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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84화 (18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84화>

    ***

    내실에서 차를 들던 대마도주 무라모리(材盛)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오우치(大內) 족속이 심상치 않다니?”

    “조선에 접촉을 하려는 것 같사옵니다.”

    무라모리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던졌다.

    파삭-.

    “누가 누구와 접촉을 해?”

    꿀꺽.

    무라모리를 모시는 가신 무네모리(宗盛)는 마른 침을 꼴깍거렸다.

    가뜩이나 도주께서는 요새 치통이 도져 매사에 신경질적이신 일이 잦았다.

    한데 이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소식을 가져왔으니 신하된 입장으로서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쇼니(少弐) 가(家)가 오우치 족속들에 패퇴한 뒤로 도주께서 영 미심쩍다면서 사람을 보내신 일이 있잖사옵니까?”

    “한데?”

    “지금 요시카타(義質)가 소식을 들고 1년만에 입도했사온데 오이치의 당주가 조선과 물밑으로 접촉하려는 낌새가 포착됐다고 하옵니다.”

    쾅!

    “이놈들이 이제는 우리 섬까지 노리는 것이 아닌가?”

    무라모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생각할수록 열이 뻗치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여기선 냉철히 행동해야 했다.

    소식을 가져온 무네모리가 무슨 죄가 있겠나.

    그는 몇차례 심호흡으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찌 접촉한다는 것이냐?”

    “조선에 세견선을 보내려면 응당 도주의 소개장이 있어야 하옵지 않겠사옵니까?”

    무네모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주의 소개장 없이는 세견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조선에서는 바로 왜선으로 오인해 공격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도주께서 소개장을 내줄 까닭이 없으니 아예 사신을 보내 우리와의 교역을 끊게 하고, 저희들과만 교역케 하려는 듯 하옵니다.”

    “그거라면 메이오 8년(1500년)에도 시도를 한 일이 아니냐?”

    “그랬었지요.”

    놈들은 조선과 물꼬를 트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6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실제로 사람을 보낸 적도 두 차례나 있었다.

    첫 번째 사례는 사전에 발각해, 추격선을 보내 침몰시켰고, 두 번째 사례는 입국에는 성공했지만 조선측에서 도주의 소개장 없이는 세견선을 받을 생각이 없다며 돌려 보냈었다.

    이미 두 차례나 실패한 일이었기 때문에 세 차례나 감행 한다는 건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꼴일 테지만······.

    ‘오우치 놈들이 생각없이 일을 벌일 리가 없지.’

    분명 뭔가가 있는 게다.

    “혹 놈들이 조선이 거절 못 할 패라도 들고 있는 것 아니냐?”

    “그래서 알아봤사온데 이번에는 조선에 호감을 사기 위해, 조선인 노예들을 사들인 연후 조선에 통보해 송환시킬 생각인 듯 하옵니다.”

    “조, 조선인 노예들을? 어, 얼마나 말이냐?”

    대마도는 조선과 긴밀하다.

    관작도 제수 받을 정도고, 조선과 교역이 없다면 섬사람들 모두 아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무라모리 뿐만 아니라 역대 도주들은 조선에 온신경을 집중했고, 그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 했었는데 개중에 하나가 조선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조선이 필요로 하는 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대개 왕업이었다.

    왕의 권위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일.

    그리고 그중 하나는 포로 송환이다. 포로 송환은 대내적으로 왕의 선함과 백성에게 베푸는 따스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조선 왕들이라면 누구라도 반길 일이었다.

    “정확한 수는 모르겠지만 사들인 노예만 물경 일백이 넘는다 하옵니다.”

    “배, 백이 넘어? 이놈들이 아예 작정을 했구나.”

    오우치는 쇼니 가의 전쟁에서 전비를 제법 소모했다.

    그뿐인가?

    허수아비 쇼군을 뫼신다며 발광을 해댄 턱에 백성들에겐 원성이 자자할 터였다.

    그런데 노예를 백여명 넘게 사들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우치 족속들은 멍청한 족속들이 아니다.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을 거란 말이다.

    수백명의 노예를 조선에 공으로 보낸다 한들, 그래서 세견선의 입국을 허락 받는다 한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세견선을 보내는 즉시 무라모리 자신과 쓰시마가 가만 있을 리가 없다.

    왜구로 변장해 세견선을 발견하는 즉시 침몰시키거나 나포할 게 불보듯 훤하니, 오우치 입장에서는 열에 다섯이나 조선에 도착하면 다행인 일이다.

    어찌 보면 남 좋은 일 시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거늘······.

    “뭐 때문이라더냐?”

    “그게······.”

    “어허!”

    “비누 때문이라고 하옵니다.”

    이실직고하는 무네모리에 무라모리는 얼이 나갔다.

    “비, 비누?”

    그의 시선이 곧 어딘가로 옮겨갔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네모반듯한 물체.

    “저, 저거 말이냐?”

    일전에 조선국 왕자가 섬에 들렀을 때 선물로 주고 간 것 중 하나였다.

    아직 써보진 않았고 모양이 예뻐서 관상용으로 두고 있었다.

    “예.”

    “저게 뭐라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 아니··· 위험을 떠나 조선에 바짝 엎드리면서 까지 얻으려 한단 말이더냐?”

    “공가(귀족)에서 없어서 못 살 지경이라 하옵니다.”

    “공가에서?”

    “예. 류큐 놈들에게서 몇 개를 구해온 적이 있는데, 쇼군께 진상하고 난 뒤로 공가에서 쓰임이 많이 생긴 듯 하옵니다.”

    “아무리 쓰임이 많이 생겼다손쳐도 저런 거 때문에··· 허.”

    이해가 안 됐지만 또 달리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교토의 공가 놈들은 별 희한한 것도 사들이는 고상한 취미가 있지 않던가?

    몇 년 전에는 하등 쓸모가 없는 늙은 조선인 노예를 두는 게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는데,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것과 같은 이치일지 몰랐다.

    “그래서 그 비누를 얻기 위해 조선에 세견선을 보내려 한다?”

    “그런 듯 하옵니다.”

    무라모리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그의 시선은 비누에 멈춰있었다.

    ‘오우치 놈들이 얌전히 창고에 재화를 쌓게 둘 순 없지.’

    저 비누가 얼마의 가치를 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오우치 놈들이 탐내고 있는데다, 꼭 그게 아니어도 놈들이 조선과 교역하도록 둘 순 없었다.

    조선이 쓰시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교역이 끊긴다면 쓰시마 입장에선 밥줄이 끊기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노략질이나 하면서 살 순 없지.’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무네모리.”

    “예, 주군!”

    “조선에 좀 다녀와야겠다.”

    “예. 걱정마시옵소서. 소신이······.”

    “아니.”

    “예?”

    “내가 좀 다녀와야겠다.”

    ***

    편전.

    “그래서 아직도 결론이 아니 나왔다?”

    임금의 음성은 싸늘했다.

    영의정 허침은 싸늘한 임금에 식은땀을 주룩- 흘리며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쾅!

    “내 경들에게 어찌 이 일을 논의케 한 것 같은가?”

    “···”

    “어찌 대답들이 없어?”

    “전하께서 지금 저희에게 상교를 내리신 까닭은 군신의 정사를 도모하는 아름다운 모습 때문이시옵니다.”

    김감이었다.

    정답을 말하는 김감에 융은 조금은 풀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경의 말이 맞다. 내 지금 상교를 내려 논의케 함은 군신이 정사를 도모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듯 하여 이런 분부를 내린 것이었다. 특히 이번 정책처럼 대전을 개정하는데 모자라,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는 국책에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정책을 시행하려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

    “벌써 두 달이다, 두 달. 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된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송구할 짓은 안 하면 된다. 왜 송구할 짓을 해놓고 매번 송구하다고만 하는가?”

    “···”

    “크흠. 무신들은 이 일을 어찌 생각하던가?”

    찬반이 극렬하게 갈려 논의가 거듭되자, 융은 변경의 무장들에게도 이 일의 찬반을 논하라 한 적이 있었다.

    “무신들은 8할이 찬성하옵고 2할이 반대한 줄로 아옵니다.”

    “허어. 무신들이 찬성하는 일을 왜 문신들이 반대를 한단 말인가. 잘 나가는 선비는 고꾸라뜨리는 게 소인의 심리라더니 같은 심리인가?”

    “그게 아니오라······.”

    “대제학(김감)은 할 말이 있는 것이냐?”

    김감은 연신 눈치를 살폈다. 차마 이 일을 아뢰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 것이리라.

    그 고민을 대신해준 건 홍문관 전한 이행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지금 논의가 두 달째 이어지고 있는 것은 공신전 때문이옵니다.”

    “고, 공신전?”

    융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사실 그는 이 논의에 대해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국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왕의 업적인 대전을 개정하는데 모자라 군제를 혁파할 테니 국책 정도가 아니라, 나라의 병무를 뜯어 고치는 일이었다.

    때문에 김감이 말한대로 군신의 정사로 비쳐지게끔 할 의도가 컸다.

    그래서 최대한 간섭치 않았다. 않았는데······.

    “무슨 말이냐, 공신전이란 게?”

    “공신전이 대부분 면세전인데 이에 세를 징수해야할지 말지에 대한 논의 때문에······.”

    “자세히 말해보라, 자세히.”

    김감은 대사성 김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대사성과 일부 인사들이 공신전을 문제로 차일피일하고 있사온데 어찌 된 영문인가 헤아려보면 공신전에도 구실을 삼아 세를 징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사옵니다.”

    “참으로 지당한 의견이 아니냐. 누구의 의견이냐?”

    “진성대군의 의견이었사옵니다.”

    찰나 동안 흡족한 미소가 입에 걸린 융.

    그는 신색을 가다듬고 되물었다.

    “맞는 말인데 그게 어찌 문제가 된다는 말인고?”

    “전하. 신 대사성 김전 아뢰옵니다.”

    “말하라.”

    “신이 두 달 전, 면세전을 혁파해 세수를 늘릴 수 있다 주장하였사옵니다.”

    “그랬지.”

    “한데 공신전을 제외한 것은 무슨 영문이었겠사옵니까?”

    “무슨 영문인가?”

    “지금 공신의 자제들에게 내준 공신전을 혁파하여 세금을 징수하게 한다면 여론이 들끓을 것이옵니다. 전하께선 감고(勘考) 해보시옵소서. 가뜩이나 이 일이 여염집에 알려지매 있어 여론이 불리한데, 공신전까지 혁파한다는 말이 나돈다면 이 사안이 어찌 국론의 분열 없이 가능하겠사옵니까?”

    “음.”

    융은 사색에 잠긴 듯 수염을 매만졌다.

    “더욱이 별사전(왕이 하사한 토지) 역시 공신전의 축에 들어 공신전의 면세를 혁파하자면 응당 별사전에도 세를 징수해야 할 텐데 이 별사전들은 역대 제왕들께서 공신에게 하사하신 토지이옵니다. 그런데 지금 면세에 대한 혜택을 없애면 여론이 어찌 반발치 않겠사옵니까?”

    “이는 어불성설이옵니다, 전하.”

    임사홍이었다.

    “인군(仁君)이란 말이 자자하셨던 선왕께서도 공신전에 조세를 논의케 한 적이 있사옵니다. 이때 비록 모두가 찬동하지 않아 시행되진 못 했사오나 어찌 이 일이 논의 된 것이겠사옵니까?”

    “하지만 공신의 자손으로서 고아와 과부가 된 자가 여럿 있을 텐데 지금 갑자기 면세의 혜택을 없애면 실망하는 바가 클 것이옵니다. 공신을 우대하는 법도가 어찌 이럴 수 있겠사옵니까?”

    “대사성의 말은 그른 바가 있사옵니다. 공신전에 면세의 혜택을 주는 것이야 말로 어찌 공신을 중히 여기는 것이겠사옵니까? 비록 공신을 우대하는 법도가 조종의 옛법이라 경솔히 할 수 없다지만 무릇 법도란 당세의 풍조에 따라 결정하는 법이옵니다. 선왕들이 시행했다고 하여 당세에도 시행할 수는 없고, 선왕들이 부정했다고 하여 당세에도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임사홍과 김전의 설전이 있은 뒤, 편전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그 침묵을 깬 건 융이었다.

    “내가 지금 가만 생각해보건대 좌의정의 말이 타당한 듯 하다.”

    “전하!”

    “국조의 공신을 헤아려보면 본인이 직접 공을 세운 자도 있겠고, 타인으로 인해 공을 얻은 자도 있을진대 이들이 모두 면세의 혜택을 받을 만큼 큰 공을 세웠겠는가? 개국 이래 수백의 공신이 있었으니 그 자제들은 수천이 넘는다. 그 훈공이 경(輕)한 자들은 면역을 박탈하고, 중한 자달은 유지케 함이 온당한 처사라 할 수 있겠도다.”

    “전하, 지금 만약 공신전에 세를 징수한다면 공신의 자제들이 앞다투어 몰려와 성토할지도 모르옵니다. 그리된다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더냐. 이 일은 이리 알고 잘 헤아려서 시행하라.”

    “하오나······.”

    “시행하라!”

    두 달 가깝게 이어진 논의가 임금의 말 한마디에 종식되었다.

    예전과는 달라진 임금의 권위를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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