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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78화 (17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78화>

    ***

    강녕전.

    ‘생각이 어찌 이리도 깊을 수가 있을꼬.’

    안석에 몸을 편히 기대고 앉은 융은 편해진 몸처럼, 편하면서도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네 청을 한 번 말해보아라.

    빈 말이 절대 아니었다.

    굳이 총애하고 아끼는 진성이라서 한 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진성이는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설령 진성이 아니라 대사성 김전이 이런 공을 세웠어도 똑같이 원하는 청이 있냐고 물어 봤을 것이다.

    그만큼 진성의 공은 작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실감이 안 나지만 영토가 늘었고 신의를 맺은 나라가 생겼다.

    이건 왕업의 일환이다.

    선왕께서도 이루지 못 한 왕업.

    적잖은 왕업을 이룰 수 있었으니 이게 어찌 작은 공이겠는가.

    그래서 청이 있으면 사심없이, 그래서 기탄없이 말을 해보라 한 것인데······.

    긁적긁적.

    “배 불리 먹고 사는 것도 다 형님 덕이고, 이미 형님이 땅이랑 노비까지 하사 해주셔서 딱히 청이랄 것도 없는데요. 생각해보니까, 신공이나 채윤문 같이 배에 기름만 잔뜩 낀 똥별들이 엄청 많을 것 같더라구요? 청이 있다면 그런 놈들 물갈이 시켜주시는 것 정도?”

    대궐의 말을 세간의 사람들은 궁중어(宮中語)라고 표현한다.

    지밀 같이 저 깊고 은밀한 곳에서도 말(言)로서 체통과 위엄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중에서 사용하는 말투라기에 진성의 말투는 심히 경박했다.

    하지만 융은 반어(아이러니)하게도 이 경박한 말투가 심히 그리웠었다.

    “그것이 진정 네 청이란 말이냐?”

    “형님.”

    진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불렀다.

    뭔가 진지한 말을 꺼낼까 싶어 융은 몸을 앞으로 쭈욱- 내뺐다.

    “죄송한데 저도 거기 안석좀 주시면 안 될까요?”

    “아, 안석?”

    긁적.

    “사실 제가 쉬지도 못 하고 먼 길 달려왔거든요. 보는 눈 있으면 감히 그런 생각 못 하겠지만 사관도 없고··· 저도 좀 기대 앉고 싶어서······.”

    푸핫.

    실소를 터뜨린 융은 남는 안석을 진성에게 건넸다.

    그리고 마침내 안석에 기대 앉은 진성은 하, 살겠다··· 라는 말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하던 말씀 계속 드리자면요. 제가 아까 편전에서는 일부러 말씀을 안 드렸는데··· 아, 형님도 서계 보셨죠?”

    “봤다마다.”

    진성이 보내오는 서계는 그 내용들 마다 절로 부아가 치밀었다.

    어쩌면 신공이나 채윤문에게는 진성에게 걸린 게(?) 다행일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내 직접 친국을 주도했다면 그리 편히 죽게 놔두진 않았을 테지.’

    다시금 두 사람에 대해 이를 갈던 즈음.

    “하, 근데 이게 직접 안 당해보면 모른다니까요? 얼마나 화딱지가 나던지··· 이런 장수들이 채윤문하고 신공 두 사람 뿐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화가 나는 거 있죠? 그런 놈들은 진짜 묵사발을 내버려야 되는데.”

    “그것이 진정 네 청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병조판서 한사문과 이조판서 이계동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라 하명한 참이거든.”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다른 청은 없는 것이냐?”

    “다른 청··· 음. 아. 이건 청이라고 할 건 없는데요.”

    “편히 말해보거라.”

    “그, 좌수사 이종인하고 우후 김경조는 어찌 처분하기로 결정 났습니까?”

    “편전에서?”

    “예.”

    요새는 이리저리 신경 쓸 일이 많았다.

    꼭 부산진의 일 뿐만 아니라 평안도에서는 해랑적(중국해적)과 여진 오랑캐에 대비해 성을 쌓는 일로 치계를 해왔고, 강원도에서는 갑자기 황우(黃雨)가 내리는 이변이 있었다며 관찰사가 직접 치계해 왔으며, 전라도 일부 고을에서는 수재가 발생해 관찰사가 그 현황을 치계해오기도 했었다.

    이 만기친람(萬機親覽)들에 비하면 이종인과 김경조의 처분은 티끌 작은 일에 가까웠다.

    때문에 융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종인은 파직하여 다시는 서용치 말고, 김경조는 상관을 잘 못 만난 죄만 있으니 따로 죄를 묻진 않되 요직에는 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게 공론이었다.”

    “형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나?”

    “네.”

    융은 침음했다.

    사실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앞서 설명한 만기친람들과 우수사 채윤문, 신공의 파급이 워낙 컸어야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만, 대사성 김전이 두 사람의 처분을 물을 때 ‘경들의 뜻대로 하라.’ 말한 적은 있구나.”

    “그럼 여기서 청입니다.”

    “말해보아라.”

    “이종인과 김경조는 제가 만나보니 이대로 쳐내기에는 아까운 장수들 같았습니다. 실수가 크긴 했지만 그 실수도 따지고 보면 두 사람 잘못이라고도 할 수가 없었구요. 충군(充軍)으로 죄를 대신하게 하는 건 어떨까요?”

    “충군?”

    “으음. 대신들의 반발이 클 터인데······.”

    “그래서 청이죠.”

    “공사를 사감(사적인 감정)에 대입해 돌볼 순 없다. 네가 이종인과 김경조를 그리 아끼는 연유가 무엇인 게냐?”

    “그러니까요······.”

    진성의 입에서, 짧은 서계와 별단(첨언하던 문서)에서는 보지 못 했던 이종인, 김경조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술술 새어나왔다.

    ***

    잠깐 부산진의 일을 떠올려봤다.

    부산진에서 안처직 씨와 바톤터치를 하기 전까지, “저놈 모가지를 잘라버려라!” 효수형을 선고한 사람들은 두 손으로 셀 수가 없다.

    물경 스무명이 넘는다.

    목이 잘려나간 사람들만 스무명이지 면직 처분 된 사람들은 그 곱절에 해당한다.

    당장 채윤문과 달리 아무런 죄가 없던 우수영의 만호들.

    그들은 봉고(감찰) 때문에라도 일시 면직 처분이 떨어졌다.

    지은 죄가 없는 우수영의 만호들이 이 정도이니 예하 지휘관들의 관리를 못 한 좌수사 이종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안처직에게 바톤터치를 하고 한양에 올라오기 전 날까지도 이종인은 무장해제 된 채 원옥에 하옥된 상태였다.

    그만큼 극단적이기까지 했었던 내가, 그래서 스스로 이종인을 원옥에 하옥시켜버렸던 내가 두 사람을 변호한 건 사적인 친분이 있다거나, 더 나아가 뇌물을 받아 먹었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다.

    진짜로 아까워서였다.

    뭐, 어쩌면 똥별들 사이에 있어서 더 돋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종인은 수하 관리를 개떡(?) 같이 하긴 했어도 본영(本營) 관리 만큼은 철두철미하게 했었다.

    내가, 각 군영들을 돌아보면서 매긴 점수로 외침시 반격 가능성을 점쳤을 때, 이종인의 본영만이 80%의 점수가 매겨졌다.

    미흡한 점이 다소 보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임진왜란이 일어난다면 가장 먼저 반격에 나설 수 있게끔 만반의 채비가 갖춰진 곳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부산진에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이종인이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다.

    근데 알고 보니 공을 엄청 세운 사람이었다.

    소싯적에는 오랑캐를 섬멸하는데 참전하기도 했었고, 해랑적(중국 해적)을 무찌르기도 했고, 노략질하는 왜구의 수급을 단신으로 십수개나 벤 소드마스터(?) 급의 공이 있는 이였다.

    무엇보다.

    딱딱하고 세상을 오시하던 것처럼 느껴진 첫인상과 다르게 따뜻한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군사를 엄격하게 지휘하되 휘하에 형편이 궁핍한 군사나 군관이 있으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구휼했다.

    이건 사실 엄청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채윤문을 털면서 채윤문의 돈이 이종인에게 흘러 들어간 내막이 밝혀졌고, 또 동래 유지의 돈이 이종인에게 흘러 들어간 사실이 밝혀졌다.

    나는 당연히 뇌물로 간주해 수사를 했는데 뇌물이 아니었다.

    단순 채무 관계였다.

    휘하에 군사 하나가 있었는데 그 군사가 봉양하는 노모가 숨을 거뒀단다.

    장사를 치러야 하는데 장사 치룰 돈이 없어서 채윤문에게 돈을 꿔 장사 치르게 했고, 휘하에 있는 군관의 자제가 무재에 재주가 있는 걸 알고선 동래 유지에게 돈을 꿔서 무예를 익히게 했다.

    아, 물론 여기서 이종인이 채윤문과 동래 유지에게 받은 돈을 안 갚았으면 문제 될 소지가 있겠지만 이것도 금방 갚았다.

    이렇게 선행이라면 선행인 일을 베풀었으면서도 일체 본인이 한 걸 알리지 않았단다. 앞전의 군사 같은 경우에는 고을에서 내려온 지원금이라 얼버무렸고, 군관의 자제 같은 경우에는 나라에서 나온 장학금 정도로 말을 얼버무렸다.

    물론 이 사실들은 좌수영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라 군사들에게 신망도 두터웠고 말이다.

    그건 김경조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인을 통해 들은 김경조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채윤문이나 신공 같은 똥별들이 비리를 저지른 것과 대조적으로 일체의 뇌물은 받지 않은 건 물론, 군사의 질을 우선으로 생각한 사람이었다.

    아, 과거 만호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단다.

    왜구가 상륙했고 마침 성은 텅텅 빈 상태였다.

    당연히 왜구가 툭- 건드리면 성은 윽- 하고 무너진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는데, 하필 백성들은 밖에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김경조는 성을 걸어잠궈서 본인의 안위를 돌보는 대신 상륙한 적들이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성문을 활짝 열고는 백성들을 피신시켰단다.

    그리고 왜적이 성 앞에 진을 치자 소수의 기마대만 이끌고 출성해서 백성들의 피신로를 지켰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왜구 수괴가 저런 무사는 해칠 수 없다고 해서, 노략질한 물품과 포로로 잡은 백성들도 모두 풀어주고 빈 손으로 돌아갔다나?

    뭔가 실화라기 보다는 구전을 통해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같게 느껴지겠지만 가쓰히로를 통해 교차검증(?)한 결과 팩트였다.

    실제로 가쓰히로는 동료에게서 그런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단다.

    뭐, 그 외에도 이종인을 따라 종군하면서 공을 세운 일이나 선행을 베푼 일이나··· 여러 가지 일들을 종합해 봤을 때, 이대로 군문에서 물러나게 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들이 많았었다.

    형님께서 청이 있냐고 물었을 때, 별 생각 없다가 두 사람이 떠오른 건 이 때문이었다.

    뭐, 말 그대로 청인지라 형님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

    “전하, 병조판서 한사문과 이조판서 이계동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진성의 말을 듣고, 이종인과 김종인의 처분을 고민하던 융은 상선의 음성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흐트러진 채로 있었던 건, 진성과 함께였기 때문이지 다른 신하들이 볼 때 임금은 근엄해야 한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허리도 꼿꼿이 세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들라하라.” 말했다.

    드르륵-.

    문차비 문 여는 소리와 함께 한사문과 이계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진성처럼 감히 융의 코앞에 앉지는 못 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읍(揖)부터 했다.

    그리고 마침내.

    “앉으시오.”

    령이 떨어지자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대책은 강구해봤소?”

    아닌 게 아니라 융은 며칠 전 미복에서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을 불러들여 경상도 수영의 문제로 상의를 한 적이 있었다.

    경상도 수영의 문제만이 아니란 생각은 두 사람 역시 동감했고, 융은 이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예. 하여 전하께서 오수(낮잠)에 드실 시간인 걸 알면서도 외람되게 알현을 청한 것이옵니다.”

    “대책을 강구했다니 다행이오. 어떤 것이오?”

    병조판서 한사문이 고개를 조아리더니 품에서 잘 갈무리한 종이를 하나 꺼냈다.

    당연히 바로 전하지는 못 하고, 상선에게 대신 전달했다.

    상선은 종이를 조심스레 받아들고 다시금 융에게 건넸다.

    촤락-.

    설렘반, 기대반과 함께 종이를 펼친 융.

    「전국 병영의 폐해와 폐단에 대한 시무책」

    그가 곧 시무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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