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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52화 (15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52화>

    ***

    형님의 말씀에 나는 얼이 나갔다.

    “지금 뭐라고 하셨사옵니까?”

    그래서, 혹자가 본다면 되바라지다 손가락질 할 만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혹시 가는 귀가 먹은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배가 다 완성됐다는 기별이 왔다.”

    하지만 형님이 그 어느 때 보다 또렷한 발음으로 말하자, 나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음을 뒤늦게나마 인정 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여긴 강녕전이다.

    형님이 중신들에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패초를 보내셨고 나나 다른 신하들은 패초를 받자바자 편전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터졌나 싶은 마음에 아기 목욕 시키다 말고 허둥지둥 튀어 온 건데··· 막상 입조하자 들은 말은 보다시피 배가 다 완성됐다는 말이었다.

    아차, 무슨 배냐고?

    고춧가루 팍팍 친 김치를 먹고 싶다는 내 일념이 만들어낸, 그래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마도 출신인 가쓰히로(勝弘)에게 발주 넣었던 그 배 말이다.

    그래, 책임감 없다고 해도 할 말 없다.

    그 배 발주 넣게 만든 원인은 나고, 애당초 오키나와에도 내가 가겠다고 자처 했으니까.

    근데 그때랑 지금이랑은 상황이 좀 다르다.

    무엇보다 아기도 있고······.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어쩌겠나. 아기가 눈에 밞혀서 도저히 못 가겠는 걸.

    “에······.”

    그래서, 나는 말끝을 흐렸다.

    단어들을 좀 조합해서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어보기 위함이었다.

    ‘못 가겠습니다··· 이건 사적인 자리였으면 몰라도 이런 자리에선 너무 노골적이고, 음. 요즘 바다에 태풍이 많이 분다고 하옵니다··· 이건 뜬금없어 보이고. 아!’

    “그보다 전하.”

    “말하라.”

    “요즘 오랑캐들의 정세가 어떻다 하옵니까?”

    “여진 오랑캐라면··· 변장(변경의 장수)들에 의하면, 경이 회군하기 전 우리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경이 회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순종하려는 기색을 보이고 있다 한다. 다행한 일이지.”

    “그렇사옵니다. 비록 애석하게도 역신들이 갑자기 날뛰어 대군을 회군시키는 통에 무력으로서 적토를 붕괴시키진 못 했지만, 본시 전하께서 군사를 일으킨 까닭이 무엇이겠사옵니까? 오랑캐들의 순종에 있었사옵니다. 하온데 한 번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오랑캐들이 경계하고 경거망동하지 못 하도록 막았으니 이는 나라의 홍복이옵고 전하의 왕업이옵니다.”

    지금 새삼스럽게 형님의 업적을 칭찬하자고 여진족 운을 뗀 게 아닌데··· 좌의정 임사홍 때문에 다 틀어졌다, 제길.

    오늘 따라 눈치가 없으시다.

    ‘아!’

    또 생각났다.

    “예. 다행한 일이온데 신이 듣기로 요즘 탐관오리가 활개 치는 통에 민생이 고단하다 들었사옵니다. 탐관오리를 방치함은 나라의 백년대계를 세우긴 커녕 썩어문들게 만드는 꼴이니······. ”

    아무말 대잔치를 이어나가던 와중 형님이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그게 참말인가?”

    “신은 금시초문이옵니다.”

    허침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금시초문이란 말이 새어나왔다.

    “신 역시 사헌부가 제 소관을 잘 해내어 탐관오리들이 지레 겁을 먹고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드디어 수습되었다고 들었사옵니다. 아무래도 대사헌께서 겸손이 지나치신 듯 하옵니다.”

    이번엔 숭재 씨까지··· 후.

    “하하. 과연 그렇구나. 대사헌의 겸손이 지나치다.”

    “···송구하옵니다.”

    “송구는 무슨. 아. 아까 하려던 말을 계속하자면 말이다.”

    후, 이쯤되면 어쩔 수 없다. 가야지.

    사내대장부 이역.

    한 입 갖고 두 말은 안 한······.

    “슬슬 사신단을 구성해야 할 듯 싶어 경들을 부른 것이다.”

    꿀꺽.

    “사, 사신단 말이옵니까?”

    “그래. 당초 배를 만든 목적이 사신을 보내기 위함 아니었던가. 쇠뿔도 단김에 빼란 말이 있는데 앞으로 한 두 달이면 날이 풀릴 테니 시기를 놓치기 전에 사신단을 구성하고 날이 적당히 풀릴 때 파견한다면 시간을 지체 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게 바로 대사헌이 말하던 효율성과 실리 아니겠는고?”

    내가 형님과 두 제자들에게 가르친 효율성과 실리는 이런 게 아닌데, 젠장.

    아!

    안 가려는 거 절대 아니다. 갈 거다. 당연히 가야지.

    방금 전에 앓은 소리 한 건··· 음. 조금 아쉬워서 해 본 거다.

    해외여행을 나만 한다는 행복감(?) 때문에.

    그리고, 아까 말한 것처럼 남자가 한 입 갖고 두 말 할 순 없······.

    “그래서 말인데 정사로 누굴 보냄이 좋겠더냐?”

    마치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겠단 뉘앙스시다. 그러면 나야 좋은··· 읍!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신이 가기로 돼있는 일 아니었사옵니까?”

    “대사헌은 사헌부의 장관으로서 책임이 막중한데 어찌 보낸단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전하. 무릇 국가 간의 일에는 격이란 것이 있는 법이온데 대사헌은 사헌부의 장관임을 떠나, 사사롭게는 선왕의 적자이시옵니다. 선왕의 적자이신 대군을 보낸다면, 국체를 손상케 하는 일이니 정사는 선별하여 보냄이 온당하옵고······.”

    오.

    대사성 김전.

    꽉 막힌 읍선비님들께서 모조리 숙청(?) 당하시고 편전에 유일무이하게 남아 계신 읍선비님.

    평소에는 사람이 융통성이 너무 없어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오늘은 왠지 친구먹고 싶어진다.

    “또한 지난 번, 천추사(황제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에 보내던 사신)로황도에 보낸 정사 변상은 정삼품의 품계로 벼슬은 공조참의에 이르렀는데도 탄일을 경하하기 위해 전문(箋文)을 받들게 하여 보냈는데, 반면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에는 대군을 보낸다면, 하여 명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찌 불쾌해 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

    와, 씨.

    갑자기 명나라가 고마워진다.

    이런 게 재조지은인가?

    왜 조상님들이 명나라를 빨아제꼈는지 알 것 같··· 아, 이게 아니지.

    나는 은근히 새어나오는 웃음기를 감추고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사성의 말씀은 그른 데가 있사옵니다. 소신이 유구국에 가겠다고 하여 국고를 이용해 선박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제와서 다른 이를 정사로 보내겠다고 한다면, 명을 떠나서 신민들이 정책을 얼마나 우습게 행한다 하겠사옵니까?”

    “음.”

    형님이 얕은 침음과 함께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신다.

    자, 김전!

    힘을 내. 한 번 만 더!

    딱 한 번 만 더! 명 때문에 안 된다 말을 하라구.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옳지!

    “거듭 번거롭게 하옵니다만은··· 국가의 일은 원칙에 근거해서 돌아가야 하옵니다. 원칙이 없다면 법을 어찌 바로 세울 수 있겠사옵고, 국기를 어찌 바로 세울 수 있겠사옵니까? 일국의 왕자를 동등한 제후국에 정사로 보낸 일은 전례에 없는 일이오니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오늘만큼은 명나라도 고맙고, 대사성 김전도 고맙다.

    ‘언제 밥 한끼 대접해드려야지.’

    물론 꽉 막힌 분이라 받지도 않을 테지만.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 대사성 김전이 꽉 막혔고 사사건건 원칙 운운한다지만, 지금처럼 완강한 적은 또 없었거든.

    그 사실을 형님 역시 누구 보다 잘 알기 때문인지, 딜레마에 빠지신 듯 고민 중이신 모습이시다.

    그런데.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대사성의 주장에는 논리가 빈약하옵니다.”

    잠깐. 수, 숭재 씨?

    찡긋.

    눈은 왜 깜빡거려!

    “첫째로 일국의 왕자를 동등한 제후국에 정사로 보낸 일은 없다지만 유구는 소국이옵니다. 비록 명조에 함께 사신을 보내 입조하는 처지라 하오나, 그 국력을 헤아린다면 소국이니 어찌 아국의 국력의 반에 반이나 미치겠사옵니까?”

    “계속하라.”

    “본시 대사성은 말하기를 ‘대국의 의무는 소국의 사정을 잘 헤아리는 것이고, 반대로 소국은 대국을 잘 섬겨 서로 간에 힘듦이 없도록 함이 옳다’라는 말을 줄곧 하였는데 말씀드린대로 명조에 입조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유구는 소국이 되는 셈이고, 우리 조선은 대국이 되는 셈이옵니다. 대국이 소국의 사정을 헤아려 왕자를 보냄이 어찌 국체에 어긋나는 일이라 할 수 있겠사옵고, 명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설령 명에서 불쾌해한다면 변무사(오해를 풀기 위해 보내던 사신)를 파견하여 일의 정황을 고하면 될 일이옵니다.”

    ···라고 할 말 다한 숭재 씨가 날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찡긋거린다.

    그게 마치 ‘나 잘 했지?’라고 말하는 듯 해서 주먹이 쥐어졌다.

    “듣고보니 제예의 말이 일리가 있는 듯 하다. 대국이 소국을 어루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법인데, 제예가 말한대로 유구는 소국이 아닌가? 또한 내 굳이 사신단이라 표현한 것은 이를 대체할 말이 안 떠올라서지, 따지고 본다면 유람이 아닌가? 왕자가 외국을 유람하면서 외국의 군왕을 만나는 것은 예의 하나이니 어찌 중국에서 불편해 하겠는가?”

    ···라고 할 말 다한 형님이 숭재 씨처럼, 날 바라보며 찡긋거린다.

    그게 마치 ‘우쭈주, 그렇게 가고 싶었느냐?’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 이후.

    졸속으로 사신단, 아니 유람단 구성이 논의 됐다······.

    ***

    “뭐? 누가 와?”

    “그때 그 선비님 말입니다요.”

    그때 그 선비라······.

    기억을 더듬던 내 머릿속에 누군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 융통성 없던?”

    “예예.”

    “보답 같은 거 안 해도 된다니까 기어코 그림 그려왔나 보네.”

    “예?”

    “아니, 혼잣말이다. 그래서 어디있는데?”

    “사랑방에 계십니다요.”

    “아니, 뭐하러 집 안에 까지 끌어들였어? 그림만 받고 돌려보내면 되지.”

    “죄, 죄송합니다요.”

    고개를 조아리는 덕산이에 나는 이마를 지끈 눌러감쌌다.

    “아니, 내가 미안하다. 요새 이런저런 일들로 신경이 곤두섰네.”

    “아, 아닙니다요.”

    덕산이가 아무리 편해도 덕산이한테 분풀이하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덕산이한테 화를 내고 말았다.

    왜 요즘 들어 부쩍 신경이 곤두섰는지는 모두들 잘 알 거라 믿는다.

    모르겠다고?

    후··· 결국 가게 됐거든.

    안 가면 되지 왜 끌려가냐고 묻는다면, 분위기상 도저히 안 간다고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형님도 원치 않은(?) 지원사격을 해주셨고, 숭재 씨도 지원사격을 해줬는데 거기다 대고 ‘생각해보니 나 말고 다른 사람 보내는 게 좋겠군요.’ 이 말을 어떻게 해?

    두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왕 가는 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오키나와는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었고.

    또, 배를 만든 가쓰히로와 김비을개(金非乙介)라는 사람도 가기로 해서 걱정을 조금 덜었다.

    아, 참고로 김비을개란 사람은 나도 이번에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몇 년 전 유구국에 표류한 경험이 있던 자란다.

    그 외 사절단 구성원들과 수군의 장교들, 또 금군까지 합쳐 도합 430명이 7척의 배에 나눠 올 3월에 출발하기로 결정이 났는데 이만하면 설마 표류하거나 해적을 만나는 등의 위험한 일은 없겠지.

    뭐, 어쨌든.

    “그래서 사랑방에 있다고?”

    “예.”

    나는 휘적휘적 걸어 사랑방으로 향했다.

    사랑방 섬돌에는 과연 신이 벗어져있었는데, 이상하게 두 켤레였다.

    나는 덕산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 사람만 온 거 아냐?”

    “다른 선비님하고 같이 오셨던 걸요?”

    “음. 알았다.”

    “예.”

    덕산이가 물러나자, 나는 사랑방에 올랐다.

    문을 열자 그림을 들고 있는 양팽손과 이름 모를 선비가 보였다.

    정체불명의 선비를 흘긴 나는 상석에 가서 자연스럽게 앉았다.

    “은인께 한다는 보답에 부족함이 없도록 노력한다는 게 시일이 많이 지체 되고 말았사옵니다. 만족하셨으면 좋겠사옵니다.”

    라고 말한 양팽손이 초상화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게 초상화를 받아든 나는 내심 놀랐다.

    모두 알다시피 ‘보답’으로 초상화를 요구한 건, 귀찮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고, 정 보답하고 싶으면 그거라도 해라.

    정도 였다.

    근데 이건······.

    ‘잘 그렸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 그렸다.

    아, 그전에. 사대부 한량들의 필수 덕목중 하나가 뭔 줄 아나?

    서예다.

    그 다음이 그림이고.

    나도 종종 서예 공부를 했었다. 그림 역시 이따금 배웠었고.

    이런 걸 왜 배우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서예와 그림은 상식으로 통한다.

    대화를 하려면 필요한 주젯거리랄까?

    그래서 그림을 배우면서 대강이나마 화풍이라느니 선대의 그림이라던지는 알게가 됐는데··· 지금 내가 받아본 그림의 화풍은 거의 안견의 것과 흡사했다.

    예상 외의 그림 실력이다.

    발로 그린 그림이면 대충 문갑 안에 넣어둘 참이었지만, 생각보다 잘 그렸기에 벽에 걸어둘 요량이다.

    “그림을 취미로만 그리는 게 아닌가 보오?”

    “아, 예··· 미천한 실력이나마 갈고 닦으니 그나마 못 볼 정도는 아닌 실력을 갖게 되었사옵니다. 마음에 드시는 듯 하니 다행이옵니다.”

    “고맙소. 한데 이분은······.”

    그림을 갈무리하며 정체불명의 선비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림 보느라 누군지 묻지도 못 했다.

    “뭐하는가? 대감께 인사 올리지 않구.”

    “인사가 늦었사옵니다. 소인은 조광조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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