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72화 (17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72화>

    ***

    “···하므로 지금 과인은 눈물이 앞을 가린다. 군사란 진실로 위험을 대비해 키우는 자들이다. 그런데 위험을 대비하기는커녕 방조 하였으니 그 죄가 대역죄에 버금가지 않겠는가. 과인이 변방의 일을 상고해보건대, 변방의 장수들은 티끌 잘못을 저질러도 체차(관직이 갈림)되거나 혹 패전한다면 그 책임을 물어 파직 혹은 좌천이 되고, 경우가 심각할 때는 참형으로 엄히 다스린다. 이는 그만큼 변경의 군사란 한시도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부산과 동래의 일을 보라. 참담하여 말을 이을 수 없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법에 안핵(按覈)을 겸하는 관리는 없다. 하지만 좌수영의 일이 이처럼 화급하니 전례만 운운한다면 어찌 국법의 지엄함을 바로 세울 수 있겠으며, 군사를 문란케 한 대역죄인들을 조사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진성대군 이역에게는 경상좌우도의 군사를 징병 할 수 있는 병부를 발행하고, 안핵사에 제수한다. 지금 경관(서울의 관리)을 파견한다면 죄인들이 죄를 인멸 할 수 있고, 증인을 살인멸구시킬 우려가 있으니 경은 이 어지를 받드는 즉시 조사에 착수하여 한사람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게 할지어며, 또한 경상좌우도의 군령을 바로 세우라. 이에 안핵사에 제수한 것이니 경상좌우도의 수령 모두가 알게 할지어며, 안핵사의 수사를 방해 혹은 협조하지 않는 자들은 경의 재량에 따라 벌하라. 재량에 따라 참해도 좋다.”

    선전관의 낭독에 나는 넙죽 부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자, 윤허까지 받았다.

    아, 내가 윤허를 받은 건 혹시나 나올 뒷말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이번 사건은 스케일이 너무 컸다.

    일반적인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나 똥별들의 비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일대 진장들과 수령들을 족치면 월권 운운하는 패배자들이 있을 수도 있었고, 심할 경우에는 이거 또 임금이 진성대군한테 밀지 전해주고 숙청 일으키는 거 아니냐는 뒷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나는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고 싶었다.

    그런 뒷말이 나오지 않게끔.

    그래서 장계를 올려보냈고, 그 답은 보다시피 어마무시한 권한이 주어졌다.

    안핵사라는 듣도보도 못 한 임시관직이 주어졌고, 경상좌우도의 병사를 징발 할 수 있는 발병권까지 주어졌다. 또 수령들이 협조를 방해하는 정도가 심할 경우엔 참해도 좋다는 단서까지 달렸다.

    발병부까지는 이해하지만 즉참권은 의외의 권한이었다.

    이건 솔직히 발병부 보다 더한 권리다.

    형님이 마음을 단단히 먹으셨다는 반증에 가까웠다.

    아닌 게 아니라, 즉참권은 어마무시한 권한이다.

    원칙적인 절차를 밞는다면 감찰어사들이 가렴주구를 일삼은 수령들을 봉고파직 시킬 순 있어도 참할 순 없다.

    그건 아무리 극악무도한 대죄를 저지른 수령일지라도 같다.

    수백명의 백성을 살인했어도 수령을 즉참할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무조건 서울로 압송시켜 조사를 받게해야 했다. 그게 조선의 법의 근간이다.

    근데 즉참할 권한을 주셨다.

    이 사건을 전시라 규정하신 셈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똥별들이 국가 안보를 담보로 잇속을 챙긴 거잖아?

    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긴 하다.

    “서계(보고서)는 향리나 수령들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 써서 올리시거나 서장관에게 맡기시라 하시옵니다.”

    선전관이 어지를 갈무리하며 다가왔다.

    “어지의 내용이 파격적인데 조정에서 반대는 없었소?”

    전화가 있으면 바로 전화해서 물어볼텐데 전화가 없다.

    그런고로.

    한양에서 곧장 내려온 선전관에게 물어보는 것 말고는 한양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선전관에게 묻자 자신을 황동정이라고 밝힌 선전관은 혀를 내둘렀다.

    “이를 말입니까. 대사성께선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라면서 석고를 청하셨사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어지가 내려왔다는 건?”

    “다수의 조정대신들은 찬동했사옵니다.”

    임금의 정사에 대신의 지지를 받냐, 안 받냐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걸 대사헌 짓 1년 해먹으면서 깨닫게 됐다.

    어쨌건 조정대신들 절대다수의 지지는 받고 있는 사안이라 하니 뒷말이 나올 리는 없겠다.

    “이는 경상도 군영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의견도 대두되었고, 찬반이 오가다가 결국 전라도에는 좌상대감을 안핵사로 삼아 내려보내셨사옵니다.”

    “좌상대감까지?”

    “예.”

    “흐음. 먼 길 내려왔는데 푹 쉬다 올라가시오.”

    내가 눈짓하자 부산진의 아전 하나가 후다닥 튀어나와 선전관을 모시고 나갔다.

    “자, 그럼.”

    윤허까지 떨어졌다.

    망설일 게 뭐 있어?

    나는 당장 죄인들을 구금해둔 원옥(감옥)으로 향했다. 원옥의 입구에 들어서자 벌써부터 시끌벅쩍했다.

    “내 그대에게 내보인 의리에 대한 보답이 결국 배신이었단 말이냐! 입이 있다면 말을 해보아라, 이놈!”

    “흥, 그럼 다 같이 뒤지잔 말씀이시오?”

    “이, 이시오? 허! 이제 막나가자는 겐가?”

    “첨사도 귀가 있으면 진성대군의 악명을 들었을 터. 대사헌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탐관오리란 탐관오리는 모조리 족치고 다녔소. 한데 이번 일이 탐관오리를 족치는 일에만 국한 될 것 같소?”

    “사내대장부의 담이 그리 작아서야··· 하긴. 그러니 앞잡이 마냥 죄를 자복했겠지.”

    “그리 앞날을 내다보질 못 하니 영전을 못 하는 거요, 영전을. 말로만 조만간 수사(수군절도사)로 영전할 거라 하지, 실상 만년첨사 아니시오?”

    “뭐! 마, 만년첨사!”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보시오. 내 첨사와의 정이 있어 지금 이런 조언이라도 해주는 건데··· 우릴 왜 사흘간이나 이 원옥에 방치한 것 같소?”

    “봉고(감찰)를 한 거겠지.”

    “내 이런 양반에게 아첨이나 하고 있었으니··· 제기랄.”

    “혀, 현령. 첨사의 말씀은 개의치 말고 사흘간 방치한 까닭이 뭔지 말씀이나 해보시게. 뭣 때문인 것 같나?”

    “만호도 첨사랑 같이 뒈지기 싫으면 조사에 협조하는 게 좋을 거요. 대군께서 장계를 올려보낸 게 아니면 사흘간 우릴 방치할 까닭이 무에 있겠소?”

    “자, 장계? 봉고에 대한 윤허를 받는단 말인가?”

    “만호도 대가리가 그리 안 돌아가오?”

    “크흠. 내 대가리가 안 돌아가니 이리 자네 조언이 간절한 것 아니겠나, 자네 생각이 어떤지 얼른 귀띔좀 해주시게.”

    “봉고에 대한 윤허만 받으려고 우릴 사흘간 방치했겠소? 경상우도는 몰라도 최소한 좌도는 끝장이오, 끝장!”

    “그게 무슨 말인가, 알아 듣게 좀 설명을 해보시게.”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로 구금을 해둘 걸 그랬나?

    서로 입을 맞출 우려가 있다는 서장관 이열후의 의견보다, 이장길이가 원옥 내부에서 최대한 겁을 줘서 다른 똥별 새끼들이 수사에 협조하게 할 수 있다는 장곤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한 방에 집어넣은 거였는데 말이다.

    뭐, 어쨌든 이제 끝이란 건 맞다.

    “이야. 잔대가리는 잘들 돌아가는데 상황 파악하는 능력은 현령보다 한참 밑이시네들.”

    “대, 대감.”

    날 부르는 첨사 신공을 지나쳐 동래현령 이장길에게 다가갔다.

    “우리 현령은 상황 파악도 잘 하시고, 잔대가리도 잘 굴리시는데 그 능력을 좋은데 좀 쓰시지 왜 허튼데 재능을 낭비하셨어?”

    방금 전까지 굳은 표정이었던 이장길은 어디갔는지, 아첨형 미소를 잔뜩 머금는다. 이 사람은 딱 수완 좋은 간신 같다.

    “헤헤, 송구하옵니다. 어떻게, 일은 잘 하시고 계신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어지를 내보였다.

    “이게 뭔지 아시겠지?”

    “어지 아니옵니까?”

    “어지지. 근데 보통 어지가 아냐.”

    저벅저벅, 걸어나간 나는 첨사 신공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신공에게 역시 어지를 내보였다.

    “뭐라고 써있는지 아시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사옵니다.”

    “중요한 부분만 읽어드릴게. 자, ‘경상좌우도의 수령 모두가 알게 할지어며 안핵사의 수사를 방해 혹은 협조하지 않는 자들은 경의 재량에 따라 벌하라. 재량에 따라 참해도 좋다’ 라고 써있소.”

    이제 조금 상황 파악이 되는지 신공의 표정이 울상이 된다.

    “한마디로, 내가 지금 당신들 모가지 쳐도 뒷말이라던가, 위험에 빠질 일은 없다는 거지.”

    “대, 대감! 사, 살려주시옵소서. 소, 소인에게는 봉양해야할 부모님과 조부모님과 사촌과 조카와······.”

    “내가 죽이긴 왜 죽입니까.”

    “가, 감사하옵······.”

    “근데.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다르지. ”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사헌부 1년이면 탐관오리가 된다.

    아, 정말로 뇌물을 받아 쳐먹었단 건 아니다. 그만큼 탐관오리들의 생리와 꼼수를 빠삭하게 알게 된다는 뜻이다.

    비밀 장부는 어떻게 작성하는지.

    뇌물은 어떻게 받아쳐먹는지.

    받아쳐먹은 뇌물로는 또 누구한테 상납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비리를 저지르는지.

    아전들과는 어떻게 짝짜꿍하는지.

    증거 인멸은 어떻게 하는지.

    꼬리는 어떻게 잘라내는지.

    등등?

    근데 그보다 확실한 건 관려자들의 실토다.

    관련자들이 본인들이 저지른 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실토하면, 일은 당연히 쉬워질 수 밖에 없다.

    굳이 엄한 사람들 부려가면서 숨겨놓은 장부 수색하려고 진 뺄 필요도 없고, 숨겨놓은 재산들 어떻게 찾나 골몰할 필요도 없고, 받아쳐먹은 뇌물 또 누구한테 상납했는지 고신해서 입 열게 할 필요도 없고, 증거를 찾으러 다닐 필요도 없고.

    물론, 물론 가해자들이라 본인들에게 유리하게끔 진술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지금 상황에선 얘기가 다르다.

    “진실되게 협조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본인들 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수사를 돕는 사람들은 살려줍니다. 근데··· 도와주는 척 하면서 증거를 인멸하려 든다거나, 본인한테 불리한 사건의 진상을 은폐 혹은 축소시키려 든다면.”

    “···”

    “가족들까지 힘들게 만드는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까들?”

    대가리가 있다면 가족들까지 연좌된다는 협박이라는 것쯤은 알아 들었겠지.

    “자, 그럼. 자수하고 광명 찾을랍니까, 아니면 끝까지 시치미 떼다가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모가지 걸리시겠습니까?”

    ***

    나는 되도록 이 사람들이 자수하고 광명 찾는 것 보다 끝까지 시치미 떼다가 광화문이나 어디 운종가에서 효수되는 걸 바랐다.

    아, 물론 내가 잔혹한 성격이 있어서 그런 광경 보길 바라서는 아니다.

    내가 무슨 루마니아의 블라드 3세도 아니고 목 잘린 시체는 봐서 뭐하게?

    난 고어 영화도 제대로 못 보던 사람이다.

    다만 이번 사건은 21세기에서 판을 치던 ‘생계형 비리’와는 달랐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왜구의 침략이 있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내가 대마도주를 어쩌면 보살일지 모른다고 우스개 소리로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 대마도와 조선의 관계가 우호적인 편이라 망정이지, 적대적이었다면?

    누차 말하지만 부산은 이미 함락이다.

    이 일대 백성 모두가 왜구한테 살해 당하거나 겁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부산만 함락됐겠어?

    이 새끼들 군기 보면 경상도 전체가 함락됐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런 일이 없어서 망정인 거지 있었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근데 그런 일이 생겼었다고 가정을 해보자.

    효수 되는 걸 바라는 건 지극히 정상 아닐까 싶은데 애석하게도(?) 자수를 했다.

    물론 네 사람 모두의 자수를 받은 건 아니었다.

    네 사람 중에 비교적 죄가 가벼운 동래현령 이장길과, 이 네 사람 중에 가담을 제일 늦게해서 죄 역시 비교적 가벼운 다대포 만호 진세걸의 자수만 받았다.

    첨사 신공과 해운포 만호 하현제는 자수 한다고 울고 불고 떼쓰는 거, 마다했다.

    최소한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사법거래를 약속했는데, 그놈들은 살려주기가 싫었거든.

    그리고 다시 사흘이 흘렀다.

    봉고 결과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이 일에 연루된 사람들만 잔챙이를 제외하고 열 네명이었다.

    여죄들?

    식스센스급의 반전 없이 딱 내가 예상하던 시나리오의 죄들이었다.

    탐관오리들이 전형인 수탈.

    세금 착복.

    송사 청탁.

    하지만 가장 심각했던 건 돈 받고 군역을 면제시켜준 일이었다.

    예를 들자면 해운포의 수군이 100명이어야 한다. 이게 정원인 셈이다.

    장부상으론 100명이 맞는데 실제로 사열을 시켜보면 100에 30도 안 나온다.

    30명 중에서도 15명은 돈 받고 대신 입대한 대립군들이고 다시 15명은 돈 없어서 울며겨자 먹기로 끌려온 사람들이다.

    나머지 70명?

    장부에는 군역을 서는 것으로 올라갔지만 실질적으로는 돈 내고 입대를 면제 받은 사람들이었다.

    나라에서 해당 지역의 정원을 정했다는 건 최소한의 수비 인력이 이 정도란 뜻일 텐데, 정원의 30%도 그 지역을 안 지키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마저도 수군들을 밀수에 동원시켰으니 따지고 본다면 20%의 인원만이 해당 지역을 수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실 탐관오리들이 보이는 전형이고, 군역을 돈 주고 면제 받는 일도 공공연한 사실이라 ‘관행’으로 치부하고 넘어 갈 수도 있지만 문제는 개좌(출근)였다.

    동래현령 이장길은 그래도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지 그럭저럭 행정 업무는 곧잘 처리 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의 출근 기록은 개판 오분전이었다.

    아, 장부상으로는 365일 출근한 게 맞다.

    하지만 증언을 들어보면 365일 중에 100일도 채 출근을 안 했다.

    놀고 먹었다는 뜻이다.

    그럴 때 만약 왜적이 쳐들어왔다면 지휘부와 소통이 안 돼 지리멸렬했을 거다.

    난 오히려 이 일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수군을 밀수에 동원한 일.

    세금을 착복한 일.

    백성들을 수탈한 일.

    어떻게 보면 백성들의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변경 지역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출근을 게을리한 건 백성들의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니까.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는 명만 형님께 받았다면,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서울로 호송시켜 보냈겠지만 경상도의 군권까지 위임 받았고, 부산진, 동래현, 다대포, 해운포 네 곳 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역을 조사하라는 명까지 받은 상황에서, 개판 오분전인 출근 기록을 좌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고민에 빠진 것이다.

    이 잡놈들을 살려두면 경고가 전혀 안 될 것 같았다.

    부임지를 개판 오분전으로 만들어 놔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것 같았달까?

    그래서 딱 하루를 고민했다.

    딱 하루를 고민했고, 하루만에 답이 나왔다.

    최소한 이 일의 주모자인 첨사 신공은 참하는 걸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