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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67화 (16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67화>

    ***

    초조해진다. 초조해지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초조해진다.

    주식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이 초조함을 알 거다.

    물론 난 주식은 안 해봤지만.

    그런 의미에서 TMI가 될 수도 있겠지만 주식좀 해 볼 걸 그랬다.

    어떤 경험이든 도둑질, 살인 같은 중범죄만 아니라면 한 번 쯤 경험해볼만 하다며?

    갑자기 안 해 보고 온 게(?) 생각나서 주절거려봤다.

    오키나와 왕은 내가 주식을 떠올리게 만들 만큼 생각 이상으로 느긋한 사람이었다. 워렌 버핏이 이런 느긋함을 가지고 세계 최대 부호가 됐을까 싶을 정도로, 나와는 딴판의 느긋함이었다.

    아니면 정말 아쉬운 게 없나?

    아닌 게 아니라 벌써 일주일이다.

    일주일 동안 오키나와 왕은 날 부르질 않았다.

    물론 가끔 연회를 베풀어주기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기도 해서 완전히 방치 시킨 건 아니었지만, 딱히 교역에 교자는 꺼내질 않았다.

    내가 은근히, 선물한 비누가 어떻냐는 질문에는 신기하다. 같은 짤막한 대답만 늘어놓을 뿐, 그걸 좀 사고 싶다느니 아니면 어떻게 만드는 건지 그 원리가 궁금하다느니, 교역과 관련된 그 어떤 대답도 내놓질 않았다.

    그럼 그 일주일 동안 아주 손 놓고 놀기만 했냐고?

    그건 또 아니란 말씀.

    하도 안 부르길래 지금 오키나와 상황이 어떤가 염탐을 좀 했다.

    지피지기백전불태란 말도 있잖은가.

    염탐을 하는 건 쉬웠다. 오키나와 왕은 우릴 별 신경도 안 쓰는 듯 했지만 이곳 관리들은 달랐다.

    외국인이란 점이 신기했을 수도 있고, 문명국··· 아, 오해할까봐 덧붙이는데 오키나와가 비문명국이란 소리는 아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거고, 이쪽 문화 중에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다고 해서 미개하단 생각은 전혀 안 든다.

    다만 시대적 관점에서 문명국과 비문명국을 가르는 기준점은 중국이다. 중국의 문물을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아니냐.

    그게 문명국과 비문명국을 나누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사람들은 문명국에서 온 우리가 동경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말했다시피 오키나와 왕은 최대한 신경을 안 쓰는 모습이었지만 이곳 관리들은 이 핑계, 저 핑계대며 우리 숙소를 기웃거렸다.

    염탐은 그 와중에 친해진 관리들을 통해 할 수 있었다.

    대단한 정보들은 아니었지만 소기의 성과라고는 할 수 있는 소득은 있었다.

    첫째.

    오키나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우리나라로 치면 왕건이 나오던 후삼국시대 같달까? 호족들이 마구잡이로 날뛰던 후삼국시대 말이다.

    드라마 《태조왕건》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왕건이 가진 최대의 골칫거리는 이 호족들이었다. 오키나와 왕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터.

    두 번째.

    왕이 말한 섬 오랑캐는 미야코(Miyako) 섬을 이르는 말이었다. 미야코 섬은 내가 또 조금 안다.

    현호로 살던 시절 일본 여행보단 오키나와 여행을 꿈꿨고, 당장 여행을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도 나중에는 꼭 가본다는 생각으로 오키나와에 가면 가볼 곳을 미리 정해뒀었다.

    그중에 한 곳이 바로 미야코 섬이었다. 그곳을 가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라부대교 때문이었다. 생긴 건 뭔가 출렁다리 같이 생겨서 가보고 싶단 생각이 가득이었다.

    좌우지간, 이 미야코 섬이 쇼(尙)씨 왕실 입장에선, 왕권을 위협하는 호족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오키나와 왕은 본인 입으로 미야코 섬의 호족이 왜구와 결탁한 것 같다는 말까지 했었고, 나랑 친해진 관리는 미야코 오랑캐들은 호전적이라 다스리기가 어렵다는 말까지 해댔었으니 얼마나 골칫거리면 이런 말을 했겠나?

    그리고 세 번째.

    우리나라도 왜구에 대한 피해가 심각하지만 오키나와도 우리나라 못지 않았다.

    동남아에 보냈던 상선이 연락두절 되는 건 예사고, 이따금 상륙도 해서 노략질하는 왜구들 때문에 일부 주민들은 대거 이주를 한 적도 있단다.

    염탐 결과는 이게 전부다. 자잘하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이를 취합해보면 제법 그럴싸한 결론이 도출된다.

    나는 절대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 같은?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오키나와 왕이다. 역지사지로 생각을 해보자고, 내가 오키나와 왕이다. 근데 갑자기, 진짜 개연성이라곤 쥐뿔도 없이 조선에서 왕자가 찾아왔단다.

    그 왕자가 교역을 하자는 말에 오키나와 왕인 나는 냉큼 ‘왜구 소탕좀 도와주쇼’ 할 수 있을까?

    나같으면 못 한다. 어느 나라 왕이 생판 모르는 남의 나라 왕자한테 우리 나라랑 연합작전 펴자고 하나?

    그만큼 절박하니까 이런 소릴 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할 일은 두 가지다.

    차분히 기다릴 것.

    오키나와 왕이 미끼를 물면 어떤 조건을 내걸지 생각할 것.

    ‘어떤게 좋을까나.’

    내가 여기서 가장 불행했던 건,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가장 행복했던 건, 안 맞는 음식에 후추를 팍팍 쳐서 그나마 입맛에 맞게끔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조선에선 후추가 엄청 귀하거든.

    덕산이가 나없는 사이에 곳간에서 안 빼돌렸으면 나도 딱 5근 갖고 있는 게 전부일 정도로 귀한 거다. 그마저도 형님께 하사 받은 거고.

    근데 후추는 조건에 들어갈 수가 없다. 교역을 하게 되면 당연히 교역품으로 후추를 요구할 생각인데, 조건으로 내걸 필요가 없잖아?

    후추를 조건으로 내걸 필요가 없으니 설탕이나 물소뿔, 사어피(상어가죽), 유황, 상아 등등의 특산물도 조건으로 내걸 필요가 없다.

    그럼 뭘 걸어야 하려나?

    이 자그마한 땅에서··· 잠깐, 땅?

    그래, 생각해보니까 땅 괜찮다. 오키나와는 소국이다. 이 소국에서 위에 언급한 특산물들 빼고 내걸 조건은 땅 밖에 없다.

    사람?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은 구해서 얻다 쓰게?

    하지만 땅은 다르단 말씀!

    영원히 남는 게 땅이고, 떡상할 가능성이 매우 큰 게 바로 땅이다.

    또, 사용처도 무궁무진하고.

    ···라는 생각은 얼마지나지 않아 망상임을 깨달았다.

    막말로 땅을 줄 리가 없잖아?

    아무리 절박해도 그렇지, 영토 일부를 떼어서 준다는 건··· 음. 무리지.

    라고 생각하며 다른 조건을 떠올리던 그때였다.

    내 머릿속에 미야코 섬이 떠올랐다.

    ‘어차피 복속시키지도 못 하는 오랑캐라고 했으니까··· 그 땅을 주라고 하면?’

    러시아도 미국에 알래스카를 헐값에 팔아넘겼다.

    오키나와라고 다를까.

    ‘이거 어쩌면 가능하겠는데?’

    ***

    “아직도 말인가?”

    “···예.”

    “생각보다 진득한 구석이 있는 젊은이군.”

    “조선 왕가의 핏줄이라 하니 피는 못 속이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하긴.”

    쇼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부견자란 말이 있지만, 그보다는 호부에 호자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조선의 선왕은 호부에 가까웠다.

    쇼신도 조선의 선왕을 기억한다. 즉위초 신녀들의 권한을 억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에 대장경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일단 불경이 있어야 어떻게든 신녀들의 권한을 억제시킬 테니까.

    때문에 수차례 국서를 주고 받은 적이 있었고, 그때 쇼신이 받은 조선왕에 대한 인상은 제법 호걸이란 점이었다.

    조선에 다녀온 신하들도 ‘조선이 태평한 치세를 맞은 듯 합니다.’라는 보고를 했었고 말이다.

    그런 선왕의 핏줄이니 과연 피는 못 속이겠지.

    “사신이 머무는 객사에 거둥하겠다.”

    “조선국 왕자가 말한 조건을 수락하실 생각이시옵니까?”

    “그 조건이 뭔지 들어는 봐야겠지. 듣고 나서 판단해도 늦진 않는다.”

    그가 나고 자라고, 다스리는 류큐는 소국이었다.

    자신을 모시는 신민은 고작 1만8천호에 지나지 않았고, 아직 복속하지 못 한 오랑캐들을 감안해도 그 수는 2만5천호를 채 넘지 못 한다.

    사람수로 치면 10만을 가까스로 넘기거나 혹은 10만에도 못 미치는 수준인 셈이었다.

    물자도 제한적이지만 사람은 더더욱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미야코 오랑캐들과 왜구들.

    부끄럽게도 이들은 류큐의 힘만으론 쫓아낼 수가 없었다.

    물론, 하나씩 상대한다면 전력을 집중해 쫓아낼 순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대가 둘인데다, 하나도 벅찬 세력이 결탁을 했다.

    미야코를 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인다면 수도가 비게 될 테고, 수도를 염두에 두고 소수의 병력만 움직인다면 각개격파 당할 수 있었다.

    반대로 왜구를 치자니, 왜구란 족속들은 신출귀몰했다.

    신출귀몰한 그들을 위해 군사를 움직이면 이 미야코 오랑캐들이 틈을 노리고 수도로 쳐들어올지도 몰랐다.

    인정하긴 싫어도 자력으로 이 둘을 무찌를 순 없었다.

    제 3세력의 힘이 간절한 이때, 외교적인 우위나 점하고자 지지부진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건이 과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수락 가능한 한도에 있다면 조선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게 소국의 현실이었고, 소국을 다스리는 임금의 현실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객관.

    수차례 심호흡을 한 쇼신이 객관 안으로 들어섰다.

    ***

    파닭이 생각난다.

    참, 파닭이 처음 나왔던 때가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때였던가, 중학교 때였던가?

    그땐 참 신선한 충격이었지.

    아, 파닭은 웬말이냐고?

    파닥파닥.

    드디어 미끼를 물었거든.

    다름 아니라 오키나와 왕이 행차했다. 다른 사람을 보낸 것도 아니라, 직접 말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절로 실소가 터져나오게 만드는 것들이다.

    “···우린 보통 후추는 안남에서 공수해온다고 하시옵니다.”

    “···유황 같은 경우는 파도, 파도 끝이 없을 만큼 나와 이걸 어찌 처분할지가 골치일 정도라고 하시옵고······.”

    “···조선엔 이번에 선물로 갖고 서책들처럼, 진귀한 서책들이 많냐고 여쭈시옵니다.”

    자, 왜 실소가 나오는진 알 거다.

    이제 전세 역전 됐다.

    앞전에 내가 오키나와 왕을 만났을 땐, 우리측이 교역을 절실히 바라는 모양새였지만, 이번엔 반대다. 오히려 오키나와 왕이 교역에 대한 운을 떼고 있고, 어떻게든 물꼬를 트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존버(?)하길 잘 했다 싶으면서도, 애써 잡은 물고기인데 방생 할 순 없겠단 생각이 든다.

    “우린 사실 후추가 필요해서 교역을 원한 건데, 유구국에서 후추가 안 나는 거면 굳이 교역을 할 필요가 없다고 전하시게.”

    “예?”

    “김 통사.”

    “예, 대감.”

    “자네는 참··· 그, 통역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 같애. 반문하지 말고 그대로 좀 전해주게.”

    “송구하옵니다.”

    잠시 후.

    “조선에서 안남까진 뱃길도 험한데다 왜구들도 득실거려서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거라 하시옵니다.”

    “그렇겠지. 아, 이건 전달할 필요없고, 말장난할 거면 나도 계속 말장난할 거라고 전하시게.”

    “무, 무례하지 않을는지요?”

    “무례는 저쪽에서 먼저 했잖는가.”

    “···예.”

    역시나 잠시 후.

    오키나와 왕이 피식거렸다.

    “선왕께선 예법에 정통하여 우리가 보낸 사신들을 극진히 대접하였고, 하는 말씀들마다 기품이 있다고 내 전해 들었는데 왕자께선 다른 듯 하니 말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겠다고 하시옵니다.”

    “다행이네.”

    “저번에 말한 조건을 듣고 싶다 하시옵니다.”

    “그전에, 혹시 왕께서는 시간이 금과 같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냐 물으시게.”

    “없으시다고 하옵니다.”

    “이번 기회에 들으시면 되겠네. 아, 이건 혼잣말이니까 전할 필요 없고. 본시 시간이란 쏜 살 같아서 후회스러운 일을 저질러도 다시 되돌릴 수 없고, 또 시간이란 매우 공평해서 청년이든 노인이든 똑같이 흘러갑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돈을 주고도 살 수가 없지요, 라고 일단 전하게.”

    “···공감하신다고 하옵니다.”

    “근데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내 소중한 시간, 일주일을 허비하게 만들었으니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고 전하게.”

    김 통사의 눈이 부릅떠진다.

    안다, 대단한 무례인 거. 근데 아쉬운 거 저쪽인 걸 본인들 스스로가 까발렸는데 뭐 어때? 이왕 개망나니처럼 군 거, 계속 개망나니처럼 굴지, 뭐.

    국익이 걸린 일을 착한아이 콤플렉스로 망칠 수도 없잖아?

    “이리 무례하신 줄은 몰랐다고 하시옵니다.”

    “말했다시피 무례는 그쪽에서 먼저 저질렀고, 선한 의도로 찾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저울질로 상대 간 먼저 본 게 누구냐고 여쭙게.”

    “그건 사과드린다고 하옵니다. 조건을 말씀해달라고 하시옵니다.”

    “먼저······.”

    땅은 킵 해두고··· 얼떨결에 조건 하나를 더 추가로 얻게 됐다.

    뭘 요구하지?

    아!

    “상국에 1년에 한 번씩 조공을 위해 사신을 보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조선에도 마찬가지로 1년에 한 번씩 사신을 주고 받는 게 조건이라 하게.”

    “하오나 그건······.”

    “상국처럼 조공을 받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 그렇긴 하온데··· 크흠.”

    “뭐라시는가?”

    “두 나라가 교역을 시작하면 그러지 말래도 그럴 생각이셨다고 하옵니다.”

    젠장, 다른 조건을 내걸 걸 그랬다.

    “나머지 하나는 뭐냐고 여쭈시옵니다.”

    “땅.”

    “어, 어떤 땅을 말씀하시냐고 하시옵니다.”

    “토씨하나 틀리지말고 전해야하네.”

    “말씀하시옵소서.”

    “나도 여기 머물면서 왕께서 말씀하신 섬오랑캐가 어떤 족속들인지 좀 알아봤습니다. 아주 대단한 족속들이더군요. 왕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골칫거리인 족속들,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럼 왕께서는 왜구들만 신경을 쓰시면 되겠지요. 대신, 그 영토는 저희가 갖는 걸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말한 땅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왕이 보일 반응으로 두 가지를 짐작했다.

    버럭 화를 내거나.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거나.

    미야코를 복속하진 못 했으니, 이 땅이 류큐의 영토는 아니다. 하지만 영향력 안에 있는 영토임은 분명하다.

    음, 조선으로 치면··· 제주도 같은?

    뭐, 제주도랑 1:1로 완전히 비교하긴 좀 어렵다만.

    좌우지간, 그래서 두 가지 반응을 예상했었던 건데, 왕이 보인 반응은 의외의 것이었다.

    “어째서 그 미개한 땅을 원하냐고 하시옵니다. 본인이 알기로 미야코엔 금광산 따윈 없는 걸로 아신다고······.”

    일단 간을 보겠다는 거다.

    미야코에 득이 될 만한 게 있으면 내줄 수 없을 테니까.

    그럼 나도 굳이 그 땅을 어떻게 처리할지 정확히 말해줄 필요가 없다.

    뭐, 아직 어떻게 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둔 것도 없고.

    “유배지로 쓸 거라고 하시게.”

    자, 이제 내 조건은 전부 털어놨다.

    이제 이 문제는 내 손을 떠났다. 결과는 전적으로 왕에게 달렸다.

    어떻게 나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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