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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66화 (16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66화>

    ***

    자, 인정하겠다.

    나는 세상을 너무 쉽게 산 경향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이거, 깔끔하게 인정한다.

    난 너무 낙관적이었다. 사람이 좀 비관적일 때도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왜냐고?

    난 오키나와에 오면 다 해결될 줄 알았다.

    우리가 교역의 교자만 꺼내면 이쪽에서도 기다렸다는 듯, OK 교역 합시다. 라고 말할 줄 알았다는 뜻이다.

    맞다, 겁나 낙관적이었던 거지.

    물론 내 입장에선 낙관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교역이란 게 누가 손해보고 이득을 보는 장사가 아니잖아?

    그런데.

    조건을 내걸었다.

    교역을 하는데 조건이라니··· 어처구니가 없고 빈정이 상했지만 먼 길 왔는데 빈 손으로 돌아 갈 수도 없었다.

    “조건이 뭐냐고 여쭤보세요.”

    잠시 후.

    통사와 오키나와측 통사가 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거의 10분 가량 둘이서 대화를 한 듯 싶었다.

    “무슨 조건이랍니까?”

    “그게······.”

    “괜찮아요, 말해보세요.”

    “이곳 상황이 좀 난처한 듯 싶사옵니다.”

    “난처?”

    “아직 복속하지 못 한 오랑캐 종족들이 있사온데··· 이들이 최근 왜구들과 결탁한 듯 하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그리되면 교역을 하고 싶어도 오랑캐들과 왜구들이 뱃길을 막을 게 뻔하기 때문에, 교역을 못 할뿐더러 오랑캐들과 왜구들이 바다를 떡하니 지키고 있는 게 신경 쓰여서 이 때문에라도 또 교역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조건이 뭐냐구요, 조건이.”

    “···왜구를 소탕해달라고 하옵니다.”

    띠링!

    퀘스트가 발동했습니다.

    <오키나와를 괴롭히는 왜구 무리를 섬멸하세요.>

    라는 미지의 목소리가 들린 건 환청일 거다.

    아니, 무슨 왜구를 소탕해달래?

    그게 무슨 조건이라고?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건지, 곧이어 오키나와 왕이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은 다시금 우리측 통사가 전해줬다.

    “과한 부탁인 건 알지만 본인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하옵니다. 이걸 도와준다면 교역에 응하겠다고 하십니다.”

    자, 아까도 인정했다시피 난 또 한 번 인정하겠다.

    이미 말려든 것 같다.

    오키나와 왕에게 말려들었단 말이다. 분명 오키나와 왕은 내가 거절치 못 할 걸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애당초 그 패를 보여준 건 나다.

    뭐하러 왔냐는 질문에 순진하게 ‘교역하러 왔는데요.’ 라고 내가 가진 패를 까발린 게 바로 나니까, 교역하러 왔다는 사람이 왜구 소탕 때문에 다시 왔던 길 되돌아 간다고 말 못 할 걸 알 테니까.

    한 번 말려든 건 깔끔하게 인정이다.

    근데, 두 번 말려들 순 없지.

    “왜구 소탕해주면 뭐해줄 거냐고 묻게.”

    “예? 교역에 응하겠다고······.”

    “그건 당연한 거고, 왜구가 뭐 말이 왜구지 그놈들 야차인 거 자네 모르나? 그런 놈들 소탕하는 데 일조하는 건데 교역 하나로 끝낼 순 없지. 그리고 왜구놈들만 소탕하는 것도 아니라며? 그 무슨 오랑캐 놈들도 같이 소탕해야 된다며?”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통사가 다시금 내 뜻을 전하기 시작했다.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오키나와 왕의 표정이 급변했다.

    “교역 때문에 왜구를 소탕하려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굳이 소탕할 까닭이 없으니 더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없다고 하시옵니다.”

    “그럼 대화는 끝났다고 전하게.”

    “예?”

    “뭘 놀라고 그러나. 제대로 전하게.”

    끌려갈 생각 전혀 없다.

    이미 내가 교역할 생각으로 왔다는 유일무이한 패를 까발렸지만, 상대도 무의식중에 패 하나를 까발렸다. 왜구 때문에 힘든 상황이란 걸 무의식중에 까발린 것이다.

    자, 이제 서로 대등한 입장이 된 셈이다.

    저울질 할 차례다.

    누가 더 아쉽냐, 아쉽지 않냐로.

    저울질을 달리 말하면 강짜고, 좀 속되게 말하면 치킨게임이다.

    그런의미에서, 대화는 끝났다.

    ***

    “자충수가 되진 않을는지요.”

    장곤 선생님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아, 여긴 객사다. 대화는 아까 거기서 끝이났고, 우린 오키나와측 사람들이 안내해준 객사로 이동했다.

    “자충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맨입으로 왜구를 소탕해 줄 필요는 없잖습니까? 군사를 원정 보내는 일이 쉬운 일도 아니구요.”

    객사로 돌아온 우리는, 우릴 여기까지 안내해준 관리에게 왜구에 대한 피해를 은근히 물었다.

    그 질문에 관리는 말하길, 오키나와측 전선 4척이 최근 침몰 또는 나포되기 까지 했단다.

    최소 수백명의 왜구들이 설치고 있단 소리였다. 어쩌면 우리가 오는 길에 봤던 그 왜선들의 소행일지도 모르고. 그런데 거기다가 오키나와 왕이 복속하지 못 한 섬 오랑캐들까지 상대해야 한다.

    자, 여기서 우리가 원정 보낼 병사는 몇 명이나 돼야 할까?

    못 해도 천 명이다.

    연합작전이니 천 명까진 필요 없을지 몰라도 천 명에 육박하는 군사를 보내야 가능한 것이다. 천 명을 원정 보내는 건, 다 돈이다.

    육로로 보내는 것도 큰 돈이 드는데 하물며 바닷길을 이용해야 한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 거다. 이 천문학적인 돈을 고작 교역권 하나 따내자고 우리돈 써가면서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말들이 많을 것이옵니다.”

    “우린 아쉬운 거 없습니다. 아쉬운 건 저쪽이죠.”

    아까는 몰랐는데 객사에 와서 머리를 식히니 좀 알겠더라.

    왜구를 소탕해달라는 말은 내정에 간섭해달란 소리가 된다. 그만큼 절박하니까 자기들 내정에 간섭해달란 소릴 했겠지?

    그럼 아쉬운 게 누구겠나?

    “음. 하면 저쪽에서 만족할만한 조건을 내건다면 정말로 왜구 소탕을 도와주실 생각이십니까?”

    “조건이 충족이 되면 그래야겠죠?”

    “월군이 될 수도 있사옵니다.”

    “형님께서 그러라고 전권을 주신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전권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전횡을 일삼는 기분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렇긴 합니다만··· 원정 문제는 또 다른지라.”

    “그걸 상회할만한 이문을 남기면 되죠.”

    “어떤···?”

    “그건 차차 고민해봐야죠.”

    ***

    경복궁, 강녕전.

    방원무처불농화(芳園無處不濃華)

    방원 곳곳마다 짙게 꽃피고,

    홍엽견풍친록다(紅葉牽風襯綠多)

    단풍이 바람결에 푸르러졌네.

    가경승평수여어(佳景昇平誰與語)

    가경과 태평을 뉘와 함께 말하리.

    도빙교염상춘화(徒憑嬌艶賞春和)

    화창한 봄 경치나 교염과 구경하세.

    “어떤가?”

    어제시의 감흥을 묻는 임금에 숭재는 고개를 조아렸다.

    “내 경이 예흥청의 장관으로 있어서 묻는 것이다. 경이 특히 가사(佳詞)와 시에 조예가 깊잖은가.”

    “과찬이시옵니다.”

    “그래서, 어떠한가?”

    숭재는 다시 한 번 어제시를 곱씹었다.

    “전하께오서 어떤 의미로 방원과 홍엽을 지으셨는지는 모르겠사오나 둘은 상극이옵니다.”

    방원은 꽃을 기르는 꽃밭을 의미하고, 홍엽은 붉은 잎사귀.

    말그대로 단풍잎을 의미한다.

    둘 모두 봄과 가을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니 숭재의 말처럼 상극이라면 상극이었다.

    “그렇지.”

    “한데 두 경치가 화합한 데 모자라, 붉은 단풍이 다시금 푸르러졌으니 태평한 세월은 백성들로 하여금 금방 지나가는 세월처럼 느끼게 하지만, 그 소중함은 새싹 돋는 봄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심금을 아니 울린다 하겠사옵니까?”

    “크하핫. 그리 해석했단 말인가?”

    “주제넘었사옵니다.”

    “아니다. 해석이란 분분하기 마련인데 나는 경의 해석이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태평한 세월은 금방 지나가는 세월처럼 느끼게 하지만, 그 소중함은 새싹 돋는 봄에 비할 바가 아니라··· 이 어찌 심금을 울리는 말이 아니냐.”

    숭재는 만면에 미소를 그득 머금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 한데 어찌 알현을 다 청한 것인가?”

    칭찬은 임금도(?) 춤추게 한다.

    시에 특히나 조예가 깊은 숭재에게 칭찬 받았다는 사실과, 그의 해석이 퍽 마음에 들어 싱글벙글하던 융은 문득 든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숭재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하관들 사이에 추문이 나도는 듯 하옵니다.”

    “하관들 사이에? 어떤 추문?”

    “입에 담기 망측하오나 전하께서 어찌 대군마마께 전권을 일임하셨는지 모르겠다는 소문이옵니다. 이대로 두면 불경한 말들이 나돌 수 있으니 속히 단속함이 어떤지요?”

    잠시 고민하던 융은 손을 내저었다.

    “놔둬라. 호사가들은 떠들기 때문에 호사가다.”

    “하오나 왕업과 왕명을 의심하는 자들이옵니다.”

    “제예.”

    “···예.”

    “내 재위에 있으면서 몇 사람을 죽였지?”

    뜬금없는 질문에 숭재는 화들짝 놀랐다.

    “어, 어찌······.”

    “괜찮다. 말해보아라.”

    “세어보질 않아 모르겠사오나··· 모두들 죽을 대죄를 저질렀기에 죽은 자들이옵니다.”

    “맞다. 죽을 죄를 저질렀기에 응당 죽임을 당한 것이지. 한데 그 수가 어림잡아 수십은 넘을 것이다. 어쩌면 기백이 될지도 모르겠지. 사람을 더 죽이고 싶진 않다.”

    “송구하옵니다. 신이 미처 어지를 헤아리지 못 했나이다.”

    “그나저나··· 호사가들 말 따위나 전하고자 온 건 아닐 테고, 경 또한 걱정이 되긴 하나 보지?”

    “대군마마께서 실수를 할까 걱정된다기 보다는, 혹 대군마마와 유구국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이 일을 유구국이 상국에 언질하게 되어 상국에서 트집을 잡을까 저어되옵니다.”

    융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파안대소를 터뜨린 그는 등뒤에 있던 병풍을 손수 치웠다.

    갑작스런 행동에 숭재는 고개만 조아리고 있었다.

    융이 병풍을 치우자 드러난 것은 또 다른 병풍이었다. 아니, 병풍이라기엔 지도에 가까웠다.

    “이게 무엇인 줄 아는가?”

    “모, 모르겠사옵니다.”

    숭재는 넋이 나간 채 답했다.

    병풍이 아니라 지도란 건 알겠다. 저런 병풍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니까 지도가 분명하다.

    문제는 난생 처음 보는 지도란 점이었다.

    특정 고을을 나타내는 읍지같지도 않아보였고, 도성을 나타내는 지도 같지도 않았으며, 도서산간의 지도같지도 않아보였다.

    “네 믿지 않겠다만 이게 바로 천하다.”

    “처, 천하··· 라 하오시면······.”

    “불씨들이 말하는 이승의 세계란 소리다.”

    숭재는 새삼스럽게 지도를 흘겼다. 큰 대륙들이 몇 개 보였고, 큰 섬들도 몇 개 보였으며, 자잘한 섬들도 몇 개 씩 보였다.

    그중에 숭재는 한가운데 있는 대륙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는 상국 같사옵니다.”

    “우리 조선은 어디에 있는 것 같더냐?”

    숭재는 바삐 눈알을 굴렸다.

    마침 큰 대륙 옆에 또 다른 땅이 보였다.

    처음에 가리킨 대륙보다는 훨씬 작아보였지만, 다른 자잘한 영토보다는 커보이는 땅이었다.

    “저곳인 듯 하옵니다.”

    “틀렸다. 네가 말한 상국은 여기다. 우리 조선은 여기에 있지.”

    임금이 새로 가리킨 곳은 대국이라기 보다는 현저히 작은 크기의 대륙에 있었다. 하지만 그게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보다 훨씬 작은, 어쩌면 점에 가까운 곳이 임금이 가리킨 조선이었다.

    “아무래도 지도가 잘못된 듯 하옵니다. 애당초 천하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리 만무하옵니다만··· 더욱 외람되게 말씀드린다면 신이 혼일강리대국도지도(조선판 세계지도)를 본 적이 있사옵니다. 도지도의 모습과는······.”

    “다르지. 하지만 이게 진정한 천하의 지도다. 우리 조선은 점만도 못 한 크기고, 상국이라 한들 천하와 견주어 본다면 크다고 말할 순 없다.”

    숭재는 순간 임금이 또 실성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불민한 소리였지만 그게 더 설득력있었다.

    “믿건 말건 네 자유다. 하지만 난 이 지도를 믿는다. 그런 내가 본다면 상국은 아주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

    숭재는 황급히 문을 흘겼다. 다행히 듣는 문차비는 없었다. 사관도 존재하진 않았다.

    “그런 상국이 트집을 잡는다면 우린 어쩔 수 없겠지.”

    “···”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상국을 나타내는 지도는 가린 융은 곧 조선과 그 위쪽 지방을 뭉뚱그렸다. 그러자 커다란 영토가 곧 조선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커진다면 상국에서 트집 잡을 걸 어찌 걱정이나 하겠더냐?”

    “저, 전하.”

    “이 지도를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아느냐?”

    “···”

    “지금은 내가 전하라 불리고 있지만 내 어찌 죽을 때가 되어서도 전하라 불려야겠느냐?”

    지도를 응시한 융이 말했다.

    “난 폐하라 불릴 것이다. 그 첫 단추가 유구국과의 일이니 더는 유구국의 일을 걱정치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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