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70화 (17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70화>

    ***

    “감사하오.”

    나는 어눌하게 우리말로 감사 인사를 표현하는 오키나와 왕에 생긋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찡긋, 윙크를 하고 싶었다만 괜히 오해하면 안 되니까, 윙크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감사는 무슨요. 전에도 그랬지만 이제 거의 피를 나눈 형제 국가 아닙니까? 형제국 사이에 이 정도 일은 도와줄 수도 있는 거죠.”

    내 말을 김 통사가 제대로 통역했는지 오키나와 왕의 만면에 미소가 걸린다. 어딘가 흐뭇해하는 미소였다.

    날 바라보는 왕의 표정도 바뀌었다.

    일전에는 날 조금은 귀찮은 존재··· 음, 속된 말로 좀 띠겁게 바라보는 게 있었더랬다.

    굳이 비교하자면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눈빛 정도?

    적의는 아니지만 경계하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눈빛은 아니다. 오히려 따스하다.

    “하하하.”

    일변한 왕의 표정에 흐뭇해하고 있을 무렵.

    김 통사가 폭소를 터뜨린다. 그러다 뒤늦게 여기가 어전 임을 깨달았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뭐라셨는데? 혼자 웃지 말고 같이 웃자고.”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씀에, 그럼 조선이 형님국이라 하시옵니다.”

    피식.

    “나이는 우리 형님보다 전하께서 더 많으시다 하시게.”

    보름.

    딱 보름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오키나와 왕하고 농담을 주고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조약도 맺었고 서로 신의를 다졌지만, 진짜 딱 비즈니스 파트너.

    그 이상의 관계도, 이하의 관계도 아니었다.

    직장을 다녀보진 않아서 딱히 모르겠지만,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늘 하는 말 있잖은가.

    회사 사람들은 정이 안 간다.

    회사를 다닐 땐 분명 인간적으로 친했던 것 같은데, 나오니 서로 연락을 안 하게 된다.

    거짓말 않고 이런 관계 같았다.

    근데 지금은 좀 바뀐 것 같다. 입사 동기의 관계 정도?

    “국가 간의 관계는 연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 어찌 아우국이 형님국을 넘볼 수 있겠냐고 하십니다.”

    나는 다시 한 번 피식거렸다.

    왕의 말이 맞다. 국제 관계는 지도자의 연배가 중요한 게 아니지.

    ‘형님이 들으면 좋아하시겠다.’

    오키나와 왕이 조선을 형님국으로 모시겠다고 했다는 말을 전하는 순간, 아마 입가에 미소가 번지지 않을까?

    “왕께서 궁금한 게 있다고 하십니다.”

    상념에 잠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자국 백성을 살려도 나라에서 크게 포장(褒章)을 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이국의 백성을 살렸으니 이것이 어찌 형제국이란 이유만으로 가능하겠냐고 하시면서, 우리 백성을 살린데 모자라 피해까지 최소화하였으니 혹 원하는 게 있다면 주시겠다고 하시옵니다.”

    “원하는 거? 없다고 하게. 그런 거 받으면 의미가 퇴색되지.”

    “어··· 원래 왕께서는 대감께서 두창을 예방 할 수 있다는 말을 하실 때, 그걸 빌미로 뭔가를 요구 하실 줄 알았다고 하시옵니다.”

    뜨끔했다.

    라후테를 먹다가 두창이 창궐했다는 걸 알게 됐다.

    신속히 입궐을 했지만, 그 와중에 별에 별 생각이 다 들긴 했었다.

    뭘 요구 할까 말까 하면서.

    하지만 금방 관뒀다. 사람 목숨가지고 딜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사실은 그랬는데 안 받길 잘 했다고 전하게. 사람 목숨 담보로 뭔가를 받았으면 마음이 찝찝했을 거라고.”

    김 통사가 내 말을 전하자 왕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솔직한 게 매력이시랍니다.”

    그건 이미 천지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비록, 안 받겠다고 하셨지만 그건 대감의 처지이고 또 우리의 처지에선 우리의 백성을 살린 데 모자라, 두창을 예방하여 더 번지지 않도록 막은 공로가 있으니 비록 외국의 왕자시더라도 이를 치하하지 않는다면 국격이 훼손 될 우려가 있으시답니다. 원하는 걸 꼭 말씀해주시라고······.”

    긁적긁적.

    “정말 받을 생각 없었는데··· 으음.”

    근데 정히 주시겠다는데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욕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정말로 국가의 권위라는 게 존재하고 오키나와 왕의 입장에선 그 국권을 생각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뭘 받아야 하려나.

    ‘돈은 됐고.’

    나한텐 남는 게 돈이다.

    게다가 이 시대 돈이란 건 화폐가 아니다.

    예컨대 쌀이라고 한다면, 쌀은 결국 썩기 마련이다. 곳간에 저축(?)을 한다고 해도 쥐가 갉아 먹거나 썩어 버려서, 이자를 제대로 받긴 커녕 마이너스 손실이 생긴다.

    그래서 돈이 생기는 족족 최대한 금이나 은 같은 광물석으로 바꾸고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비누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불가능해졌다.

    생산되는 광물은 제한적인데 반해, 내가 사려는 건 1, 2돈 정도가 아니거든.

    비누 판매 대금으로 받는 곡식 같은 경우는 진짜 처치 곤란이라, 아예 나라에 기부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썩게 놔두느니 국가 예산으로 편입 시키는 게 낫잖은가.

    ‘역시 땅 박에 없네.’

    아무래도 땅 밖에 없는 것 같다. 뭐, 어업권을 요구할 것도 아니고, 어업권을 받으면 얻다 쓸 건데?

    역시 땅이 최고지.

    “그럼 땅?”

    내 말을 역시나 김 통사가 전하자, 왕이 이번에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보통 사람이라 함은 물욕을 갖기 마련인데 대감께선 지욕(地慾)이 굉장하신 듯 하다고 하옵니다.”

    “비꼰 건 아니지?”

    “예. 비꼬시진 않으셨습니다.”

    “어디 남는 땅 없냐고 물어보시게.”

    “그건 어찌 물으시냐 하시옵니다.”

    오키나와 기후가 조선에 비해 온화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사전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게 아니라, 사실 유명한 거 잖아?

    명색이 오키나와 여행을 꿈꿨던 내가 오키나와 기후가 어떤지도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런 의미에서, 여긴 농사 짓기가 딱 알맞았다.

    “농사 좀 지으려고.”

    “노, 농사요? 제가 아는 그 농사 맞사옵니까?”

    “맞지.”

    “농사라면 조선에서도 지을 수 있을 텐데 어찌 먼 이국 땅에서 지으려고 하시냐 여쭙사옵니다.”

    “오키나와에서 밖에 못 짓는 농사니까.”

    김 통사가 내 말을 통역하자 왕은 떨떠름해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침 반란을 일으킨 호족에게 적몰한 땅이 얼마 남는다고 하시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백성들을 살렸기로서니 땅을 내주는 건 어렵다 하시옵니다.”

    “돈 주고 살 생각이었다고 전하시게.”

    거래 제안에 왕이 눈을 휘둥그레 치켜뜬다.

    “하면 대금은 그 종두라는 걸로 받을 수 있냐고 하시옵니다. 정확히는, 종두 개발법이요.”

    왕도 종두의 효험을 톡톡히 본 것 같았다.

    하기사.

    내가 듣기로 작년에 오키나와 두창이 창궐했을 적엔 수백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들었다.

    해마다 수십~수백이 두창으로 죽어 나갈 테니, 인구가 국력인 시대에서, 특히나 오키나와 같은 소국은 더더욱 종두가 절실할 것이다.

    하지만 종두 개발법은 어렵다.

    “개발법은 어렵다고 하게. 종두 자체를 공급하는 건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만, 개발법은 좀 다르지.”

    사실 종두는 개발법이라는 거창한 명칭이 붙을 필요도 없었다.

    사고의 전환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어디 사고의 전환이 쉽던가? 그게 쉬웠다면 내가 알고 있는 역사에서도 이미 10세기경쯤 종두 개발법이 나와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을 거다.

    “하면 아쉬운대로 종두라도 받겠다고 하시옵니다. 또, 부족한 대금은 혹 비누로 받으실 수 있냐고 하시옵니다.”

    비누는 어렵지 않다.

    이제 국가에 속한 종두 개발법과는 달리, 소유권이 온전히 나한테 있으니까.

    “오히려 감사하다고 전하게.”

    “땅은 얼마나 원하시고, 위치는 어딜 생각하시냐 하십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위치는 박토만 아니면 되는 곳이라 하게. 아, 물론 접근성도 좋아야겠지?”

    “중신들과 논의해보고 귀국 전 알려드리겠다 하시옵니다.”

    오케이!

    그로부터 20일이 흘렀다.

    4월에 도착했던 것 같은데 벌써 7월이 된 것이다.

    당초 목포에서만 해도 6월 초순 쯤이면 모든 걸 마무리 짓고 귀국하리라 생각했는데 예정보다 훨씬 길어졌다.

    두창 환자들의 예후를 봐야했고, 또 생각보다 오키나와에는 명승지가 많았다. 남는 시간에 명승지 좀 돌아본다고 귀국일이 길어졌다.

    나와 함께 온 사람들이 불평하지 않았냐고?

    별로.

    원래 사신행이 결정나면 사람들은 하다못해 짐꾼으로라도 가려 한다.

    왜냐고?

    밀무역을 할 수가 있거든. 그래서 짐꾼으로라도 가는 사람들은 친지들에게 돈을 싸그리 긁어 모아 해당국가에 내다 팔 걸 미리 구매한다.

    나와 함께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불법이긴 하지만 대부분 눈 감아준다. 나도 모른 척 눈 감아 주고 있고.

    근데 이번에 따라온 사람들만 무려 수백명이다. 그 수백명이 한 번에 오키나와라는 작은 시장에 물건을 내놓았다.

    오키나와도 거상이란 존재는 있을 테니 금방 나가는 물건도 있지만, 아닌 물건들도 많았다.

    때문에 아직 가져온 물건을 못 판 사람들은 오히려 미뤄진 기간 동안 물건 팔아서 적자 안 볼 수 있다고 좋아한 편이었다.

    이미 물건 다 판 사람들도 차근차근, 조선에 가져갈 오키나와의 특산품을 골라볼 수 있다고 좋아했고.

    하지만 이제는 귀국 일자를 더 미룰 수가 없었다.

    항해 하기 좋은 계절은 봄~초가을까지다.

    제일 적기는 4월~8월 사이.

    그리고 지금은 7월이다. 서두르지 않는다면 한층 사나워진 바다에 황천길 갈지도 몰랐다.

    아, 땅.

    가장 중요한 땅을 빼먹을 뻔 했네.

    흥정 끝에 총 500명분의 종두+비누 2,500개로 땅을 살 수 있었다.

    위치도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이번에 받은 미야코 섬.

    그 섬과 엎드리면 코닿을 곳에 이라부 섬이란 곳이 있었다.

    면적은 자세히 모르겠지만 얼추 계산해보니 800만평 쯤?

    그 섬을 받기로 했다.

    미국이 러시아에 알래스카를 헐값에 매입했던 것처럼, 나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매입한 것 같다.

    뭐, 오키나와 왕 입장에선 어차피 조선령으로 편입될 미야코 근방에 있는 땅이라 그리되면 어차피 처치 곤란이었을 테니 헐값이라고 생각도 않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여행이란 당초 목적과, 교역이란 목적, 거기에 부수적인 땅까지 얻으면서 이번 오키나와 행은 참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다시 이틀 후, 우린 오키나와 왕의 배웅을 받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

    [내 마음대로 항해일지2]

    《1506년 7월 11일 미시(오후1시~3시)》

    -날이 저물었다. 갑판에서 바라보는 저녁놀은 예술 그 자체였다. 선원들 모두가 넋놓고 석양을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정체불명의 새가 울면서 지나갔는데 “바다에 웬 새?”독백하니 김비을개가 “아직 출항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듯 합니다. 물새가 있다는 건 섬이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말했다. 석양도 아름다웠지만 밤 하늘 역시 아름다웠다. 별들이 빼곡이 박혀 있었다. 같이 하늘을 바라보던 장곤 선생님이 “남극노인성(남극성)이 보입니다.” 말했다.

    《1506년 7월 12일 오시(오전1시~오후1시)》

    -파도는 잔잔하다. 날은 맑게 개었고 비가 올 조짐은 안 보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 머어어어얼리서나마 보이던 오키나와가 안 보인다.

    그래도 몇 달 머물렀던 오키나와가 안 보이니 섭섭하다. 알게 모르게 정이 든 건가? 출출해져서 운나의 아버지 가나구스쿠 씨가 선물로 준 육포를 뜯었다.

    짭짤한 맛과 비린내가 동시에 났지만 영 못 먹을 정돈 아니었다. 조금 먹다가 격군들에게도 나눠주었다. 사실 이번에 가장 고생이 많았던 건 격군들이다.

    《1506년 7월 13일 해시(오후9시~11시)》

    -바람이 거세게 불자 선원들이 모두 불안해하였다. 다른 배 역시 마찬가지인지, 머잖아 뒤따라오던, 그러니까 김 과장(김공저)님이 타있던 선박에서 빨간 깃발이 올라왔다.

    미리 입을 맞춘 신호였는데,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지금 같은 경우는 해류를 잘못 탈 우려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찌할까 선원들에게 의견을 묻다가 이대로 해류를 잘못 거슬러 타면, 최악의 경우엔 서쪽의 여송국(필리핀)까지 흘러 갈 수 있다고 하여 항로를 수정했다.

    김비을개는 큐슈의 동쪽 연안을 따라 올라가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장곤 선생님께 여쭤보니,

    “해동제국기는 물론 류큐에 사신으로 간 선인들의 일을 상고해본다면 보통 목포나 부산에서 출발하여 대마도를 거치고, 일기도(이키섬)을 따라, 복강도(후쿠에섬)를 경유하여 지나갔다고 하였습니다. 본시 조선에서 류큐로 갈 땐 이 항로를 이용하니 이리 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하여 의견대로 항로를 수정했다.

    《1506년 7월 14일 신시(오후3시~5시)》

    -항로를 수정하길 잘한 것 같았다.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우린 임시방편으로, 멀리 섬이 보이길래 부랴부랴 닻을 내렸다.

    섬에 인적은 드문 편이었는데 사람이 아주 없진 않았다.초가가 수십호 보였는데, 우릴 보자마자 깜짝 놀라 도망갔다.

    그래도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들인지, 조악한 무기 따위를 들고 긴장한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마침 우린 점심으로 오키나와 왕이 챙겨준 라후테를 먹고 있었는데 접촉한 섬사람들에게 조금 나눠주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면서 라후테를 맛보던 사람들이 이내 우리와 함께 둘러앉아 고기를 뜯었다.

    술이 땡긴 건진 몰라도 섬사람들이 곧 술을 가져왔다.

    맛은 썩 좋진 않았다. 탁하진 않았지만 시큼털털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말은 잘 통하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섬에 유일하게 글을 아는 이가 왔다.

    그 사람은 이 섬사람들 모두 도망자라고 했다. 원래 본토(정확히 어딜 말하는 건진 알아 듣지 못 했다)에서 살던 사람들인데, 태수한테 죄를 짓고 마을 전체가 야반도주를 했단다.

    가엾기도 하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먹물 깨나 잡순 것 같은데 이런 야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게 안타까워졌다.

    그러다가 마침 수중에 책이 얼마 있어서 건네줬다. 이 사람은, 다른 섬사람들이 라후테나 다른 식료품을 나눠졌을 때 감사해하는 것보다 책을 나눠줬을 때, 아예 펄쩍 뛰면서 감사해 했다.

    그리고 수차례 이 귀한 걸 받아도 되냐고 물었고, 선물이라 하니 절까지 했다.

    이 이름 모를 섬에는 하루를 머물렀다.

    내가 책을 선물로 준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제선(斉宣)이라고 했다.

    글자를 쓰면서 “나리노부, 나리노부, 나아아아리노부” 라고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는데, 제선의 일본식 발음이 나리노부인 걸로 보아 나리노부가 이름 같았다.

    아무튼 그런 나리노부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리노부에게 나중에 또 볼 수 있겠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농담식으로 또 도망칠 일이 있으면 류큐로 가라고 했다. 가서, 내 이름을 대면 류큐왕이 박대는 하지 않을 거라 하니 나리노부 역시 도망칠 일이 있으면 이 섬으로 오라고 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됐고 아는 일본어가 많진 않았지만, 하루간 머물게 해준 나리노부와 섬사람이 고마워서,

    “나리노부, 소시떼, 시마닝겐,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몇 번이나 말하고 배에 올랐다.

    아, 나리노부에겐 상어이빨 같은 걸 받았는데 부적이란다.

    순항을 바란다면서 줬다.

    《1506년 7월 25일 오시(오전11시~오후1시)》

    -항로를 수정해서 목포로 갈 순 없었다. 간다면 가겠는데, 제주를 거치고 남해안의 여러 섬들과 암초를 피해 목포로 진입해야 했기에 비효율적이었다.

    항로를 수정한 김에 곧장 북상하였다. 왜구도 몇 차례 봤는데 경고용으로 화포를 쏘아대니 이전처럼 접근하진 않았다.

    머잖아 멀리 섬 하나가 보였다.

    대마도 같았다. 대마도주는 우리가 탐탁지 않은 듯 했는데, 대마도 사람인 가쓰히로에게 물어보니 접대비 때문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럴만도 했다.

    수백명의 사람들을 공짜로 접대해야 했을 테니 심기가 상할만도.

    오랑캐(?)라지만 도주에게 폐를 끼치면 가쓰히로 씨에게 해가 갈 것 같기도 하고, 폐를 끼치는 것 자체로도 미안한 일이라 이틀만 머물렀다.

    도주에겐 사과의 의미로 오키나와에서 받은 상아와 후추를 조금 나눠주었다.

    꽁한 게 풀렸는지 그날 저녁 잔치를 베풀어줬다.

    역시 돈이 최고다.

    그렇게 이틀을 머무른 우린 극진한 도주의 배웅을 받으며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까지는, 이른 아침에 출발하니 점심이 갓 지난 1~2시쯤 도착 할 수 있었다.

    근데 멀리 부산이 보이는데도 수군선은 코빼기도 하나 안 보였다.

    이게 왜 문제인지는 가쓰히로도 알고 있는지 연신 침음만 해댔다. 가쓰히로 보기 창피했다.

    수군선은 정확히, 우리가 항구에 도달할 즈음 마중을 나왔는데 그마저도 군선이 아니라 문정선이었다.

    왜구였으면 어쩔 뻔 했냐고 장곤 선생님이 길길이 날뛰었는데 군관이 무슨 죄가 있겠나? 장곤 선생님은 곧 첨사를 뵈어야겠다고 하면서 군관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군관이 “먼 길 오셨으니 조금 쉬시라”하셨음에도 꼭 지금 봐야겠다고 날뛰셨다. 이렇게 화난 선생님은 처음 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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