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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54화 (15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54화>

    ***

    궁중의 일이란 게 그렇다.

    때론 알면서도 모르는 척.

    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

    봤으면서도 못 본 척.

    두 귀와 눈을 닫고 특히 입은 조심해야 하는 곳이 바로 구중궁궐이었다.

    그건 임금이 비행(非行)이나 기행(奇行)을 저질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임금이 비행과 기행을 일삼는다면 더더욱 눈과 귀를 닫고 입에는 자물쇠를 채워야 했다.

    안 그러면 도태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도태는 목숨과 연관이 있을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사실 궁궐에 한 번이라도 들어온 사람이라면 모두 체감하는 사실이었다.

    딱히 교육을 받거나 혹은 누군가 알려줘서 알게 되는 사실이 아니라,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는 요령이란 말이다.

    하물며 이제 막 궁궐에 들어온 생각시(어린 궁녀)들도 이런 사실은 잘 알고 있고, 이제 막 거세한 어린 내관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궁궐밥(?) 십수년을 넘게 먹은 각색장(수라간 요리사) 김말손(金末孫) 역시 이런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왜, 그런 적 많지 않던가.

    사람이 살면서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돼도 감성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던 때들.

    지금 말손이 그러했다.

    “어, 어찌······.”

    말손은 벌벌 떨었다.

    상술한대로 궁궐밥 십수년을 먹은 말손이었지만, 그래서 그 실력을 인정받아 각색장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이리 가까이서 마주하는 것은 실로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임금이 수라간에 행차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럴 땐 둘 중 하나다.

    대전에 들어간 수라가 임금의 입을 사로잡아 임금이 치하를 하기위해.

    대전에 들어간 수라에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혹은 임금의 입맛에 도통 맞지 않아 꾸지람을 하기위해.

    물론 그렇다 해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보통은 상선이나 다른 내관들을 보내 질책하거나 치하하지, 아무리 수라가 맛있거나 맛이 없어도 직접 행차 씩이나 하시진 않으니까.

    더욱이 지금은 수라가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수라가 맛있어서라거나 입에 맞지 않아 행차했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궁궐밥 십수년의 말손도 겪지 못 한 일이었다.

    “아침 수라에 올릴 조반을 만들고 있었는가?”

    하도 놀란 말손은 사고가 정지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때문에 임금의 하문이 있은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대답을 못 했다.

    “어허, 전하께서 하문하시지 않은가?”

    상선의 호통에 화들짝 놀란 말손은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그, 그러하옵니다, 전하.”

    “내 미리 기별을 하고 찾지 않아 놀란 듯 하구나. 이런 미안한 때가 있나.”

    “아, 아니옵니다. 미, 미안이라니 당치도 않사옵니다. 신들은 그저 전하께오서 갑자기 행차하시니 놀라고 아득한 마음에··· 한데 송구하옵게도 어쩐 일로······.”

    앞서 말한대로 궁궐에선 눈코입 모두를 닫아야 한다.

    그게 장수하는 길이다.

    하지만 이례적인 상황에 말손은 그러지 못 했다.

    오히려 손사래까지 치며 과장되게 행동한데 더해, 오히려 역질문까지 해버리고 만 것이다.

    뒤늦게 내뱉은 말을 인지하고 아차 싶었지만 뱉은 말을 도로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

    이젠 죽었다 생각하던 그때.

    “그, 내가 말이다.”

    기존의 임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역란이 있을 때 역신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난신들 역시 모조리 추방해버리던, 어떻게 보면 한겨울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만큼이나 냉혹해보이던 임금이 아니라, 머뭇거리면서도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이 풋사랑을 하고 있는 소년의 그것에 가까웠다.

    “큼큼.”

    “예?”

    “구, 굴곽탕은 어찌 만드는 것인가? 내 일평생 손수 요리를 해 본 적이 있어야지······.”

    말손은 앞전처럼 사고가 정지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의 머리는 임금의 말에 대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돌아갔다.

    아닌 게 아니라, 그걸 왜 임금이 하문하신단 말인가?

    임금이 하실 말씀은 간단명료하다. ‘굴곽탕이 먹고 싶으니 굴곽탕을 대령하라.’ 이 정도?

    그마저도 직접 행차하셔서 하실 거창한 말도 아니었다. 지나가는 남녀궁인 하나 붙잡고 대신 전하게 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뒤에 붙은 ‘손수 요리를 해 본 적이 있어야지’는 뭐란 말인가?

    “소, 소신이 아둔하여 전하께서 어찌 굴곽탕 제조법을 하문하신 것인지 모르겠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털썩.

    암만 궁리를 해봤지만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손은 넙쭉 엎드렸다. 그러자 멋쩍은 표정을 한 임금이 말했다.

    “사, 상선이 대신좀 전하라.”

    그렇게 말한 임금이 등을 돌려 수라간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홀로 남은 상선이 말손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요새 굴곽탕이 유행처럼 번지는 거 모르시는가?”

    “구, 굴곽탕이 말이옵니까?”

    금시초문이었다.

    “대사헌께서 부부인이 해산하실 적에 굴곽탕을 해다 바치셨네. 그 뒤로 한양의 여인네란 여인네들은 모조리 바가지를 긁는다는데······.”

    “그럼 혹시······.”

    “쉿! 불경한 말을 꺼내려거든 그 입 다물게.”

    “···송구합니다.”

    “전하께서 요근래 중전께 소홀하셨으니 흡족한 일을 해주시려는 걸세.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들었는가?”

    “알아 듣고 말구요.”

    상선은 혹 듣는 귀가 또 있을새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수라간에서 쌀 고르는 게 주업무인 미모(米母)와, 차려진 수라를 가지런히 정돈할 상배색(床排色)이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게 시선에 들어왔다.

    상선의 뜻을 눈치챈 말손이 황급히 두 사람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마침내 둘만 남게된 수라간.

    “이 일은 자네와 나만 알아야 하는 건데······.”

    “예.”

    “낮 수라는 만들지 마시게.”

    “하, 하오나 어찌······.”

    “아까 한 말 못 들었나? 전하께서 흡족한 일을 좀 해주시려고 한다지 않았는가.”

    “아······.”

    “낮에는 수라를 비우도록 하게. 혹 보는 자가 있으면 민망하기 짝이 없으니.”

    “그래도 아주 비밀로 할 순 없을 것이온데 그건 어찌?”

    “그거야 이제 자네 역량인 게지.”

    “아, 알겠사옵니다.”

    “그럼 알아 들은 줄 알고 이만 물러가보겠네. 명심하게, 낮 수라가 만들어질 시간에, 수라간엔 아무도 없어야 함세. 아무도!”

    “며, 명심하겠사옵니다.”

    말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로부터 몇 시진 후.

    빈 수라간에 융과 상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

    집경당(集慶堂)에 머물고 있던 녹수는 표독하게 눈을 치켜 떴다.

    “치워라!”

    그녀의 호통에 다과를 올리던 궁녀가 부복했다.

    그러고는 본인이 잘못이라도 저질렀는가 싶어, 다과를 바라봤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내 지금 이깟 차들이 목구멍에 넘어갈 것 같단 말이냐?”

    예의 궁녀는 어이가 없었다.

    불과 한식경 전.

    식후 차를 들고 싶다던 게 누구였단 말인가?

    변덕이 심한 건 익히 알았지만 상전만 아니라면 아주 침을 뱉고 싶을 만큼 변덕이 별났다.

    “하던 말. 계속해보거라.”

    다과상 올리던 궁녀를 물린 녹수는 또 다른 궁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씀드리기 민망하오나 전하께서 수라간에서 음식을 만들고 계시옵니다.”

    “음식을?”

    “···예.”

    “어찌?”

    “그게······.”

    “속히 아뢰지 못 할까!”

    “음식을 만들어 중전마마와 함께 드실 생각 같으셨사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어처구니 없어 하던 녹수는 문득 전날 찾아온 언니가 해준 말이 기억이 났다.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궐에 사는 녹수라지만 궐밖 소식에는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소 궐밖 소식은 보통 언니나 궐밖 출입이 용이한 다른 사람들에게 듣기 마련인데, 어제 그녀의 친언니 장복수(張福壽)는 도성에 이상한 유행이 번지고 있다는 말을 해줬었다.

    갑자기 미역의 가격이 오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이제는 구하기도 어렵단다.

    궐밖 소식은 그 어떤 것이든 즐겁게 듣는 녹수였기에 그 영문을 물었다.

    이유는 뜻밖이었다.

    미역을 여염집 부엌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방에서 소비하기 때문이란다.

    어느 날, 진성대군이 부부인의 해산날 미역국을 해다 바쳤는데 그 소문이 퍼지면서 몇몇 애처가들이 미역국을 해다 바쳤고, 그 소문이 또 퍼져나가니 이제는 유행처럼 확산이 됐다는 것이다.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혹 곽탕을 만들고 계시다더냐?”

    “그걸 어찌 아셨사옵니까?”

    놀란 표정의 궁인에 녹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됐다, 물러가거라.”

    궁녀들에 축객령을 내린 녹수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일국의 군주란 작자가 처를 위해 음식을 갖다 바친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혹시 또 몰랐다.

    자신을 위한 일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좀체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다.

    오히려 임금이 손수 만든 곽탕을 들고 중궁전을 찾았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짜증이 났다.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구중궁궐에서 그녀와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대상은 많지 않았다.

    있다면 가족 뿐이었다.

    그녀는 궁녀를 불러다 내수사에 노비로 있는 언니를 불렀다.

    어제도 부름을 받고 만났던 그녀의 언니 복수는, 어쩐 일인지 차가운 표정의 동생을 보고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이 어두우신데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으십니까?”

    동생이라지만 성은을 입은 몸이었다.

    언니의 존댓말을 불편함 없이 받아들인 녹수가 대답했다.

    “내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안 나오오.”

    “어쩐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글쎄······.”

    녹수의 입에서 임금이 친히 수라간을 비우고, 그 수라간에서 음식을 해다 중궁전에 해다 바친 일화가 전해지자 복수는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어찌 일국의 군왕이··· 흡.”

    실언임을 깨달았는지 복수는 금방 입을 틀어막았다.

    녹수는 딱히 그녀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녹수 자신 또한 동감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게나 말이오. 어찌 일국의 군왕이 처를 위해 수라간을 비우고, 빈 수라간에서 음식을 하는 기행을 벌인단 말이오. 내, 참.”

    “하온데 부인.”

    “음?”

    “혹 부인께서 주상 전하와 동침한 것이 언제쯤이시옵니까?”

    “기억에도 안 나오.”

    “으음······.”

    침음한 복수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하면 중전마마와 전하의 사이는 어떠신지요?”

    민감한 걸 묻는 복수에 녹수는 빽 소리질렀다.

    “그런 건 대체 왜 묻소?”

    “노여워마시옵소서. 그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요새 사이가 퍽 좋아 보이더이다.”

    “반면 부인과는 소원하구요?”

    “흐흠.”

    “이건 사실··· 소인이 몇 주 전에 부인께 아뢸까 하다가 만 것이온데 말이옵니다.”

    “···?”

    “전하께서 부인을 총애하신 세월이 얼마였겠사옵니까? 그런데 갑자기 변심이라도 한 듯 동침도 멀리하시고··· 아니, 동침이 뭡니까? 옛날에는 하루가 머다하고 찾았는데 이제는 아예 들르지도 않으신다면서요?”

    “···”

    “그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옵니다.”

    “이유? 무슨 이유?”

    “그게, 말씀드리기 망측하긴 하온데······.”

    “괜찮으니 말씀해보오.”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내수사에선 희한한 소문이 돌고 있습지요.”

    “소문?”

    “예. 요즘 들어 전하께서 중궁전을 자주 찾으시옵고, 반면 총애하던 부인은 나몰라라하고 있으니 중궁전에서 사람을 시켜 집경당(녹수의 거처) 기둥 밑에 독이 잔뜩 품은 지네와 부적을 숨겨뒀다는 소문입지요.”

    “중궁이 염매(주술이나 방술)를 행한단 말이오? 설마.”

    평소 중궁의 모습을 떠올려보자면 그럴 위인은 아니었다.

    그럴 그릇도 못 되는 여자였고.

    “중전께서 친히 지시했다는 것이 아니오라, 무릇 사람이란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하지 않겠사옵니까? 게다가, 그게 아니라면 전하께오서 갑자기 중궁전을 자주 찾는 일을 어찌 해석할 수 있겠사옵니까?”

    “원래 중궁과는 사이가 돈독하지 않았소.”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었다.

    중궁과 주상은 사이가 돈독한 편이었다. 자신을 총애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럼 전하께서 부인을 총애하던 게 갑자기 식어버린 건 어찌 설명하시렵니까?”

    진실을 계속 맞딱뜨리다보면 불편해지기 마련이었다.

    녹수는 표정을 구겼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제가 잘 아는 방술인이 있습지요.”

    “큰 일 날 소리!”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염매를 행하다 걸리면 어찌 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요?”

    “그러니 안 걸리게 하면 되는 것입지요.”

    “안 걸리게? 어떻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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