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68화 (16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68화>

    ***

    쇼신은 일그러진 표정을 가까스로 가다듬고 미소를 머금었다.

    상대는 여전히 오만스러웠다.

    “왕자의 의도가 무엇이겠사옵니까?”

    함깨 조선 왕자가 머물고 있는 객사에 온 삼사관(재상) 다마구스쿠 우미(玉城海)가 물었다.

    물론 그 의도는 쇼신도 알 수 없었다.

    땅의 사용처가 고작 죄인들을 가두는 용도라니······.

    얼버무린 말임이 분명했다.

    “경은 어찌 생각하시오?”

    “비록 미야코의 나카소네(仲宗根) 일가가 오랑캐인 건 맞지만 야에야마의 골칫거리였던 오야케 일족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건 사실인데다 일시적이긴 했어도, 당시 복속을 약조하였었으니 어찌 그 땅을 함부로 외세에 넘길 수가 있겠습니까?”

    우미의 말에 쇼신은 침음했다.

    미야코를 오랑캐라 부르곤 있지만 우미의 말처럼 그들은 일시적인 복속은 약조했었다.

    6년 전.

    쇼신은 세력을 팽창할 필요성을 느꼈다. 왕성에 불러들인 호족들이 점점 불만을 갖게 되었는데, 이를 분출할 배출구가 필요했고, 또 야에야마와 미야코의 오랑캐들을 계속 방관한다면 왜구와 결탁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런 과정에서 쇼신은 군사를 일으켰다.

    야에야마의 오야케 일족은 복속을 거부했고, 미야코는 복속을 약조했다. 미야코를 다스리던 호족 나카소네 도유미야(見親)는 먼저 신뢰를 보여주겠다면서, 오야케 일족의 토벌에 앞장섰고, 쇼신은 미야코의 오랑캐들에겐 자비를 베풀었던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때 베푼 자비로 말미암아 미야코 놈들이 세력을 확장해 왜구와 결탁을 하게 됐다만, 어쨌건 우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흐음. 하지만 미야코가 복종을 거부하고 왜구와 손을 잡지 않았소. 왕성과 야에야마와는 거리가 머오. 오히려 미야코와 지척이지. 미야코 놈들이 야에야마까지 세력을 확장한다면 승산이 없어지오.”

    야에야마는 특히 쇼신에게 원한이 깊을 터였다.

    복속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남녀 가리지 않고, 저항하는 자는 모조리 참살했기 때문이었다.

    원한이 뼈에 사무칠 텐데, 원수의 원수는 친구라는 말처럼 미야코가 야에야마를 손에 넣는다면 더 이상은 손쓸 방도도 사라질지 몰랐다.

    “더군다나 나카소네 일족은 다스리기 까다로운 오랑캐들이 아니었소?”

    6년 전, 그때만 복속을 약조한 게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수차례 복속을 약조했고, 세월이 흐르면 파기하기를 밥먹듯 하던 족속들이었다.

    게다가 또 어찌나 호전적인지, 틈만 나면 사건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귀찮다고 외세에 넘기는 건 군주의 도리가 아니옵니다.”

    “귀찮은 게 아니오.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게지. 대안이 있다면 말해보오. 내 경의 말대로 할 터이니.”

    “···”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미야코 오랑캐들을 억제 할 수도 있고, 왜구를 무찌를 수도 있소. 거기에 미야코 오랑캐들을 박살내면 또 준동할 기세를 보이는 야에야마 놈들도 단속 할 수 있을 터이니, 일석삼조가 아니겠소?”

    “최악의 경우도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무슨 최악의 경우?”

    우미는 팔짱을 낀 채, 쇼신을 바라보고 있는 조선 왕자를 흘겼다.

    “조선이 미야코를 근거지로 삼고 우리 류큐를 침공한다면 어쩌시겠사옵니까?”

    쇼신은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겠사옵니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는 건 명이 천하의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되겠지.”

    조선과 류큐는 똑같이 명을 상국으로 받드는 제후국이었다.

    그런 조선이 류큐를 친다.

    조선이 명의 눈치를 볼 이유가 사라졌을 때나 가능한 거고, 명의 눈치를 볼 이유가 사라졌을 때는 적어도 명이 멸망 했을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조선에게만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니잖소. 조선의 토산을 일본에 갖다 판다면 그 이문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셨소?”

    틀린 말은 아닌지라 우미는 입을 다물었다.

    쇼신은 본인을 믿었다. 미야코의 영토를 떼어준다는 건, 아쉽기 그지 없는 일이지만 미야코의 영토보다 더 가치가 있는 걸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본다면 그다지 손해보는 일도 아니리라.

    ***

    됐다!

    만세!

    진짜 오키나와 왕이 보고 있지만 않으면 두 손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됐다.

    드디어 오키나와 왕의 입에서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나는 수십분만에 굳어 있던 얼굴을 폈다.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오키나와 왕이 악수를 알 리가 만무하지만, 영화 같은 거 보면 성공적인 비즈니스가 이뤄질 땐 꼭 악수를 하지 않나?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냐고 묻는 오키나와 왕에게 신뢰를 나타내는 예법이라고 설명한 뒤,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자 김 통사가 말한다.

    “대감께서 말한 악수를 했으니 서로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한답니다.”

    “우리가 먼저 저버릴 일은 없지.”

    “그리고 군사는 언제쯤 보내주실 수 있냐고도 물으시옵니다.”

    돌아가는 시간.

    편전에서 대신들을 설득한 시간.

    군사를 정비할 시간.

    배타고 다시 오키나와에 오는 시간.

    등등을 따져보면 내년 봄 정도가 될 것 같았다.

    “내년 봄?”

    “나쁘지 않다고 하시옵니다.”

    그럼 나쁘지 않겠지.

    손 안 대고 오랑캐들을 처치하게 됐는데.

    물론 서로 윈윈이다.

    저쪽은 안보가 위협 받는 상황에서 한 숨 돌리게 되는 셈이고, 우리는 큰 돈 안 들이고 땅을 얻는 거니까.

    사실 미야코 섬의 면적이 150㎢ 정도로, 제주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크기고 대략 울릉도의 2배 정도 되는 크기에 불과하지만 그런 작은 땅도 제 돈 주고 사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파병 한 번으로 얻게 됐으니 얼마나 이득인가?

    “피차가 내건 조건은 수락했으니 본격적으로 교역에 관한 사안을 나누고 싶은데 어떠시냐고 여쭤보게.”

    오키나와 왕은 곧, 그 문제는 식사나 하면서 심도 깊게 논의해보자는 대답을 해왔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그 날 저녁.

    교역에 관한 세부적인 논의가 오갔다.

    ***

    1. 조선국은 내년 봄까지 1,000명의 군사를 파병한다. 파병시 조선국 군대에 대한 통제권은 쇼신(尙眞)이 갖는다. 단, 불합리한 명령은 따르지 않을 권한이 있다.

    2. 조선국의 도움으로 미야코와 왜구들을 억제하는 즉시 유구국은 미야코 제도(諸島) 일대를 조선국에 할양한다. 유구국은 이에 대한 이의제기를 영구적으로 포기하며, 미야코 제도 일대에 대한 권리 역시 영구적으로 포기함을 본 조약에 명시한다.

    3. 두 나라는 기별 없이 상선을 보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하나, 그 장소는 서귀포와 나하로 제한한다. 이외의 장소에서 상행위를 할 경우, 본 조약과 관계없이 당사국의 법률에 따라 처벌한다. 단, 양국이 사전에 이해를 구했을 경우 본 조약은 무효로 한다.

    4. 유구국은 조선국에 1년에 한 번 정기사(定期使)를 보낸다. 단, 유구국은 조선국의 제후가 아니므로 자국의 사정에 따라 사신 파견을 일시 중단할 권리를 갖으나 그 기한이 연년(連年)이 되어서는 안 된다.

    5. 양국은 각각 제주와 나하에 대사(大使)를 두어 사무를 돌보게 한다. 대사는 양국의 임금을 대리하는 자리이며, 대사는 면책을 갖는다. 단, 살인과 강간과 같은 중죄에는 양국에 공문을 보내 당사국의 법률에 따라 처벌하며, 양국의 교역품은 대사가 정한다. 이외의 물품을 반입할 시 당국의 법률에 따라 처벌한다.

    6. 본 조약은 동등한 국가 간의 약조이므로 굳이 상국에 통보하진 않는다. 상국에 통보한 국가는, 아니한 국가에 어떠한 형태로든 조약 파기에 대한 배상금을 지급한다.

    홍치 18년 4월 28일.

    전권대사[조선국 왕자대군] 이역.

    전권부사[조선국 홍문관 교리] 이장곤.

    유구국 전권[국왕] 쇼신.

    양국의 전권을 위임받거나 갖고 있는 자들이 본 조약을 의정(議定)하였으며, 본 조약은 수결하는 즉시 효력이 발생케 한다.

    *본 조약은 수결하는 즉시 효력이 발생하지만 조선국이 1,000여명의 군사를 파병치 않는다면 유구국은 이를 자동 파기할 권리가 있으며, 조선국은 이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배상한다.

    *본 조약은 전권을 갖고 있거나 위임받은 자들이 협의하여 수정 혹은 삭제 할 수 있다.

    *두 나라는 신의로서 본 조약을 의정하였으니 굳은 신뢰로 우의를 다진다.

    ***

    장담한다, 난 귀국 즉시 영웅이 될 거다.

    뭔데 장담까지 하냐고 한다면··· 조약 보면 알잖은가?

    아주 성공적인 조약이었다.

    다시 한 번 장담컨대 그 누구도 해내지 못 했을 조약이다.

    과찬 아니냐고?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장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장곤 선생님은 청출어람이라고 까지 표현하셨다. 사실 조약 하나 잘 맺은 걸로 청출어람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당키나 한 건지는 의문이긴 하다만··· 어쨌든 칭찬인 건 분명하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다.

    땅이다, 돈 주고 사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드는 땅문서를 들고 귀국한다.

    개선장군에 맞먹는 환영식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이것도 어떻게 보면 영토 개척(?)의 일환 아닌가?

    세종대왕의 4군 6진 이후 최초로 있는 영토 개척.

    그것도 해외의 영토를 개척한 첫 사례다. 내가 봐도 칭찬할 만 한 일인데 남이 보면 더하겠지.

    뭐, 자랑은 이쯤하고.

    조약을 성공리에 맺고도 열흘이 더 흘렀다. 열흘이 더 흘렀는데도 귀국 준비를 안 하고 탱자탱자 놀고 있는 건, 음식 때문이다.

    일하러 온 건 맞는데, 일은 다 끝냈다. 남는 건 노는 것 밖에 더 있나?

    그런 맥락에서, 열흘이 넘도록 식도락만 주구장창 즐기고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음식은 처음 보는데?”

    이제 조금은 친해진 김 통사에게 묻자, 김 통사가 음식을 내어온 사람에게 또 다시 물었다.

    “라후테라는 음식인데 돼지고기로 만들었다고 하옵니다.”

    “라후테?”

    새삼 라후테란 음식을 살피니 삼겹살 같다. 비계와 살코기가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었고, 기름진 냄새 또한 삼겹살 냄새와 똑같다.

    이건 또 무슨 맛일까.

    라후테를 입에 가져다 넣었다.

    온몸에 전율이 인다.

    동파육이다, 이름만 다르지 딱 동파육이다.

    달짝지근한 맛이 일품인 동파육!

    “와우.”

    동파육과 흡사한 맛이지만 디테일하게 파고 들면 좀 다르다. 내가 기억하는 동파육보다 맛이 좀 더 진하다.

    자, 그럼 다른 것도 한 번······.

    뭘 먹지 고민하던 그때였다.

    우당탕!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앞전에 회담장(?)에서 본 기억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름이··· 뭔 우미였던 것 같은데. 좌우지간, 우리나라로 치면 삼정승 정도의 관직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헐레벌떡거리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싶어 김 통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대?”

    “두창인 것 같사옵니다.”

    “두창?”

    “예··· 귀인들이 두창에 걸리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으니 당분간 왕궁에서 지내셔야 될 것 같다 하옵니다.”

    긁적긁적.

    “배 타고 넘어온 사람들 중에 두창 예방접종 안 한 사람 있나?”

    “다 했사옵니다.”

    내 기억으로도 그렇다.

    출국 전부터 이미 예방접종을 안 한 사람들은 예방접종을 할 만큼 철저히 준비하고 출국했었거든.

    “우린 괜찮다고 전하게.”

    “안 괜찮은 일이라 하옵니다. 벌써 사망자도 나온 듯 하다고······.”

    아이고, 두창이 사람 잡는 건 조선이나 오키나와나 똑같······.

    잠깐만.

    “김 통사.”

    “예, 대감.”

    “우리 종두도 챙겼지?”

    “아마 그럴 것이옵니다.”

    내 기억도 그렇다. 혹시 몰라서 챙겼던 기억이 있거든.

    “밥은 나중에 먹고, 입궐부터 하세.”

    “예? 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