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83화>
***
빈청.
진성대군은 일다경 쯤 빈청을 나섰다.
애 깰 시간이라면서······.
그리고 진성대군이 나간 편전에는 침묵만 감돌았다.
일다경간 이어지던 침묵은 우의정 채수의 헛기침으로 깨졌다.
“다들 대감이 말씀하신 바는 이해하셨소?”
모두들 자신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로운 게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리 시행한다고 강군이 될지 의문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이해는 했다.
100% 이해를 한다는 건 어불성설에 가깝지만 그 체계라던가 위계를 바로 세움에 있어 발생하는 이로움과 그로 인한 긍정적인 파급은 이해를 했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제를 완전히 혁파할 근거가 된다는 데 대한 확신은 들지 못 했다.
특히 조심스레 의문을 제기한 대사성 김전이 그랬다.
“하지만 대감의 말씀이 그르진 않습니다.”
별충위장 김억수였다.
김전은 본인의 의문을 반박하는 억수에 불편한 듯 헛기침을 터뜨렸다.
비록 김전이 모병에 대해 찬성했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그게 일면에선 진보적인 사상이라 볼 수도 있다지만, 김전에게 억수는 임금이 원칙을 위배한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일개 대립군으로 공을 세워 권관이라면 몰라도, 단박에 건공장군에 봉해졌다.
공신으로서 공을 세웠다는 점을 참작해도 파격적인 건 매한가지였다.
불편한 사람의 반박이었으니 김전의 말투도 곱지는 않았다.
“변경에서 소군을 지휘하는 것과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네. 말을 함에 있어 신중히 해야 할 걸세.”
“송구합니다만, 영감께서도 별충위의 위력은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별충위는 8할이 해체 된 상태였다.
전성기(?)에는 정원이 1000명을 살짝 넘었던 별충위의 모태는 결국 사회지도층의 자제들을 전쟁에 내보내는 데에 있었다.
전쟁이 역적들의 발호로 흐지부지되자, 시간이 차차 흐르며 그 수는 감소해 지금은 160명 남짓한 사람들만 군문에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무슨 위력 말인가?”
“비록 여진과의 전쟁에서 무위를 뽐낸 일은 없다지만 역적을 척결하는 일에는 무위를 뽐낸 바가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별충위가 한량들이 모인 집단이었다고 한들 어찌 역적들을 그리 손쉽게 척결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간단히 하시게, 간단히.”
“대감께서 별충위를 훈련시키셨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훈련이 없었다면 역적들을 상대로 큰 피해를 냈겠지만 대승을 거뒀지요.”
“그건 역적 박원종이 우매한 바가 있었고 또한 비격진천뢰에 역적들이 혼비백산한 것일세. 어찌 별충위의 위력이 천하제일이라고만 말씀하시는가?”
“그것도 맞는 말씀이지만 벽단에서 남하한 시간을 생각해보시옵소서. 제아무리 강군이라 한들 그 짧은 시간 안에 한양까지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낙오자도 없이 말입니다. 이게 단순히 한량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위계가 바로 잡혀 있었고, 충분한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딱히 김전도 부정하지 않았다.
역난 당시, 큰 틀에서 보자면 별충위는 역적들의 입장에서 큰 변수가 되진 못 했다.
변수가 된 건 별충위의 예상 밖의 빠른 남하와 박원종의 실책에 있었다.
이 변수에 단순히 박원종의 실책만 있었더라면, 역적 모의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대감께선 지금 모병이라는 강수를 두어 전군을 별충위와 같은 정예군으로 탈바꿈시키시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비록 말씀하신 군의 직책에 있어서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지만, 소인이 별충위에서 직접 겪은 바에 의하면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습니다.”
별충위가 독자적인 군제를 썼다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었다.
정식적인 직책은 따로 있었지만, 진성대군이 대대장이니 중대장이니 부르며 그게 공식 직책처럼 굳혀진 것이다.
“그건 위장의 말이 맞는 듯 하오.”
채수였다.
“내 역난이 발호 했을 때,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직접 별충위를 보았는데 확실히 위계가 바로 서 있음이 천하의 으뜸가는 군대였소. 속하의 군교들마저 투항을 권고했으니 오죽하겠소?”
평안도 관찰사 시절 채수는 남하하는 진성대군의 별충위를 역적으로 오인한 적이 있었다.
그 위력을 직접 맞딱뜨린 사람은 채수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무관 학교는 어쩌시겠습니까?”
다시 김전이었다.
아까 진성대군은 무관 학교라는 기관에 대해 설명했다.
기존의 갑사와 북방의 정예군들을 버려가면서 까지 군제를 개혁할 필요가 있냐는 유자광의 질문에, 회유책의 일환으로 무관 학교를 언급한 것이었다.
문제는.
“대감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만 들어보면 무과를 폐지하시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모병에 지원한 자들중 일부는 그 학교에 입교시킨다. 그 연후 그들에게 지휘관의 보직을 주어 일군을 지휘하게 한다.
이게 바로 대군이 말한 무관학교의 골자였다.
“지금도 방방곡곡에는 무과 하나만 바라보고 무예를 연마하는 무사들이 즐비한데 갑자기 이를 무관학교라는 기관으로 대체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대사성. 대감의 말씀을 곡해하지 마시오.”
김감이었다.
“대감께서 언제 무과를 폐지 한다 하셨소? 일정 시험을 치러서 그 무관학교에 입교시키고 지휘관으로 육성한다지 않으셨소? 게다가 말이 나와서 말인데 군관들의 질이 천차만별이라는 건 여기 계시는 분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니오?”
“···”
“군관은 수령의 직하에 소속돼서 군사들과 밀접히 움직이는 자들이요. 한데 활을 제대로 잡는 자는커녕 언문도 제대로 못 읽는 자들이 지방에는 수두룩 하오이다. 그런 자들을 모두 파직시키고 잘 교육시킨 군관들로 대체하겠다는데 이것이 어찌 무과 폐지요? 솔직히 말씀하시오.”
“뭘 말씀이시오?”
“지금 대사성이 비록 모병에 대한 방책을 내놓긴 했지만, 대감께서 공신전을 지적하시니 트집을 잡는 것 아니오?”
반시진 전.
빈청에는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진성대군이 군대의 설명을 이어가던 중, 김전에게 의문을 제기한 것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공신전이었다.
대군은 궁방전과 내수사전 등의 왕가 소유의 면세전은 지적하면서도 면세전의 다수를 차지하는 공신전은 빼먹었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거기서 약간의 설왕설래가 오간 적이 있었다.
“내 지금 그 일로 감정이 상해 트집을 잡는다는 거요?”
“아니라는 법도 없지.”
“허.”
“자자. 괜히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겠소이다. 군포 문제는 괜찮다고들 보시오?”
분위기가 과열될 기미를 보이자 국회의장 격인 영의정 허침은 한차례 박수와 함께 화제를 전환했다.
“이를 말이겠소이까. 다른 건 몰라도 군포만큼은 이롭다고 보오.”
호조판서 이손이었다.
“다른 분들은?”
“동감합니다. 외관을 전전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재물을 받고 면역케 해주는 수령들이 있는데 이를 국가가 대신해서 받게 된다면 오히려 수령의 불법을 막을 수 있으니 어찌 나쁜 일이라 하겠습니까? 문제가 있다면 군포를 걷는 일인데······.”
“무슨 말씀이신가?”
“가뜩이나 조운선과 조군들이 납세철만 대면 빌빌거리거나 제때 운반을 못 하는데, 군포까지 가중한다면 제대로 운반이 될지 의문입니다.”
“음. 그 문제는 차제에 논해야 할 듯 하오.”
“알겠습니다.”
“결국 결론지어 보자면 대감이 하신 말씀은 군을 완전히 개혁하자는 것인데 찬반을 나눠 전하께 상주함이 좋겠소. 찬성하는 분은 적절한 의견을 개진해서 찬성 의사를 밝혀주시고, 반대하는 분들 역시 적절한 의견을 개진해서 반대 의사를 밝혀주시오.”
누군가는 찬성을, 또 누군가는 반대표를 던졌다.
찬반이 나눠지자, 삼정승들은 표결과 대신들의 의견을 갖고서 강녕전을 찾았다.
이후에는 연일 존폐 여부를 두고 회의가 거듭됐다.
회의는 장장 두달 동안 지속됐다.
***
조선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유구국 조정은 또 다른 의미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쇼신(尙眞)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둔기로 한 대 얻어맞으면 이런 얼얼함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게 사실이냐?”
한참 동안 운을 떼지 못 한 쇼신은 장장 일다경이 지나서 입을 열었다.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어찌··· 허.”
“조선의 상품이란 매양 들어오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그 비누라는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 소량만 들어왔으니 더욱 그러한 듯 하옵니다.”
“허.”
조선국 왕자는 비누라는 조선의 특산품을 갖고 왔었다.
아주 귀한 특산품이라면서 말이다.
그 특산품을 쇼신은 일부 사족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사족들 사이에서는 비누를 가진 자와 없는 자로 분류가 된단다.
어이가 없다 못 해, 염라대왕이 곡할 노릇이었다.
“임금이 하사한 물건을 함부로 매매하는 것이 가당한 일이란 말이냐.”
“그게 어찌 가당한 일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오나 그들의 마음도 이해 못 할 것이 아닌게······.”
“아닌게?”
“어찌 된 영문인진 몰라도 비누를 사용하면 잔병치레가 준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사옵니다.”
“잔병치레가 줄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던 쇼신은 흠칫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쇼신은 잔병치레가 많았다. 겨울에는 감기를 달고 살았고 조금만 피곤하다 하면 입안에는 종기라던가 얼굴에는 여드름 같은 몹쓸 게 나곤 했었다.
한데 비누를 사용한 뒤로는 그런 잔병치레가 줄긴 했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사옵니다.”
“왕이 하사한 물건을 함부로 사고 파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무엇이란 말이냐?”
“시, 시마즈이옵니다.”
“시마즈? 놈들이 또 변경을 약탈한 것이냐?”
“그건 아니온데··· 그 오랑캐들에게도 비누가 들어 간 듯 하옵니다.”
“그럴 경로가 전혀 없는데?”
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사족들 중엔 시마즈와 교류하며 이문을 남기는 자들도 많았다.
“그 오랑캐들 사이에서도 비누가 조선의 특산이란 게 알려지면서 욕심을 내고 있다고 하온데 사족들 사이에서는 또 이 오랑캐놈들이 비누를 탐태 침략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놈들이 암만 무지하기로서니 고작 물품 하나를 탐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쇼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현실성이 전혀 없다.
그래, 100번 양보해서 비누가 사족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값이 더해져 거래가 된다고 하자.
그래서 그 비누를 시마즈 오랑캐들이 탐낸다고도 하자.
하지만 그게 전쟁 명분이 되지는 못 한다.
분명 소문의 배후가 있을 터였다.
전쟁 분위기를 부추겨 불안을 제기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사람.
누굴까 고민해봤지만 선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말이온데······.”
“말해보라.”
“조선국에 사신을 보냄이 어떻겠사옵니까?”
“조선에?”
“예. 그럴 일이 전혀 없다지만 백성들이 불안해한다면 정사에 이로운 바가 하나도 없사옵니다. 가뜩이나 왜구와 섬오랑캐가 결탁했다고 해서 백성들이 불안해 떨고 있사온데 거기에 시마즈까지 가세한다면······.”
우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선에 사신을 보내 파병군을 속히 보내달라 요청하는 것이 가할 듯 하옵니다.”
“하지만 조선 왕자가 돌아간 지 반년도 채 안 됐는데 사신을 보내 파병을 재촉한다면 우리의 약점을 조선에 내보이는 꼴이 아니겠는가?”
“조선이 왜구와 섬오랑캐보다 위협적이겠사옵니까?”
쇼신은 얕게 침음했다.
하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선이 이 작은 나라에 관심을 가질 일도 없을뿐더러, 설령 류큐가 황금의 나라라 한들 조선은 쉽사리 야욕을 드러내진 못 할 터였다.
명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어찌?
“하면 사신은 누굴 보냄이 좋겠는가?”
“사신으로는 왕자군을 보냄이 좋을 듯 하옵니다.”
“바닷길이 위험하고 왜구가 있어 뱃길이 험이할 텐데 어찌 왕자군을 보낸단 말이냐?”
“왕자군들 중에 한 분을 보내시옵고, 조선에서 교류케하고 친분을 쌓는다면 장차 나라에 이로운 바가 크지 않겠사옵니까?”
일리가 있는 말에 쇼신은 사색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