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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74화 (17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74화>

    ***

    강녕전.

    풀벌레 우는 소리만 가득하던 침소에 지등불이 아른거리더니 나지막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독백한 융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음침한 웃음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폭소를 가까스로 억누르려는?

    그의 시선은 병풍처럼 6폭이나 되는 지도에 머물러있었다.

    일전에 숭재에게도 보여준 지도였다.

    그는 지도의 한 곳을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아이 다루듯.

    ‘이곳인가.’

    푸핫.

    갑자기 터져나온 웃음에 융은 신색을 가다듬고, 문 너머를 힐끗거렸다.

    다행히 문차비들이 들은 것 같진 않았다.

    ‘섬이라······.’

    그의 입이 곧 헤벌쭉 벌어졌다.

    지도를 짚고 있는 곳이 유구국이 할양하기로 한 땅인지 확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유구국의 서울이 바로 오른편에 있었고, 교리(이장곤)에게 들은 바가 확실하다면 유구국에 받기로 한 땅은 유구국의 서울에서 동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지도를 들여다보던 융은 안석에 기대 앉았다.

    ‘저긴 어떤 곳일꼬.’

    그는 유구국에 대해 잘 알지 못 했다.

    유구국이 조선과 오래토록 교류한 나라이고, 함께 명을 받느는 제후국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외 자세한 사실은 몰랐다.

    예컨대 풍습이라던가, 기후라던가.

    그저, 《해동제국기》나, 조선인으로서 유구에 표류한 자들이 남긴 글월을 토대로 참고만 할 뿐이었다.

    ‘따뜻한 나라라 했던가.’

    그러다 문득 장곤이 한 말이 떠올랐다.

    장곤은 유구국이 따뜻한 나라라고 표현했다. 기후만 따뜻한 게 아니라 인심 역시도.

    “푸핫!”

    그 사실을 떠올리자 그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황망한 표정과 함께, 다시 한 번 문 너머를 힐끗거렸다.

    문차비들에게 융은 근엄 그 자체였다.

    근엄한 자태를 매일 보여줘도, 이따금 기행을 벌여 체통을 잃을 때가 있는데 실성한 사람 마냥 웃어제끼면 문차비들은 물론, 남녀궁인들에게 위신이 서지 않을 터였다.

    그건 내키지 않는 일이다.

    ‘여기엔 무얼 한다.’

    장곤에 의하면 진성은 이 영토의 소용이 무궁무진하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융은 진성처럼 트인 사고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런진 몰라도, 이 영토가 어떻게 무궁무진한 소용이 닿을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기껏 떠오르는 생각은 농사 정도?

    ‘진성이 고작 농사만 짓고자 땅을 댓가로 파병을 승낙했을 린 없을 테고.’

    유구국과 약조한 할양에 대한 조건은 파병이었다.

    파병 인원도 구체적으로 약조를 했는데 무려 1,000여명이다.

    이번에 진성과 함께 유구국에 보낸 인원이 400명을 상회하니 그 곱절 정도의 인력은 고작이란 생각을 할지 몰라도, 천명을 파병하는 문제와 사백명의 사신단을 파견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후자는 이처럼 외교술로 땅도 얻을 수 있지만, 전자는 장병들의 생사가 걸린 일이니까.

    말이 천여명이지 개중에 살아 돌아올 이들이 얼마나 될지 짐작 할 수도 없었다.

    700명? 800명?

    아니. 절반만 살아 돌아와도 하늘이 보우했구나, 생각할지 몰랐다.

    진성도 이런 사실을 모를 린 없을 터.

    게다가 명의 승인도 받지 않은 파병이니 조정 대신들, 특히 하관들 사이에선 말이 많을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약조를 했으니 뭔가 꿍꿍이가 있긴 할 텐데, 융으로선 알 턱이 없었다.

    ‘뭐, 진성이 돌아오면 알게 될 테지.’

    미리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지금은 이 기쁨을 만끽하기에도 벅차다.

    형님국이라니, 듣기 낯간지로우면서도 싫지만은 않다.

    “전하. 상선이옵니다.”

    “들라.”

    이내 모습을 드러낸 상선은 지도를 힐끗거렸다.

    “아랫것들이 보면 난처할 것이옵니다.”

    “그들이 이게 지도인지, 그림인지 어찌 구분하겠느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선도 처음에 이 지도를 진성대군이 그렸다는 말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대군이 자주 벌이던 기행의 일환처럼, 이번에는 손 가는대로 붓을 놀려 그림을 그리셨구나, 라는 생각 말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게 지도라는 건 감히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다시 보아도 아름다운 지도다. 아니 그러하냐?”

    상선은 지도를 다시 한 번 힐끔거렸다.

    사실 상선이 보기엔, 지도라기 보다는 하얀 백지에 먹을 휘리릭 뿌린 것 같은 그림에 가까웠다.

    아름답고 말고의 감상은 없었다.

    “···예.”

    “그러고 보면 참 진성이와 이장곤의 공이 크다. 유구국과 맺은 약조도 약조지만 둘 모두 하는 일마다 나를 기쁘게 하지 않더냐? 유구국에서의 일화도 들어보면 둘이 아주 콤비가··· 아, 상선은 콤비가 무슨 말인지 모르던가?”

    “신이 학식이 짧아······.”

    “콤비라는 건 서로 죽이 잘 맞는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상선도 나랑 콤비가 참 잘 맞아. 아니 그런가?”

    “성은이 망극할 뿐이옵니다.”

    “아, 한데 어인 일인가?”

    “전하께서 궁고도에 대한 시문이 올라오는대로 가져오라는 전교를 승정원에 내리신 걸로 아옵니다.”

    “그랬지, 벌써 올라왔단 말이냐?”

    “예.”

    안석에 몸을 기대고 있던 융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사이, 상선은 침소를 나가 한뭉텅이의 종이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게 모두 몇 개인가?”

    “예순 두 개이옵니다.”

    “예순 두 개? 내 궁고도를 시제로 하여 시문을 짓게 한 게 바로 오늘의 일인데 벌써 이리 많은 시들이 올라왔단 말인고.”

    “어느 것부터 보여드리오리까?”

    “관리들이 지은 건 안 봐도 뻔하다. 언시(한글시)나 보자꾸나.”

    상선이 종이를 몇 개 골라 서안에 올려놓았다.

    그 수만 어림잡아 마흔 개는 넘어 보였다.

    “아, 하옵고 이건 의 도령께오서 지어 올리신 것이옵니다.”

    의 도령은 다름 아니라 개똥이다.

    개똥의 아비 팔석이 의 씨를 사성받고, 궁중은 물론 사삿집에서도 개똥이를 의 도령이라 부르곤 했다.

    “하핫. 개똥이 녀석은 참으로 귀여운 면이 있다. 날 임금이 아니라 삼촌으로 대하니, 녀석에게는 어명보다 삼촌의 말이 더 무서울 게다. 아니 그러하냐.”

    상선이 작게 웃자, 융은 손을 뻗어 개똥이가 지어올린 시를 펼쳤다.

    제목 : 궁고도

    나는 궁고도가 어딘지 모른다네

    그런데 유구국에 있다고 들었다네

    유구국의 이름은 오키나와라네

    나는 이걸 대감께 들었다네

    아, 나도 궁고도를 가보고 싶다네

    내가 들은 유구국은 여자들이 엄청 예쁘다고 했는데

    딱히 그래서 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고 싶다네

    나중에 장군이 되면 꼭 가야지

    “하하하하.”

    융은 배를 잡고 한참을 웃었다.

    “승정원에 명해 팔석의 집에는 사탕(설탕)1근을 내리라 하라. 아, 그리고 혹 위사들 중에 무예가 특출난 자가 있는가?”

    “특출난 자들이요?”

    “그래. 기마와 활, 또한 병서도 잘 읽고 해석하는 자라야 한다.”

    “알아보겠사옵니다.”

    “알아보고, 개똥이를 훈련시키게끔 하라.”

    “위, 위사를 말이옵니까?”

    “무예 실력이 뛰어난 자에게 강습을 받아야 개똥이가 장군이 돼서 유구국에 가보질 않겠느냐?”

    “아··· 분부 봉행하겠사옵니다.”

    “그래, 그래.”

    상선이 조심스럽게 침소를 빠져나갔다.

    융은 상선이 나간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백성들이 지어 올린 언시를 읽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다음 날.

    팔석의 집을 포함해 임금이 하사하는 설탕을 받은 사람은 도합 아홉명이었다.

    융은 그 비싸다는 설탕까지 하사한 걸로도 모자라, 아홉명의 시인(?)들을 장원이라 표현하고는 이 시들을 책으로 엮어 내도록 했다.

    ***

    살려달라 애걸복걸하던 신공의 목은 가차없이 잘려나갔다.

    나는 그 목을 소금에 잘 절여 부산진성 앞에 효수하도록 했다.

    사실 신체발부수지부모의 개념이 이 시대 사람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현대인 관점에서 봐도 사람의 목을 잘라 장대 높이 효수 하는 건, 잔인할 걸 떠나 아무래도 께름칙한 일이 맞았다.

    괜히 꿈에 나오지는 않을까 뒤숭숭하기도 하고.

    하지만 효수는 단순한 분풀이가 아니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고 일종의 광고를 하는 것이다.

    너희도 이 목 잘린 시체가 될 수 있으니 잘 해라.

    같은?

    어떻게 보면 잔인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잔인한 말이지만 효율적인 게 효수였다.

    의외로 죄책감은 없었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부산진성이다. 때문에 성루에 오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신공의 뒷통수다.

    덩그러니 장대에 꽃힌 머리를 보면 뭔가 속이 메스껍고 죄책감에 시달릴 줄 알았는데, 말했다시피 의외지만서도 죄책감 같은 게 안 느껴졌다.

    그만큼 적응이 됐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었다고, 나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 중에 자기합리화를 했다던가.

    어쨌건 지금 나는 성루에 있다.

    물론, 신공의 뒷통수를 감상하고자 이 성루에 있는 건 아니고.

    “세월좋구만.”

    부산진성으로 하나, 둘 들어오는 좌수영의 지휘관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서로 잡담을 나누면서, 세월 좋게 걸어 들어오고 있다.

    “서장관.”

    “예, 대감.”

    “저 수건 치우라고 하십시오.”

    아무래도 좌수영의 지휘관들은 신공이 처형 됐다는 사실과 그 목이 효수 됐다는 말은 들었어도, 부산진성에 효수됐다는 사실은 듣지 못 한 것 같았다.

    아니면, 어젯밤 비가와서 임시방편으로 머리에 씌워둔 수건 때문에 효수된 머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던가.

    후자 같아서 수건부터 치우라고 지시했다.

    이열후는 내 말을 진성의 군관에게 전했고, 군관은 후다닥- 뛰어나가 효수된 머리에 덮어두었던 수건을 뺐다.

    “이제좀 효과가 있네.”

    그러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던 좌수영의 지휘관들이 멈칫거린 것이다.

    그들은 곧 장대에 걸린 신공의 머리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나는 그들을 마중나갔다.

    “경상좌수영의 수군절도사 이종인(李宗仁)이라 하오.”

    “소인은 우후 김경조(金敬祖)라 하옵니다.”

    선두에 백발이 성성한 인물이 이종인이었고, 그 바로 옆에 있던 인물이 우후 김경조였다.

    둘의 인사를 시작으로, 두모포 만호 조윤침(趙允琛), 서생포 만호 김수년(金水年), 개운포 만호 하신량(河愼梁), 포이포 만호 최간(崔澗), 축산포 만호 전세정(錢世禎) 등이 차례로 고개를 조아렸다.

    “대감께서 어지를 받들어 안핵사에 제수되셨고 이에 소인들을 부산진의 군문으로 모이게 하여, 명을 받잡아 이렇게 걸음 하였소만 이처럼 지휘관이 하루라도 군영을 비우는 것은 온당치 못 한 일임을 아셨으면 하오.”

    와우.

    좌수사 이종인은 불편한 심기를 한껏 드러냈다.

    아마, 내가 탐탁지 않았겠지.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꼴도 여간 꼴보기 싫은 게 아닌데, 군사의 군자도 모르는 애송이 따위가 좌수영의 지휘관들을 모조리 불러들였으니까.

    아, 이들을 불러들인 거?

    봉고(감찰) 때문이다.

    좌수영의 수군영들을 봉고하려는데 아무래도 인력이 모자라다.

    내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홍길동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니 임시방편으로 혐의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래서 신공과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죄를 지었을지도 모르는 지휘관들은 모조리 불러 모아놓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A군영을 봉고 하는 동안에 이 소식을 들은 B군영에서 죽자고 달려들어서 증거를 인멸하면 나로선 어찌 할 방도가 없거든.

    물론 나도 안다.

    고위급 지휘관들이 군영을 비우면 전쟁이 발발했을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거.

    하지만 고위급 지휘관들의 부재로 혼선이 빚어질 정도의 대대적인 전쟁은, 적어도 내가 알기론 없다.

    결국 왜구의 침략 같은 소, 중규모(?)의 국지전 정도일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고위급 지휘관의 부재로 국지전 정도도 승리하지 못 한다면, 지휘관이 있건 말건 지지 않겠나?

    관리가 잘 된 수군영이라면 대규모의 외침이 아닌 이상 잘 방비를 할 거라 믿는다.

    뭐, 지금 중요한 건 내 믿음과는 별개로 좌수사께서는 이 일을 굉장히 불편하게끔 느끼고 있는 사실이란 거지만.

    “봉고를 감행하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첨사요?”

    내 말에 작게 침음한 좌수사는 장대에 걸린 머리를 가리켰다.

    “첨사가 아니라 대역죄인이지요.”

    대답은 서장관 이열후가 대신했다.

    “누구인가?”

    “인사가 늦었사옵니다. 소인은 안핵사를 뫼시고 있는 예문관 봉교 이열후라 합니다.”

    “흐음.”

    “자자, 지금은 한가롭게 인사나 나눌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들은 엄연히 혐의가 있는 용의자들이라고 볼 수가 있었다.

    뭐, 따지고 보면 아직 혐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조사를 해봐야 아는 거지만··· 어쨌든 용의자들이란 건 맞다.

    경상좌우수영에 대한 전수조사가 떨어졌고, 증거 인멸을 막기 위해 불러 모은 거니까.

    수사관과 용의자의 관계에선 괜히 말 섞어서 친해질 필요가 없다.

    수사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서장관.”

    “예, 대감.”

    “모두 안으로 뫼시게.”

    “그리하겠사옵니다.”

    “아,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나는 좌수사 이종인과 만호들을 흘겼다.

    “정중하게 모시되 군사들로 하여금 엄히 지키게 하게. 잡인의 출입은 금하도록 하고, 혹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원옥에 하옥하게. 알겠는가?”

    이열후가 불쾌하다는 뜻을 표정으로 한껏 드러내는 지휘관들에 난감해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알겠사옵니다.”

    “우수영의 지휘관들은 한시진 후 쯤에 도착할 테니, 도착하면 그들 역시 정중하게 모시되 엄히 지키고.”

    “예.”

    자,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는 용의자들은 모두 잡아들였다.

    이제 남은 건 대대적인 수사다.

    나는 가장 먼저 좌수영으로 향했다.

    부산진에서의 거리가 가깝기도 하지만, 가장 스케일 크게 해먹을 자리는 아무래도 만호나 첨사 같은 떨거지(?)들 보다는 그들을 사령하는 좌수사가 아니겠나.

    그런 의미에서 수사 시작이다.

    '걸리면 다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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