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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63화 (16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63화>

    ***

    “영감.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옵니까? 이게 함진아비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김전은 연신 툴툴거리는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손집경 (孫執經)에 고개를 떨궜다.

    사실 민망하기도 하고, 뭐라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떨군 것에 불과했지만 그런 모습이 집경에겐 더 어처구니 없고 화가 나는지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개 노비의 혼례입니다. 일개 노비의 혼례에 반사를 이처럼 성대히 하는 것도 예에 없는 일이지만, 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찌 영감께 반사품을 전하라 할 수 있단 말이옵니까?”

    “반사문도 내린다 하지 않으셨는가.”

    “반사문이 구실임은 코흘리개 삼척동자도 알 만한 사실이옵니다. 오히려 못 하겠다 강자를 놓아도 무리가 없는데 어찌 수긍을 하시려 하옵니까? 들고 일어나야 마땅한 일이옵니다.”

    “들고 일어나? 어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김전이 모처럼 반응을 보이자, 손집경은 다시 자리에 착석한 채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일은 최소한 문묘(공자를 모신 사당)를 모시는 이들이라면 납득할 수 없는 일일 테니, 들고 일어난다 한들 당위가 없는 일이 아니옵니다. 이 일을 태학생들에게 언질한다면 필시 태학생들부터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날 것이니, 그리되면······.”

    “그리되면? 그리되면 태학생들 전부가 갈려나감을 모른단 말인가? 바로 얼마 전에도 태학생들이 모두 갈려 나갔네. 내 굴욕을 면하고자 태학생들을 사지로 등떠밀란 것이 사성이 말하고자 함인가?”

    “그런 뜻이 아님은 영감도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부당한 명이옵니다. 이게 일개 종놈에게 하례하러 가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으며, 일개 종놈의 혼례를 국경(國慶)으로 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사옵니까?”

    “일개 종놈이 아니지, 대군이 아끼는 몸종이지.”

    “대군이 아끼는 몸종은 종놈이 아니란 말이옵니까?”

    “다르지.”

    “허, 어찌 말이옵니까?”

    “대군이 아끼는 몸종이니 전하의 축하를 대신 전하러 가는 사절인 게지.”

    집경은 말도 안 나오는지 허- 짧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오히려 태평하게 책장을 넘기는 대사성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서였다.

    “어찌 그리 태평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영감께서 이 일을 수긍하신다면 앞으로 전하의 말씀은 곧 칙서(황제의 명령서)와 다를 바가 없어질 것입니다.”

    “언제는 아니 그랬던가.”

    “영감!”

    “신하는 싫든 좋든 임금의 명을 받들 수 밖에 없네.”

    “명도 명 나름이지요. 이게 명입니까? 전하께선 대놓고 굴욕을 주고 계십니다.”

    “사직하란 어명이면 그리하면 되는 거고.”

    “영감!”

    “어허, 귓청 떨어지겠네. 내 알아서 할 터이니 자네는 일이 새나가지 않게 입단속이나 하게. 태학생들이 또 들고 일어나면 애꿎은 사람들만 다쳐.”

    노골적인 축객령에 집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김전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책을 덮었다.

    집경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그저 태평한 듯 굴었지만 어찌 마냥 태평하기만 하겠는가.

    착잡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따르지 않을 도리도 없다.

    안 따르면 어쩔 건가?

    집경의 말처럼 태학생들을 동원해 시위라도 할 건가?

    그랬다간 애꿎은 사람들만 다친다.

    다만 씁쓸한 건 사실이다.

    차라리 사직하라 하셨다면 사직이라도 할 텐데, 내려진 어명을 거역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짜고짜 지금과 같은 시기에 사직소를 내놓는 건, 그에게 내려진 어명을 무시하는 처사에 가깝다.

    좋건 싫건 반사품을 전달··· 아니, 집경이 말한대로 함진아비 노릇을 해야 했다.

    “후.”

    애써 마음을 다잡은 김전은 다시금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영감. 모든 채비가 끝났사옵니다.”

    함께 반사품을 전달하러 갈 금군이었다.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때가 도래하자 역시나 입맛이 쓰다.

    “가세.”

    “예.”

    ***

    이제 조선에 온 지 3년차가 됐다.

    그 3년간 24년을 살면서 겪었던 희로애락을 전부 겪은 것 같지만, 오늘만큼 감정이 이상한 적은 또 없었던 것 같다.

    희(喜)와 애(哀)가 공존한다고나 할까?

    오늘은 덕산이가 장가 가는 날이었다. 경사스러운 날인데 왜 기쁘면서도 슬픈지 모르겠다.

    부모님들이 자식들 시집, 장가 보내면 이런 기분이려나?

    생물학적인 나이 자체는 덕산이가 더 많아도 왠지 덕산이가 장가간다니 믿기지 않기도 하면서, 뭔가 서글프다.

    “꺼억!”

    평소에는 나오지도 않던 트림도 오늘은 별스럽게 자주 나온다.

    술 먹어서 그런가?

    하늘이 빙글빙글돈다.

    술을 어지간히 마시긴 한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이 정도에서 자제를 하겠지만 왠지 술이 당기는 날이다.

    쪼로록-.

    대접에 탁주를 한가득 따라 벌컥- 들이켰다.

    술이 참 달다.

    나는, 달디 달지만 뒷맛은 쌉싸레한 탁주 맛을 음미하면서 뜰을 내려다봤다.

    정겨운 풍경이다.

    노비의 혼례라 이런저런 하객들을 초대해 축하를 해주진 못 했지만, 그래도 집안 식구들끼리 나마 모여서 잔치를 벌이는데 모두들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자식.”

    개중에 가장 기분 좋아 보이는 녀석은 단연 덕산이었다.

    오늘 만큼은 번지르르하게 새옷도 잘 다려입은 녀석은 행랑 식구들이 축하주를 건네면 거절 않고 넙죽, 넙죽 마시고 있었다.

    역시,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다.

    아, 다들 즐기고 있는데 왜 나만 중2병 발병한 소년처럼 대청에 앉아있냐고?

    아까까진 나도 같이 즐겼다. 취기가 좀 오르는 것 같길래 마루에 좀 누워서 쉰다는 게, 쉬진 않고 뻘생각만 하고 있다.

    “덕산아!”

    나는 행랑 식구들과 함께 흥겹게 춤사위를 추고 있는 덕산이를 불렀다.

    덕산이는 후다닥 뛰어왔다.

    “너 이 자식. 너도 이제 드디어 사내 구실 하는구나. 기분 좋냐?”

    “···송구하온데 취하셨습니까요?”

    “취하긴! 내가 인마. 동탁이랑 장비도 저리가라 할 술고래야. 알면서 취했단 소리나 하고··· 딸꾹. 있어.”

    “아니, 아까도 하신 말씀 또 하시길래··· 헤헤. 기분은 좋습죠.”

    “그래. 가서 즐겨라.”

    “대감마님은요?”

    “난 잠깐 바깥 바람좀 쐬고 올게.”

    “제가 뫼시겠습니다요.”

    “됐다.”

    부축하려는 덕산이를 뒤로한 나는 뜰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밖으로 나온 건 올 사람이 안 와서다.

    대사성 김전.

    형님이 내려주신 반사품을 김전이 가져오기로 돼있었다.

    근데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다.

    아, 덕산이는 형님이 반사품 내려주신 거 아직 모르고 있다.

    짠! 하고 깜짝 놀래켜 주려고 했는데 대사성 씨가 좀 늦네.

    라고 생각하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저기, 대사성이 오신다.

    나는 후다닥 대사성에게 뛰어가 말고삐를 잡았다.

    “이제 오십니까?”

    “과음하셨습니까?”

    “뭐, 좀 했죠.”

    “크흠.”

    김전을 일별한 나는 수레에 담긴 반사품들을 흘겼다.

    “반사문은요?”

    “여깄습니다.”

    “저 먼저 들어가 있겠습니다. 반사품은 금군 나리들이 마당으로 좀 옮겨주세··· 아니, 영감.”

    “예?”

    “식전 아니십니까?”

    “예, 뭐.”

    “그럼 같이 들어가시죠.”

    내가 김전의 팔을 잡고 이끌자 그는 당혹스런 얼굴을 하고선 날 멀뚱멀뚱 쳐다본다.

    마치 그 표정이, 제가 말입니까?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거길 왜 갑니까?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식전이시라면서요? 명색이 잔칫날인데 오신 손님 빈손으로 돌려보낼 순 없죠.”

    극구 사양하는 김전을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이덕이에게 상 하나를 차려달라 하고는 반사문을 꺼내들었다.

    “자자, 주목. 주목들 합시다.”

    “···”

    “이건 형님 전하께서 우리 덕산이가 결혼한다고 하니까, 반사품들과 함께 내려주신 교서입니다. 대표로 제가 읽··· 꺼억. 읽겠습니다.”

    갑자기 주위가 시끌벅쩍해진다.

    일개 노비의 혼례에 형님이 교서를 내렸다는 말 때문이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반사문을 읽어나갔다.

    “···하니 신분이 미천하다 하여 나의 백성이 아닌 것은 아니다. 임금의 도리는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것에 있고, 백성의 도리는 혼인하여 부모에게 효하고 후손을 낳아 기름에 있으니 덕산이 너 또한 아이를 잘 낳아 길러 은혜에 보답하라.”

    “서, 성은이 망극합니다요.”

    덕산이가 반사문을 향해 넙쭉 부복했다.

    때마침 금군들이 반사품들도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물건들 전부 형님이 덕산이와 전금이에게 내린 선물들이라 하니, 덕산이는 물론 모두들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형님 잘 둔 덕에 기분이 좋아진 것도 잠시.

    “자, 저기 계신 분은 내 후임으로 대사헌이 되실 대사성이십니다. 모두들 박수!”

    행랑식구들이 엉겁결에 박수를 치자, 소반을 받고 수저를 들려던 김전이 어리둥절한 채 날 바라봤다. 나는 그런 김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영감, 제가 평소라면 이런 부탁 안 드리겠지만··· 이, 술기운이란 게 평소에 못 하는 것도 하게 만드니 술기운 아니겠습니까? 덕산이랑 전금이한테 축사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

    “가, 갑자기 축사라 하오시면··· 아니 한데 대사헌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흡!

    나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거 비밀이었는데 깜빡했다.

    뭐, 사실 비밀로 할 것도 없긴 했다만······.

    긁적.

    “그건 제가 나중에 차차 말씀드릴게요. 어쨌든 축사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등떠밀린 김전이 쭈뼛거리며 마당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어색한 지 그는 괜히 헛기침을 터뜨리며 덕산이와 전금이를 바라봤다.

    “에··· 흠. 이 사람이 이런 식의 혼례는 처음 보기도 하고, 에, 또···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그, 말주변이 없기도 해서··· 그러니까, 으음.”

    등떠밀리긴 했어도 막상 축사를 하려니 말이 쉽게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편하게 하시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대감께서 편하게 하시라니 내 편하게 말하겠소이다. 내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런 혼례는 본 적이 없소만, 절차와 방식은 다를지라도 남녀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이치는 같을지니 어찌 다른 혼례라고만 할 수 있겠소? 본시 혼례란 집안의 도리를 바로잡아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후대를 잇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세종대왕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혼례란 삼강의 근본이요 시초를 바로 잡는 도리이므로 성인들 역시 혼례를 중시하여 의식을 마련하였다’하셨소.”

    “···”

    “하니 여기서 말하는 삼강의 근본이 과연 무엇이겠소? 옛말에 이르기를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하였으니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단 말이오. 이 말을 바꿔말하면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가 되겠소만, 어찌 여자에게만 국한되는 말이겠소? 이제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열부(烈夫)로서 두 아내를 섬기지 않아야 하는 것 역시 지아비의 도리가 되는 것이오. 비록 지금에 이르러······.”

    ···술이 확 깬다.

    나도 뭔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행랑 식구들은 오죽할까?

    축사가 점점 잔소리로 변질되는 것 같길래, 나는 대사성 영감의 축사가 끝나자마자 박수를 쳐서 다운되는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고는 미리 만들어둔 단상에 올랐다.

    이미 결혼식치고는 숙연한 분위기라던지 엄숙한 분위기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명색이 결혼식인데 분위기가 왁자지껄하건 말건 주례사가 빠질 순 없잖은가?

    저 단상도 내가 주례를 보려고 미리 준비해둔 거다.

    물론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주례는 일찌감치 생략하기로 했고, 가장 중요한 것들만 골라서 하기로 했다.

    “자, 신랑 덕산이는 전금이를 아내로 맞아서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고 존중할 것을 맹세하겠느냐?”

    “예, 대감마님.”

    “전금이 역시 덕산이를 아내로 맞아서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고 존중할 것을 맹세하겠느냐?”

    “···예, 대감.”

    “자! 두 사람이 서로 부부가 되기를 맹세하였으니, 주례를 맡은 본인은 이 혼례가 서로간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시간 부로 덕산이와 전금이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곳곳에서 박수 갈채가 터져나왔다.

    사실 이 시대 혼례에도 부합하지 않았고, 저 시대(?)의 결혼식에도 부합하지 않은 절차와 방식이었지만, 그래서 어딘가 엉성하고 고급진 분위기는 전혀 없었지만, 대사성이 말한 것처럼 절차와 방식이 무슨 대수겠나?

    함께 축하해주고 함께 즐거워하고, 기쁜 날을 함께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텐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진심으로 기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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