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59화>
***
긴장되는 마음과 함께 편전에 들었다.
사실 신하가 임금을 기다리게 하는 건 큰 불충이다. 문제될 소지가 다분한데도, 문제란 게 문제를 제기해야 문제라는 말처럼,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이미 시끌벅쩍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다들 그저 쓱- 눈길 한 번 주고 말 뿐이었다.
내 자리에 가서 시립한 채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다.
이미 내가 편전에 들기 전 부터, 사건은 역모 사건으로 비화된 지 오래였고 내가 편전에 들었을 땐 이 역모 사건을 어떻게 다스릴지에 대한 해당 장관들의 브리핑이 이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수사를 특명 받은 의금부에서는 의심 가는 남녀궁인들을 모조리 수사하겠다는 형님의 허락을 받았고, 병조에서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순라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브리핑을 했다.
사실 물리적인 반역은 아니라,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신하들은 만장일치로 금군의 숙위를 대폭 늘리는 데에 찬성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기밀도 기밀이지만, 시간도 많이 잡아 먹었다.
그렇게 장장 한시진 가량을 병풍처럼 서있을 즈음.
회의가 잠시 멈췄다.
각 장관들은 막간을 이용해 편전에서 나온 말들을 이행하기 위해 각각의 부처로 떠났고, 모두들 반시진 후에 다시 모이기로 결정이 났다.
일종의 휴정(休廷)으로, 형님과 독대할 기회가 장장 한시진만에 생긴 셈이었다.
나는 지체없이 형님께 독대를 요청했다.
형님은 별 의심없이 내 독대를 받아 들여주셨고, 우리는 편전을 나와 강녕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관도 물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리고 도착한 강녕전.
당연히 사관이 동석한다. 나는 예의 사관들을 흘기며 물었다.
형님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여태 내가 먼저 사관을 물려달라 청한 적은 없었으니까.
“어찌 그러는 것이냐?”
“송구하오나 역모와 관련한 일인데 혹 말이 새나갈까 우려됩니다.”
떨떠름해하시던 형님은 역모와 관련됐다는 말에 냉큼 사관들을 물렸다.
침소에는 자연히 둘만 남게 됐다.
“역모와 관련한 것이라고?”
형님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애써 냉정을 유지하려는 것 같지만, 얼굴빛이 침착과는 거리가 영 멀다.
오히려 내 입에서 역모 주동자가 튀어나온다면 당장이라도 금군을 불러 목을 쳐버릴 기세에 가깝다.
그래서 잠시 뜸을 들이고 어떻게 말문을 열지 생각을 정리했다.
다짜고짜 실행에 옮긴 게, 중궁전 궁관 이덕이라고 하면 곧바로 잡아들이라고 할 것 같아서 말이다.
“또 역모군요.”
“내가 부덕한 소치다. 내가 부덕하여 중전이 욕을 당했으니 역적을 색출한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능지할 참이다.”
“그··· 형님.”
“응?”
“일단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오해하지 말고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들어나 보자.”
“또 당연히 화가 나시겠지만 제 말을 안 끊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알았다.”
심호흡을 한 나는 입을 열었다.
“먼저, 중궁전의 기둥에 방술 재료들을 숨긴 건, 중궁전 나인입니다.”
흠칫.
“···지밀나인의 소행이란 말이렷다?”
“예.”
“너는 어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냐?”
내가 형님을 신뢰하는 것처럼, 형님도 날 신뢰한다.
형님에게 직접적으로 “너무조건적으로 신뢰함”이란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확신 할 수 있었다.
이건 대사헌으로서의 직감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직감이다.
그래서, 뭔가 추궁하는 어조지만 절대 추궁은 아니었다.
의심도 아니었다.
그저 다소 놀란 듯, 반사적으로 새어 나온 질문에 가까웠다.
“형님이 패초를 보냈고, 패초를 받은 게 광화문에서였습니다. 당연히 제일 빨리 와야 할 제가 늦은 거죠. 그러다 우연히 범인을 만났습니다. 그 지밀나인은 죄를 자복했구요.”
죄를 자복했다는 말에 형님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스스로 말이냐? 갑자기?”
“예. 스스로도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괴로웠다면 실행에 옮기질 말았어야지··· 내 이년을 당장 잡아들여 요절을 내버려야겠다. 누구냐?”
“김이덕이란 나인입니다.”
“김이덕··· 김이덕. 아, 기억난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년이 아니냐? 중궁이 그리 신경을 써줬는데······.”
“형님. 나인 혼자서 그 일을 할 순 없습니다.”
“배후가 있다는 말이렷다? 누구냐? 누가 그런 흉측한 짓을 저지른 것이냐? 대사성인가?”
아무래도 대사성 김전과 의견적으로 충돌하는 일이 잦다보니 형님은 대사성 김전을 배후자라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완전히 잘못짚으셨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실행은 이덕이 했고 계략은 집경당에서 나왔습니다.”
“집경당? 집경당······.”
대수롭지 않게 집경당을 되뇌던 형님이 멈칫거렸다.
“수, 숙용?”
그리고 확인차 다시 한 번 물으셨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짧게 주억거렸다. 형님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지 팔다리도 축 늘어졌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한 일에 가까우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녹수가 어찌··· 어찌 그런 흉측한 짓을······.”
넋이 나간 듯 되뇌는 형님의 자리가 새삼 두렵게 느껴졌다.
내가 본 것만 형님은 벌써 네 번 배신을 당했다.
처음에는 윤필상 같은 노신들에게.
다음으로는 박원종 같은 역적들에게.
또, 다음은 성준 같은 난신들에게.
그리고 이번엔 총애하던 후궁에게.
그가 가엾게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감정적이라 그런 걸까?
나는 형님이 감정을 추스르길 잠시간 기다렸다.
뭐, 사실상 감정을 추스른다는 말도 우스우니 진정되길 기다렸다고 하자.
겸사겸사 나도 타이밍좀 재고.
막말로, 분기탱천해 있는 형님인데 면전에 대고 “이덕이는 용서해주시죠?” 하긴, 좀······.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타이밍만 오지게 재던 무렵.
생각을 정리한 듯 형님이 물었다.
“···하나만 묻자.”
“예.”
“녹수가 했다는 증좌가 있는 것이냐?”
나는 답할 수 없었다.
그렇잖아. 내가 들은 건 이덕이의 진술 뿐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했을 때, 이덕이 구라··· 아니, 거짓말을 칠 것 같진 않다는 점이 가산 되었을 따름이다.
물론 이게 확증이 될 순 없다.
비관론자들 관점에서 본다면··· 아니, 다방면에 가능성을 열어두는 사람들이 보자면, 오히려 이덕이 녹수를 음해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근데.
내가 본 이덕은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자기 목숨과 자식 목숨을 담보로 잡으면서 까지 장녹수에게 원한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증좌는 없습니다. 이덕이의 진술 밖엔요.”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직설적인 내 말에 형님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다시 한참이 지나서 운을 뗐다.
“나는 녹수를 총애하고 신임했다.”
“압니다.”
“녹수가 하는 말은 무조건 신뢰했고, 녹수가 하는 행동은 무조건 어여삐 봤다.”
“그것도 압니다.”
“하지만 너만큼 신뢰하진 않는다. 비록 녹수가 했다는 증좌는 없더라도 너 또한 어떤 확신을 가졌으니 내게 이런 말을 고한 거겠지. 난 네 확신을 믿는다.”
라고 말한 형님에 어안이 벙벙한 것도 잠시.
내 계획에 없던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별안간 형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신 것이다.
“혀, 형님! 어디가십니까?”
“집경당.”
형님은 짤막한 말을 남기곤 휘적휘적 침소를 빠져나가셨다.
당황한 나도 형님을 뒤따랐다.
***
집경당.
무사히 처소에 돌아왔음에도 녹수는 심장이 여전히 벌렁거리는 것 같았다.
‘뭔가 낌새를 눈치 챈 것 같았단 말이지······.’
한시진 전 쯤 우연히 마주친 진성대군.
기분 탓일지 몰라도 그는 뭔가 낌새를 눈치 챈 것 같았다.
“초조하십니까?”
초조함이 안색에도 드러나는지,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언니 복수가 말했다.
“아까 진성대군을 보지 않았소.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소.”
“기분 탓일 것입니다. 저희만 아는 일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다만 이덕이가 걸립니다.”
“이덕이?”
“예. 평소에도 심성이 여린 아이가 아닙니까. 예전에 제안대군 댁에서도 마마를 대신해서 매를 대신 맞기도 했었고······.”
잊고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맞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파 식은 밥을 훔쳐 먹은 적이 있었다. 그게 발각이 됐고, 매질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그 매를 이덕이 대신 맞아준 적이 있었다.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만큼 이덕은 심성이 곱고 남을 위하는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그런데 그게 왜?”
“예전에는 지밀을 감시하라 보냈는데 요즘 보면 감시는커녕 중전과 노닥거리는 일이 잦지 않습니까?”
“양심에 가책이라도 느낀다는 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사람은 본시 이기적이오. 이덕이가 제아무리 무지해도 이 일이 발각되면 장동이도 무사치는 못 할 텐데, 중전이 국모인 걸 떠나 본인에게 은인이라 한들 제 자식 목숨보다 귀할까.”
“그렇긴 한데···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자는 거요?”
“여차하면 부인께 불똥이 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쩌자는 거냔 말이오.”
“쇤네가 듣기로 이덕이 내관과 정을 통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다.
궐에서 내쫓고자 함이다.
“흠.”
“이덕이 잠꼬대나 말실수라도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부인의 안위가 달린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덕이는 내 몸종 시절부터 함께 한 벗이오. 어찌 누명을 씌워 내쫓을 수 있겠소?”
“부인께선 이덕이 대신 죽을 수 있으십니까?”
“그건 어렵지.”
“이덕이는 할 아이입니다. 잘만 설명하면 될 겝니다.”
“흐음.”
“그리고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은근하게 말한 복수가 몸을 녹수 쪽으로 기울였다.
“방술인이 말하기론 효과가 29일 안에 나타난다고 합디다. 그 자리를 부인이 꿰차지 말란 법이 어딨겠습니까?”
“종년이 어찌 국모가 된다고···전례에 없는 일이라 불가할 거요.”
“전례가 없다면 만들면 되는 것이 전례지요.”
“···”
“전하의 환심을 잘 사서 국모가 되기만 해보십시오. 쫓겨난 이덕이에게 재물로 보상 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뿐이겠습니까? 장동이도 면천 시켜주고, 뒷바라지도 시켜줄 수 있지요.”
자신의 언니지만 가끔 한심할 때가 있다.
너무 이상적이랄까.
종년은 국모가 될 수 없다.
절대.
하지만 그 모든 게 자신을 위한 것임을 녹수도 모르진 않았다.
“그 문제는 나중에 논하든가 합시다.”
“그때가 되면 늦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빨리 결정하셔야 합니다.”
“아, 알았으니 그만좀 하시오. 내 어련히 할 테니.”
녹수가 날카롭게 반응하던 그때였다.
처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녹수야. 안에 녹수 있더냐.”
전하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실로 오래간만에 듣는 옥음이기도 했다.
전하의 옥음에 신난 건 오히려 복수였다.
“과연 용하긴 용합니다. 효험이 벌써 나타난 모양입니다. 이제 부인께선 예전처럼 전하를 치맛폭에 잘 감싸고만 있으시면 되······.”
“녹수 이년! 속히 나오지 못 하겠더냐!”
앞전과는 다른 옥음에 녹수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언제까지 임금을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
신색을 가다듬은 녹수가 처소를 나섰다.
흠칫.
임금의 손에 날이 바짝 선 칼이 들려있었다.
“요망한 것이 드디어 나오는 구나.”
“저, 전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소첩이 전하의 심기를 언짢게 한 것이 있사온······.”
“심기?”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내뱉은 융이 칼을 번쩍 들어 복수를 가리켰다.
“나라의 종법(從法)이 무너졌기로서니 내수사 종년이 궁궐 안팎을 횡행하는 것이 법도에 맞는 것이란 말이냐?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복수는 오체투지 자세로 엎드렸고, 녹수는 비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어색하게 웃으며 융에게 다가갔다.
“또 어찌 이러시옵니까, 전하. 소첩 섭섭하옵니다.”
“섭섭?”
“날이 춥사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
“어디 역적년이 옥체에 손을 댄단 말이냐!”
“저, 전하!”
“내 모를 줄 알았단 말이냐? 내 모를 줄 알았어!”
“어, 어인 말씀이신지······.”
융은 소매를 뒤졌다. 작은 주머니가 달려나왔고, 주머니를 열자 그 안에는 죽은 지네가 들어있었다.
그는 녹수의 면전에 주머니를 내던졌다.
지네를 본 녹수의 표정이 일순 얼어붙었다.
“내 너를 어여삐여겼다. 한데 그 보답이 이거란 말이냐?”
“저, 전하··· 소, 소첩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 이게 다 무엇이옵니까?”
“이런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년을 다 보았나.”
“저, 정말이옵니다. 소첩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어, 어찌 이러시옵니까.”
“정말 모른단 말이냐?”
“···예.”
고개를 끄덕거린 융이 녹수를 지나쳐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오체투지한 채 벌벌 떨고 있는 복수 앞이었다.
융은 복수의 목에 칼을 겨눴다.
“이래도 모른단 말이렷다?”
꿀꺽.
“모, 모르옵니다, 전하.”
“복수야.”
“예, 저, 전하.”
“녹수는 모르는 일이라는데 너도 모르는 일이냐?”
“어, 어인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이제 자매가 감히 쌍으로 임금을 기만하려 들어?”
“···”
칼을 거둔 융은 쪼그려앉아 복수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녹수를 흘긴 채, 그녀가 들리진 않게 작게 속삭였다.
“네가 사주한 것이냐, 녹수가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냐? 네가 사주한 것만 아니라면 네 목숨은 살려주마.”
“그, 그게······.”
복수는 녹수와 융 자신의 눈치를 봤다.
아니길 바랐지만, 복수의 태도에서 확신 할 수 있었다.
융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머잖아 옥루가 흘러내렸다.
챙그랑-.
칼을 내던진 융은 터덜터덜 집경당을 빠져나갔다.
“···저 역적년들은 모두 포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