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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75화 (17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75화>

    ***

    후, 전(前) 대사헌으로서의 촉이 한 번 쯤은 빗나가길 바랐다.

    내 촉이 무조건 맞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우울한 일이니까.

    그런데 제기랄.

    어째 한 번을 안 빗나가냐?

    그냥 돗자리나 깔까 싶다.

    “어찌 된 영문이냐니까.”

    돗자리고 나발이고.

    나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게 잡으려고 중저음의 목소리를 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왔다.

    개똥이가 이 꼴을 보고 있었어도 목소리가 가라앉을 걸?

    “그게··· 뒤, 뒷간을 간 게 아닐는지······.”

    “여기 뒷간도 있나?”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게 아니라 여긴 산이다.

    “뒷간도 있냐니까!”

    버럭 소리치자 좌수영의 군관 김언동(金諺銅)이 우물쭈물거렸다.

    표정은 마치, “하, 쓰바 저 새끼 때문에······.” 일병 후임 잘못 들어와서 상병한테 갈굼 당하는 이병의 그것과 같았다.

    “송구하옵니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여긴 말했다시피 산이다.

    그리고 삼보승차(?)를 할 정도로 걷기를 싫어하는 내가, 해발 300m는 됨직한 천마산을 올라온 건 봉홧불 때문이었다.

    좌수영으로 가던 중에 경치가 너무 좋아서 주변 풍광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천마산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부산의 지리라곤 1도 모르는 서울 촌놈인 나는 천마산에 봉화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만 나와 함께 온 서경덕이 “봉화가 안 피어오릅니다.”라는 말을 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봉화는 신호체계의 일환이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연기가 1개는 나고 있어야 정상이다. 봉홧둑에서 연기가 1개 나고 있다는 게 이상무, 라는 뜻이니까.

    천마산에 온 건 이것 때문이다.

    나야 할 연기가 안 나서.

    근데 나야 할 연기만 안 나는 게 아니라 아예 봉졸들도 안 보인다.

    “이것들이 어딜갔나······.”

    눈알을 부라리는 내 모습에 지레 겁을 먹은 건지, 함께 따라온 좌수영의 아전은 괜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피러 갔다.

    “경덕아.”

    “예, 스승님.”

    “넌 남아서 여기 봉졸들 오면 좌수영으로 데리고 와라. 할 수 있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경덕이와 석평이를 남기고 그제서야 하산을 했다.

    하산 하는 내내 내 눈치를 살피던 좌수영의 아전은, 마침내 하산을 하자 역시나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천마산 봉졸들이 평소에는 저런 적이 없었는데 참으로 기이합니다. 좌수영에서는 이런 일이 없을 터이니 노여움 푸시옵소서.”

    두시진 후.

    “좌수영은 괜찮을 거라매?”

    “크흠··· 큼큼.”

    이후로 다대포, 축산포, 서생포, 개운포 등등······.

    좌수사의 지휘를 받는 제진들도 살펴봤다.

    살펴본 결과는 한 마디로 요약이 가능했다.

    “차라리 개똥이한테 군권을 맡기지.”

    ***

    “아무리 대군이시라지만 이건 너무한 처사입니다.”

    두모포 만호 조윤침.

    “조 만호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어명을 받아 안핵사라는 돋도보도 못 한 관직에 제수가 되셨다지만 엄밀히 군직이라는 것이 따로 대전에도 실려 있는데 이렇게 함부로 창고를 열어제낀다면 군의 사기가 어찌 되겠사옵니까?”

    서생포 만호 김수년.

    “설마 트집 하나 잡아서 우리 목을 치진 않겠지요?”

    개운포 만호 하신량.

    “목이라니··· 설마.”

    포이포 만호 최간.

    “영감. 확실히 조 만호의 말대로 과한 처사임이 분명합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지금 이리 진성에 모여 있는 사이 외침이 있다면 어찌 외적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무관들을 경시하는 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짓입니다.”

    축산포 만호 전세정(錢世禎).

    “다들 자중들 하시오. 대감께서 그른 일을 하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명을 받잡아 점검을 하시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리들 많소.”

    우후 김경조.

    설왕설래가 오가는 분위기였다.

    좌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종인에게로 모아졌다.

    따가운 눈총들에 이종인은 마지못한 척 입을 열었다.

    “우수영 쪽은 어떻다던가?”

    반색하며 말을 받은 건 개운포 만호 하신량이었다.

    “소장이 아까 안골포 만호 조귀호와 만나 말을 섞어봤사온데 전반적으로 격분한 듯 했사옵니다.”

    “격분?”

    “예. 방금 조 만호가 말한 것처럼 함부로 창고를 열어제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지휘관들을 모조리 진성에 하옥시켰으니 혹여라도 외침이 있다면 그 죄를 피할 길이 없다면서, 대놓고는 아니지만 성토하는 분위기였사옵니다.”

    “흐음.”

    이종인은 너풀거리는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를 보고 하신량이 은근하게 물었다.

    “소장이 우수사를 뵙고 올까요?”

    “뭐, 어쩌려는 겐가?”

    “아니··· 좌수사 영감과 우수사 영감이 합심하셔서 대군께 이 사실을 아뢰면 설마 하니 봉고를 이어나가시겠사옵니까?”

    “아니 될 말입니다, 영감.”

    김경조였다.

    “좌우수영의 불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영감께서 나서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명분이 없는데 어찌 나서시겠사옵니까?”

    “하면 좌우수영 전역을 들쑤시도록 가만 놔둔단 말입니까?”

    “어허, 말을 삼가시게. 들쑤시다니··· 명색이 대군 대감이실세.”

    “잠시 말이 헛나오긴 했습니다만··· 크흠, 어쨌든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트집 하나 잡아서 첨사또처럼 목을 치시려 든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첨사는 대죄를 저질렀네.”

    “그건 모르지요.”

    “어허, 이 사람이 자꾸··· 헛소릴랑 관두시게. 영감, 듣지 마시옵소서.”

    분위기가 점점 과열되던 그때였다.

    “왜구다! 왜구가 나타났다!”

    밖에서 들려오는 뜬금없는 소리에 장내의 인물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김경조와 이종인이었다.

    “왜, 왜구라니 이게 무슨······.”

    “어, 어찌합니까, 영감?”

    갈팡질팡 못 하는 만호들에 이종인은 쯔쯧, 혀를 차고는 방을 나섰다. 그는 가장 먼저 봉홧불을 살폈다. 그 어디에서도 봉홧불을 피어오르고 있지 않았다.

    “이보게.”

    그는 이리저리 뛰어가는 군관 하나를 붙잡았다.

    “예.”

    “외침인가?”

    “그, 그런 듯 하옵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이종인이 방안으로 들어가 여전히 갈팡질팡 못 하는 만호들에 소리쳤다.

    “하 만호는 속히 좌수영에 계실 대감을 뫼셔오고, 조 만호는 부산진 앞바다에 군선들을 배치시키게.”

    “소, 소장은 뭘 하면 되겠사옵니까?”

    축산포 만호 전세정이었다.

    “사태를 파악하고 있다가, 내게 일러주게. 김 만호는 우수사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아뢰도록 하고, 성곽에 가있을 테니 채비를 마치는 대로 나오라 전하게.”

    “예.”

    얼추 지시를 끝마친 이종인은 김경조와 함께 혼비백산하며 뛰어다니는 진성 안 사람들을 가로질러 성루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성루에 올라와서 바라본 바다는, 왜구가 나타났다는 소리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

    좌수영 : 외침시 반격 가능성 80%

    다대포 : 외침시 반격 가능성 30%

    두모포 : 외침시 반격 가능성 25%

    서생포 : 외침시 반격 가능성 25%

    포이포 : 외침시 반격 가능성 20%

    축산포 : 외침시 반격 가능성 15%

    개운포 : 외침시 반격 가능성 10%

    이쯤하면 이게 뭐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감찰한 결과물이다.

    나는 좌수영에 속한 군영들을 감찰하고 각각 점수를 매겼다.

    뭐··· 예컨대 이런거다.

    무기고 상태.

    선박 상태.

    화약 및 화포 상태.

    갑주 상태.

    둔전 상태.

    군기 상태.

    군졸 수효 상태.

    등등?

    각각의 항목에 점수를 매기고 머릿속으로 외침이 있을 때 군사 작전을 벌일 수 있을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그리고 나온 결과치가 저 퍼센티지들이다.

    물론 한 군영을 반나절 사이에 감찰했고 누락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고, 말이 시뮬레이션이지 결국 머릿속으로 돌린 거라 100% 일치 한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장담컨대 오차범위가 크진 않을 거다.

    기껏해야 ±5%쯤?

    그나마 좌수사 이종인이 있는 곳은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다.

    각각의 항목에서 7~100점의 점수가 매겨졌으니까.

    하지만 그 이하의 진영들 상태는 진짜 개판 오분 전이었다.

    반격 가능성이 가장 낮은 포이포.

    나는 정말 놀랐다.

    아니, 놀랐다기 보다는··· 뭐랄까. 경탄을 했달까?

    이런 상태로 안보가 지켜지고 있었다니······.

    각 진영들의 상태가 개판 오분전이라고 해도, 하다못해 봉화가 제대로 돌아간다면 그나마 사정이 나을지도 모른다.

    근데 봉화들도 상태가 개판 오분전이다.

    부산의 모든 봉수대를 돌아보진 않았고 처음에 올라간 천마산을 포함해 네 군데에 더 사람을 보내봤다.

    그러니 총 다섯 군데를 돌아본 셈인데, 개중에 천마산처럼 사람도 없고 연기도 안 피어오르는 곳은 한 곳이었고, 나머지 세 군데는 연기는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불을 지켜야 할 사람이 없거나 잠을 퍼질러 자고 있었다.

    봉수대 상태가 이 정도라면 대규모 외침이 있을 때, 한양에선 정말 몇 날 며칠이고 간에 외침을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죽 한심하면 봉고를 하다, 하다 관뒀겠나.

    이 상태면 하나마나였다.

    좌수영의 상태가 이 정도니 우수영도 비슷하면 비슷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아서 우수영 쪽 감찰도 보류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 딱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사람을 시켜 부산진성으로 보냈다.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거짓 소문(?)을 내고 지휘관들이 어떻게 반응하나 궁금해서 말이다.

    FM대로 행동하자면 지휘관들이 보일 행동은 둘이다.

    3분 내로 뛰쳐나와 상황 파악부터 하기.

    3분 내로 진성의 무기고로 가서 갑주부터 착용하기.

    이게 맞는 거잖나?

    어느 지역에 왜구가 상륙했는지도 모르는데다가, 모든 지휘관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

    섣불리 본인들의 근거지로 향하다간,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으니 일단은 상황파악부터 하는 게 우선이었다.

    설령 상황 파악 하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비무장 상태니 만큼, 무장부터 하는 게 우선이었다.

    “한 사람도 안 나옵니다.”

    “경덕아, 그런 건 나도 알아······.”

    “···예.”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나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였다.

    그렇게 체감상 한 4분 정도 지났을까나?

    좌수사와 우후가 성루로 올라왔다.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나온 게 분명했다. 둘은 성루 위에 있는지라, 그 아래에 내가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왜선이 아니 보이는데······.”

    “동래쪽으로 상륙한 것 아니겠사옵니까?”

    “그럼 큰 일 아닌가.”

    “속히 우수사부터 뫼셔오겠습니다.”

    “그러게.”

    김경조가 뛰쳐나가려고 할 때.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감?”

    넋나간 표정이 마치 “너가 왜 여깄음?”이라고 묻는 것 같았다.

    “왜적 같은 거 안 쳐들어왔으니까, 우수사한테는 안 가도 됩니다.”

    “그게 무슨······.”

    “잠깐만 조용히 계십시다들.”

    두 사람의 입을 막은 나는 기다렸다. 하염없이 기다렸다.

    좌수사 이종인은 진즉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제 우수사 차례다.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을 테니 최소한 우수사는 무장한 상태로, 무장한 지휘관들과 함께 성루에 와야 한다. 분명 그래야 맞는 건데······.

    멀리 군관 하나가 군사 셋을 대동한 채 헐레벌떡 뛰어 왔다.

    물론, 비무장 상태였다.

    “누가 보내서 오는 길인가?”

    “우수사께서 보내셨습니다만······.”

    군관의 어깨 너머를 흘깃거리니 우수사는 안 보인다.

    “우사사가 직접 안 오고 왜 자네가 오는데?”

    “성루에 있는 좌수사를 뫼시고 오고, 성문은 걸어잠그시라고······.”

    “성문을 걸어잠그면 바깥에 백성들은?”

    “그, 그건 소관도 잘······.”

    “···우수사 어딨나.”

    “소, 소관이 뫼시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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