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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55화 (15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55화>

    ***

    이제 몇 일 안 남았다.

    자, 세어볼까.

    3월 7일 출국(?)이니까··· 이제 정확히 딱 23일 남았다.

    출국 날이 가까워지면서 긴장되던 마음도 다소 가라앉았다.

    사실 죽을 자리 찾아서 가는 것도 아니고, 죽을 사람은 뭘 해도 죽는다던데 나는 뭘 해도 죽을 팔자는 아닌 것 같거든.

    그래서 마음 편히 먹기로 하고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일은 안 하냐고?

    맞다, 안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나려나?

    내가 대사헌 직에 임명되고 여기 법 공부좀 했던거.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불현듯 육아 휴직에 관한 법률이 떠올랐다.

    놀랍게 여기에도 육아 휴직이란 게 있었거든.

    물론 법문 자체를 상세히 파고 들자면 난 해당 되지 않는 말이다.

    -관비로 있는 여종은 해산하기 전에 한 달을 쉬게 한다.

    -해산 후에는 50일을 쉬게 한다.

    -그의 남편은 해산 후, 15일을 쉬게 한다.

    보다시피 관노비들에 대한 법조문이거든.

    근데 관노비들한테도 있는 육아 휴직이 관리들에게도 없겠나?

    나는 특별히 형님께 상소문을 올렸다.

    아이가 해산했고 이제 곧 출국하니 정리할 게 많아 30일만 쉬겠다고··· 그러고 나서 바로 후임자 구해지면 인수인계하겠다고 말이다.

    아, 인수인계는 모두 알다시피 내가 계약직 장관이잖나.

    이제 형님께 청한대로 30일만 쉬면 계약만료(?)다.

    뭐, 쉬는 건 흔쾌히 승낙하신 형님도 계약만료 부분을 내가 들먹이자 내심 아쉬워하는 것 같긴 한데··· 어쩌겠나?

    애당초 계약조건이 딱 1년이었는데.

    좌우지간, 이렇게 형님의 배려 덕에 다시 대군으로서 놀고 먹는 인생을 즐기고 있다.

    아, 물론 만날 놀기만 하는 건 아니다. 사헌부에 출근하면서 뜸했던 개똥이 공부도 빡세게 가르치고 있는데······.

    “내 칼을 받아라!”

    보다시피 절레절레다.

    잠깐 뒷간좀 다녀오게 자습하고 있으라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혼자서 장군 놀이 중이다.

    “개똥아.”

    이제는 굳이 꾸짖거나 타이르고 싶진 않다. 스승으로서 제자를 포기했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 사람 성격은 어떻게 못 바꾼다.

    그런 맥락에서 개똥이는 주의력 결핍장애(ADHD)가 분명하다.

    이런 건 나이 먹으면 자연스레 치료가 된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 굳이 꾸짖어서 뭐 하겠나?

    개똥이 나이 이제 고작 열 살이니 나이 좀 더 먹으면 괜찮아지겠지······.

    “네?”

    “너 자습하라니까 거기서 뭐 해?”

    “저 지금 자습하고 있었어요.”

    “나무 막대기 휘두르면서?”

    “아, 제가요. 방금 소학을 읽고 있었거든요? 근데 칼 도(刀)자가 나오지 뭐에요? 그래가지고 제가 아, 칼 도자 한 번 써봐야지 하고 먹 찾았는데 먹이 안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바닥에 쪼그려앉아서 쓰려고 한 건데 마침 이 막대기가 보여서, 막대기를 줍고 쓰고 있었걸랑요? 근데 막 벌레가 날아들어서 휘두르면서 쫓아내다가 보니까······.”

    장장 몇 분 씩이나 이어지는 횡설수설이 시작됐다.

    그래, 이 녀석 ADHD아니다.

    말에 논리는 없지만 전개는 또 딱딱 맞아 떨어지는 거 보니··· 다시 한 번 이 녀석은 ADHD가 아니라 천재란 생각이 든다.

    불리할 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횡설수설.

    그래도 귀여우니까 봐준다.

    “근데 삼촌 보러는 언제가요?”

    알다시피 개똥이에게 삼촌은 형님이다.

    “아직 점심 안 됐잖아. 점심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면 데려다줄게.”

    모름지기 아이들은 동기부여가 필요한 법.

    나는 개똥이에게 형님이란 동기부여를 심어줬다.

    그러니 웬 걸?

    녀석이 막대기를 냉큼 갖다 버리더니 대청에 후다닥 올라 책부터 편다.

    그래, 역시 애들한텐 동기부여가 최고다.

    ***

    개똥이를 공부시키고 입궐했다.

    사실 개똥이에겐 동기부여를 시켜 주겠답시고 공부 다 하면 형님 보러 가는 거라고 했지만, 애당초 오늘은 약속이 잡혀 있었다.

    형님이 특별히 나와 개똥이를 보고 싶다 했었고, 긴히 논의할 말도 있다길래 점심이나 함께 들자며 상선 대감을 보내온 것이다.

    뭐, 그런 내막을 모르는 개똥이는, 이 근래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나 싶을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만··· 자고로 선의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잖아?

    그리고 도착한 강녕전에는 형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창녕대군 성이와 세자 황이가 있었다.

    창녕이는 간간이 봤는데 세자는 오랜만이다. 내가 궐안 출입이 잦다고는 해도 동궁에 머물면서 제왕학을 익히는 황이를 보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다.

    “우와, 숙부님!”

    내가 강녕전에 들자마자 와락 안긴 건 창녕이었다.

    반면.

    “숙부님, 그간 소질(小姪)이 찾아뵙지 못 했사온데 신상 만안(萬安)하셨사옵니까?”

    고상한 말투를 기품 있게 척척 내뱉는 이 아이는 알다시피 세자 황이었다.

    “그래, 오랜만······.”

    이다, 라고 편하게 반말하려던 나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입니다, 저하.”

    라는 경칭을 썼다.

    창녕이는 쉽게 말을 놓겠는데 황이는 세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말투 때문에 그런지 말을 놓기가 어렵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황이에게는 경칭을 쓰고 있기도 하고······.

    “개똥이는 못 본 새 많이 컸구나.”

    “헤헤헤.”

    개똥이의 트레이드 마크 실없는 웃음을 보고 피식거린 형님은 우릴 밖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경회루였다.

    이미 수라간에서 음식들을 준비해놨는지 멀리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도착하고 보니 과연 냄새대로 진수성찬이 차려져있었다.

    고기 반찬부터 시작해서 찜이며 찌개며, 나물이며 전이며, 굴곽탕이며······.

    ‘응?’

    굴곽탕?

    ‘세자 저하가 굴곽탕을 좋아하시나.’

    내가 입궐하고 형님과 식사를 할 때면 형님은 늘 수라간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내어오도록 하셨다. 그건 개똥이나 창녕이가 입궐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굴곽탕이다.

    궐에 골백번 드나들면서 한 번도 보지 못 한 음식이랄까?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형님이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치셨다.

    “예?”

    “뭐 찔리는 거라도 있는 것이냐?”

    “찔리는 거요? 아뇨, 없습니다만······.”

    “아니, 굴곽탕을 빤히 쳐다보고 있길래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했지.”

    “저하께서 굴곽탕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황이가?”

    “예.”

    잠시 머뭇거린 형님이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황이는 굴이라면 제 어미를 닮아 질색팔색을 한다. 어려서 못 먹는 겐지··· 굴 맛을 모르는 겐지······.”

    세자 저하도 아니라고?

    뭐, 그럼 창녕이?

    “와, 맛있겠다! 개똥아 얼른 앉아!”

    ···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듯 하다.

    창녕이는 굴곽탕은 본 척도 안 하고 고기 반찬 앞에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군마마. 전하께서 아직······.”

    “상선은 그만하라. 보는 이 없고 모두 가족들 밖엔 없는데 격식을 차려 무엇한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상선이 물러나고, 창녕이 개똥이와 나란히 앉아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형님이 별안간 날 또 툭툭 치시면서 말했다.

    “이 굴곽탕에는 긴 사연이 있느니라.”

    “사연 씩이나요?”

    “그래. 네 혹시 알지 모르겠다만··· 요새 도성에 곽 값이 오른 것을 아느냐?”

    나는 미역을 내 돈 주고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형님께 선물 받거나 혹은 선물이 들어오거나.

    “아뇨, 몰랐습니다.”

    “요새 도성에 곽탕이, 꼭 기방의 해어화(기생)들이 하는 걸 보면 따라하는 규수들처럼 모두들 곽탕을 해먹으려 하니 값이 뛰었다더구나.”

    “그렇습니까?”

    “찔리는 게 아직도 없는 것이냐?”

    긁적긁적.

    “혹시 저희 집 종들이 장난이라도 친 건지?”

    권세 있는 대감집 가노들이 대감의 위세를 빌려 호가호위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아직까지 우리집은 그런 일이 없다지만, 형님이 계속 찔리는 거 없냐길래 혹 나도 모르는 새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게 아닌가 싶어 여쭸다.

    답은,

    “그런 건 아니고.”

    No였다.

    “하면 이 곽탕을 내가 손수 만들었느니라.”

    “예? 형님께서 말이십니까? 곽탕을 직접요?”

    “그래.”

    “이제 좀 생각나는 것이 있겠지?”

    “···없습니다만.”

    진짜 생각이 안 난다.

    뭐지? 뭔데 계속 미역을 언급하시는 거지?

    “소문의 당사자가 막상 소문은 듣지 못 했으니 이런 애석한 일이 있나.”

    “소문요?”

    “어쩌면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르겠구나.”

    “한데 왜 직접 만드신 것입니까? 숙수들한테 시키지 않구요.”

    “그런 게 있다··· 등쌀이라고 하면 너무 정이 없어 보이니 지아비 구실을 하기 위함이었다고 해두자꾸나. 어쨌든 만들다 보니 너무 많이 만들어서 음식이 좀 남게됐다.”

    지아비 구실?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형님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식사 분위기는 역시 가족들끼리다 보니 화기애애했다.

    음식들도 모두 맛있었다.

    그리고 식사를 끝내자 차가 들어왔다.

    물론 전부터 이미 알고 지내면서 거의 소꿉친구나 다름이 없어진 창녕이와 개똥이는 차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저희들끼리 빨빨거리며 뛰어놀기 바빴다.

    세자인 황이만 어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시선이 자꾸 창녕과 개똥이에게 가는 걸 보면 함께 어울리고 싶긴 한 것 같다.

    애어른 같긴 해도 확실히 애는 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형님은 잠시 사색에 잠긴 표정을 지으시다가 황이를 불렀다.

    “함께 놀고 싶은 것이렷다?”

    본심을 들켜서일까.

    황이는 조막만한 손으로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을 했다.

    “아, 아니옵니다. 아바마마. 소자 어찌 용포를 더럽힐 수 있겠사옵니까.”

    “그렇지. 어찌 일국의 국본이란 자가 용포를 더럽히고 놀 수 있단 말이냐. 나 또한 저 나이땐 저리 뛰어놀고 싶었어도 참았다.”

    “···예.”

    “하지만 그러지 못 한 것이 아쉽다. 네 숙부와 긴히 논의할 것이 있으니 가서 어울리거라.”

    “하오나······.”

    “아비의 명을 거역할 참이냐?”

    “아, 아니옵니다.”

    헛기침을 한 형님은 개똥이를 불렀다.

    창녕이와 멀찍이 떨어져서 내가 가르쳐준 땅따먹기를 하고 있던 개똥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부르셨어요, 삼촌?”

    “개똥아.”

    “넹.”

    “세자가 궁궐에만 있어 세간의 네 또래 아이들이 노는 법을 모르니 알려주거라.”

    “네!”

    개똥이 황이의 손을 이끌자, 황이는 쭈뼛거리더니 마지못한 척 따라나섰다.

    세자라곤 해도 확실히 놀고 싶을 때긴 하지.

    옷에 흙도 좀 묻히고···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잘 논 사람이 나중에 시집, 장가도 잘 간다고··· 어렸을 때 놀아본 세자가 나중에 성군이 될 거다.

    아마도?

    나와 형님은 세 아이들이 노는 걸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러다 아이들이 중궁전 쪽으로 사라지자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궁이 시끄럽다고 혼내진 않을지 걱정이구나.”

    “설마요. 중전마마께서 온화하신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럴려나?”

    “아, 그보다 저랑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인지요?”

    “아··· 대사헌직 말이다.”

    “예.”

    “네가 저번에 휴가를 청하면서 이제 앞전에 말한 1년이 다 됐으니 속인(俗人)이 되겠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삼정승과 의논을 좀 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의, 의논 말입니까?”

    “그래. 조정에서 필요로 한다고 하니 내 어찌 뿌리칠 수 있었겠느냐? 그래서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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