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77화 (17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77화>

    ***

    편전.

    “한심하도다, 한심해.”

    운을 뗀 임금에 대신들은 고개만 조아렸다.

    입이 열 개라 한들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변방 꼴이 이 지경인데도 외적이 침입치 아니 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이 보우하심이다. 하늘이 보우하셨어.”

    “···”

    “아니지, 아니구나. 예판.”

    얼마 전, 예조판서로 영전한 신수영(愼守英)이 고개를 조아렸다.

    사적으로는 신수근의 아우이기도 했다.

    “예, 전하.”

    “내 도주에게 친서를 전해야겠다.”

    “친서를 말이옵니까?”

    “그래, 친서. 도주의 인품이 참으로 고귀하지 않은가? 도주는 늘 내게 섬의 형편이 곤궁하니 왜관의 거점을 늘려달라 청했었는데 내는 그 청들을 매정히 거절했었다. 한데 지금 보면 충분히 노략질로 하여금 이문을 남길만도 했는데도 아니 그러했다. 얼마나 고귀한 인품이면 이러했겠나? 응당 친서를 써야지.”

    “전하······.”

    쾅!

    “내 오죽하면 이러겠는가! 변방 꼴이 이 지경이었는데도 도주가 아무런 흑심을 품지 않았으니 우습게도 고마운 일이 아니냐!”

    “···”

    “오늘 잡아 올린 생선 대가리가 썩어 들어가지는 않았을 터. 하물며 우수사 채윤문은 감히 폐기할 무기들을 정체도 알 수 없는 왜구들에게 팔아 넘기기까지 했으니 이는 오래된 일일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한단 말이냐?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하냔 말이다!”

    “고정하시옵소서. 전라도에 안핵사로 내려간 좌의정 임사홍의 서계에 의하면 다행이 전라도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 하옵고 경상도 역시 우수사 채윤문을 제외하면······.”

    위로라고 하는 말일 테지만 전혀 위로가 되진 않았다.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문득 이들이 무슨 죄가 있나 싶었다.

    따지고 보면 화가 나는 건 자신 뿐만이 아닐 터였다.

    저들도 화가 날 테지.

    바로 오늘 아침까지 진성대군은 서계를 보내왔다.

    진성대군의 서계가 당도할 때 마다 대신들은 함께 역정을 냈었다.

    역률에 의거해 그들의 식솔까지 참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화가 나는 건 저들도 같을 것이다.

    이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저들을 탓할 것 없었다.

    “후. 과인이 부덕한 소치다. 과인이 부덕한 소치야.”

    “전하······.”

    “오늘은 내 진이 빠져 일체의 정사를 돌볼 수 없겠다. 이만 물러들 가라.”

    축객령과 함께 대신들이 편전을 빠져나가고. 편전에 홀로 남은 융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상선을 불렀다.

    “진성이는 언제쯤 온다더냐?”

    “대군 말씀이시옵니까?”

    끄덕.

    “최소한 안처직에게 인계를 하고서나 오시지 않을는지······.”

    “그리 늦게?”

    “송구하옵니다.”

    “상선.”

    “예.”

    “내 오늘 만큼 답답하고 울화가 치민 적이 근자에 없었는데 오늘은 정말 미칠 듯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는구나.”

    가라앉은 목소리에 상선은 임금의 눈치를 살폈다.

    ‘혹 또 병세가······.’

    불경한 생각에 상선은 고개를 털어 생각을 떨쳐냈다.

    한 두 번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지만 세 번은 아니 된다.

    어찌 털고 일어나셨는데 또 병세가 도지신단 말인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축구를 준비 하오리까?”

    다급한 마음에 상선은 축구를 언급했다.

    임금은 진성대군에게 축구를 배운 뒤, 사냥보다는 축구에 전념하고는 했었다.

    대신들은 오히려 쌍수 들고 환영했다.

    사냥에 비해 소요되는 경비도 전무한 편이고, 무엇보다 사냥과 비교했을 때 운동이 더 된다. 훨씬 활동적인 셈이다.

    임금의 건강을 생각하면 대신들이 축구를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축구를 말씀 아뢴 것인데······.

    잠시 혹해 하던 임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내 미복(외출)을 나가야겠다.”

    “미복을 말이옵니까?”

    “진성은 말하기를 마음 속의 근심, 그러니까 이 심병을 스트레스라 종종 말하곤 했었다. 기억하는가?”

    “예··· 기억하옵니다.”

    “내, 그래서 진성에게 하문한 적이 있다. ‘너는 그 스트레스라는 것이 발병하면 어찌 하느냐?’ 하니 진성이 답하기를 ‘산책을 주로 합니다.’ 답했다.”

    “···”

    “궐에서 산책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내 미복이라도 나가서 산책을 좀 해야겠느니라.”

    임금의 미복이란 지극히 은밀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 초저녁에나 나가시지, 이처럼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미복을 나가시진 않는다.

    때문에 상선은 잠시 망설였다.

    다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채비 하겠사옵니다.”

    ***

    상선 김처선은 두 귀를 틀어막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틀어 막다 못 해 아예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상감마마 해잡순 굴곽탕♫ 중전마마께도 해드신 굴곽탕♪ 상감마마 은혜가 하늘 같더니 성은이 중궁전에도 뻗쳤다네♫ 어허이! 국모께 갖다 드린 굴곽탕이 성은이더냐 사랑이더냐♫ 어허어허이!

    망측하다 못 해 오금이 절로 저려버리는 가락이었다.

    이 망측하다 못 해 오금이 절로 저리는 가락을 저잣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대고 있었다.

    하다못해 누군가 제지하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리 망측하지도 않겠건만······.

    “얼쑤! 잘 헌다, 잘 해!”

    다 큰 어른들이 말리지는 못 할 망정 가락을 흥얼거리면서 추임새까지 넣고 있었다.

    상선의 얼굴이 절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신이 입궐하는대로 각색장 김말손을 불러 내막을 알아보겠사옵니다.”

    분명 이 노래는 수라간에서 흘러 나온 소문을 토대로 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동요가 만들어질 까닭이 없다.

    굴곽탕이라니··· 그것도 저리 노골적으로!

    ‘그리도 주의를 줬건만······.’

    상선의 원망이 김말손에게 뻗쳤다.

    절대 함구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었다.

    단 한 차례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나인들을 통해 말이 새어나갈 수 있으니 수라간에 드나드는 건, 설령 쥐새끼라 할지라도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라 주의를 줬다.

    그런데 어찌······.

    -우리 상감마마 해잡순 굴곽탕♫ 중전마마께도 해드신 굴곽탕······.

    “이놈들!”

    분위기 파악 못 한 아이들이 돌림노래처럼,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자 참다 못 한 상선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잣거리를 가로지르며 흥얼거리던 아이들이 흠칫거리며 멈춰섰다.

    “아니, 코흘리개들이 노래좀 부르는 것 가지구 너무하시네······.”

    한 상인이 상선의 옷차림새 때문에 대놓고 비난하진 못 하더라도 궁시렁거리며 불평을 했다.

    오히려 그 상인의 반응에 상선은 더 열이 뻗쳤다.

    지금 임금의 상태가 어떻단 말인가?

    또 병세가 도지실지도 모를 만큼 위태로운 상······.

    “하하. 그 노래는 어디서 나온 노래이냐?”

    어라?

    상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상선은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계시던 전하께서 안 계셨다.

    한 눈 판 사이, 아이들에게 가셔서 눈높이를 맞추고 노래의 출처를 묻고 계셨다.

    화들짝 놀란 상선이 허둥거리며 융에게 다가갔다.

    “요새 도성에서 유행하고 있는 노래여요.”

    “그래? 가락이 참으로 중독성이 있구나. 어찌 부르는 것이냐?”

    “우리 상감마마 해잡순 굴곽탕~ 중전마마께도 해드신 굴곽탕~ 상감마마 은혜가······.”

    상선의 안색이 파리해진 것도 잠시.

    별안간 임금이 파안대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잘 배웠다.”

    “네. 하면 저흰 이만.”

    배꼽 인사를 올리고 멀어져가는 코흘리개들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상선은, 곧 융을 바라봤다.

    “전하. 어찌 이런 상스러운 노래를······.”

    “내 중궁전에 굴곽탕을 해다 바친 것이 상스럽단 말이냐?”

    “아, 아니. 어찌 소신이 감히 그런 불경한 생각을··· 소신은 그저······.”

    “요 임금 시절 요나라 백성들은 강구요(康衢謠)와 격양가(擊壤歌)를 불렀다. 요 임금의 치세가 태평성대가 아니었다면 어찌 가능했을 일이랴.”

    그건 상선도 잘 알고 있다.

    “하오나 이 노래는 감히 전하와 중전 마마를······.”

    “상선.”

    “예, 전하.”

    “격양가 한 번 읊어보아라.”

    갑작스러운 하명에 당황한 것도 잠시.

    “해뜨면 일찍 나가 논밭 갈고 밤이면 집에 와서 편히 쉬는구나. 우물 파서 물 마시니 걱정없는데 그깟 제왕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 있으랴··· 이옵니다.”

    “꼭 임금의 덕을 칭송하고 강구요처럼 태평성대를 칭송해야만 백성들이 평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더냐.”

    “···”

    “임금의 권위란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이 어찌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가락이 아니겠더냐. 놔두도록 하라.”

    상선은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임금을 힐끗거리자.

    “환궁해야겠다.”

    “벌써 말이옵니까?”

    “어린 백성들도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있는데 내 어찌 한가하게 노다닐 수 있겠는가. 입궐하는대로 병조판서 한사문과 이조판서 이계동을 부르라. 내 경상도 수영의 일로 논해야 할 것이 있다.”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앞장서서 휘적휘적 걷는 임금에 상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래가 그리도 마음에 드신 겐가?’

    ***

    안처직에게 바톤 터치를 하고 며칠간 부산진에 더 머무르며, 안처직에게 완벽히 인수인계를 할 작정이었던 나는 미처 인수인계를 할 새도 없이 말을 달렸다.

    한시가 급했다.

    다른 게 아니라 조정에서 귀경령(歸京令)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얼른 입조해서 경상도의 일을 편전에서 아뢰라는 것이 귀경령의 핵심이었다.

    뭐, 부산진에서 시간을 더 끈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하고··· 솔직히 부정부패를 파헤치는 일은 나보다는 안처직이 더 수완이 있으니 안처직에게 넘기고 나는 일행들과 함께 곧장 한양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도착한 편전.

    내가 한양에 올라오면서 경유한 고을의 수령들에게 듣기로 조정의 분위기가 영 산뜻하지 못 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음.

    그 말은 확실히 맞다.

    음산한 건 아니지만 가을 밤공기처럼 싸늘하달까?

    경상도 수영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들 때문일 테지.

    형님께 괜한 걱정을 끼쳐 드린 것 같아 송구스러운 마음이었는데 그런 마음과 대비되게 형님은 아무런 내색 없이 날 반기셨다.

    “진성아!”

    ···라고 형님이 말씀하시자 난 멈칫했다.

    누차 말하지만 여긴 강녕전이 아니라 편전이다.

    지켜보는 눈들만 수십쌍이 넘는단 소리.

    그런데 진성아라니······.

    나까지 동조해서 네, 형님! 하면 형제가 싸잡아 욕 먹을 것 같아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영 안 돌아가는 머리빡(?)을 굴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불민한 신(臣), 진성대군 이역이 전하의 성명을 어렵사리 봉명하고 마침내 귀국하여 하례드리오니 안강(安康)하셨사옵니까?”

    “하하하. 평안하다마다.”

    “소신이 부산진의 일로 조정을 번거롭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참으로 크옵니다.”

    의례적인 말에 형님은 손사래를 치셨다.

    “아니다. 네 일찍이 발견하지 못 했다면 그 폐해가 결국 썩고 문드러져 외침이 있었을 때, 국란이 크게 생겼을 것이다. 오히려 천만다행한 일이니 어찌 죄를 논한단 말이냐? 아니 그런가?”

    대신들에게 동의를 구하자,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고개 조아리는 대신들을 흐뭇히 돌아보던 형님이 문득 눈을 치켜떴다.

    “대사성?”

    “예, 전하.”

    “대사성은 이견이 있는가 보오. 다들 만장일치로 진성의 공을 칭송하는데 어찌 대답이 없소이다.”

    “아··· 송구하옵니다. 신이 고뿔이 들어······.”

    형님이 쯧쯧. 혀를 찼다.

    “거, 몸도 성치 않은데 성균관의 일을 볼 순 있겠소? 그러니 성균관의 기강이 그 모양이지.”

    대사성 김전이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형님은 역시나 탐탁찮은 표정으로 그를 흘기고는 다시 날 바라봤다. 물론 날 바라볼 때의 표정은, 앞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애틋한?

    흐뭇한?

    뭐가 됐던 복잡미묘하면서도 상기된 표정이셨다.

    “비록 부산진의 일이 달갑지 않은 건 사실이나, 내 아까 이른대로 미리 발견치 못 했다면 외침시 나라가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다만. 일단은 네가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았으니 우울한 일은 논하고 싶지 않구나. 유구국왕께서는 평안하시다더냐?”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리면서 유구국의 일을 형님께 상세히 아뢨다.

    왜구와 조우했다는 부분에선 감탄이, 풍랑을 만났다는 부분에선 탄식이, 불안해하는 선원들에 수신제를 지냈다는 부분에선 탄성이 새어나왔다.

    물론, 형님의 반응은 초지일관 같으셨다.

    “네 공이 이와 같으니 내 어찌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있으랴? 네 청을 한 번 말해보아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