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65화 (16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65화>

    ***

    쇼신(尙眞)은 명군이었다.

    그가 명군이란 사실은 적어도 류큐인이라면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쇼신은 열 두 살 어린 나이에 신탁을 받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막 보위에 올랐을 때, 류큐는 혼란 그 자체였다.

    쇼신이 신탁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겠지만, 신녀들의 권한은 무지막지했다. 그들은 신탁이니 신의 계시니 하며 왕실을 위협했다.

    사실 쇼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까닭도, 선왕이자 숙부인 쇼센이(尙宣威) 왕이 그 사촌누이이자, 지금은 쇼신의 아내이기도 한 이히투시(居仁)를 신녀들의 우두머리로 내세워 신녀들의 권한을 억누르려 했기 때문이었다.

    위협을 느낀 신녀들은 신탁을 핑계로 선왕을 폐하고 어린 쇼신을 왕위에 올렸다.

    어쩌면 신녀들에겐 그게 더 불운이었다.

    열 두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쇼신은 그 과정을 전부 기억했다.

    언젠가 꼭 선왕의 염원을 이루겠노라 다짐했고, 쇼신은 선왕처럼 성급하게 신녀들을 위협하진 않았다.

    그가 이용한 건 타종교인 불교였다. 그는 명나라 황제에게 승려를 보내달라 요구했다. 명황제는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고, 책봉사가 돌아올 즈음엔 명나라 출신의 승려들도 함께였다.

    쇼신은 도성 근방에 작은 사찰을 지어 그들에게 불공을 드리도록 했다.

    대다수가 신토를 믿는 류큐인들이었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승려들을 물심양면 도운 끝에 최소한 도성 인근의 백성들은 과반이 불교 또한 믿게 됐다.

    그렇다고 수백년 뿌리 내려온 신녀들의 권한이 억눌린 건 아니었다.

    쇼신은 협상을 핑계로 신녀의 우두머리 자리에 부왕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누이를 앉혔다.

    탐탁잖아도 불교의 교세가 나날이 증세하니, 신녀들은 협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사촌 누이가 신녀들의 우두머리인 키코다이쿤(聞得大君) 되자, 쇼신은 사촌 누이를 이용해 신녀들에 대한 권한을 왕실로 옮겨왔다.

    왕실의 권위는 자연스레 올라 갈 수 밖에 없었다.

    류큐 내부의 종교 문제를 얼추 해결한 쇼신은 호족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당시 류큐는 아비규환에 가까운 난세였다.

    각지에선 호족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각지에선 호족들이 일으키는 반란을 진압하느라 연간 국력의 3할이 소모될 정도였다.

    여기서 쇼신은 신탁을 이용했다.

    키코다이쿤이 된 누이를 이용해 신의 계시를 대신 받아달라 부탁했고, 누이는 그 말을 받아 ‘호족들은 슈리로 모여들라.’라는 신탁을 전한다.

    반신반의 하던 다수의 호족들은 당연히 불응했고, 쇼신은 그들을 아마미키요(류큐를 만든 여신)의 뜻에 불응한 난적으로 규정하고 토벌을 감행했다.

    모두를 토벌할 필요는 없었다.

    쇼신에게 필요한 건, 압도적인 힘으로 인한 일부의 승복이었다.

    몇몇 호족들을 치자, 또 다른 호족들은 겁에 질려 신탁을 받들겠다며 슈리로 모여들었다.

    쇼신은 그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물론 채찍질만 가한 건 아니고, 도성으로 모여든 호족들에겐 관직도 주었다.

    신녀들의 부패로 황폐해진 류큐인들의 삶과 호족들의 잦은 반란과 전란으로 피폐해진 류큐인들의 삶이 조금씩 개선되며 쇼신은 류큐의 태평치세를 이룩한 명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쇼신은 거기서 만족 할 수 없었다.

    이 태평은 그가 죽고나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일시적 태평에 지나지 않았다.

    쇼신이 원한 건, ‘일시적 태평’이 아니라, ‘영원한 태평’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사를 키워야 했다.

    호족들을 도성으로 불러들였지만 모두가 응한 건 아니었고, 미야코 섬이 아직 명령에 불응했고, 미야코의 바로 동쪽에 있는 야에야마 섬 역시 명령에 불응하고 있는 상태였다.

    영원한 태평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그 섬 오랑캐들 역시 완전히 쇼 씨(氏)의 권속에 둬야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안남으로 보내는 상선들은 그들에게 종종 습격을 받곤 했었다.

    2년 전, 안남에 보냈던 상선 역시 연락이 두절됐는데 미야코 섬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들을 어쩔 순 없었다.

    왕의 일은 만기(萬機)라 불린다.

    그만큼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처리하면 저 일이 터지고, 저 일을 처리하면 이 일이 터진다.

    그리고 지금은 왜구 때문에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어디서 말인가?”

    황급히 편전에 든 쇼신은 옷매무새를 차마 가다듬지도 못 하고 물었다.

    “도카시키 섬이옵니다.”

    “놈들이 이제는 도카시키까지 노략질 했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도카시키는 슈리에서 동쪽에 있는 섬이었다.

    배를 탄다면 하루나절에서 하루면 도착하는 거리였기 때문에 요즘 들어 급증한 왜구들도 도카시키를 노략질 한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주변은 수군들이 해역을 순찰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왜구의 출몰이 의아 할 수 밖에 없었다.

    “피해는?”

    “전선 2척이 침몰했고 2척이 놈들에게······.”

    쇼신은 할 말을 잃었다.

    전선 2척이 침몰했고 2척이 놈들에게 나포됐단다.

    총 4척의 전선.

    도카시키 해역을 지키던 수군들이다.

    “모, 모두?”

    “···예.”

    “왜구라지 않았는가?”

    4척의 전선에 나눠탄 수군만 해도 200은 넘는다. 그런데 그들이 패배할 정도면 압도적인 전력 차이가 아니고서는 불가한 일에 가깝다.

    “아, 아무래도 미야코 오랑캐들이 도운 듯 하옵니다.”

    “그 오랑캐 놈들이?”

    “예. 그게 아니고서는 순시를 도는 전선들을 각개격파 할 수 없음이옵니다. 더군다나 이맘때 나타나는 왜구들이라고 해봤자 일이백에 지나지 않는데, 그들이 도카시키의 수군들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긴 어렵사옵니다.”

    “그러긴 한데··· 하면 백성들의 피해는 얼마나 되는 것인가?”

    “다행히 도카시키 수군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놈들도 제법 큰 피해를 입은 듯 했사옵니다. 섬에 상륙하진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 하옵니다.”

    “당장 쫓아갔어야 하거늘.”

    “송구하옵니다.”

    그때였다.

    “전하! 왜, 왜구이옵니다! 왜구가 출몰했사옵니다!”

    ***

    멀리 오키나와가 보인다.

    으음, 거리는··· 매의 눈으로 가늠해보건대 대략 1~2km 정도.

    문제는······.

    “환대가 극진한데요.”

    선상에 있던 나는 너른 바다를 바라봤다.

    파도가 얕게 출렁거리고 바닷물은 바닷속이 훤히 보일 만큼 맑으며, 그 주변에는 군선들이 떼거지로 몰려있다.

    아주 정상적인 바다다. 아주 일반적인 바다의 모습이다.

    바다에 군선이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하니까, 일반적이다 못 해 너무 평범한 바다란 말이다.

    “스승님. 환대가 아니라 적대 같습니다.”

    너른 바다에서 시선을 뗀 나는 경덕이를 바라봤다.

    “비꼬는 거잖아.”

    “···”

    “비을개.”

    “예, 대감.”

    “자네가 여기 왔을 때도 군선들이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와서 환대해줬었나?”

    사실 이 선단에서 오키나와에 와본 사람은 김비을개와 그 동료들 밖엔 없었다.

    물론 비을개와 그 동료들은 여행이나 사행을 온 게 아니라 고기 잡다가 표류를 했던 거지만, 과정이 어찌됐건 수백명의 사람들중에 오키나와에 와 본 유일한 조선인인 건 분명했다.

    내 질문에 비을개는 포위망을 점점 좁혀오는 군선들을 힐끔거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정선 하나만 마중 나왔습지요.”

    “적으로 오해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 합니다. 왜맹선(倭猛船)이 5척이니 왜구로 오인 할 수도 있는 문제구요.”

    부사로 함께 온 장곤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가쓰히로가 만든 배를 왜맹선이라 불렀다.

    그 크기는 대맹선(조선의 주력 전선)보다 반곱절 더 큰데 형태는 왜선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쉽게 왜구의 왜(倭)와 맹선의 맹선을 합해 만든 단어였다.

    “어떡할까요?”

    “초장부터 괜히 기싸움하면서 힘 뺄 필요는 없겠죠. 용기(임금의 깃발)는 그대로 놔두고 백기 올립시다.”

    “예.”

    선원들이 깃대에 올라 백기를 들어올렸다.

    내가 탄 대장선에서 백기가 올라가자, 다른 4척의 배에도 백기가 올라갔다.

    그 와중에도 오키나와 배들은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을 무렵.

    작은 배 하나가 우리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적의를 보이는 대신 백기를 보이자, 문정을 하기 위해 오는 문정선이 분명했다.

    문정선이 가까워지자 나는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자, 다들 목포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기억합니다.”

    “정암.”

    “예, 대감.”

    “내가 목포에서 했던 말 기억하나?”

    “하구 말구요.”

    “뭐라고 했는데?”

    주변 눈치를 살피던 조광조가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우리는 놀러온 게 아니라 국사(國使)로서 온 것이니 흠 잡힐 일은 하지도 말아야 하고, 또 감정적으로 굴어서는 안 된다 하시었사옵니다.”

    “나는 자네가 특히 걱정돼. 제발 감정적으로 굴지말라고. 이 머리로, 응?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행동해야 돼. 알겠지?”

    “걱정마시옵소서.”

    “좋아.”

    그 사이.

    문정선이 도착했다.

    ***

    여기가 오키나와··· 아니지, 유구국의 편전이구나.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면서 본 건물들은 이국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낯익었다.

    사실 오키나와=일본이란 인식이 있는 나로선 의외인 점이기도 했다.

    일본보다는 중국적인 느낌이 충만하다.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편전을 두리번 거리는 사이.

    통사(통역관)가 이곳 왕의 말씀을 전달했다.

    오해는 다른 게 아니고, 우릴 왜구로 오해하셨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방금 바다에선 진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오키나와가 보였고, 우리는 닻을 내린 채 가만히, 아무 적의도 없이 문정선이 오길 기다렸다.

    그게 맞잖아?

    입국 심사(?)도 없이 다짜고짜 입항하면, 나 적이니까 공격해주세요. 하는 것과 같다.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도 무례기도 하고, 최소한의 절차는 받는 게 예의 인 것 같아서 문정선을 기다렸는데, 문정선은 지랄이고 군선이 떼거지로 몰려왔다.

    사방팔방으로 우리 선단을 포위한 군선들은 당장 공격이라도 할 듯 위협까지 해댔다.

    서둘러 깃대에 백기를 내걸어서 적의가 없음을 밝혔고, 오해도 곧 풀렸지만 일촉즉발의 상황인 건 맞았다.

    극도로 긴장해서 오줌도 지릴 뻔 한 건 비밀이다.

    “뭐,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도 하고 오해도 할 수 있는 거지. 괜찮다고 전해주시게. 아, 그리고 내가 누군지는 제대로 설명했지?”

    “예. 대군마마라고 설명드렸사옵니다.”

    “아니, 대군마마라는 건 당연한 거고··· 선왕의 적자이고 금상의 아우라는 소개도 덧붙이라니까?”

    “아··· 예.”

    어리숙한 김 통사가 다시금 내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소개가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어좌에 앉은 류큐왕의 표정이 변화가 생겼다.

    “조선국의 왕자께서 찾아오셨으니 영광이 따로 없다고 하옵니다.”

    영광은 무슨.

    “정암.”

    나는 격군으로 오키나와에 데려온 조광조를 불렀다.

    지금은 격군이 아니라 짐꾼이다.

    조광조는 가져온 짐짝을 풀었다.

    “우리 전하께서 여기 임금께 전하는 신의의 선물이라고 전하시게.”

    자고로 선물 마다하는 사람은 없다.

    오키나와 왕의 얼굴에도 금방 미소가 번져나간다.

    “얼핏 봐도 진귀한 선물 같다고 하십니다.”

    진귀한 것 정도가 아니지.

    서책과 병풍, 종이, 철릭 20벌, 장삼 20벌, 신발 20켤레, 그 귀하다는 설탕이 동봉된 함 하나, 그리고······.

    뭐, 좌우지간 겁나 많이 싸들고 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귀한 건 말이지?

    “저건 무어냐고 묻사옵니다.”

    저거!

    “비누라고 전하시게. 비누가 뭔진 자네도 알지?”

    “예, 아옵니다.”

    “뭐에 쓰는 건지도 알려드리고.”

    “예.”

    맞다, 비누가 가장 귀하다.

    이건 내가 챙겨온 건데 딱 10개만 챙겨왔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10개가 딱 감질맛나기 적당한 것 같아서.

    “신기한 물건이라 하시면서 후의에 감사한데 유구는 어찌 방문했냐고 여쭙사옵니다.”

    방문 목적.

    다들 알다시피 교역을 위해서다.

    그리고 굳이 교역을 위해서 왔다는 말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두 나라가 교역을 했으면 하는 차원에서 전하께서 보내신 거라 하시게. 사신으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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