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62화>
***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누가 보면 제가 사지로 가는 줄 알겠습니다.”
난처하다, 참 난처해.
“하지만 배가 얼마나 위험한데요.”
여울이 때문이었다.
아, 맞다. 이제 여울이에게는 씨(氏) 자는 안 붙이기로 나 혼자 다짐했다.
나보다 한 살 많긴 하지만··· 한 살 차이면 친구기도 하고, 연인들 간에 연하라고 해서 남자가 여자에게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잖아?
이름 앞에 자꾸 씨 붙이면 거리감 있어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좌우지간, 지금은 그런 여울이를 달래고 있다.
출국날이 가까워지면서 여울이는 자꾸 불안한 지, 닷새 전부터 아이처럼 칭얼거리고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라 귀엽고 고맙기도 한데 5일간 지속되니 이제는 정말 난처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별 수 있나?
달래야지.
“전쟁터도 갔다 왔는데 배가 대수겠습니까?”
내가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었던 원인이 이것이기도 하다.
진짜로 난 실전(?)을 겪은 몸이거든.
뭐, 부사령관으로 가긴 갔어도 여진족은 코빼기도 못 보긴 했다만··· 임시 사령관으로 반란도 진압했고, 역적도 소탕했었다.
그거에 비하면 배는 뭐··· 껌이지, 껌.
“이제 얼마나 남은 거죠?”
“음··· 정확히 사흘 남았네요.”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이 참 쏜살같다.
장복수가 운종가 한복판에서 사지가 찢겨나가는 거열로 최후를 맞이한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달 가까이 흘렀고, 위세등등하던 장녹수가 광화문 앞에서 능지처참 당한 게 벌써 한 달 반으로, 과거형이 됐다.
그 뒤로도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사실 장녹수를 처형시킨 일에 비하면 사건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지만··· 내가 말했던가?
장녹수가 해먹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그걸 장녹수 혼자 해낼 수 있을리 만무했다.
장녹수가 저지른 비리를 들은 형님은 수사를 명령했고 거기서 갈려나간 위인들이 스무명이 넘는다. 개중에는 육의전 상인, 그러니까 21세기로 치면 재벌 총수님도 계셨고 관리들도 있었다.
다행히(?) 장녹수의 협박에 의한 점이 참착돼서 목숨은 부지했지만, 역적과 공조했다는 혐의로 재산은 적몰당했다.
사실상 생매장 시켜버린 거지, 뭐.
“사흘··· 안 가면 안 되는 건가요? 다른 분들도 많지 않겠습니까?”
“많죠. 많긴 한데··· 제가 아니면 안 되니까요.”
알다시피 내가 오키나와 가려는 건 식도락 때문이었다.
당연히 나를 대체할 위인이 있을 턱이 없다.
형님도 내게 전권을 맡기신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정사로 가면 전권?
맡길 수가 없지. 나니까 외교적인 부분에서 전권을 맡기신다고 한 걸, 잘 안다.
그런데 출국이 사흘 남은 지금 안 가겠다고 떼쓰는 건, 형님을 배신하는 일에 가깝다.
형님도 나한테 전권을 맡기겠다는 결정을 내리시기까지 고민이 제법 많으셨을 텐데 말이다.
“부인은 제가 없는 동안 중전마마와 잘 지내고 계세요. 요즘 부쩍 우울해하시는 듯 하니 잘 달래드리구요.”
“알겠습니다······.”
마지못한 척 수긍하는 여울이지만, 나는 잘 안다.
내일 또 나를 불러다가 안 가면 안 되냐고 할 게 뻔하거든.
벌써 닷새째 있었던 일이다.
물론 고마운 일이다. 날 걱정해준다는 건 그만큼 날 생각한다는 뜻이고, 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언제나 고마운 일이지.
“그럼 쉬세요.”
나는 또 붙잡힐 새라 신속정확하게 안채를 빠져 나왔다.
출국을 사흘 앞두고 눈코뜰새 없이 바빠진 요즘이다.
오히려 대사헌으로 일할 때 보다 더 바빠진 느낌인데 특히 오늘은 할 일이 더 많다.
뭐, 별 건 아니고··· 사실 지난 두 달간 우리 집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헤헤헤, 전금아.”
양반은 못 될 녀석이다.
저깄네.
지금 저기 보이지? 안 보여?
안채 뒤 담벼락 말이다.
덕산이는 헤실헤실거리고 있고 전금이는 쑥스럽다는 듯 몸을 꽈배기처럼 배배 꼬고 있잖나.
짐작이 맞다.
카사노바인 이 몸께서 나서도 소득이 없었던 덕산이의 연애사업.
도무지 소득이 없어서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던 그 연애사업!
지난 두 달간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덕산이가 숫기가 없어서 대쉬를 못 하고 어버버만 거렸는데 그걸 보다 못 했는지 전금이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래서 요새는 틈만 나면 연애질이다.
확 가서 산통 깨고 싶지만 내가 또 누군가.
부처도 울고갈 보살 아니던가.
얌전히 사랑채에서 덕산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전금이랑 연애는 잘 하고 왔냐?”
흠칫.
“여, 여, 연애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저, 마당 쓸고 왔는뎁쇼.”
“이놈이 이제는 연애하더니 거짓말까지 하네?”
“···”
“너 임마 내가 다 봤어, 안채 담벼락에서! 어? 이 자식이 누굴 바보로 아나.”
“보, 보셨습니까요? 헤헤.”
“거기 앉아봐.”
“예.”
덕산이가 마루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너랑 전금이 나이가 올해 몇이지?”
“아시다시피 저는 스물이고 전금이는 열아홉입죠?”
여기선 일찍들 결혼해서 남자 나이 스물, 여자 나이 열아홉이면 혼기가 꽉 찼다고들 표현한다.
다만 그건 상민들 기준이고, 노비는 또 다르다.
혼기가 찬 건 맞는데 늦었다는 표현은 잘 안 한다.
노비들에게 결혼이란 건, 주인이 짝을 지어줘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노비들 중엔 노총각, 노처녀들이 흔하다.
“시간 빠르네. 너랑 전금이가 벌써 스물에 열아홉이라니······.”
“그러는 대감마······.”
“왜 말을 하다말어?”
“아, 아닙니다요.”
내 나이 말 하려고 했던 건가?
뭐, 육체적인 나이는 확실히 덕산이보다 적다.
열여덞이니까.
“좌우지간, 이제 너희도 슬슬 합방(결혼)해야지?”
“하, 합방이라굽쇼?”
“너희 합방 안 시키면 행랑에서 나 욕할 거 뻔히 아는데, 뭘. 새삼스럽게.”
“그, 그럴 리가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 자식아. 너도 그렇지만 전금이도 마음의 준비는 다 했을 거 아니야?”
덕산이에겐 내가 늘 “합방 언제할래?” 언질을 주기도 했었고, 전금이야 뭐.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섰으니 마음의 준비는 해두고 대쉬를 했을 거다.
사실 일반적인 노비들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고 자시고 할 게 없다.
너랑 너 내일부터 합방해.
주인이 지시하면 그 날로 부부가 되거든.
“그렇기는 합지요.”
“그럼 모레 어떠냐?”
배가 잘못될 일은 절대 없겠지만 사람 앞날이란 게 또 100% 확신 할 순 없다.
“모, 모레요? 너무 이른 거 아닌지······.”
“나 사흘 뒤면 떠나는데 그전엔 해야지.”
시간이 많았다면 덕산이 결혼은 성대하게 치러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이기적일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건 보고 출국하고 싶달까?
그래야 좀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요.”
“좋아. 그럼 얼른 준비부터 하자.”
***
말했다시피 노비들의 결혼이란 지극히 간소하다.
한 방에 남녀 한쌍을 밀어놓으면 그게 결혼인 셈이다.
좀 더 성대한 결혼이라고 한다면, 그 방 안에 정안수가 떠져 있다는 것 정도?
그럼 둘이서 혼인 서약 비스무리한 걸 하는데, 이게 좀 성대한 노비들의 결혼식인 것이다.
그래도 난 정말 성대하게 치러주고 싶었다.
내가 이 몸의 주인이 되고, 가장 먼저 접한 게 덕산이기도 하고 그간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준 사람도 덕산이니 말이다.
노비에게 성대한 결혼식을 치러줬다는 주위 이목이 쏠리긴 하겠지만··· 음.
애당초 내가 남들 이목 신경 썼으면 대사헌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시간이 촉박해서 내가 생각한 성대한 결혼식은 무리겠지만 잔치 분위기는 내고 싶어서 소를 한 마리 잡았다. 사내종들한텐 따로 떡도 좀 만들라고 말해뒀고, 가락지랑 비녀, 신발도 하나 사서 덕산이한테 줬다.
물론 가락지와 비녀, 신발은 전금이거고, 덕산이한테는 따로 신발과 새옷 등을 선물했다.
이 모든 걸 반나절 사이에 뚝딱 해결하려니 약속에 늦고 말았다.
무슨 약속이냐고?
내가 오늘은 특히 바쁘다고 했던 거 기억하나?
오늘 형님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혼수 준비 때문에 바빠서 약속을 저녁으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미뤘는데도 일이 다 안 끝나서 좀 늦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일을 모두 마무리 짓고 헐레벌떡 입궐해 침소로 향했다.
무안한 표정으로 들어가자 형님이 손사래를 친다.
“아니다. 덕산이가 합방을 한다지?”
“들으셨습니까?”
“점심때 들었다.”
“네, 사실 그것 때문에 좀 바빴거든요. 혼수도 얼른 알아봐야 되고, 준비할 것도 많아서.”
“혼수까지?”
“네.”
“음. 네가 덕산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건 알았다만 아끼는 종이긴 한 모양이로구나.”
“뭐, 그런 셈이죠.”
“상선. 밖에 상선 있는가.”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얘기를 하다말고 상선을 부른 형님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형님을 날 바라보며 피식웃는다.
“대군의 몸종이 모레 합방을 한다고 하니 내 반사(선물)를 좀 해야겠다.”
“하교하시옵소서.”
“흑칠하고 자개가 박힌 함과 내빙고의 얼음, 또 과일과··· 어, 그래. 이번에 강원도에서 올라온 표피가 몇 장 들어왔던가?”
“예. 20장이 들어왔사옵니다.”
“하면 표피 한 장과, 인삼 2근, 표리(옷감)와 말 1필, 술과 고기를 내리도록 하라.”
“···송구하오나 과하지 않을는지요?”
“덕산이라면 나도 몇 번 본 몸종이다. 혼례를 치르니 이 정돈 해줘야지.”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아, 그리고.”
“예.”
“무수리들이 반사품들을 이고 가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그리 되면 격이 떨어지니 반사품들을 호위하는 건 반사하는 예에 맞춰 금군들이 하도록 하고, 다만 그 책임자로는 대사성을 보내도록 하라.”
“대, 대사성을 말이옵니까?”
이례적인 명에 상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사문(반사하는 교서)을 함께 내릴 것이니 대사성을 보낸다 하여 의아해 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상선대감이 빠져나가고, 나는 약간 얼이 나간 채 되물었다.
“대사성께서 자존심 상해하실 텐데요?”
일개 노비의 결혼식에 짐꾼으로 가게 생겼으니 자존심이 상하다 못 해 사직이나 안 할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괜찮다.”
과한 감이 없잖아 있긴 해도 괜찮으시다는데 내가 뭐라 하겠나?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야지.
“감사합니다.”
“내 너에게 입궐하라고 했던 것은 말이다. 후임자를 정해야 되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후임자요?”
“대사헌을 영영 공석으로 둘 순 없잖으냐.”
“아··· 편전에서는 누가 언급됐습니까?”
이 시대는 장관들에 대한 청문회는 없지만 심사는 존재한다.
그 심사는 어떤 부처의 장관이냐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비교적 느슨한 심사도 있는 반면, 기준이 엄격한 심사도 있다.
그리고 대사헌은 후자다.
대개 심사 기준이 엄격하다.
“편전에서는 윤금손(尹金孫), 안윤덕, 유자광, 이계맹, 김봉(金崶) 정도가 거론됐다. 한데 마음에 드는 위인이 있어야지.”
“좌참찬(안윤덕)이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사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유자광은 좀 아는데 다른 인물들은 생면부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들이라 대사헌에 적임인질 모르겠다.
하지만 좌참찬은 몇 번 보기도 했고 성품이 강직해서 대사헌 직에 딱이다.
“좌참찬은 나중에 의정으로 기용하려 하는데 대사헌의 소임을 맡기면 아무래도 말이 많지 않겠느냐.”
대사헌의 자리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자리긴 하다.
잘 해도 욕 먹고, 못 해도 욕 먹는 과대 같은 자리랄까.
적이 많이 생길 수 밖에 없단 소리다.
물론 요직중의 요직이란 건 분명하지만.
“음. 형님은 따로 누굴 생각하시는데요?”
“안처직이 괜찮은 듯 한데··· 안처직 역시 나중에 달리 소용이 있을 듯 한데다 장령으로 기용한 지 1년만에 대사헌으로 영전시킨다면 분명 말들이 많을 것이다.”
“제예(임숭재)는 어떻습니까?”
“외척을 앉혔다고 오히려 더 말들이 많을 테지.”
퍼뜩 떠오르는 사람들이 없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임숭재, 안윤덕, 안처직이 고작인데 이 사람들은 전부 안 된다 하고··· 장곤 선생님은 대사헌으로 영전하기엔 연차가 모자라고 김굉필을 거론하자니 김굉필은 좀 과격하다.
다른 사람들한테 들어보면 요샌 옛날에 비해 점잖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여전히 과격하셔서 좀 아니올씨다다.
“인물이 이리 없단 말이냐.”
“아.”
“떠오르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있긴 한데 형님께서 싫어하실 듯 해서······.”
“괜찮다. 말해보아라.”
“그게, 대사성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