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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76화 (17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76화>

    ***

    한가롭다.

    과연 왜적이 나타났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고요하고 한가하다.

    아, 물론 진짜 왜적이 나타난 건 여러분도 알다시피 아니다.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궁금해서 왜적이 나타났다는 말을 흘리게 한 것 뿐이니까.

    거기에 대해 이종인과 김경조는 성루로 뛰쳐나와 상황을 파악하려 했고, 우수사 채윤문은······.

    “소, 소장은 그저 이 수사(이종인)와 진성이 염려되어······.”

    ···변명으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변명에 불과했다.

    봐라, 얼척이 없었던 건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이종인도 열을 내고 있지 않나.

    “채 수사! 성문을 걸어잠그면 밖의 백성들은 모두 도륙이 나는 걸 모르시오?”

    “아니··· 말하지 않았소이까, 이 수사랑 진성이 염려되는 마음에 그랬다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성이 함락되면 이게 또 출동이 용이하지도 못 하고, 에··· 또 좌우수영의 변장들이 모두 진성에 있는데 왜적들에게 사로잡히기라도 해보시오. 그럼 경상도는 지리멸렬 아니겠소?”

    장수들이 왜적들에게 사로잡히면 확실히 큰 일이다.

    큰 일은 맞는데······.

    그게 성문을 걸어잠그란 부당한 명에 대한 합리화가 되진 못 한다.

    저 말을 이행하려면 최소한 이종인처럼 사태 파악을 했어야 했고, 성 밖에 있는 백성들을 성 안으로 대피시켜야 했다.

    설령, 생각 보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라 백성들을 성 안으로 대피시키지 못 할 것 같다면 최소한 성루에 있는 북이나 종을 울려서 외침을 알려야 했다.

    “변명 같은 건 집어 치우시오!”

    “이, 이 수사···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나는 이 수사가 걱정 되는 마음에 그리 한 건데······.”

    어이가 없는지 이종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이종인을 대신해 김경조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밖에는 안핵사도 있으셨습니까.”

    “아, 안핵사··· 아, 대감. 오, 오해 하지마십시오. 소인은 성문을 걸어잠그라 한 다음에 바로 대감을 뫼셔오려고 했사옵니다.”

    퍽이나.

    채윤문을 일별한 나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할 생각이셨습니까?”

    “그, 그 다음이라시면······.”

    “왜적이 나타났습니다. 우수사는 군관을 시켜 좌수사를 모시게 오게끔 했고 동시에 성문을 걸어잠그라 했지요.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떻게 하려고 했냔 말입니다.”

    “다, 당연히 대감을 뫼시고······.”

    “그것 말고.”

    “하면 어인 말씀이신지······.”

    “왜적을 어떻게 막을 생각이었냐고 묻는 겁니다.”

    눈을 껌뻑거리던 채윤문은 우수영 예하의 지휘관들을 바라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얼른 채비를 갖추고······.”

    “갖추고?”

    “예.”

    “근데 왜 안 갖췄습니까?”

    “시, 시간이······.”

    그래, 여기까진 인정.

    “계속하세요.”

    “그 다음 상황을 알아본 연후에··· 그, 좌수사와 상의를 하고··· 사, 상의를 한 다음에는 이제 또··· 왜적이 상륙을 했다면 큰 일이니, 상륙한 지역으로 군사를······.”

    “동래와 부산진에 나눠서 상륙했다면요?”

    “나, 나눠서 말이옵니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채윤문은 갑자기 등장한 변수에 오류가 났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예. 나눠서.”

    “그러면 이제 다시 좌수사하고 상의를 하고, 또 예하의 지휘관들 의견도 들어보고··· 타당한 게 있으면 따라서 대비하고 몰아내지 않았겠사옵니까?”

    나는 우수사 옆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던 서장관 이열후를 바라봤다.

    “이런 사람도 변장(변방의 장수)에 제수되는 걸 보면 조선에 무관이 없긴 한가 봅니다. 거기, 경덕아.”

    얼결에 이제는 내 수석보좌관이 된 경덕이를 불렀다.

    경덕이는 지휘관들 사이에 쭈뼛거리며 시립해있다가, 내가 부르자 후다닥 뛰어왔다.

    “너가 우수영 맡으면 되겠다. 너가 늘 하던 말 있잖아.”

    “제, 제가요? 무슨 말씀을 스승님께 드렸었지요?”

    “만날 입에 달고 사는 말.”

    “아··· 우리나라 무관들 한심하기 짝이 없어서 동네 활터에서 활쏘는 한량들 시켜다가··· 흡!”

    “왜 말을 하다 말어?”

    싸가지가 바가지에 중2병 만렙인 경덕이도 이 정도 예의는 차릴 줄 아는지, 녀석은 좌우수영 지휘관들의 따가운 눈총에 고개를 수그렸다.

    “이 서장관.”

    “예, 대감.”

    “형님한테 서계 올릴 거니까, 준비하게.”

    “전하를 이르시옵니까?”

    “그래, 형님.”

    어떻게 보면 공적인 자리라 전하라 불러드려야 맞지만 나는 일부로 형님이라 칭했다.

    말이란 건 단순한 의사소통 매개체가 아니다.

    말의 힘이란 게 있고 본인을 과시할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놈들이 지금은 그럭저럭 고개 조아리고 있어도, 언제 날 만만하게 보고 발끈할지도 몰랐다.

    “알겠사옵니다.”

    “아, 그리고. 파발도 하나 띄우자고.”

    “말씀하십시오.”

    “형님께 안 장령(안처직)이랑 사헌부 관원들, 그리고 금부에 도사들이랑 나장들도 좀 보내달라고 하게.”

    “예.”

    안 장령이란 말에 우수영 지휘관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내 명성도 명성이지만 사실 악명 자체는 안처직 씨가 더 심한 편이긴 하거든.

    나는 뭐랄까··· 말로 안 되면 치고 박는 이미지지만, 그런 나와 다르게 안처직 씨는 치고 박고 보는 해결사 쪽의 이미지랄까?

    “고, 공무가 다망한 자, 장령까지 보낼 필요가 있을는지··· 하하.”

    역시 채윤문이다.

    지방에까지 안처직의 악명이 퍼져있는 것 같으니 참 다행이다.

    “내 손으로 당신들 모가지 쳐서 손에 피 묻힐 필요는 없잖아? 서장관!”

    “하명하십시오.”

    “우수영 떨거지들은 당장 하옥시키게.”

    “좌수영 쪽은 어찌 하올까요?”

    “좌수영은 모두 무장해제 시키고 감금 정도?”

    “예.”

    그렇게 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빠질 때다.

    서계도 올려야 하고, 안처직이 오기 전까지 우수영을 감찰해야 했으니까.

    ***

    “우수사.”

    “···예.”

    “하실 말씀 없소?”

    “···”

    나는 채윤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괜찮소, 괜찮아.”

    “감사하······.”

    “이미 예상한 일이니까.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아. 충격이란 게 말이오, 예상 밖의 일을 당했을 때나 충격적인 거지. 충분히 예상한 상태에선 충격이라기 보다는 뭐랄까··· 분노지. 내 예상이 맞았다는 데서 오는 분노.”

    털썩.

    “대, 대감!”

    나는 무릎 꿇은 채윤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직도 역알못이지만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는지는 알 것 같았다.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이다.

    이런 한심한 작자들이 장군입네 거들먹거리고 있었으니··· 아, 조선 쳐들어온 일본 왕이 누구였더라?

    히데요시인가, 노부나가인가?

    아무튼.

    내가 둘 중 한 사람이었어도 조선에 쳐들어왔을 것 같다.

    툭 치면 툭 쓰러질텐데 얼마나 만만해?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준비해 둔 지필묵을 꺼내서 채윤문에게 건넸다.

    지필묵을 받은 채윤문은 이게 무슨 의미냐는 듯 날 다시 바라봤다.

    “써.”

    “어인 말씀이신지······.”

    “당신이랑 같이 해먹은 관련자들. 직책, 이름, 나이, 사는 곳 하나도 빠짐없이 다 써.”

    “대감.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같잖은 구걸에 나는 군관의 칼을 뺏어 들었다.

    “신공이랑 붙어 먹었던데 살려달라?”

    “아니, 그건··· 대감. 제 말씀좀 들어보십시오. 그건 첨사가 이제··· 그, 말을 하다가 군선이 조금 부족하다기에 마침 우수영에 놀고 있는 조운선이 몇 척 있고··· 또, 이제 막 수리를 끝낸 맹선이 하나 있어서······.”

    나는 참을 인자를 되뇌었다.

    신공처럼 목을 쳐버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보시오, 우수사.”

    “···”

    “당신이 한 짓 역적질이야, 알아? 화약을 시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구들한테 넘겨?”

    “그, 그건 소인이 한 짓이 아니옵니다. 첨사가······.”

    “당신은 거들었을 뿐이다?”

    “예! 제 말이 그 말이옵니다. 게, 게다가 그 화약은 오래돼서 왜구들이 사용 하지도 못 했을 것이옵니다.”

    “아 그래? 그럼 전하께 ‘우수사 채윤문은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구족을 멸하십시오.’ 라고 주청드리고 전하께서 내 주청 들어주시면 나는 당신네 집안 멸문지화하는데 아무런 책임도 없겠군? 그저 간청만 드렸을 뿐이니까.”

    “대감······.”

    “지금 단단히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누가 주도를 했냐 안 했냐 묻는 게 아니오. 죽을래 살래 선택지를 준 것도 아니고, 당신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

    채윤문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내가 준 선택지는··· 편히 죽을래 고통 속에 죽을래. 둘 중 하나 택하라는 거요.”

    채윤문이 울상이 되다 못 해 눈물까지 찔끔거렸지만 불쌍하진 않았다.

    다른 게 아니고 저게 시발 악어의 눈물이라니까?

    저 새끼도 신공이랑 똑같은 새끼다.

    오히려 신공보다 더 한 새끼지, 신공은 그나마 밀무역만 했는데 저 새낀 폐기하라는 화약이나 무기를 왜구들한테 넘겼다.

    그것도 울릉도까지 가서.

    그러면서도 죽은 아이 부랄 붙잡는 것도 아니고 이미 뒤진 신공의 짓이라 변명한다.

    오히려 이놈 휘하에 있는 우수영의 만호들은 대부분 괜찮은 상태였다.

    기생들을 불러 계집질(?)을 좀 하긴 했지만 이 시대 관점으로는 그게 흠 잡을 건덕지는 아니다.

    우수영에서 딱 이놈. 이놈만 문제였다. 이 새끼만 아니었으면 우수영 전체가 아마 포상 받았을 텐데, 똥별 상관 둔 게 뭔 죄라고, 참.

    후.

    릴렉스하자.

    괜히 열 내서 좋을 거 하나 없다.

    “쓴다고 만다고?”

    붓을 든 채 우물쭈물하는 채윤문에게 물었다.

    “···쓰겠사옵니다.”

    “한 놈도 빠짐없이. 이 일에 관여한 수령 놈들도, 토박이 놈들도.”

    “···예.”

    ***

    채윤문이 진술한 관련자들은 총 열 아홉 명이었다.

    절반은 고을의 아전들이었고, 또 나머지 절반은 채윤문이 관장차첩(기관의 장이 임명한 관리)을 매관매직해서 군관이 된 군관계자들이었다.

    채윤문이 진술한 바에 의하면 이랬다.

    그는 우연히 신공의 밀무역을 목격하게 된다. 신공은 채윤문에게 이 일을 함구해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백미 300석을 선물하는데, 어마무시한 금액을 한 번에 받은 채윤문은 눈이 획- 하고 돌아가버렸다.

    이게 돈이 되겠다 싶었던 거지.

    신공과 함께 밀무역을 몇 차례 하면서 노하우를 전수받은 채윤문은 하다 보니 간이 커졌다.

    사람이란 게 그렇잖나.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작은 범죄가 익숙해지면 큰 범죄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거.

    한마디로 간땡이가 부은 거지.

    녹이 슬거나 혹은 폐기해야 할 화약들을 폐기 처분 하지 않고 우연히 조우한 왜구들에게 팔았단다. 채윤문 말로는 딱 한 차례 밖에 없었다고는 하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장부들을 비교해보면 한 차례만 있었던 것 같긴 한데, 확실하진 않다.

    어쨌건 간에 이 어마무시한 범죄를 혼자 저질렀을 리는 만무하다.

    상술한대로 각 고을의 아전들을 섭외하거나 우수영에 딸린 아전들을 섭외했다. 군관계자들을 섭외하는 건 되려 더 쉬웠단다.

    관장차첩을 내어주면서 매관매직한 자리의 군관들이 그의 말이라면 껌뻑 죽었다나 뭐라나.

    다 됐고,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채윤문에게 껌뻑 죽은 군관이나 아전 새끼들 모두 진짜 죽게 생겼다는 거지.

    “집행하게.”

    “형을 집행하라!”

    채윤문을 포함한 스무명에 대한 형집행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나는 경상도 전역에 공문 하나를 각 고을들에 돌렸다.

    찔리는 새끼들은 목 찔리기 전에 자수하고 광명찾으라는 자진신고 관련한 공문서였다.

    서경덕이 설마 효과가 있겠냐고 투덜거렸는데 공문서를 돌린 바로 다음날 3건의 자진 신고가 접수됐다.

    한심하다고 해야할지 기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을 무렵.

    바톤 터치할 안처직이 도착했다.

    ***

    “여긴 어딘가?”

    “에··· 이제 막 문경새재를 넘었으니 곧 상주일 것이옵니다.”

    수행원의 말에 안처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대구에는 당도해야 함세. 그래야 내일 저녁 늦게라도 부산진에 도착하지 않겠는가.”

    “염려 마십시오. 저기, 한데 나리.”

    “음?”

    “그 말이 참말이올까요?”

    “그 말이라니?”

    “좌수영의 군기 문제 말이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첨사란 위인이 도주와 내통을 했을 리가 있나 싶어······.”

    “하면 대군께서 거짓 장계라도 꾸며서 올렸단 소린가? 참말일 걸세. 본시 사람이란 감시가 소홀하면 역심도 품는 것이 사람일세. 금수만도 못 한 것들이지. 자, 다들 쉬었는가?”

    “예.”

    “그럼 가세.”

    잠시 쉬던 안처직과 일행들은 다시 말에 올랐다.

    그런데 앞장서야 할 안처직이 가만 있는 게 아닌가?

    뒤따르던 수행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아. 아닐세. 잠깐 귀가 간지러워서. 가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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