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51화>
***
굴.
알다시피 다른 해산물에 비해 가격적인 면에서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고, 맛도 훌륭하다.
데쳐서 먹어도 좋고, 쪄 먹어도 좋고, 계란옷 살포시 입혀서 굴전 해먹어도 좋다.
그 중에서도 굴미역국.
굴미역국은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자취만 10년 가까이 했었다. 특히 겨울철 요리에는 굴을 자주 이용했었고, 굴미역국도 종종 해먹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내막을 들으면 슬플 거다.
만났던 여자친구들 생일날 비싼 걸 해줄 수가 없으니 서프라이즈라면서 해줬었거든.
얼마나 슬퍼?
근데 사람 인생 한치 앞도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그땐 뭔가 슬프고 여자친구들한테 미안한 감정이었는데 여기서 쓰게 될 줄이야.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자, 어쨌든.
먼저 미역 한줌을 물에 불려놓자. 미역이 불기까지 다소간의 시간이 있으니 막간을 이용해서 소금으로 굴을 아이 다루듯 문지르고, 마지막으로는 물로 헹궈준다.
불려진 미역은 먹기 좋은 크기로 듬성듬성 잘라준다.
그 후에 집에 있는 들기름을 냄비에 살포시 두르고, 냄비가 달궈졌을 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낸 미역을 넣는다.
화르륵-!
냄새 한 번 구수하니 좋다.
구수한 미역 볶는 냄새를 좀 맡다가, 간장과 다진 마늘을 한 숟갈 정도 넣어주고, 잡내 제거를 위해 청주도 한 두 숟갈 넣어준다.
그리고 지금처럼 미역이 조금씩 풀어지는 기미가 보일 때, 물을 넣고 팔팔 끓이면.
끝.
여기서 간이 좀 싱겁다 싶으면 소금이나 간장을 넣어서 간을 맞추면 된다.
굴미역국인데 굴은 언제 넣냐고?
굴을 푹 익히면 자글자글해지고 퍼석해져서 맛이 없다. 국이 팔팔 끓는 지금쯤 넣으면 된다.
자, 그럼! 진짜 완성이다.
이제 남은 건 심사다.
심사를 받기 위해 완성된 굴미역국과 다른 밑반찬들을 정갈하게 소반 위에 담았다.
그렇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반을 들고 안채로 건너가려던 그때였다.
“대감마님.”
내가 음식 준비하는 동안 따로 거들 것도 없으니 행랑에서 쉬라고 했던 덕산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왜, 나 바쁜데.”
“그게 말입니다요.”
“뭔데 그래?”
“아까 그 선비님 기억하십니까요?”
선비?
“아, 기억나지. 그 선비가 왜?”
“실은 아까부터 대문 밖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요.”
“언제부터?”
“대감마님이 갑련이 아줌마하고 실랑이 할 때 부터요.”
갑련이 아줌마와 실랑이를 한 건, 뭐 큰 트러블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나에게 종속된 종 신분의 갑련 아줌마가 나와 언성을 높이면서 언쟁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다만 갑련 아줌마는 내가 부엌에 들어가겠다니 한사코 말렸다. 예전에 치킨을 만들겠답시고 몇 번 출입해 본 적이 있는 부엌인데도 말리셨다.
왜 그런가 이유를 물어보니 그때는 일가를 이뤘어도 ‘사내’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손(孫)도 보고 진짜 ‘사내’가 됐기 때문에 삼가야 한다고 했다.
뭐, 결국은 내가 이겨서(?) 요리 잘 하고 나오는 길이지만.
“실랑이 할 때면 한시진 전이잖아?”
“그렇습죠.”
포졸 부르라고 하려다가, 같이 나랏밥 먹는 처지에 이런 걸로 포졸 나리들 귀찮게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소반을 덕산이에게 건네곤 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열자 과연 덕산이 말처럼 아까 그 선비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 대인!”
아까는 은인이라더니 이제는 대인이란다.
“왜 여깄소?”
“원각사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선비된 자가 어찌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보답할 기회를 주십시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데 융통성이 아주 없다.
근데 은혜 갚는다는 걸로 융통성 없다고 나무라기도 뭐하고······.
‘혹시 딴 맘 있는 거 아냐?’
아닌 게 아니라 나랑 말 한 번 붙여보려는 작자들이 새고 샜다.
요새야 선물을 받는 족족 돌려보내고 있어서 좀 뜸하지만, 그마저도 요새는 여울 씨가 산달이란 소식이 퍼지자마자 곧 태어날 아기씨 선물이라며 마구잡이로 들여보내곤 한다.
댓가 없는 선물은 당연히 없다.
모두들 나랑 말 한 번 붙여보기 위한 거고, 말 한 번 붙여보려는 건 어떻게 자리 한 번 꿰차보거나, 또 다른 흑심이 있는 거다.
이 선비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순 없었다.
나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하고선 선비를 흘겼다.
‘딴 맘 품은 건 아닌 것 같고.’
사람 행색만 보고 그걸 단정 짓는 것도 우습지만 일단은 그래 보인다.
애당초 이 사람과 엮인 것도 내가 먼저 나서서지, 이 사람이 나서서 엮인 것도 아니고.
뭐, 좌우지간.
“정말로 됐소.”
“하지만··· 아!”
“···?”
“대인의 저택을 보아하니 지금 소인이 가진 재물을 드린다 한들 대인께 보답이 되진 못 할 것 같고, 소인이 얕은 재주로나마 그림을 좀 그릴줄 아는데 그림으로 보답해드리면 어떻겠사옵니까?”
“그림?”
“예!”
말하는 거 보면 이 사람은 내가 누군지 확실히 모르는 눈치였다.
그림이라니, 내가 도화서(그림에 관한 사무를 맡던 관아)에 말만 하면 그림 그려줄 실력 있는 화가들이 새고 샜는데······.
근데 마다하면 하루종일 죽치고 은혜 갚겠다느니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포졸 불러서 쫓아내자니 삼칠일 금기 동안 괜히 부정 타는 일 하는 것 같고.
“뭐, 그럼 그렇게 합시다.”
“그림은 뭘로···?”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냥 날 그려주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은혜 갚을 길이 생겼다는 게 그리도 기쁜지 호기롭게 답하는 건 물론,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이다.
“엄동설한에 갈 데는 있소? 그림 그리려면 거처 정돈 있어야 하잖소.”
“걱정마십시오. 있습니다.”
“뭐, 그럼 됐고.”
“완성 되는대로 다시 찾아뵙겠사옵니다.”
“그럽시다.”
그렇게 말한 나는 대문을 닫았다.
대문을 닫고 보니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미역국!’
젠장, 다 식었겠다.
* * *
“어떻습니까?”
긴장한 표정으로 묻는 지아비에 여울은 환히 웃었다.
“맛있습니다.”
여울이 활짝 웃고 답하자 지아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 다행이다. 맛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직접 만드셨다지요?”
“네.”
분명 그녀의 지아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저 짤막하게 네, 라고 답했을 따름이니까.
하지만 그 짧은 대답에 여울의 심장은 쿵쾅쿵쾅 요동쳤다.
그녀의 나이 방년 18세.
고작 18년을 살았으니 그의 아이를 받아준 산파에 비하면 긴 세월을 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18년 생을 사는 동안 지아비가 해산한 부인을 위해 음식을 해다 바쳤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친 건, 그 때문일지 몰랐다.
이 엄동설한에 부인을 위해 아궁이에 쪼그려 앉아 고생했을 지아비가 떠올라서.
“남들이 흉보면 어쩌려구 그러셨습니까?”
“흉보면 흉보라고 하죠, 뭐. 그거 다 시샘해서 나오는 소립니다. 본인들 남편은 이런 거 안 해주니까 괜히 흉보는 거죠.”
여울은 작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 지아비의 손이 살포시 얹어졌다.
“고생하셨습니다, 부인.”
여울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조선에서 자신처럼 지아비에게 대접받는 여인네가 또 있을까?
‘없겠지?’
조선 뿐만 아니라 명에도 이런 여인네는 없을 거라고 여울은 생각했다.
***
며칠 후, 강녕전.
“갑자기 곽탕(미역국)을 말이냐?”
상선의 말에 융은 얼굴에 의문문을 한가득 띄우고 되물었다.
그의 물음에 상선 역시 도통 영문을 모르겠는지, 고개를 한차례 갸웃거리고는 답했다.
“예.”
“혹 중궁이 회임을······.”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건 아닐 터였다.
박수도 두 손이 마주쳐야 되는 법인데, 그 기억이 맞다면 근래 이래저래 일이 많아 박수를 친 적이 없었다.
“무슨 영문으로 곽탕을 찾으셨단 말이냐?”
“그건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보통 곽탕이 아니오라 굴이 들어간 곽탕을 찾으셨다고······.”
“굴이 들어간 곽탕?”
“예.”
“굴이라면 질색을 할 텐데······.”
의문이 더 증폭된다.
중전은 생전 굴은 입에도 안 갖다 댔었다. 특유의 비린내 때문이었다.
한데 생전 멀리하던 굴을, 그것도 굴이 들어간 곽탕을 찾다니······.
“한데······.”
“하문하시옵소서.”
“중전이 곽탕을 찾는다면 중궁전 수라간에서 올리게 하면 되지 않더냐?”
궁궐은 대전 수라간만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중궁전 수라간도 따로 있다.
그럼, 수라간의 숙수들 마다 실력이 다르냐.
그것도 아니었다. 물론 대전 수라간 숙수들의 실력이 조금 더 낫다 볼 수 있었지만, 월등한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중전은 딱히 미식을 즐겨하진 않아서 그 차이도 잘 느끼지 못 한다.
그저 된장조치(된장찌개) 하나면 족해하는 여인이 바로 중전이란 말이다.
한데 왜 굳이··· 선뜻 이해가 안 갔다.
“그건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소신은 그저 중전마마께서, ‘전하께 굴이 들어간 곽탕을 먹고 싶다 아뢰주실 수 있으십니까?’ 하시길래 전언한 것에 불과하옵니다.”
“굳이 전언까지 하게 하다니 확실히 기이하도다.”
평소 중전을 생각하면 확실히 기이한 일이다.
중전은 국모로서 완전무결한 여인이었다. 왕가에 해가 가는 일은 일절 하지 않았고, 입도 무거웠다.
하는 행동들도 한 나라의 국모에 걸맞게 기품이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절대 권위적이지 않았다. 타고난 듯 한 기품에, 성품도 매사에 선하고 아랫 사람 대하기를 웃어른 대하는 것처럼 해서 일개 무수리에게 까지 존댓말을 할 정도였다.
그런 중전이 상선을 통해 전언하게 했으니 뭔가 뜻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골몰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중궁전에는 어찌 아뢰올까요?”
“흐음.”
그가 받은 말은 ‘굴이 들어간 곽탕이 먹고 싶다.’ 였다.
여기서 답할 말이 있을 턱이 있나.
있다고 해도 ‘드시라 전해라.’ 같은 정없는 말 뿐이었다.
“상선이 보기엔 무슨 의미 같은가?”
“소신도 잘··· 송구하옵니다.”
상선도 모른다니 더더욱 할 말이 궁색하다.
“음. 하면 내 이따 중궁에 들러 낮 것을 함께 들 것이라 전하거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상선이 조심히 물러나자, 또 다른 대전내관이 그를 찾아왔다.
“전하. 편전에 납실 시간이옵니다.”
오늘은 안남 왕자의 처분을 편전에서 논의해야 했다.
이전 날에는 진성이 없어서 구체적인 논의는 하지 못 했었다.
환복한 융은 곧장 편전으로 향했다.
편전에는 미리 입궐한 중신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오늘은 진성도 함께였고, 진성이 보이자 천군만마와 함께하는 듯 한 듬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실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먼저······.”
어좌에 착석한 융이 운을 떼자 중신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대사헌이 실로 오랜만에 편전에 들었다. 모두들 할 말 없는가?”
“경하드리옵니다, 대감.”
“경하드립니다.”
곳곳에서 경하한다는 말이 튀어나오자,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지은 융은 신색을 가다듬었다.
“안남 왕자에게 선물할 물품은 논의했는가?”
그가 묻자 영의정 허침이 읍을 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께서 이미 안남 왕자를 조선인으로 살게 하고자 마음을 굳히셨으니 굳이 물품을 주어 위무할 까닭이 있는가 하는 말들이 나왔사옵니다.”
“음, 그렇지.”
“하여 예흥청 제예 임숭재가 말하길, ‘통상 귀화한 외국인의 전례를 상고해보자면 여진족의 경우에는 번호(순종적인 오랑캐)로 삼으면서 작호와 관직을 주었사옵고, 그 외의 귀화인이 중국인일 경우엔 땅과 함께 면세 혜택과 관직을 주어 위무했습니다. 다만 안남인이 귀화한 적이 없으니 전조의 예를 상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전조에는 땅과 관직을 주었으니 이에 따라 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사옵니다.”
“모두들 찬동했는가?”
“예, 전하.”
대사성은 어쩐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미 모두들 찬성한 사안이니 굳이 딴지를 걸진 않는 것 같았다.
결국 안남 왕자의 귀화는 반대 없이 받아들여졌다.
융은 여형에게 경기도 일대에 흩어져있는 전지 130결에 면세 혜택과 노비 30구, 난신들에게 적몰한 저택 2채를 하사하며 성은을 내렸다.
물론 댓가 없는 성은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