑자기 날아든 부음은 성절사(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사신)로 중국에 갔던 권인손(權仁孫)이 보내온 것이었다.

    성절사는 황제의 탄신에 맞춰 올봄에 보냈고, 잘 머무르다가 10월인 다음 달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일정이 계속 미뤄졌다.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어 언제 세상을 떠나도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권인손은 틈틈이 치계를 보내오곤 했는데 보름 전 도착한 치계는 ‘황제의 건강이 수상하다’ 였었다. 그리고 보름만에 도착한 오늘의 치계에서는 황제의 부음을 알리고 있었다.

    제후로서는 황급히 대신들은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국상이 났으니 상례(喪禮)를 치르지 않을 수 없겠다. 예는 어찌 갖추는 것이 좋겠는가?”

    “전례대로 거애(통곡하는 일)하고 성복(成服)을 입는 것이 온당한 줄로 아뢰옵니다.”

    예조판서 신수영의 말은 정례에 가까웠다.

    황제의 부고가 알려지면 선왕들은 서둘러 옷을 차려입고 거애부터 했었다.

    다만.

    ‘귀찮기 짝이 없구나.’

    귀찮았다.

    진심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한다면 거애하고 성복을 입는 일이 어찌 귀찮겠냐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황제의 죽음이 거짓 눈물을 흘려야 된다니···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거애는 꼭 해야하는가?”

    신수영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부음을 들은 그 날로 거애하는 것은 제후를 떠나 선비로서의 예(禮)이옵니다.”

    “새 황제는 어떤 분이라던가?”

    “권인손에 의하면 학문을 가까이하시고 성덕을 내비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고 하시옵니다.”

    "황태자 시절에는 평이 달랐던 걸로 기억하는데?"

    차기 암군이라는 평을, 북경에 다녀온 사신들을 한 적이 있었다.

    “뭐, 어쨌든. 내 과거의 일을 상고해보면 꼭 거애해야만 상례를 지키는 것이 아닌 줄로 아는데. 세조께서도 거애를 아니 하신 일이 있으시지 않은가?”

    “온양에 행차하셨기 때문이옵니다. 사세가 어쩔 수 없었으니 궐정에서 곡림하는 것이 불가하여 그랬던 것이지 아니셨다면 필시 거애하시고 예를 차리셨을 것이옵니다.”

    “후. 거애는 얼마 동안 해야 하는가?”

    “나흘간 거애하는 것이······.”

    “나흘?”

    융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대행황제(죽은 황제)께서는 명군이시자 조선을 은혜로 보살피셨사옵니다. 지금 거애하지 않으신다면 후세가 의표(意表)한 일이라 생각할 터이니 속히 거애함이 온당하겠사옵니다.”

    “중국에서는 사신이 언제쯤 오겠나?”

    뜬금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의정 허침이 했다.

    “권인손 말이옵니까?”

    “아니. 중국에서 황제의 부고 때문에 보낼 사신 말이다.”

    “지금이 9월이고 국상을 당했으니··· 못 해도 내년 초에나 오지 않을까 싶사옵니다.”

    “사신이 거애한 절차와 곡절을 묻겠는가?”

    허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이옵니다.”

    “그럼 거애를 했다고 말하면 되지 않겠는고?”

    “하, 하지만 어찌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나와 경들이 안 했다고 말 하지 않으면 중국 사신이 어찌 진상을 알겠는고?”

    “그, 그래도 하심이······.”

    “하기 싫다.”

    “하오나 전하. 대행황제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해보시옵소서.”

    대사성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없다. 오히려 귀찮게 칙서만 자주내려 잔소리를 해대고, 칙서 받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게 한 일이 많았다.

    칙서 받는 예란 게 복잡하기 그지없는데 말이다.

    “승정원은 들으라.”

    “전교하시옵소서.”

    “황제의 부음을 중외에 포고하고, 또한 임금이 황제의 부음을 듣고 거애하고 성복을 입어 죽음을 비통해했다고 포고하라.”

    도승지 권균이 대신들의 눈치를 살폈다.

    “어찌 대답이 없는가?”

    “아, 알겠사옵니다.”

    “경들은 들으라.”

    “···”

    “나는 오늘 권인손의 치계를 받고 통곡했다. 너무 울어 정사조차 돌보지 못 했고, 정사를 돌보다가도 갑자기 왈칵 눈물이 터져나와서 황제의 은혜를 떠올리곤 하였으니 지금 내 말에 틀림이 있는가?”

    “어, 없사옵니다, 전하.”

    “하면 그리 알고 병무도감의 일을 진행하라. 과인은 나흘간 거애해야 하니 좀 쉬어야겠다.”

    거애를 핑계로 나흘간 쉬겠다니··· 어이가 골을 때리는 대신들이었지만 별 수 있겠는가.

    대신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어이없어 하는 대신들을 뒤로한 채 편전을 빠져나온 융이 상선에게 말했다.

    “진성이는 꽈배기를 만들었다던가?”

    “오늘 만들어 진상하신다고 하셨으니 아마 그러실 것이옵니다.”

    “그럼 내 진성의 저택에 가서 꽈배기 만드는 법을 눈으로 좀 보아야겠다.”

    “괜찮으시겠사옵니까?”

    “뭐가 말이냐?”

    “사관도 동석하지 않았사옵니까.”

    융은 편전을 흘겼다.

    “사관 놈들이 사초를 사신에게 보여줄 리도 없는데 무에 걱정인가.”

    “···예.”

    《무종실록(武宗實錄) 1506년 9월 20일 기사》

    ···하므로 사신은 논한다.

    정례를 지키는 일은 군왕으로서 더한 것이 없고, 하물며 상례하는 일은 제후의 법도이며 도리인데 거짓으로 거애했다는 분부를 내렸으니 이보다 더 큰 허물이 어찌 있으랴?

    후세는 들을지어다. 본시 왕은 총명하고 어진 바가 있어 도리를 어기는 일은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도리를 스스로 저버린 바가 많으니 어찌 미치광이와 다를 바 있으랴?

    ***

    꽈배기를 만드는 건 정교하면서도 지극히 조심스러워야 한다.

    이 반죽이며 재료들이 모두 얼마 짜린데······.

    나는 무슨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양, 조심스레 반죽을 들어올렸다.

    준비는 완벽하다.

    가마솥에 팔팔 끓고 있는 기름.

    구들장에 잘 숙성시킨 반죽.

    구비시킨 설탕.

    “후.”

    나는 조심스럽게 반죽을 들어올렸다.

    이제 이걸 넣기만 하면 되는데······.

    “대감마님! 대감마님!”

    “앗!”

    ······.

    떨어졌다.

    꽈배기 반죽이··· 그 비싼 반죽이!

    “이 자식아! 내가 꽈배기 만들 땐 방해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덕산이는 바닥에 떨어진 꽈배기 반죽을 바라보고 흠칫거렸다.

    “소, 송구합니다요.”

    “덕산아.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이건 신성한 의식이야. 너 인마, 무당들이 작두 탈 때 누가 방해하는 거 봤어?”

    “···못 봤습죠.”

    “신성한 의식이니까 누가 감히 방해를 못 하는 거지. 이것도 같애. 방해하면 부정 탄다고. 하. 그래서 뭔데?”

    “아! 제가 지금 막 들었는데 말입니다요. 황제폐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요.”

    “누가 죽어?”

    “황제폐하 말입니다요.”

    “···”

    사람의 분노 게이지를 나타내는 퍼센티지가 있다면 나는 아마 분노 게이지가 95%쯤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황제가 죽었단다.

    그래, 사람대 사람으로 보면 일단 한 인간의 죽음이란 애통한 일이다.

    고귀한 신분이건 천한 신분이건.

    사람이 죽는다는 건 애통한 일이지.

    근데··· 난 황제하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연관된 일도 없고.

    황제의 죽음 때문에 반죽을 떨어뜨렸다니 사람된 심정으로 그러면 안 되지만 아깝기 짝이 없었다.

    “후. 그래, 애통하네.”

    그렇게 말한 나는 떨어진 꽈배기를 조심스레 들어올려 살폈다.

    먼지가 좀 묻긴 했지만 털면 못 먹을 것도 없어보인다.

    그래도 일단 더러우니 맨 나중에 튀기기로 하고, 새 반죽들부터··· 조심히, 아주 조심히 신배 다루듯이.

    “대감마님! 대감마님!”

    “앗!”

    ······.

    또 떨어졌다.

    꽈배기 반죽이··· 한 번으로도 모자라 또!

    획!

    꽈배기 반죽을 떨어지게 만든 원흉을 바라봤다.

    장동이었다.

    “넌 또 뭔데!”

    “그게···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요.”

    “누구?”

    “나랏님 말입니다요.”

    인지부조화가 일던 그때.

    “꽈배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냐?”

    “어라, 형님?”

    형님이셨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혹시 내가 꽈배기를 만드는 사이 해가 저물었나 싶어서.

    근데 아니었다.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아직 형님이 정사를 돌보실 시간이란 소리였다.

    “편전에 계실 시간 아니십니까?”

    “귀찮아서 나왔다.”

    전생에 놀자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 심정 백번이고 이해한다.

    귀찮아서 학교 안 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니까.

    “꽈배기란 건 그렇게 만드는 것이구나? 내 말로 듣기만 했지 눈으로 본 적이 없으니 경이하다. 그 맛이 천상의 맛인지라 만드는 방법 역시 특별할 줄 알았는데.”

    “형님도 해보시겠습니까?”

    “대, 대감.”

    상선 대감이 화들짝 놀라 날 불렀지만, 형님은 아랑곳 않으셨다.

    “그럴까? 어찌하면 되는 것이냐?”

    “자, 일단 손부터 씻으시구요. 그 다음에는 이 반죽을······.”

    나는 형님께 꽈배기 튀기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드렸다.

    별 거 없다고 생각되셨는지, 형님은 소매를 걷어올리고 꽈배기 만드는데 함께하셨다.

    얼굴이며 옷에 밀가루 반죽을 묻히신 형님에 상선 대감은 아연실색 하셨지만··· 뭐, 어때?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

    “어··· 병무도감이요?”

    나는 약간 얼이 나간 채 되물었다.

    형님은 아랑곳 않고 꽈배기를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갓 나온 꽈배기라 저렇게 드시면 입천장 데일 텐데, 아무렇지도 않으신지 뜨거운 꽈배기를 곧잘 드신다.

    “그래. 네가 병무도감을 맡아야지, 누가 맡는단 말이냐?”

    “음.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뭘 말씀이십니까?”

    “네 나와 약조한 것이 있지 않더냐?”

    약조?

    ‘아.’

    나는 뒤늦게 형님과 한 약속이 떠올랐다.

    이덕이를 살려주는 댓가로 똥밭에 2년을 더 구르기로 했던 약조.

    솔직히 말하면 대군으로 꿀빨고 있느라 잊고 있었다.

    “설마요. 안 잊고 있었습니다.”

    “이제 슬슬 입조해야지.”

    “병무도감으로요?”

    끄덕.

    “병무도감의 일에 너보다 해박한 이가 뉘 있겠더냐? 지금은 도감이다만 정삼품아문으로 승격시킬 것이다.”

    조금 더 놀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른 게 사람이라지만 약조는 약조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등청은 언제부터 하면 됩니까?”

    “지금 대신들에게 병무도감의 일을 논하게 했으니 아마 사흘 뒤부터 등청을 하면 될 게다. 아직 관사가 없으니 병조로 가면 될 게고.”

    “나흘 뒤요. 아, 근데.”

    “응?”

    “덕산이한테 들어보니까 황제가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나와계셔도 돼요?”

    “안 되지.”

    안 되는 걸 너무 당연하게 말씀하셔서 넋이 나갔다.

    “그 일은 걱정말거라. 대신들이 알아서 처리 할 테니.”

    걱정 놓으시라는데 걱정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나는 마저 꽈배기를 베어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증 하나가 일었다.

    “아, 그러고보니까요.”

    “음?”

    “황제께서 돌아가셨으니까 새 황제께서 등극을 하실 것 아닙니까?”

    “그렇지.”

    “새 황제는 어떤 분이시래요?”

    “학문을 갈고 닦기를 즐겨한다고 하는데··· 모르지. 제왕들이란 국본으로 있던 시절과 제위에 오른 직후의 모습이 다르니. 게다가 기존에 있던 평이 하도 극명하게 갈리는지라 쉬이 판단이 안 서는구나.”

    ‘아쉽네.’

    입맛을 다신 나는 형님과 다른 주제로 담소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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