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50화>
***
드디어 내 아이를 만났다.
도톰한 아기보에 누워서 손발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모습에 덩달아 미소 지어졌다.
실없이 웃음만 계속 나온다.
그러다 아이가 날 보고 생긋 웃자 또 다시 실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직 신생아라 누가 누군지 구별 할 수 조차 없을 텐데 날 보고 웃는 모습이 마치 날 구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전생에선 아이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는데······.’
문득 전생의 삶이 떠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땐 당장 몇 년 뒤에 뭐 먹고 살지를 생각했었지, 결혼이나 아이 생각은 해볼 겨를도 없었었다.
잠깐의 사색을 마친 나는 아이를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아이는 여전히 손발을 꼼지락거리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공주님 삶 안 부럽게 키워주마.’
자꾸 전생을 들먹여서 미안하지만, 전생의 나는 흙수저 축에도 끼지 못 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알다시피 지금은 다르단 말씀.
정말 남부럽지 않게 키울 자신이 있었다.
물론 돈이면 다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없이 살았던 전생과 있이 살고 있는 현생의 삶을 살아보니 확실히 알겠더라.
너무 당연하게도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게 편하다.
이 아이를 고래등 같은 집에서 편히 키울 수 있을 테고, 사람을 부려서 아이가 편히 생활 할 수 있도록 해줄 수도 있으며, 먹고 싶은 건 다 먹게 해줄 수도 있다.
전생의 현호는 못 하지만 현생의 이역은 그럴 재력이 된다.
재력만 돼?
권력도··· 음, 사실 절대권력이라는 생각자체만 해도 거의 모반죄니까, 절대권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만하면 어디가서 꿀릴 권력은 아니다.
명예?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천연두 백신 만든 사람이 누군지.
이거면 끝이잖아?
삼박자가 이미 갖춰진 상태란 말이다.
그래서 더 잘 키울 자신이 있었다. 정말 잘 키울 자신이.
“웅애애애애!”
갑자기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산파를 바라봤다.
“아, 아이가 왜 우는 거요?”
당황한 나와 다르게 산파는 익숙하게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랬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신기하고 왠지 모르지만 신성하게까지 느껴져서 하염없이 아이를 바라봤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문득, 진짜 뜬금없게도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무슨 어제 일이냐고?
어제 형님과 독대하면서 나눴던 대화. 그게 개연성이라곤 쥐뿔도 찾아 볼 수 없이, 갑자기 떠올랐단 거다.
그땐 치기 어린 반항심에 막 뱉은 말에 가까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간단히 웃어 넘길 말이 아니다.
‘내가 삼박자 다 갖췄어도 중국놈들이 지랄하면?’
떠오른 김에 또 다른 가정이 하나 떠올랐다.
현시점에서 다른 곳은 몰라도 최소한 아시아에서 만큼은 최강대국인 중국에서 지랄을 한다면?
이런 가정이 떠오르자 역시나 개연성이라곤 쥐뿔도 찾아 볼 수 없이 영화 《최종병기 활》이 떠올랐다.
그 영화 참 재밌게 봤···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영화에선 반상 구분 없이 모두 끌려간다.
물론 이 가정은 C급 SF영화에서도 취급하지 않을 시나리오가 분명하다.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명이 갑자기 조선을 침략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약소국의 국민으로 산다는 건 언제나 설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특히 이 아이는 0.1%에 포함된 신분계층을 타고 태어났다.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중국과 트러블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명나라가 이 아이를 볼모로 요구하면?
‘시발!’
이젠 되도록 욕은 삼가자고 바로 방금 전 다짐했으면서 금방 욕이 튀어나왔다.
저건 너무 억측 아니냐고?
그래, 억측일 수도 있지. 억측일 수도 있는데······.
그 누구야. 이름은 까먹었는데 볼모로 끌려간 왕도 있지 않나? 봉 뭐시기 였던 것 같은데.
그리고 중국과 트러블이 생긴 상황에서 세자 대신 요구할 볼모로 이 아이가 간택 된다면 약소국인 조선은 거부할 힘이 없다.
‘그건 절대 안 되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국력이 지속된다면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나 사후에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최소한의 장치는 해둬야 한다는 소리였다.
꼭 그게 아니어도 내 아이가 못 사는 나라의 상위 0.1%로 살게 하는 것 보다는, 잘 사는 나라의 상위 0.1%로 살게 하는 게 여러모로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자. 잘 사는 나라다, 잘 사는 나라······.
음, 막연해서 번뜩 떠오르는 게 없다. 내가 경제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니까.
‘화페부터 만들어야 되나?’
돈이 떠올랐지만, 금방 안드로메다 저 멀리로 날아갔다.
당장 국민들이 먹고 죽을래도 소비를 할 여유가 없는데 무슨 돈이야?
다시 한참을 고민해봤다.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떠올랐다.
‘교역 밖에 없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경제 부흥 정책(?) 중에 가장 단기간에,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교역 밖엔 없었다.
‘그러자면 얼른 안남 왕자를 만나야 되겠네.’
지금 당장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교역하는 건 무리겠지만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그쪽 정세가 어떤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 편이 낫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빼도박도 못 하게 망명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대감마님! 대감마님!”
덕산이다.
“왜, 이 자식아? 아기씨 주무시는 거 몰라서 그렇게 사방팔방 난리치냐?”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뭔데?”
“안방마님께서 기침하셨습니다요.”
여울 씨는 아이를 낳고 기진맥진했는지 기절하듯 잠들어버렸었다.
이제 일어난 모양이다.
“건너갈 테니 안채에 미리 말해놔라.”
“예!”
***
안채에 건너갈 거라고 한 나는 말과는 다르게 저잣거리에 나왔다.
뜬금없이 무슨 저잣거리냐고 싶을 수 있는데 다들 알잖나.
산후조리에는 미역국만한 게 없다는 거.
그리고, 출산시 산모들에게 미역국을 해먹이는 건 유구한(?) 전통이다.
여기서도 산모들한테 미역국을 해먹이는 풍습이 있거든.
아, 물론 형님이 여울 씨에게 미역국 해먹이라며 친히 숙수들을 보내주시긴 했지만, 고생한 여울 씨에게 숙수들의 음식을 먹게 하고 싶진 않았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남의 손으로 해먹이기 싫은, 그런 거.
비효율적이래도 어쩔 수 없다.
마음이 그런 걸 어째?
좌우지간, 형님이 숙수들과 함께 상등품의 미역도 보내주셨겠다, 바로 부엌 들어가서 미역 손질하고 국만 끓이면 됐는데 문제는 굴이었다.
여울 씨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굴이다. 그래서 굴미역국을 손수 만들어주고 싶은데 우리집엔 굴이 없다.
맞다, 저잣거리에 굴 사러 나왔다.
봄~가을에는 저잣거리를 나가도 좀체 맡기 힘든 게 생선 비린내지만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보다 손쉽게 맡아 볼 수가 있다.
머잖아 나는 어물전(魚物廛)에 도착했다. 역시, 다른 분기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각양각색의 해산물들이 즐비해 있었다.
꽃게도 보이고, 낙지도 보이고, 굴비두름도 보이고, 그리고······.
꿀꺽.
연신 침을 꼴깍거리는 덕산이도 보인다. 그러고 보면 여울 씨가 애낳는다고 행랑 식구들도 고생 많이 했지. 이래저래 눈치도 많이 보고.
“굴비 몇 두름 사가서 행랑 식구들하고 나눠 먹을래?”
“쓰릅. 아, 아닙니다요.”
“괜찮아, 인마. 너나 다른 식구들도 요새 고생 많이 했으니까, 굴비 정도야.”
딱히 부정 안 하는 거 보니 굴비가 땡기긴 했나 보다.
굴비는 한 두름에 20마리씩 엮여 있었다. 나는 정확히 20 두름을 샀다.
400마리가 좀 많은 것 같아 보여도 여기 사는 사람들 먹성을 21세기 현대인들 기준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따지고 보면 행랑 식구들 한 명당 3~4마리 씩 먹는 양인데, 이 정도로도 성에 안 차 할지 모른다.
‘그렇네. 성에 안 차겠네.’
생각해보니 400마리 갖곤 안 되겠다.
굴비를 더 사려다가, 낙지를 여든 마리 더 샀다.
굴은 볏짚 꼬아 만든 망에 들어간 거 한 망만 사려다가, 기왕 사는 거 다섯 망을 샀다.
“헤헤. 계산은 어떻게?”
간만에 호구 잡았다는 듯 희희낙락해 하는 어물전 주인이 손바닥을 연신 비벼대며 말했다.
계산?
음, 계산은 카드 긁는 거 보다 더 쉽다.
덕산이에게 살짝 눈짓 하자,
“진성대군 마마시오.”
털썩.
아니, 또 무슨 무릎까지······.
“소, 송구합니다요. 미처 못 알아 뵀습니다요.”
“뭐, 좌우지간. 굴 담긴 망 하나는 지금 바로 가져갈 거고, 나머지는 우리 집으로 배달 부탁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그럼, 부탁합니다.”
“예예, 살펴가십시오.”
어물전 주인의 배웅을 받으면서 집으로 향한지 얼마나 됐을까.
다리 너머에 소나 말을 파는 마전(馬廛)이 있는 수표교를 막 건넜고 멀지 않은 곳에는 원각사(지금의 탑골공원에 있던 사찰)가 보이니 아직 종루(종로) 일대였다.
문제는 원각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노점상들이었다.
원각사 밑에 노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게 하루 이틀일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소란스럽진 않았다. 지금처럼 사람이 박 터지게 몰려 있던 적도 없었고 말이다.
“구경거리라도 났나 봅니다요. 좀 보고 갈깝쇼?”
얼른 가자고 하려다가 엿 생각이 나서 말았다.
저 원각사 밑에 있는 노점들 중에 엿장수가 하나 있는데 그집 엿을 개똥이가 좋아하는 게 생각 나서였다.
사뒀다가 개똥이 오면 줄 요량으로 문제의 장소로 향하는데.
“이 강도놈! 뭣들 하시오! 얼른 포졸 나리들 불러 오라니까?”
“아니, 강도 놈이라니··· 나 아니라니까?”
“강도 놈이 나 강도요! 한 적은 내 마흔 생전 한 번도 못 봤다, 이놈! 생긴 건 멀쩡해서는 떡이나 훔치고··· 그래, 그제, 오늘 가져온 떡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게 어째 이상하다 싶었는데 어제도 네놈 소행이지?”
“허. 생사람을 잡는구만, 생사람을 잡어.”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유분수지, 어디서 도적 놈이 선비 행색을 한단 말이냐! 포졸 나리는 멀었소?!”
아무래도 절도 사건인 모양이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말끔한 인상의 선비였다.
봇짐 지고 있는 거 보니 지방에서 올라온 선비 같은데, 예의 선비는 연신 아니라 펄쩍 뛰고 있고, 떡장수는 연신 맞다고 펄쩍 뛰고 있다.
“아이고, 대군마마 오셨습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엿장수에게 향했다. 때아닌 구경거리에 넋이 나가 있던 엿장수가 뒤늦게 인사를 해왔다.
개똥이 때문에 엿 사러 하루, 이틀 들르다 보니 그새 인사까지 나누는 사이가 됐다.
“오늘은 어째 신통치 않은가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좌판에 엿이 한가득이었다.
“예. 날이 추워서 그런지 누가 엿 사먹으러 와얍지요.”
“그럼 좌판에 있는 거 다 주십쇼.”
“이걸 개똥이··· 아니, 개똥 도련님께 다 드리려구요?”
···알다시피 개똥이는 공신이다.
“천하의 개똥이래도 이건 다 못 먹을 걸? 생각 난 김에 그냥 행랑 식구들 좀 나눠주려구요.”
“저야 감사합지요. 헤헤.”
“그럼 저희 집으로 좀 갖다 주시겠습니까?”
“물론입죠.”
“부탁할게요. 아, 그리고 날도 추운데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고뿔 들면 큰 일 납니다.”
“헤헤. 예.”
이번에는 엿장수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아, 포졸 나리! 마침 잘 오셨습니다요. 여기 이 도적 놈이 글쎄······.”
예의 사건 현장(?)에 드디어 포졸들이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포졸까지 들이닥친거면 구경거리가 없는 이 시대 기준으로는 이만한 구경거리가 또 없는 건데, 모두 알다시피 난 이런 거엔 별로 관심없다.
“생긴 건, 어디 유학하시는 선비님 같으신데.”
“선비님은 무슨! 도적 놈입니다요, 도적 놈!”
소란스럽거나 말거나, 가던 길 가려는데······.
“응?”
나는 미간을 좁혔다.
내 눈에 물체 하나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떡장수가 벌려놓은 좌판 옆의 죽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희끄무레한 저거.
별 건 아니고, 떡이었다.
다가가서 보니 확실히 떡이다.
“이보시오.”
“잉?”
“잃어버린 떡이 몇 개나 되오?”
“4갭니다만······.”
나는 예의 죽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숨어 있는 떡에 시선을 옮겼다.
확실히 4개다.
“이 선비가 훔쳐갔다는 떡 저깄네.”
“에?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없긴, 여기 딱 있는데.”
떡을 직접 주워다 떡장수에게 가져다 줬다. 떡장수의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다. 하긴 엄한 사람을 도둑놈으로 몰았으니······.
반면 선비는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한순간에 도둑놈으로 몰렸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나 아니라 하지 않았소!”
“크흠. 죄, 죄송하게 됐습니다.”
“어우! 내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보는구만!”
“사죄의 의미로다가 이 떡이라도 좀······.”
“됐소, 돼! 그렇게 살지나 마시오!”
“···송구합니다.”
떡 절도 사건이 헤프닝으로 일단락되자,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나랏밥 안 먹고 있었으면 무시하고 갔을 텐데, 이 나랏밥 먹는다는 게 뭔지, 참······.
“저기.”
자뻑과 함께 발을 놀리는데 누군가 불러세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둑놈으로 몰린 아까 그 선비였다.
“감사합니다.”
“예, 뭐.”
“초면에 실례되는 말인지는 압니다만 어디사는 뉘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은인이라면 은인인데 어찌 유학하는 사람으로 도리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간 선비들은 이게 문제다. 은혜 갚는다는 말을 참 어렵게 꼬아서 한다니까.
“됐소.”
“아, 소인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옵니다.”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서 마다한 줄 알았나?
“소인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옵고 양팽손(梁彭孫)이라 하옵니다. 시골에서 일이 있어 막 상경했는데 무고를 당했으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한데 은인께서 구함해주셨으니 은혜를 입고도 외면한다면 어찌 유학하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양팽손?
이름이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한데, 그럴 린 없겠지.
“정말 됐소. 떡 떨어졌다고 알려준 것 밖에 없는데, 뭐.”
“그래도······.”
영 아쉬워하는 양팽손에게 정말 됐다고 연신 말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곧 해가 질 때다. 여울 씨에게 미역국 끓여드리려면 얼른 가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