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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73화 (17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73화>

    ***

    부산진성 앞.

    백성들이 진성 앞에 진을 쳤다.

    적어도 지방에서 만큼은 흔히 볼 수 없는 참형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쉬이 볼 수 없는 참형에, 심지어는 그 대상자가 부산진 첨사 신공이다.

    고위직의 참형이 있는 날이었으니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신공에 대한 참형 선고를 거둘까 말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내 손에 피 묻히기 싫다고 역적들을 수수방관해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내 손에 피를 묻힌다는 건, 인간으로서는 당연히 꺼려지는 일이지만 그게 신공을 살려줄 명분이 될 순 없었다.

    그는 죽을 죄를 지은 죄인에 불과하고, 나는 죽을 죄를 저지른 죄인에 대해 사형 선고를 내린 것에 불과하니까.

    그를 살려주고 말고의 문제는 이미 내 권한 밖의 일이니까.

    “훠이! 길을 비켜라! 안핵사 대감 행차시다!”

    부산진 군관이 가갈을 하자 모세의 기적처럼 인파가 좌우로 갈라졌다.

    부복한 백성들 사이를 가로지른 나는 진성의 성루에 올랐다.

    “몇 명이나 모인 겁니까?”

    “어림잡아도 수천명은 모였사옵니다.”

    어마무시한 인파가 모여 들었다.

    실제로 성루에서 내려다보는 인파는 까마득한 느낌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확성기가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라는 배부른 생각은 뒤로한 채 나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하니 주상전하께서는 본관을 친히 안핵사로 제수하셨소. 그리하여 마침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라 명하셨으니 이는 어인 영문이겠소? 그만큼 전하께서 군사들의 문란함을 엄히 다스리고자 하는 의지가 계셨기 때문이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오. 내 짧은 학식과 사고(思考)로 생각건대 무관이란 무엇이며, 군사란 무엇이오. 무릇 전쟁이란 우리가 하기 싫다고 해서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이들이 비로소 소용에 닿을 때는 외침이 있을 때요. 하지만 외침이 없고 평화가 지속된다고 하여 안도하고, 안심하고, 방심한다면 군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오. 하지만 부산진 첨사 신공을 보시오. 오만하게 군사를 부렸고 방심하여 부산진의 경계를 소홀히 했소이다. 이는 부산진을 외적에 잘 대비하고, 혹 외침이 있다면 잘 수호하여 백성을 평안케 하라는 어지에 반하는 것이니 어찌 역적이 아니오? 이에 주상전하를 대리하게 된 본관은 군령을 해이하게 만들고, 사익을 위해 군사를 동원하고, 어명을 어긴 부산진 첨사 신공을 참하여 그 죄를 물을 것이오.”

    참한다는 말에 도처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죄인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더냐?”

    “사, 살려주십시오, 대감··· 아, 아니. 그걸 떠나 어찌 이게 참형에 처할 정도의 중죄란 말이옵니까. 이보다 더한 자들도 있었사온데, 어찌 소인만······.”

    “걱정마시오, 뒤 따라갈 놈들 몇몇 보이니까.”

    지금은 부산진 일대만 봉고(감찰)했지만 형님이 내리신 어명은 경상좌우도의 전역을 봉고하라는 것이었다.

    아직 소문이라 단정 짓긴 이르지만, 적어도 소문에 의하면 저 새끼 뒤 따라갈 놈들이 몇몇 보인다.

    “대, 대감!”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나는 이열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형을 집행하라!”

    둥! 둥! 둥!

    성루 위, 고수(鼓手)들이 북을 울려댔다.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다. 백성들은 함성과 환호를 내질렀고, 겁에 질린 신공은 오줌을 지렸다.

    내 손으로 한 짓이지만 차마 산 사람 모가지가 잘려나가는 꼴은 맨정신으로 못 볼 것 같았다.

    결국, 뒷수습은 이열후에게 부탁한 나는 성루를 내려왔다.

    ***

    「유구국 중산왕 상진(尙眞)이 삼가 조선 국왕 전하께 아룁니다. ···하므로, 삼가 생각하옵건대 의를 맺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인데, 때때로 상대가 원하지도 않음에도 함께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맹세를 강요하는 일이 고사에 분명하게 적혀 있으니 이 어찌 아름다운 광경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제가 보건대 귀국은 인자로은 은혜와 덕으로 의를 맺고자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국왕 전하께서 도모하는 정치는, 그 성덕이 탕탕(蕩蕩)하고 평평하니 실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 인간임을 떠나 소제(小弟) 또한 일국을 다스리고 있는 국왕이니 국왕 전하의 정치가 얼마나 행하기 어려운지 짐작 할 수 있으며, 이를 이루신 전하께서 얼마나 인과 덕과 지혜를 겸비하신지 알 수 있겠습니다. ···하여, 또 생각해보면 지금 두 국가는 명을 상국으로 모시고 있고 부모의 나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배에서 난 형제라면 어찌 우열이 없을 수 있겠으며, 우열이 있다면 응당 조선국이 형님국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방금 소제라 칭한 건 그런 까닭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건대, 중산국의 선군들은 조선을 형님국으로 받들어모셨습니다. 하지만 바닷길이 험란하고 사이(사방의 오랑캐)들 덕에 배알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고, 최근에는 왜구들이 준동하여 뱃길을 막아버리니 사신을 보내고 싶은 심정만 가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국왕 전하께서 왜구를 깨끗이 일소하고자 마음 먹으셨으니, 어찌 국왕전하의 어지를 거역하겠습니까? 이에 국서를 올리옵고, 보여주신 후의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예물을 보냅니다. 봉헌(奉獻)하는 예물은 후추 350근, 상아 10매(枚), 심황(울금) 150근, 사탕(설당) 40근, 사어피(상어가죽) 200장, 오목 100근, 남만제 유리 2개, 소목(蘇木), 200근, 앵가(앵무새) 두 쌍, 조와국(인도네시아 자바)의 공작(孔雀) 1쌍, 천축백호주(天竺百花酒) 1정을 바칩니다. 글을 전람하시면 아시겠습니다만 본국의 토산이란 조선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이를 예물이랍시고 바치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만 성의로서 바칩니다. 부디 조그만한 이 정성을 형편없다 하지 마시옵길 바라오며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편전.

    사람의 인생이란 날씨와 같다.

    흐린 날이 있으면 맑게 갠 날도 있었다.

    융에게 어제까지가 흐린 날이었다면 오늘은 맑게 갠 날이었다.

    감추려 해도, 애써 아닌 척 하려 해도 그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있었다.

    “참으로 후한 보답이 아닌가?”

    유구국왕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예물이라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당장 후추와 설탕만 해도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였고, 사어피와 유리 역시 귀한 물품이었다.

    “그나저나 교리(이장곤)가 참으로 수고가 많았겠구나.”

    “아니옵니다, 전하.”

    “아니라 하지만 내 잘 안다. 대군을 보필하는 일도 여간 어렵지 않았을 텐데 유구국에 가서는 큰 일까지 함께 도모하였으니 어찌 이를 쉬운 일이라 하랴?”

    “최근의 일로 전하께 상심을 안겨 드렸으니 이것이 신의 불충이온데 그저 칭찬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부산에 머물던 장곤은 유구국왕의 선물을 언제까지 부산에 방치 할 수 없다는 진성의 말에 직접 행렬을 이끌고 한양에 돌아왔다.

    그 형 장길이 부산에 남아 있어 찝찝하기 짝이 없었지만 일단은 공무가 우선이었다.

    “장길의 일이 어찌 너의 불찰이랴?”

    “그저 황송할 뿐이옵니다.”

    “됐다. 그 얘기는 차후 현령의 죄가 드러난다면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래, 유구국은 어떠하던가?”

    장곤은 유구국에서 있었던 일화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놨다.

    풍랑을 만났던 일.

    왜구를 만났던 일.

    왜구로 오인을 받았던 일.

    유구국왕을 알현한 일.

    그곳의 풍습을 헤아리지 못 해 오해가 생긴 일.

    그곳 음식을 먹다가 토를 한 일.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섬주민들과의 일.

    등등.

    “이야기로만 들어도 실로 아찔한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먼 바다까지 나가 고생이 많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데 내 궁금한 게 하나 있느니라.”

    “하문하소서.”

    “내 진성이 동래와 좌수영의 일로 장계를 보내오기 전에 올려보냈던 서계(보고서)를 잘 읽어보았다. 한데 서계에 의하면 유구국이 땅을 할양했다던데 이는 무슨 말인가?”

    융의 질문에 대소신료들의 이목이 장곤에게 집중됐다.

    사실 서계란 게 보고서의 일종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좀 경우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융이 받아본 건 약식 보고서였다.

    부산진 첨사 신공의 일이 없었더라면 부산포에 입항하는 즉시 짐을 내리고 제대로 된 서계를 작성했겠지만, 신공의 일로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 이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정에서는 유구국의 일을 캐묻기 보다 동래와 부산진을 포함한 좌수영의 근황만 물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경상좌수영은 왜구의 출현시 가장 먼저 남해를 수호해야 할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부패하다 못 해 아예 썩어 문드러져있었으니 조정의 입장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유구국이 아니라 좌수영의 일일 수 밖에 없었다.

    융이 약식 보고서만 받아본 건 그 때문이었다.

    “대군께서 서계를 어떤 형식으로 올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유구국왕께서 땅을 떼어주셨사옵니다.”

    편전이 시끌벅쩍해졌다. 손을 들어올려 소란을 잠재운 융이 물었다.

    “땅을 떼어줬다는 건 무슨 의미인고?”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대군께오서 서계에 유구국과의 약조는 첨부하지 않은 것으로 아옵니다.”

    “서계에 유구국과 몇 개의 약조를 맺었다는 건 언급했다만 교리의 말처럼 자세히 첨부하진 않았다. 알다시피 좌수영의 일이 갑자기 터지지 않았더냐.”

    “이건 대군께오서 신에게 주신 약조의 원본이옵니다.”

    융은 황급히 장곤이 건네는 원본을 건네 받았다.

    1. 조선국은 내년 봄까지······.

    2. 조선국의 도움으로 미야코와 왜구들을 억제하는 즉시······.

    3. 두 나라는 기별 없이 상선을 보내 상행위를······.

    .

    .

    .

    총 11개조의 약조였다.

    “이게 사실이란 말이렷다?”

    “신이 어찌 거짓을 아뢰오리까, 사실이옵니다.”

    융의 입이 헤벌쭉, 귀에 걸렸다.

    그의 시선은 2조항에 머물러 있었다.

    2. 조선국의 도움으로 미야코와 왜구들을 억제하는 즉시 유구국은 미야코 제도 일대를 조선국에 할양한다. 유구국은 이에 대한 이의제기를 영구적으로 포기하며, 미야코 제도 일대에 대한 권리 역시 영구적으로 포기함을 본 조약에 명시한다.

    “자, 자세히 좀, 자세히 좀 말해보라. 땅을 할양하겠다는 말은 단어 그대로 주겠다는 말인데··· 맞는가?”

    “예.”

    “하, 하면 이 섬은 어떤 섬인고?”

    “신도 그 섬에 대해 잘 알지는 못 하오나 섬에는 중종근 씨(氏)라는 호족이 다스리고 있사옵니다.”

    “이름인가, 성인가?”

    “성이 중종근이옵니다.”

    “그래, 계속하라.”

    “이 중종근이란 호족이 다스리고는 있사온데 간사하기 짝이 없고, 또 교활하여 몇 년 전까지는 유구국왕에게 붙어 아첨을 하며 평화를 약조했는데 최근에 세력이 조금 늘어나니 그새 말을 바꾸고 반기를 들었사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있나. 그래서?”

    “유구국왕의 입장에서는 처치곤란한 호족이라 할 수 있사온데, 최근에는 또 왜구와 결탁까지 하여 더더욱 처치가 곤란해진 상황이었사옵니다.”

    “왜구와 결탁까지?”

    “예. 왜구와 결탁한 중종근 씨가 이제는 섬을 벗어나 왜구처럼 노략질을 하려 하고, 또 유구국이 파견하는 상선들만 노려 약탈을 자행하고 있으니 유구국왕 입장에선 난처하기 짝이 없었사온데 이 호족을 치자니 왜구와 걱정되고, 왜구를 치자니 이 호족이 걱정되어 이도저도 못 하는 상황이었사옵니다.”

    “그렇겠지.”

    “하여 대군께서 이 사실을 간파하시고 유구국 혼자의 힘으로는 두 세력을 감당하기 버거울 테니, 조선 측에서 군대를 파병하여 두 세력을 몰아내고자 제안했사옵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얻은 것이 바로 이 땅이옵니다.”

    “천여명을 파병한다는 건 그런 영문이렷다?”

    “예.”

    융은 허, 짧게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어좌에 축 늘어졌다.

    실망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개국이래 조선은 영토를 늘리고자 노력했다. 세종대왕께서 사군과 육진을 개척하시고자 함도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사군육진 같은 경우는 여진족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한데 땅을 얻었다.

    대왕께서도 하시지 못 한 일을 해낸 셈이다.

    심지어 땅을 얻기 위한 어떠한 충돌도 없었다. 그저, 외교술 한 번으로 땅을 얻은 것이다.

    융으로서는 맥이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선왕들이 그토록 노력하셨던 일을, 입 한 번 놀려서 이룩한 게 아닌가?

    물론, 땅을 얻기 위한 단서가 붙긴 했다. 또, 제주와도 거리가 멀어서 다스리기 어려운 땅이었다. 하지만 영토가 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다, 다른 약조들도 설명을 해보거라.”

    장곤이 곧 다른 조항들에 대한 부가 설명도 곁들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

    융이 가장 놀란 건 10조항이었다.

    제주와 나하에 대사를 두어 사무를 돌보게 한다니.

    처음에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장곤의 설명을 듣고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양국의 우의가 더 깊어질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모든 조항에 대한 설명을 들은 융.

    역시나, 그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나갔다.

    아니, 번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파병이라 함은 군대를 보내는 것을 뜻하온데 유구국까지 천여명이나 되는 군사를 파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사옵니다.”

    빠직-.

    “대사성은 매사에 부정적이로다.”

    “국가의 일을 낙관하며 돌볼 순 없는 법이옵니다.”

    “비관만 해서도 안 된다.”

    “지금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르오나 그 군대를······.”

    융은 손을 휘- 내저었다.

    “대사성은 이 경사스러운 날에도 꼭 잔소리를 늘어놓아야겠는가?”

    “···”

    “내 오늘은 이 기쁨을 만끽하고 싶으니 더 이상 토 달지 말라.”

    경사스러운 날이란 건 김전도 동의하는지, 그는 이견없이 물러났다.

    김전을 마뜩찮은 눈초리로 흘긴 융이 입을 열었다.

    “내 말한대로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다. 수고한 이장곤에게는 유구국왕이 선물한 천축백호주와 사탕을 하사할 것이고, 조정대신들은 지금 유구국과의 일에 공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으니 따로 하사 할 건 없겠다. 다만.”

    “···”

    “이번에 유구국 측에서 할양한 궁고도(宮古島)를 주제로 특출난 시를 지어 올린 자에게는 사탕을 하사할 것이다. 또, 이 기쁨을 나만 만끽 할 순 없겠도다. 백성들 역시 함께 느껴야 할 것이니 유구국과의 일을 만백성이 알게 하고, 마찬가지로 궁고도를 주제로 특출난 시를 지어 올린 자에게는 공사천을 막론하고 사탕을 하사할 것이니라. 백성들의 시는 한시로 아니 지어도 되고, 언문으로 지어도 되니 이 역시 알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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