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49화>
***
믿기지 않는다.
분명 내 눈앞에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건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딸이었다. 딸이란다.
다시 한 번 믿어지지가 않는다.
“축하한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가던 때. 형님이 환한 미소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사실 형님이 우리집에 찾아온 건 무려(?) 어제의 일이었다.
어제부터, 그러니까 여울 씨가 진통이 시작 된 이후 줄곧 우리 집에 머물고 계셨는데 말 다운 말을 건네신 건 ‘축하한다’가 처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대는 산부인과가 전혀 없는 세상이었다.
MSG를 조금만 첨가한다면, 애 낳다 죽는 산모가 열에 셋은 될 정도였고, 애를 낳아도 면역력이 약화돼서 목숨을 잃는 산모가 남은 일곱 중 둘은 될 정도였다.
아이라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대로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경황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대로 내 눈치를 본답시고 말을 걸지 못 했고 말이다.
“감사합니다.”
형님께 인사를 하고 나서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갔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일 같았다. 뭐랄까, 잠을 48시간 정도 못 잔 상태?
마약을 해보진 않았지만 꼭 마약을 한 것처럼 몽롱한 상태?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전히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것 같아서, 볼을 세게 꼬집어 봤다.
“아!”
젠장, 아파도 너무 아프··· 아, 이제 말도 조심해야겠다. 아빠가 됐는데 예전처럼 말을 함부로 할 순 없지.
“꿈 같나 보구나?”
“예.”
“꿈 아니니 걱정 말거라.”
새삼 현실임을 일깨워주는 형님의 말에 모순적이게도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동시에 교차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쏙 빼닮았을 아이를 봤다는 기쁨.
그런 아이를 봤음에도 보여줄 친지가 없다는 슬픔.
어쩌면 후자는, 보여줄 친지가 없다는 슬픔 보다도 더 이상 21세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뜻하기 때문에 슬픈 걸지도 모르겠다.
설령 돌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더라도 이젠 돌아 갈 수 없다.
딱히 그곳에서의 삶에 미련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제는 정말 돌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로 일가를 이뤘기 때문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기 때문에.
“이 경사스러운 날에 어찌 눈물을 보인단 말이냐?”
형님의 면박 아닌 면박에 나는 서둘러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우, 울긴 누가 운다고 하십니까.”
“그래. 안 울었다.”
“아, 그나저나 정사는 어쩌시고······.”
피식거리는 형님에 나는 뒤늦게 정사가 떠올랐다.
아까 말했다시피 형님은 어제 여울 씨가 진통이 시작된 이래 줄곧 우리집에만 계셨다.
긴장감과 초조함 속에 시간을 보낸다고, 말 다운 말을 나눠보진 않았지만 계속 사랑방에 머물고 계셨기 때문에 정사를 돌보지 못 했다는 사실은 익히 짐작 할 수가 있는 일이었다.
내 질문에 형님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셨다.
“뭐, 하루쯤 미룬다고 큰 일 나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됐다. 정사를 하루쯤 미룬다고 안 되던 일이 갑자기 잘 되거나, 배 곯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나눠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더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안채에는 언제쯤 건너 갈 수 있겠소?”
형님에게 설득 당한 나는 딸 아이임을 알려줬던 산파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금 바로 건너가보시지요. 아기씨를 안는 건 어려워도 눈으로 보는 게 무에 힘든 일이겠습니까요?”
“형님. 저 잠시 건너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려무나.”
산파가 먼저 앞장서서 방을 빠져나갔다. 나도 산파를 따라 나서려던 그때.
“진성아.”
“예?”
“이제 너도 한 아이의 아비가 됐다.”
“그렇죠.”
“세상사 쉬운 일이 없다지만, 아비가 된다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하물며 좋은 아비가 된다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은 없지.”
“···”
“하지만 너는 좋은 아비가 될 게다.”
“···감사합니다.”
“어서 건너가보거라.”
“넵!”
나는 허둥거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
궐을 몰래 빠져나간 임금이 드디어 환궁했다.
몰래라곤 해도 의원과 의녀들을 포함한 남녀궁인 수십이 뒤따랐고, 거기에 더해 금군 수십까지 거느리고 빠져 나갔었기 때문에 사실상 몰래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뭐가 됐건 지금 편전에 모인 대신들에게 중요한 사실은 임금이 환궁을 했다는 사실보다, 부부인(대군의 부인)이 순산을 했다는 것에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환궁을 촉구했다가 부부인과 태아가 출산 과정에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뒷감당을 대신들은 할 자신이 없었다.
임금이 정사를 의정들에게 맡겨두고 대놓고 궐을 빠져 나갔어도 ‘환궁하소서’ 재촉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부부인은 순산을 했다. 태아도 건강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걸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환궁하자마자 대신들을 불러 모은 임금도 입가에 미소가 그득 걸린 것이, 근래에 이처럼 기뻐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고 말이다.
“경들도 들어서 알겠지만 부부인이 순산하였다.”
“나라의 경사이옵니다.”
“좌의정(임사홍)의 말이 옳다. 종친이 또 탄생하였으니 어찌 나라의 경사가 아니겠는가?”
“대군께오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눈에 훤하옵니다.”
“하하핫. 맞다. 아주 좋아하더구나. 그래서 말인데, 내 전일에 하문한 것은 어찌 되었는가?”
“사면령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분부를 받잡고 당상과 의정들이 빈청에서 의논함에 있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온당한 일이라 하였사옵니다. 지금 부부인께오서 순산하시옵고, 대군께오서 적녀를 보신 일은 나라의 경사이옵고 왕실의 큰 경사이오니 어찌 부정한 일을 행할 수 있겠사옵니까?”
모두가 찬동을 했다고 하니 그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융은 흡족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경들의 뜻이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면 경들의 뜻대로 탕척(죄과를 씻어줌)의 예로서 은전을 베풀도록 하겠다. 부부인이 해산한 오늘, 그러니까 이달 17일 새벽 이전을 기점으로, 모반대역(謀反大逆)한 자, 자손으로 조부모나 부모를 모살하거나 음해한 자,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 혹은 음해한 자, 처첩으로 남편을 모살한 자, 미신을 믿고 고독염매(독약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고 부적이나 저주를 행함)한 자, 정당한 이유 없이 모고살인(계획범죄)한 자, 부녀자를 겁간한 자 등과 같이 사죄(죽을죄) 이하의 죄를 범한 거라면, 이미 발각이 되었건 되지 않았건 간에 모두 사면토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 그리고 좌의정.”
“예, 전하.”
“내 미처 경황이 없어 묻지 못 했는데 안남 왕자는?”
“전하께서 전일에 진성대군 저택에서 승정원을 통해 분부하신대로 태평관에 임시로 머물게 하였사옵니다.”
“음.”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시온지요?”
잠시 뜸을 들인 융이 말했다.
“전일에 안남 왕자가 말하기를 ‘은전을 베풀어 주신다면 신복(信服)의 예로서 섬기고 싶으며, 적당한 곳에 은거하고 싶다’ 라고 하였다. 다만 알다시피 전일에는 경황이 없어 내 따로 경들과 논의를 못 하였는데······.”
“···”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의 의중은 어떠하시옵니까?”
임사홍의 말에 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득 어제 진성이 한 말이 떠올랐다.
-소국이라 대국의 심기를 언짢게 하면 안 되는 거라면. 우리도 대국이 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걔들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감정에 휩쓸려서 한 말 같지만, 그래서 이 말은 감히 편전에서 입에 담기엔 불경스럽기까지 한다만, 생각해보면 안남 왕자를 조선에 정착시키는 게 해가 될 건 없었다.
비록 황제가 붕어하고, 천방지축 황태자가 황위에 오른다면 문제될 소지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 될 게 없다.
진성에게 강학을 받으면 받을수록 융은 조선이 목줄 채워진 개와 같다고 느꼈다.
평생을 목줄에 채워져서 개가 아는 세상은, 목줄의 반경이 닿는 곳 뿐이다.
조선도 같았다.
하지만 안남 왕자를 명이 아니라 조선에 정착시킨다면, 그 목줄의 반경이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교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진성이었으니, 안남 왕자를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했을 터였다.
“안 될 것도 없어 보인다. 전례에 없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하오나 황상의 용태에 차도가 없사온데 어찌 일을 번거롭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대사성 김전이었다.
김전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융 본인도 진성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하루 사이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냐 혹자가 묻는다면, 그 하루 사이 누굴 만났느냐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고 융은 답하고 싶었다.
“대사성의 의견은 그렇다 치고, 다른 이들은?”
“조심스럽긴 하옵니다.”
좌찬성(유자광)이었다.
“대사성은 황상의 용태를 거론하였는데 좌찬성은 어찌 그리 말하는 것이냐?”
“명을 떠나서 안남의 정세가 어떤지 정확히 알지 못 하는데, 괜히 얽힐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음. 다른 이들은?”
“신 허침 아뢰옵나이다.”
“말하라.”
“대사성과 좌찬성의 말에 틀림이 없사옵니다. 황상의 용태에 차도가 없으니 향후 정국이 어찌 될지 모르옵고, 안남의 정세를 모르니 괜한 일에 끼어 들어 불똥이 튈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하오나 굳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사옵니다.”
“굳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
“말그대로이옵니다. 장래를 걱정하는 것은 가(可)한 일이나 지나치면 아니한만 못 하옵니다. 사람이 현실에 살아야지, 어찌 장래의 일이 걱정되어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겠사옵니까. 국가의 일도 같사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안남에서 도망온 왕자 여형이옵고, 여형이 은전을 베풀길 간절히 원하고 있사오니, 생각해본다면 안남 역시 중화를 받들고 있는 나라이니 어찌 함께 상국을 받드는 의리로서 이를 거절 할 수 있겠사오며, 그를 받아들인다 한들 중국에서 문제 삼을 수 있겠사옵니까?”
“음. 다른 이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신 임숭재 아뢰옵나이다.”
“말해보라.”
“지금 종친이 태어나 온나라가 경사를 맞았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종친이 태어나심에, 삼칠일의 예에 근거하여 혹 티끌 부정한 일이라도 있을까 저어되는 마음에 죄수들을 사면까지 하셨사온데, 안남 왕자를 명에 돌려보낸다면 이는 인정을 해치는 일이옵고, 삼칠일에 인정을 해치는 일은 부정한 일이니 비록 상국에서 항의할 가능성이 있다 한들, 이러한 전말을 알린다면 상국에서도 너그러이 포용 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융의 표정이 일순 밝아졌다.
“경의 말이 온당한 듯 싶다. 경의 말대로 삼칠일의 예가 있는데 부정한 일을 행할 순 없지.”
“하오나······.”
“대사성은 무슨 잔말이 그리 많은가? 삼칠일에 부정한 일을 행할 순 없다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송구하옵니다.”
“안남 왕자에게 물품을 하사하여 위무할 것이니 경들은 과연 어떤 물품을 내려 위무하는 것이 좋을지 논의하고 알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