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48화>
***
편전에서 너무 성급하게 베트남 왕자 일행의 망명(?) 신청을 찬성했다.
그 결과.
베트남 왕자 일행의 입조는 흐지부지 끝이 났다.
분위기가 급랭해졌는데 어떻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더 이어가겠나?
형님은 그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겠다는 말과 함께 잠시 시간을 벌고는 강녕전으로 날 부르셨다.
그러고는 why를 외치는 내게 형님이 하신 말씀은······.
“대사성(김전)의 말도 일리가 있다.”
방금 전.
대사성은 망명 신청을 찬성한다는 내 말에 대국을 운운했다.
뭐만 하면 중국이니 대국이니 명이니··· 선비들이 외치는 거.
다들 사극에서 많이 봤잖아? 나도 종종 봤고.
그리고 21세기에선 사극에서 저런 말 나오면 아주 지랄들 납셨네 생각했었는데··· 저걸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음, 뭐랄까··· 강한 부정을 하긴 애매하니 명나라를 끌어들이는 거라고나 할까?
이건 내가 21세기에서 생각했던 사대나 중화에 동화된 선비들의 모습이 아니란 말이었다. 그저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된다고나 할까?
주로 부정을 강경하게 표하긴 애매할 때 말이다.
또, 그것만큼 좋은 말도 없거든.
명나라를 끌어들이면 논리와 근거를 안 대도 되니까.
그래서 난 형님의 말씀을 더 이해 할 수 없었다.
대사성이 말한 대국은 부정하긴 애매하니까 대충 둘러댄 소리에 불과하잖나.
“하지만 형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대사성이 정말로 명나라 눈치 때문에 그런 말 한 게 아니란 거요.”
“알지.”
“근데 왜 망설이시는 겁니까?”
“네 가르침을 받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갑자기?
갑작스런 고백(?)에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네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건 아니지만, 네 가르침을 치국에 적용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직 시기상조일진 모르겠지만 왜국에 사신도 보내볼까 생각도 했었고.”
“그러셨습니까?”
“왜국에 사신을 보낸다면 명에서도 알게 되겠지.”
“명에서 그걸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없지. 다만 대왜(對倭) 정책에 관해서는 권리가 없을지 몰라도 대(對)안남 정책에 대해선 다르다. 명에선 외국과 교린하려는 우리를 고깝게 여길 게 아니더냐.”
음, 일단 말하기에 앞서 21세기에서의 나는 친미도 아니었고 반미도 아니었다.
근데 지금 형님의 모습을 보니 미국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이 떠오른다.
‘수교도 마음대로 못 하네, 아주.’
원칙적으로 조선은 자주국가고, 명은 조선의 권한을 침해 할 수 없었다.
근데 세상만사 원칙대로 돌아가면 골칫거리가 왜 생기겠나?
원칙대로 안 돌아가는 게 세상이니 세상만사가 골칫거리 투성인 거지.
형님 말씀대로 고깝게 여길 가능성이 컸다.
다만.
“근데 그건 가정 아닙니까? 아직 명에선 가타부타 말도 없는데 이렇게 명나라 눈치를 보는 것도 우습구요.”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소국이 대국의 눈치를 보는 것도 불변의 진리인가요?”
“···”
형님은 딱히 말씀은 없으셨다.
하지만 무언이 긍정이라고 했다. 긍정하고 계시는 게 분명했다. 물론 형님의 사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약자가 강자의 눈치를 보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니까. 근데 빌어먹을 자존심이 상한다.
한국에서도 중국 눈치 오지게 보면서 중국이 잘못해도 뭐라 똑부러지게 말도 못 했는데 여기서도 그래야 한다니.
내가 대군이고 대사헌이고 나발이고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달까.
그리고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는데 미리 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정책을 결정하려는 형님에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일단 릴렉스하자.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니까.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 불변의 진리라면, 대국의 소국을 큰 포용력으로 끌어안는 것도 불변의 진리 아니겠습니까? 설마 안남 왕자들을 받아들였다고 대국에서 뭐라고 하려구요.”
“뭐, 그렇긴 하겠다만··· 문제는 황상의 병태가 심각하다는 점이다.”
내가 알기로 지금 황제는 명나라에서 명군으로 칭송받는다고 들었다. 특히 인품이 거의 성인군자에 가깝고, 황제로서 넓은 그릇을 가졌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지금의 명나라 황제다.
내가 별 걱정 없이 베트남 왕자 일행의 망명을 받아들이자고 한 것도, 그리고 형님과 대사성이 명나라 눈치를 살핀다는 말에 이해를 못 한 것도, 다 지금의 황제 때문이다.
황제의 성품상 베트남 왕자 일행을 조선에 받아들인다고 해서 트집잡을 성격은 아니거든.
뭐, 그 양반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긴 하지만······.
그나저나 병태라니?
“병태라고 하시면?”
“조만간 연호가 바뀔지도 모른다.”
연호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건, 짐작했겠지만 황제의 죽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에 가깝다.
“지난 번 천추사(황제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에 보내던 사신)로 명에 다녀온 변상(邊祥)이 말하길 ‘이변은 없어보이니 유사시 황태자 주후조가 황위에 오를 듯 하다’ 라고 했다. 한데.”
말끝을 흐리는 형님이시다.
나는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주후조.
백작가의 망나··· 아, 아니. 황가의 개망나니다.
망나니 중의 상망나니라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제1순위로 기피하는 인물이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
이제 좀 형님의 걱정이 이해가 된다.
그런 개망나니가 황위에 오른다? 조선과 기싸움을 위해서라도 별에 별 트집을 잡으려 들 게 뻔했다. 그리고 베트남 왕자 일행의 조선 망명은 좋은 트집거리가 될 테지.
“이제 이해가 되는 것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이제 좀 이해가 됩니다. 근데······.”
“···?”
“이해가 되긴 하는데 납득은 안 됩니다.”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른다.”
“그건 알죠.”
자신만만한 내 모습에서, 자신만만(?)하게 강학했던 내 모습이 오버랩 됐던 걸까?
“복안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뇨.”
있을 턱이 없지.
내가 뭐, 부두교 주술사도 아니고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지 못 하도록 막을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전에요. 아까 형님께서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건 불변의 진리라고 하셨지요?”
“그랬다.”
“지금 하시는 걱정도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건 불변의 진리인데 더해서, 예측불허한··· 아니, 좀 심하게 표현하면 막나가는 태자가 곧 황위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신거구요?”
“···”
역시, 무언이 곧 긍정이다.
그리고 무언으로 긍정을 표하시는 형님에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내 예측이 맞았다는 데서 오는 작은 희열.
내 예측이 맞았다는 데서 오는 작은 불안.
그리고 내 예측이 맞았다는 데서 오는 호승심.
무슨 호승심이냐고?
아니, 솔직히 족(足) 같잖잖아.
언제나 위풍당당하던 형님이 대국의 대자만 나오면 저렇게 움츠러드는 것도 족··· 아, 여기서 말하는 족은 족발할 때 그 족이다. 오해는 말자.
좌우지간.
대국의 대자만 나오면 움츠러드는 형님의 모습이 족같고, 대국의 대자만 나오면 움츠러들어야 하는 상황이 족같다.
내가 말한 호승심은 그것이다.
대국의 대자가 나와도 형님이 안 움츠러들고, 대국의 대자가 나와도 안 움츠러도 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
“그 막나가는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이번 일을 책잡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드는 거구요?”
“···”
“그리고 이 모든 게 우리나라가 소국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말씀이시죠?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방법에는 대국의 심기를 언짢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으니까.”
“···”
“근데 소국이 언제까지 소국이란 법은 없지요?”
내 말에 형님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란데서 그치지 않고, 황급히 사관을 바라봤다. 사관역시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내가 하던 말을 이으려 할 즈음.
“사, 사관은 나가 있으라.”
내 입에서 본인이 감당 못 할 말이 떨어질 걸 직감적으로 느꼈던 걸까?
평상시의 사관이었다면 ‘아니 되옵니다.’를 외쳤겠지만 웬일인지 사관은 군말없이 몸을 일으켜 자리를 비켜줬다.
뭐, 사관이 없으면 말하기 한결 수월하겠네.
“뭐, 어쨌든. 소국이라 대국의 심기를 언짢게 하면 안 되는 거라면. 우리도 대국이 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걔들처럼.”
“···”
정적이 흘렀다.
형님과 함께한 지난 시간 동안 이렇게 어색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이나 지루하면서도 어색한 침묵이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나나 형님이 아니었다.
“저, 전하!”
상선 대감이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더니, 갑작스런 상선 대감의 부름에 놀란 기색을 보인 형님이었다.
“어인 일인가?”
“잠시 실례좀······.”
문을 열고 들어온 상선 대감은 헐레벌떡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모양새였다.
“대, 대군마마. 속히 자택으로 돌아가보셔야 할 듯 하옵니다.”
“우리 집이요?”
“예.”
“···?”
“부, 부부인(대군의 부인)께서 산통이 오신 듯 하옵니다.”
“뭐, 산통?!”
이번달이 출산 예정일이긴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다.
형님을 바라보던 나는 형님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침소를 뛰어나갔다.
***
“중궁에게 전해 부부인을 보살피는 일은 외명부에서 맡도록 했으면 한다하고, 부부인은 이번이 첫 출산이니 모든 것이 낯설 것이다. 내 기억하기로 지난 번 산실청(왕비와 세자빈의 원활한 출산을 위해 설치한 임시관아)의 의원으로 박형건(朴炯愆)이 으뜸이었으니 박형건과 의녀들을 보내도록 하라.”
“저, 아뢰옵기 황송 하오나 박형건은 지난 번 난신들과 엮여 강화에 정배가 되었사옵니다······.”
금시초문인 듯 눈을 휘둥그레 치켜 뜬 융이 말했다.
“그랬던가?”
“···예.”
“박형건의 죄를 임시로 사하니 속히 선전관을 강화에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박형건으로 하여금 산모의 출산을 돕도록 하라.”
“그,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또 삼칠일(아기를 낳고 21동안 꺼리던 금기)의 예가 있는데 진성이 경황이 없어 이를 잊었을 수 있으니 내시부에서 이 일을 도맡아 처리토록 하고, 삼칠일에 외인이 출입하면 산모와 아이에게 위험 할 수 있으니 금군으로 하여금 저택을 숙위토록 하여 외인의 출입을 막으라. 또, 숙수(요리사)들과 곽(미역)을 보내 위로토록 하며, 내의원에 일러 지금 부부인이 산기를 보이니 속히 불수산(순산을 위해 쓰던 탕약)과 궁귀탕(부족한 혈을 위해 쓰던 탕약)을 제조하여 전하라고 하라. 또한 부부인은 원래 궁궐 출입이 잦은데, 출산 직후에는 몸이 예전만 못 할 테니 앞으로 궁궐에 출입할 때는 가마를 타고 입궐해도 책잡지 말라 교시하라.”
과장 조금 보탠다면 중궁이 출산할 때의 예나 다름이 없었다.
이 속사포 같으면서도 전례에 없을(?) 명에 정신이 아득해진 상선이었지만, 그는 왕명을 받잡기 위해 서둘러 침소를 빠져나갔다.
침소에 홀로 남게 된 융은 지친 모습으로 안석에 기댔다.
그 얼굴에 머잖아 미소가 피어올랐다.
‘조카인가.’
큰 아버지라니.
아니, 무엇보다 철없게만 보이던 진성이 드디어 아비가 된다니 믿기지 않는다.
뭐랄까, 세자가 원손을 낳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다.
‘아차.’
흐뭇해하던 융은 상선에게 미처 전하지 못 한 말이 생각났다.
“밖에 게 아무도 없느냐?”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상선을 대신할 대전내관이 들자, 융은 몸을 일으켰다.
“승정원에 교하라.”
“하명하시옵소서.”
“지금 부부인이 산기를 보이고 있으니 만약 사내아이를 출산한다면 나라의 경사이므로 죄수들의 사면령을 내림이 어떤가 중신들에게 논하도록 하라 하고, 계집아이를 출산한다면 나라의 기쁨이니 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온당한가 그 가부를 묻도록 중신들에게 묻도록 하라.”
“···?”
“어찌 그리 멍하니 서있는단 말이냐?”
“소, 소신이 아둔하여··· 부부인의 출산에 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가한가 그 가부를 묻도록 전하라 이 말씀이시온지······.”
“답답한지고.”
털썩.
“소, 송구하옵니다.”
“그러니까, 만약 사내아이를 출산한다면 나라의 경사이니 죄수들의 사면령을 내림이 어떤가 중신들에게 논하라 전하고, 계집아이를 출산한다면 이 또한 나라의 기쁨이니 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온당한가 그 가부를 묻도록 중신들에게 전하라 이 말이다.”
“···?”
“속히 승정원에 전하지 못 할까.”
“아, 알겠사옵니다.”
내관이 어리둥절한 표정과 함께 침소를 빠져나가자, 융도 침소를 나섰다.
생각해보면 침소에서 조카가 태어나길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백부로서 도리가 아닌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환복과 함께 실로 오랜만에 궁궐 담장을 넘은 융은 진성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그 뇌리에 진성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도 대국이 되면 되는 거 아니냐라······.’
피식.
하여간 종잡을 수가 없는 아이다.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이미 선왕들이 이룩했을 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