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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53화 (15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53화>

    ***

    조광조.

    나는 본인을 조광조라 밝히는 정체불명의 선비에 흠칫했다.

    내가 진성대군이 되면서 새로운 연을 맺은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당장 떠오르는 사람들만 해도 몇 명인가.

    이장곤, 임숭재, 임사홍, 김억수, 김전, 의팔석, 안처직, 덕산이, 전금이, 성준, 갑련이, 그리고 내 장인어르신 신수근, 김감, 안윤덕, 채수······.

    음, 이렇게 보면 여기서나 저기서나 대인 관계가 극히 좁은 것 같은데 지금은 저승에 계신 분들까지 거론해보자면.

    박원종, 유순정, 신윤무, 장일신, 김종계, 윤귀수, 민효증, 홍경주, 송질, 박한필, 신계종, 민자방, 최한홍, 윤형로, 장정, 이극균, 윤필상······.

    적어보이는 건, 당장 떠오르는 사람들만 언급해서 그런 거지 실제로는 무진장 많다.

    하지만 지금 내가 언급한 사람들 중에 내가 전생에 들어본 이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박원종은 긴가민가한데 들어본 기억이 있고, 그 다음으로 임숭재와 임사홍이란 이름은 영화를 통해 들었었다.

    물론 그 영화는 지금 혐오한다. 아주 두 부자를 천하의 간신으로 묘사해뒀잖아?

    실제로는 전혀 아닌데.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이들의 이름을 전해 들었던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생에서부터 알고 있던 이들은 극히 적었다.

    한데 조광조.

    이 이름은 그 무엇보다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교과서에서 한 두 번 접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실 뭐 때문에 교과서에 등장했는지는 긴가민가한데 사화(士禍)와 관련된 걸로 기억한다.

    내가 이걸 왜 기억하냐면 당시 국사 선생님의 이름이 조광조였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인물을 실제로 대면하는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라 나는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듯 신기한 표정으로 조광조를 들여다봤다.

    ‘씹선비로 기억하는데······.’

    물론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사실 왜 조광조=씹선비로 내 머릿속에 저장이 된 건지도 기억이 안나니까.

    근데 고구마의 대명사 씹선비라기엔 잘 생겼다.

    존나라는 비속어가 앞에 부사로 붙을 만큼이나 호남형이었다.

    가느다란 얼굴 윤곽과 호리호리한 이 인상을 21세기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봤다면 기생 오라비 같이 생겼다고 할 만한 얼굴이다.

    그나저나.

    이 잘 생긴 미남을 왜 나는 씹선비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 기억의 왜곡인지, 아니면 맞게 기억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생긴 것만 보면 절대 씹선비로는 안 보인다.

    오히려 서글서글한 눈매 때문인지 순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그 모습에 내가 아는 조광조와 내 눈앞에 있는 조광조는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쩌면 그게 더 가능성 높을지도 모르겠다.

    “대감?”

    사람을 앞에두고 너무 구경만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넋이 나간 나를 일깨운 건 양팽손이었다.

    “어, 그래. 반갑소.”

    “반갑사옵니다. 소인 대감의 명성을 익히 들었사옵고 평소 흠모하는 바가 있었는데 이리 실제로 뵙게되니 가슴 떨림이 주체 되질 않는 듯 하옵니다.”

    “뭐··· 고맙소. 한데 두 분은 어떤 관계길래 함께 온 거요?”

    “벗이옵니다.”

    벗이라기엔 둘의 나이차가 좀 있어뵌다.

    조광조는 못 해도 이립(서른살)정도로 보였고 반면 양팽손은 이제 약관(스무살)의 나이 같았다.

    근데 뭐.

    여긴 대한민국처럼 1살 터울이어도 형님이니 뭐니 하는 곳이 아니니까.

    참고로 여긴 20살 위까지 마음만 맞으면 친구 먹는 곳이다.

    “음. 근데 굳이 함께 온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아, 송구하옵니다. 다만 정암(조광조의 호) 이 친구가 꼭 대인을 뵙고 싶다 하여, 마침 소인이 초상을 대감께 전달하러 가니 함께 가면 어떻겠나 제안을 했사옵니다. 인감께서 불편하실 걸 생각지 않고 무작정 일부터 저질렀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사옵니다.”

    “아니, 뭐··· 불편할 건 없고.”

    “아마 대인과도 연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 선비님과 말이오?”

    “예. 정암 이 친구가 태사 어르신(김굉필) 밑에서 수학하였으니 연이 아주 없다고도 할 수가 없지요, 하하하하.”

    이런 걸 두고 갑분싸라고 하나 보다.

    알다시피 대사간으로 영전하신(?) 김굉필의 제자가 장곤 선생님이고, 그런 김굉필의 또 다른 제자가 조광조라니 양팽손의 말처럼 연이 아주 없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근데 보통 그쯤 되면 연으로는 안 치잖아?

    뭐, 사돈에 팔촌까지 챙기는 여기 기준으로는 연이 있다 못 해 인연에 가까운 연이겠지만.

    “그래, 어찌 날 보고 싶다 한 거요?”

    딱히 청탁을 위한 것 까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세 가지 까닭이 있사옵니다.”

    “세 가지나?”

    “예. 첫째로는 소인이 듣기로 대감은 태학생 둘을 거두어 사사하고 있다던데 동시에 그 사사에 전하께오서도 함께 하고 있다니 어떤 가르침인지 궁금했사옵니다.”

    아, 얼마나 대단한 가르침이길래 형님이 경연도 뿌리치고 내 강의를 받나, 뭐 그런 궁금증이란 건가?

    “그리고?”

    “두 번째로는 대인께서 이번에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에 정사로 가시게 됐다지요?”

    정사라는 말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정사라니··· 놀러가는 거요, 놀러가는 거.”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사실 사신단의 대표로 가는 게 맞긴 한데 나중에 명나라에서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몰라 일단은 놀러 가는 걸로 마무리가 됐다.

    한데 생판 모르는 남 앞에서 정사로 간다고 할 순 없지.

    “어쨌든 말이옵니다.”

    “뭐··· 한데?”

    “그에 대해 청탁할 게 있사옵니다.”

    “스승님이 태사시라면서, 대사간(김굉필)께 부탁하는 게 더 빠르지 않겠소? 아무 연도 없는 나보다는 말이지.”

    “아, 오해는 마십시오. 소생 보잘 것 없는 학문을 익혔사오나 그깟 벼슬이나 재물을 탐해 청탁을 하는 소인배는 아니옵니다.”

    “그럼 무슨 청탁인데?”

    “유구국에 소생도 함께 따라 가고 싶사옵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빠서 찌푸린 건 당연히 아니고··· 의외의 말을 들어서였다.

    “갑자기 말이오?”

    “갑자기가 아니옵니다. 사실 지난 번, 천추사 행렬이나 동지사 행렬··· 중국에 가는 사신들 마다 따라서 가고 싶었사온데 소인이 아무 재주도 없이 따라 나선다면 어느 누가 기용하여 데려가려 하겠사옵니까?”

    “꿩 대신 닭으로 유구국에 가고 싶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사오나 그보다는 대국이 아닌 나라의 학문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실 사신단이란 게 거창해보여서 뭔가 체계적으로 움직일 것 같고 딱 나라에서 엄선한 사람들만 보낼 것 같지만 그건 또 아니다.

    알음알음.

    지인에 지인의 지인.

    친척에 친척의 친척.

    이웃의 이웃의 이웃.

    이렇게 생판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을 돈 받고 짐꾼이나 시종으로 데려가는 경우도 흔했다.

    왜냐고?

    이문이 남거든.

    문제는.

    “우린 이미 구성이 다 끝나서 들어올 자리가 없을 텐데··· 뭐, 격군(노 젓는 사람) 노릇이라도 하겠다면 자리는 만들 수 있소. 격군 자리야 안 하겠단 사람이 원체 많아야지.”

    돈 받고도 안 하려는 게 격군 자리다. 오히려 돈 주고도 안 하려는 게 격군 자리지.

    그래서 이 말을 하고 약간 멈칫했다. 생각없이 내뱉었는데, 내뱉고 보니 상대를 무시하는 발언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격군 자리라도 있다면 그게 어디겠사옵니까? 그저 감읍할 따름이지요.”

    “평생 책만 들여다 본 분이 아무도 안 하려는 격군까지 자처하면서 가려는 이유가 뭡니까?”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나라의 학문을 접하고 싶었사옵니다. 대국의 학문이야 익히 알려졌으니 논외로 친다지만 다른 나라의 학문을 접할 기회가 얼마나 되겠사옵니까? 미개한 여진 오랑캐들 따위야 학문이란 게 있을 턱이 없고, 사정은 왜인들도 마찬가지니 함께 중화에 속한 것이 유구인데 마침 유구로 가려는 배편이 있으니 어찌 선비로서 기회를 마다 하겠사옵니까?”

    눈빛을 보면 다른 흑심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이역만리에 가서 품을 흑심이래봤자 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뭐, 그럼 그럽시다.”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름 분석(?)을 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일단,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조난이나 표류나 좌초나 난파나··· 무서운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요즘 들어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다.

    마음이 약해지니 평소에는 귀에도 안 담던 말들이 잔상처럼 떠올랐는데, 대표적인 게 모 유명 연예인이 한 말이다.

    정확히 누가 한 말인지 기억 안 나는데, 모 유명 연예인은 비행기를 탈 때, 동행자 명단에 유명인이 있는지 확인부터 한단다.

    인터뷰어가 왜 그러냐고 묻자 대답이 걸작(?)이었다.

    -유명인이 탄 비행기는 추락하지 않는다는 믿음 같은 게 있거든요.

    물론 우스개소리에 가까운 답변이었겠지만 딸 아이 때문에라도 무사귀환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나는, 비록 미신은 믿지 않더라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저 말을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분석과 모 유명 연예인 발언이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 거냐고?

    자, 나는 역알못이다. 그래서 수십, 수백의 이름을 들었어도 거기서 내가 아는 이름은 소수에 불과하다.

    근데 조광조.

    역알못인 나도 단번에 떠올리는 이름이잖아?

    유명인에 부합한다.

    그리고 유명인이 탄 비행기는 추락하지 않는다 라는 공식에 대입하면, 유명인이 탄 배는 침몰 혹은 좌초되지 않는다 라는 등호가 성립한다.

    어처구니 없어도 이해해주기 바란다.

    그만큼 무사귀환하고 싶다는 간절함이니까.

    잠깐 슬퍼졌다. 나는 신색을 가다듬고 조광조를 바라봤다.

    조광조는 날 찾아온 이유가 세 가지나 된다고 했다.

    이제 마지막 이유를 들을 차례였다.

    “한데 마지막 이유는 뭡니까?”

    “아, 마지막 이유요··· 그게······.”

    막힘없이 술술 제 할 말을 토해내고, 제 바람을 말하던 앞전의 조광조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머뭇거린다.

    “뭔데 그렇게 망설입니까?”

    “사적인 질문인지라······.”

    “뭐, 실례되는 질문이라거나 본인이 하기에 창피한 질문이면 안 해도 되오.”

    “아, 아닙니다. 답변을 꼭 들어야 하는지라······.”

    라고 말끝을 흐린 조광조가, ‘안 그러면 마누라 등쌀에 어쩌고 저쩌고’ 라고 궁시렁거렸다.

    “그럼 편히 말씀하시고.”

    “그······.”

    “그?”

    “이게 좀 창피하옵고 선비로서··· 아니, 선비가 아니라 사내대장부로서 면목이 없사옵고, 에··· 또 민망하고 후세에 알려진다면 얼굴 들 수가 없는 질문인 건 아옵니다만······.”

    “아니 도대체 뭔데 그러오?”

    살짝 신경질적인 말투에 조광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그게··· 과, 곽탕 말이옵니다!”

    “곽탕?”

    “지, 지금 대감 때문에 도성 남정네들이 살 수가 없사옵니다······.”

    뭔 소리야, 이건 또.

    “뭔 소리요, 그건?”

    “대, 대감께서 부부인의 해산을 위해 과, 곽탕을 손수 만들어 올리셨다고······.”

    그 소문이 도성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고?

    아니, 퍼진 건 문제 될 게 없다.

    내가 부엌에 들어가서 미역 손질하고, 굴 손질한 거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까.

    청계천 빨래터에서 퍼졌을 수도 있지.

    근데 그거랑 도성 남정네들이 살 수 없는 게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꿀꺽.

    “그, 참으로 송구한 말씀이오나 과, 곽탕 요리법을 알려주실 수 있는지 하여······.”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곽탕 요리법?”

    “아, 정확히는 굴곽탕··· 요리법이옵니다.”

    말문이 막힌 나는 헛웃음을 흘려보냈다. 내 헛웃음에 조광조는 어색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였다.

    정확히 굴곽탕 레시피라니.

    이거 묻는 게 그렇게 창피한 일인가 싶었다.

    근데 당사자인 조광조 뿐만이 아니라 옆에 있는 양팽손마저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걸 보면··· 음.

    상식 밖의 질문이긴 한 모양이다.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그래. 그럽시다.”

    호기롭게 외치자 조광조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소, 송구하오나 하오면 소인도 눈동냥이라도 좀······.”

    “그쪽도?”

    “···예.”

    어이가 없다.

    요새 무슨 미역국 유행이라도 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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