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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47화 (14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47화>

    ***

    강녕전.

    “뭐라고 했었지?”

    융은 안남인들이 광화문에 들어섰다는 상선의 보고에 뒤를 돌아보며 재차 물었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경직돼 있었다.

    그리고 경직된 그 얼굴이 낯선지 괜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진성이 말했다.

    “긴장 되시나 봐요?”

    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임금이었다.

    당연히 여러 나라 사신들의 방문을 받는다. 바로 얼마 전에는 대국 사신의 방문을 받았고, 왜국의 사신도 종종 보곤 한다.

    하지만 이처럼 떨린 적은 단연코 없었다.

    ‘진성에게 들은 내용들 때문이겠지.’

    지난 한 달.

    융은 진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파이팅이란 의미 때문에 불탔던 학구열(?)에 다시 재개했던 경연을, 또 다시 폐하고 오로지 진성에게만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다.

    창졸간에 일자리를 잃은(?) 경연관들은, 학식이 풍부하지 못 한 진성에게 가르침을 받는 임금이 탐탁찮았는지, 경연을 다시 여시라 읍소했지만 융은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경연관들에게 받는 가르침은 따분하다.

    아니, 따분하기만 하면 차라리 다행이다. 실리적이지 못 하다.

    경연관들은 성현의 말씀을 치국에 접목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융의 생각은 달랐다.

    인간의 본성은 경전을 깨우친다고 해서 교화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백의 사람이 있다면 그 백의 사람은 각기 다른 특성과 성격을 갖고 있다. 한데 어찌 성현의 말씀으로 천만 백성을 다스린단 말인가?

    하지만 진성의 가르침.

    진성의 가르침은 달랐다.

    사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건, 장난반 호기심 반이었다.

    요즘 부쩍 진성과 만남이 없었다. 진성은 진성대로 바빴고, 본인은 본인대로 바빴기 때문이었다.

    또, 그에게는 철없는 아이로만 보이는 진성이 과연 무슨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까 궁금했었다.

    그렇게 장난반 호기심반에 받은 수업.

    융은 놀라웠다.

    경연관들의 수업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도 놀라웠지만, 상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진성이 놀라웠고, 열변을 토하는 진성이 놀라웠다.

    열변을 토하는 진성이라니······.

    늘 장난기 가득한 진성에게서 그런 모습은 낯선 모습에 가까웠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진성의 학식에 있었다.

    시장의 형태. 공급과 수요. 국부론. 낙수효과··· 등등.

    융이 여태 살면서, 보위에 오른 뒤로 죄 처음 듣는 말들이었다.

    언뜻 들으면 괴상하기 짝이 없는 표현들이었지만, 보다 쉽게 설명하는 진성에 융은 금방 이해했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시장의 형태와 공급과 수요에 대해서는 대강 이해를 했다.

    가르침을 받으면 받을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장난반 호기심반으로 시작했던 수업에 열의를 갖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진성의 가르침을 받으면 받을수록 뭔가 확신이 들었다.

    괴상하고 이상한 말들이지만, 그래서 여전히 낯설지만 진성의 가르침이 해가 되진 않겠다는 확신.

    임금이 대군에게 가르침을 받는 예는 없다며 통촉을 외쳐대는 중신들이 귀찮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성의 가르침을 치국에 접목하면 나라에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

    그런 확신을 갖게 한 건 누차 말했듯 진성의 가르침이었다.

    융은 고개를 돌렸다.

    그 침소 한켠에는 기이하고 괴상하게 생긴 지도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진성이 보다 효과적인 수업을 위한 거라며 손수 그린 지도였다.

    ‘지구라.’

    진성은 저 지도를 지구라 말했다. 그리고 지도의 동쪽 끄트머리 부분에 있는 작은 반도.

    저게 조선이란다.

    민망할 만큼이나 작은 크기였다. 크기 자체만 보자면 왜놈들 보다 작았고, 대국에는 감히 견줄 수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더 동쪽에, 그러니까 바다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대륙이었다. 그 대륙은 조선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큰 대국 보다도 컸다.

    처음에는 이 지도를 짓궂은 장난이라 여겼다.

    실제로 진성도 “믿거나 말거나” 라는 단서를 덧붙였고.

    하지만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저 지도가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생겼다.

    진성은 늘 저 지도를 통해 외국과의 교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었고, 특히 이번 안남인의 표류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기 때문이었다.

    그 중요성에 대해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서였을진 모르겠지만 평소 안 하던 긴장까지 하게 됐다.

    분명 진성에게 세 번 씩이나 들었던 말인데도 까먹게 된다.

    “짜오 믕(chào mừng)이요. 짜오 믕이라고 하시면 됩니다.”

    “짜오 믕.”

    “예.”

    융은 짜오 믕이란 말을 되뇌었다.

    안남어로 환영한다는 말이란다.

    “한데 진성이 넌 안남말을 어찌 알고 있는 것이냐?”

    “많이 긴장 되시긴 하나 봅니다.”

    “내가? 하하. 설마.”

    융은 다소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물론 누가 보더라도 어색한 미소였다.

    “그것도 벌써 세 번 여쭈셨거든요.”

    그랬던가?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전하. 편전으로 납실 시간이시옵니다.”

    상선의 말에 반응한 건 진성이었다.

    “제가 안남말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는 나중에 다시 알려드릴 테니 일단은 가시죠. 긴장도 푸시구요.”

    “기, 긴장 같은 거 안 했다니까.”

    “예예.”

    “진짜라니까 그러는구나.”

    “물론이죠.”

    “···”

    ***

    여형은 제주에서 조선의 수도라는 서울까지 올라오면서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여기서 명으로 가는 것 보다 차라리 정착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확신이었다.

    이미 조국을 떠난 지금.

    형제들을 구원하고, 폭군의 손에 억압받는 백성들을 구제 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 건 어린 여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에만 가면 형제들을 구원하고, 폭군의 손에 억압받는 백성들을 구제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건, 하나의 믿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믿음이라도 갖지 않는다면 조국을 버리고 떠나왔다는 대의명분마저 잃게 될 게 아닌가.

    하지만 제주에 머무는 내내, 웃고 떠드는 가신들과 그 식속들을 보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형제들을 구원하고 억압받는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건 자신의 바람이었다.

    말로는 저들 역시 다른 공(公)들과 백성들을 폭군의 손에서 구제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진실된 바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미 많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많은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제 조금은 웃고 떠들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에게, 차마 내 바람을 위해 명으로 가자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언제까지 저들에게 헛된 희망만 품게 할 순 없었으니까.

    언제까지 저들에게 헛된 희망만으로 살게 할 순 없었으니까.

    언제까지 저들에게 본인의 바람을 강요 할 순 없었으니까.

    조선의 수도로 호송되면서 여형은 범구화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 정착을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냐고 말이다.

    그 질문에 구화는 대수롭지 않게 괜찮은 것 같다는 말을 하려다가,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걸 보며 확신이 생겼다.

    역시 명으로 가는 건, 자신의 바람을 강요하는 일에 지나지 않다는 확신.

    저들을 더 이상 고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확신.

    아닌 게 아니라, 여기 조선에서 명으로 가는 길도 순탄지만은 않을 터였다.

    명에 정착을 하고, 적응을 한다고 해서 끝은 아니었다.

    갖은 고생을 다한 저들에게 또 다른 고생을 강요해야만 할 터였다.

    오직 자신의 바람을 위해서.

    이미 많은 사람을 잃은 여형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 날 밤.

    여형은 구화와 다른 이들을 불러모아, 조선에서의 정착 의지를 밝혔다. 처음에는 회의적이던 구화도, 눈치 같은 건 보지 말라는 여형의 말에, 사실은 모두들 지쳤다는 말을 해왔다.

    그게 전부였다.

    갑작스럽게 정착을 확정 지은 셈이었지만 후회가 된다거나 혹은 아쉽다거나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가 조선 정착을 마음 먹은 건 포기에 의한 게 아니었다.

    순전히 가신들을 위해서만도 아니었다.

    정말로 조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과제가 남아 있었다.

    조선 국왕의 윤허였다.

    이 나라가 이방인을 후대하는 관습이 있더라도 그건 이방인을 정착시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조선 국왕의 윤허가 없다면 조선 정착도 물거품이 되고 마는 셈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조선 국왕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여형은 수도로 가는 내내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조선 국왕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를 골몰했다.

    재물은 안 된다.

    난파 된 배에 소량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건 조선에 정착하면 그를 따라온 가신들과 그 식속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그마저도 소량에 불과한지라, 이걸 조선 국왕에게 바친다 한들 환심을 사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할지는 미지수였다.

    선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지만, 그게 소량에 불과하다면 오히려 자신을 기만한다거나 괄시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여형은 긴장되는 마음반, 설레는 마음반.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조선의 궁궐에 도착했다.

    이국적인 양식으로 지어진 궁궐에 절로 눈길이 갔지만, 궁궐의 모습을 눈에 담을 새도 없었다.

    그는 금세 편전이란 곳으로 안내가 됐다.

    그리고 도착한 편전.

    편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구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분이 임금인가?’

    어딘가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의 임금이 분명해보였다.

    ‘우리가 탐탁지 않으신가?’

    하지만 여형은 임금의 경직된 표정에서 자신들을 꺼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더욱 공손히 허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그가 막 굽힌 허리를 필 즈음.

    “짜오 믕.”

    여형은 두 귀를 의심했다. 월어(베트남어)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

    “짜오 믕.”

    형님의 입에서 환영한단 말이 나오자 나는 쾌재를 불렀다.

    어쩐 일인지 긴장을 좀 하셨는데 다행히 더듬지 않고 한 번에 성공하셨다.

    그나저나.

    나는 고개를 돌려, 중국말로 이중통역을 거쳐 형님께 인사하고 있는 베트남 왕자를 바라봤다.

    어리다는 말은 들었는데 진짜 어리다.

    저 어린 것이 산 넘고 물 건너서 박해를 피해 도망왔다 생각하니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뭐, 정치적인 이유로 도망자 신세가 된 사람이 저 아이만 있는 건 아닐 테지만··· 따지고 보면 21세기에도 많았고 말이야?

    근데 TV나 신문에서만 보던 망명자를 눈앞에서 보니 왠지 내가 다 서글픈 느낌이다.

    어딜가도 환영 못 받을 거 아닌가?

    명나라로 갈 생각이었다는데, 어쩌다 조선에 표류해서··· 사람 인생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다지만 명색이 왕자로 태어났는데 도망자 신세가 됐다.

    불쌍하기 짝이 없······.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편전이란 곳이 조용해야 맞는 거긴 한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당혹스러운 눈빛을 한 형님이 보였고,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워 하는 중신들이 보였다.

    왜 그러지?

    “숭재 씨. 숭재 씨.”

    나는 옆에 함께 시립해 있던 숭재 씨를 불렀다. 넋이 나가 있던 숭재 씨는 연이은 부름에도 답이 없다가,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에? 예, 대감.”

    “안남 왕자가 뭐라고 했길래 분위기가 이럽니까?”

    “모, 못 들으셨습니까?”

    “뭐 좀 생각하느라. 뭐라고 했는데요?”

    “그, 그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뭘 내려요?”

    “뿌, 뿌리 말이옵니다.”

    “정착?”

    끄덕.

    베트남 왕자 일행 표류 -> 제주에 머묾 -> 한양에 옴 -> 갑자기 망명신청함 = ?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두 눈을 끔뻑거리며 삐걱거리는 머리를 풀가동시켰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나쁠 게 없잖아?’

    내가 형님과 다른 제자 둘을 가르치면서 강조했던 게 교린과 교역이었다.

    사치를 장려시키려고 했던 것도 사실 교역을 위한 큰 그림이기도 했었고.

    근데 모두 알다시피 난 역알못이다.

    한국사도 모르는데 베트남 역사는 어떻게 알겠나?

    베트남 역사를 모르니 지금 베트남 정세가 어떤지는 더더욱 모르고.

    교역을 하든 교린을 하든 상대를 알아야 뭘 하던가 하지, 하나도 모르는데 뭘 어떻게 하겠나?

    막말로 베트남이 지금 내전 중이면··· 아니, 솔직히 내전 중일 가능성도 있다. 눈앞에 베트남 왕자가 있잖은가? 왕자 씩이나 되는 인물이 망명을 했다.

    말로는 박해와 폭압을 피해서 명으로 가던 길이었다고 하지만, 본국의 정세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 대충 둘러 댄 가능성도 없진 않다.

    자, 내전 중인 베트남.

    그 베트남에 다짜고짜 친구하자면서 사신을 보낸다?

    이건 말이 안 되지.

    근데 저 왕자가 망명을 한다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누구보다 베트남 정세에 빠삭할테니까. 물론 그 주변국들에 대한 상황도 말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베트남 왕자 일행 표류 -> 제주에 머묾 -> 한양에 옴 -> 갑자기 망명신청함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이 망명 저는 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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