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61화 (16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61화>

    ***

    편전.

    “···하오나 전하. 이덕은 녹수와 함께 범죄를 공모한 죄가 있사옵니다. 하온데 어찌 녹수와 복수는 벌하고, 이덕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질까 우려되옵니다.”

    대사성 김전이다.

    차라리 녹수가 아니라 김전이 범인이었다면 속이라도 후련하겠건만··· 아니, 함께 가담이라도 했다면 저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을 텐데··· 씁.

    아쉬운 마음에 융은 괜히 입맛을 다셨다.

    “대사성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만 중전이 죄를 사해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지 않은가?”

    “대저 나라의 일에는 나라가 정한 국법이란 게 있기 마련이옵니다. 국법을 무너뜨리는 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옵고, 정령(政令)과 사감(私感)이 개입하여 절제와 자제를 하지 못 할 때 무너지는 것이옵니다. 지금이 아니 그러하다 누가 말할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내 옛날 일을 들먹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만··· 태종대왕 시절 영락제가 정난의 변을 일으켰을 때, 건문제(建文帝)는 봉천전에 불을 지르게 하고 스스로 대궐에 목매달아 죽었다. 그러자 따라나서서 죽음을 처한 것은 신하들이 아니라 궁녀였다. 경도 잘 아는 사실이지 않더냐?”

    때로는 조신(朝臣)들 보다 궁녀들이 더 충심이 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덕은 변란이 일어나 상전을 따라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해 하였사옵니다. 어찌 건문제 때 궁녀들과 비교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제기랄··· 궁시렁거린 융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본시 재변이 발생하면 궁녀를 내보내는 것이 상례이다. 이번 일도 어찌 재변이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이덕이 재변의 당사자긴 하다만 참하는 것은 하늘의 진노를 살 수 있는 일이니 그리되면 분명 한재(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여 백성들이 고초를 겪을 것이다.”

    “이 일이 어찌 재변이 될 수 있······.”

    “또한 세종대왕께서는 일찍이 자비로운 마음이 있으셨는데 나는 이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세자 시절부터 강성하였다. 내 비록 대왕처럼 어질지 못 하고 마구잡이로 날뛰는 마음이 있어, 자비를 베푼 일이 드문데 내 지금이라도 자비를 베풀려는 것이다. 대왕께서도 위사와 사통한 궁녀를 용서해준 일이 있지 않던가?”

    “···세종대왕 시절 있었던 이영림과 궁녀 전미의 일은 전미가 출궁을 하기도 했고, 또 밖에 나간 뒤로는 어렵게 생활한다는 것이 알려져 대왕께서 자비를 베푸신 것이옵니다. 어찌 이번 일과 유사하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럼 대사성은 이덕을 참하기라도 하라는 말이냐?”

    “율법이 그러하다면 참해야 하옵니다.”

    “경들은 어찌 말이 없는가. 대사성과 의견이 같은가?”

    “신 사헌부 장령 안처직 아뢰옵나이다.”

    “오, 장령. 그래, 말해보아라.”

    안처직이 김전을 흘겼다.

    “대사성의 말씀은 분명 일리가 있사옵니다. 나라가 정한 율법에 따른다면 응당 이덕은 참해야 마땅하옵니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옵고, 후세의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하여 경계할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하오나 사람의 일이 어찌 법대로만 돌아갈 수 있겠사옵니까?”

    “그렇지. 인간사가 어찌 원칙으로만 돌아가겠는가.”

    “그러하옵니다. 무릇 법이란 사람을 편리하게 다스리기 위해 만든 것이니, 지금의 일을 상고한다면 어찌 엄격히 적용 할 수 있겠사옵니까? 더욱이 대사성께선 이덕의 과만 말씀하고 계십니다만, 공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전하, 안처직은 지금 교묘한 말로 전하를 기만하고 있사옵니다. 역적에게 공이 있다 한들 과를 상쇄 시킬 순 없는 법이옵니다.”

    “됐다, 장령은 계속하라.”

    “전하께서는 이덕을 내총(임금의 사랑을 받음)하셨고, 중전마마께서는 너그럽고 인자한 덕으로 하여금 이덕을 가까이 하셨사옵니다. 비록 이덕이 강상을 뒤흔드는 대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옵고, 이는 천번이고 만번이고 찢어 죽인다 한들 할 말이 없는 처사겠습니다만 중전마마께서 용서하셨사옵고 또한 이덕이 이 일을 끝까지 함구했다면 어찌 녹수의 소행임을 밝힐 수나 있었겠사옵니까?”

    “장령의 말이 옳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장령이 하는구나. 장령의 말처럼 이덕이 이 일을 끝까지 함구했다면 녹수의 소행임은 밝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애먼 사람이 죽어 나갔겠지. 그 애먼 사람이 대사성이었을 줄 누가 알겠는가?”

    흠칫.

    김전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역모가 발생하면 일단 족치고 본다.

    혐의가 있건 없건.

    일단 족치는 것이다. 그러다 작은 단서라도 발견하게 되면, 그 작은 단서와 연관된 사람은 줄초상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덕과 말이라도 섞은 사람들은 모조리 끌려나올 테고, 그 사람중 하나가 자신이 아니란 보장은 못 한다.

    “···전하의 뜻이 확고하오니 따를 밖에 도리가 없겠사오나 후세에는 필히 의아해할 것이옵니다.”

    “후세의 평에 연연한다면 내 경을 대사성에 제수하지도 않았겠지.”

    “···”

    “모두 들으라.”

    “···”

    “이덕은 천인공노할 역적이다. 하지만 공과가 또렷하니 어찌 과만 지적하여 벌할 수 있겠는가? 내 역적을 벌하지 않음이 실로 두려운 일이란 건 알고 있으나, 중전이 간청하는 바가 매우 큰 데다, 장령의 말처럼 이덕이 미리 자백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애꿎은 사람들만 다쳐 나갔을 것이니 공이 과를 상쇄한다고 할 순 없어도 참작할 여지는 있다 하겠도다. 그러나 참작을 한다 할지라도 역적은 역적이니 어찌 궐에 그대로 둔 채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영구히 노비로 삼아, 그 죄를 뉘우치게 할 것이고 이덕은 이번 사건에 실마리를 제공한 대사헌에게 하사할 것이니 그리 알라.”

    “녹수는 어찌 하오리까?”

    “대사헌에게 듣자니 응당 역적에 준하여 벌함이 좋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지?”

    “예, 전하.”

    “녹수의 죄는, 부녀의 질투가 황소도 쓰러뜨린다지만 그 질투는 칠거지악(아내를 내쫓을 명분이 되던 죄)중에서도 으뜸이다. 그 질투로 말미암아 내 차마 입에 담기도 망측한 죄를 저질렀으니 백성들이 왕실을 존경하는 마음이 여전하겠는가? 그 재산은 모조리 적몰하고 육신은 능지로 다스려 죄를 뉘우치게 하겠다.”

    그래도 설마 총애하던 첩실을 능지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할 줄은 몰랐는지 편전엔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융의 뜻은 확고했다.

    녹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게 질투가 부른 비극이 되든, 그녀의 이기심이 부른 참극이 되든.

    그녀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부터, 아니.

    감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생각을 했다는 데에서 그녀에 대한 애정은 식었다.

    미련 역시 없었다.

    ***

    집 바깥이 소란스럽다.

    왜 그런지는 모두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오늘이 비선실세의 또 다른 비선실세인 장복수의 처형날이다.

    정확히 말하면 거열형.

    나는 잘 몰랐는데 장녹수와 장복수 자매는 의외로 악명이 자자한 편이었다.

    형님의 위세를 빌려서 민가를 빼앗거나 헐값이 사들이는 일은 뭐, 악행 축에도 못 꼈다. 그건 그녀의 입장에서 당연한 ‘권리’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육의전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아 잡쉈다.

    음,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악행이라고 하긴 애매네.

    정경(政經)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기도 하고.

    육의전 상인. 그러니까, 현대로 치면 CED나 어디 그룹 총수쯤 되시는 위치의 분들에겐 형님의 총애를 받는 장녹수가 그럴싸한 병풍 역할을 해줄 거란 기대를 했을 테니까.

    물론 이게 죄가 아니란 건 아니고, 여기선 관례에 가까운 일이라 이것 하나만으론 책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돈놀이를 좀 크게 하셨다.

    일반적인 고리대금을 하신 게 아니라, 좀 쉽게 말하자면 장복수의 남편. 녹수에겐 형부되는 김효손(金孝孫)의 명의를 빌려서 사채를 좀 크게 하셨다.

    원성이 자자하지 않았겠냐고?

    안 자자했다. 자자 할 수가 없지. 장녹수가 누군데?

    임금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다. 입 한 번 놀렸다가 쓱싹- 되는 거 순식간이다.

    과장 아니냐고?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단다. 이병정(李秉正)이란 사람이 동추(동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장녹수네 집 하인에게 큰 모욕을 당해 녹수에게 따지니 오히려 협박을 들었다나?

    담이 작은 이병정 씨는 이게 화근이 될까 싶어 오히려 뇌물을 바치면서 까지 죄를 구했단다. 노비 단속 못 한 건 장녹수인데도 말이다.

    자, 동지중추부사다. 그런 사람도 장녹수에게 입 하나 뻥긋 못 했는데 일반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지만, 그 진실한 불편을 털어놓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사관들도 입 다물고, 관리들도 쉬쉬하니 소문이 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 뭐 여기까진 그럭저럭 참는다고 치자.

    다만 더 큰 문제가 또 있었다.

    매점매석이다.

    흉년이 들라치면 아까 말한 형부 김효손의 명의로 쌀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그럼 당연히 도성내 쌀값이 폭등하겠지?

    이렇게 차익좀 많이 남겨 먹었다. 그런데도 문제되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로 말이다.

    좌우지간, 이런저런 일로 악명이 자자한 장녹수와 장복수다 보니 악당2 장복수의 처형을 보러 인파가 좀 많이 몰렸다.

    심지어 경기도 이곳저곳에서도 구경하러 찾아올 정도라고 하니 말 다 했다.

    이렇게 장복수의 처형으로 시끌벅쩍한 도성이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집은 고요했다.

    “흐음.”

    사랑방에 자리잡고 앉은 나는 서안에 턱을 괸 채 열린 문틈 너머를 바라보며 침음했다.

    문틈 너머, 사랑방 뜰에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모자 상봉이 이뤄지고 있었다.

    “자, 장동아!”

    이덕이 장동이를 껴안고 흐느꼈다. 반면 장동이는 어미가 낯설고 어색한지 쭈뼛거렸다.

    형님은 약속대로 이덕이를 우리집에 보내주셨다. 하사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해서 말이다.

    물론 절차란 게 있고, 이덕이가 지은 죄가 아주 없지도 않기 때문에 장형이니 뭐니 형집행 한다고 보름이 지나서야 보내주시긴 했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지금처럼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모자 상봉이었다.

    그런데 막상 두 모자의 상봉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착잡하다.

    아, 오해는 하지말자.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떨어져 지내다, 드디어 만난 두 모자가 불쾌하다는 게 아니니까.

    그냥, 이제는 내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게 착잡할 뿐이다.

    꼼짝없이 2년을 더 일하게 생겼거든.

    이건 뭐, 전속 계약도 아니고.

    “크흑.”

    착잡한 마음에 연거푸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루에 앉아 있던 덕산이었다.

    “우냐?”

    “우, 울긴 누가 운다고 하십니까요.”

    “자식. 우는데 뭘.”

    “아닙니다요. 그나저나 이덕 아줌마는 어디로 보내면 될까요?”

    “갑련이 아줌마가 알아서 할 것 같긴 한데. 부엌이 좋지 않을까? 요리 솜씨 좋은 것 같던데.”

    “그럼 그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요.”

    자리를 더 지키고 있으면 터져나오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괜히 자리를 뜬 건지, 정말로 갑련이 아줌마한테 이덕이 문제를 말하러 가는 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어떻게 2년을 더 채우냐.’

    후, 이게 문제다.

    진짜 어떻게 채우지?

    시간이 쏜살같다지만 2년은 아무래도 너무 길잖아?

    대사헌 1년 해먹는 동안에도 스트레스 때문에 요절하실 것 같았는데 말이야.

    하, 2년. 차라리 군대가 더 낫······.

    아, 이 말은 취소다. 아무리 그래도 군대 보단 장관 2년 하는 게 낫긴 하겠지.

    “대감마님.”

    혼자 장관2년 VS 군대2년, 뭐가 더 나을지 영양가라곤 1도 없는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장동이와 이덕이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어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 인사는 무슨.”

    “그래도 대감마님 덕에 이 하찮은 목숨줄이라도 연명하게 됐고, 장동이랑 함께 지낼 수 있게 됐으니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나 있겠습니까?”

    이런 감사 인사는 언제 들어도 낯간지럽다.

    나는 괜히 귀찮은 태를 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네. 정 갚고 싶으면 물이나 좀 갖다 주던가. 목 마르네.”

    “물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할 말이 없고 괜히 낯간지러워서 물이라는 화두를 던진 건데, 허둥거리며 움직이는 장동이와 이덕이를 보니 피식 실소가 새어나온다.

    그래. 2년 까짓거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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