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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45화 (14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45화>

    ***

    대월(베트남)의 정세는 암담했다.

    성종 사후 황제가 두 번이나 바뀌었고, 이후 황위에 오른 여준(黎濬)은 날이 갈수록 폭정을 일삼았다.

    주색잡기는 기본이었다. 매 끼니마다 잔치를 벌였고, 창기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국기를 문란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사람 죽이는 걸 즐겨했다.

    걸핏하면 신하들을 잡아다 죽였고, 의심은 또 어찌나 많은지 종친을 경계해서 이런저런 구실과 함께 종친을 하나, 둘 처리해버렸다.

    폭정이 날로 심해지니 민간에서는 황제를 귀황(鬼皇)이라고 불렀다.

    하는 짓이 악랄하고, 하는 짓마다 악귀 같다고 해서 붙여진 불명예스런 별명이었지만, 막상 금황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을 바로잡겠다며 사람들을 더 잡아다 족칠 뿐이었다.

    이런 마수는 기어코 어린 여형(黎瀠)에게도 뻗쳐졌다.

    그 계보를 따지자면 금황은 정통성이 전연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성종의 적자이자 그 사후 황위에 오른 헌종.

    그리고 헌종이 제위를 10년도 못 채우고 급사하자 황위에 오른 숙종.

    헌종과 숙종은 성종의 적자였지만 금황은 아니었다.

    천한 궁녀가 어머니였고, 그마저도 그를 낳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궁궐에선 천덕꾸러기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여형의 아비인 건왕(建王) 여빈(黎鑌)은 성종의 적자였던데다, 뭇 선비들에게 현자로 추앙 받는 사람이었다.

    금황으로서는 현자로 추앙 받은 건왕 여빈의 아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여형의 나이가 11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벌써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금황은 체포령을 내렸다. 갑작스런 황제의 명에 형제들은 모두 체포가 된 상태였으니 여형은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끌려갔다간 그대로 죽임을 당할 게 뻔했다.

    가신들과 아버지인 건왕을 따르던 선비들의 도움을 받은 여형은 형제들과도 생이별 한 채, 어렵사리 배 3척을 구했다.

    그 3척의 배에 가신과 그 가족 180명을 태운 채, 여형은 고국을 떠났다.

    목적지는 명나라였다.

    여형에게는 할아버지 되는 성종을 명에서는 좋게 보고 있었고, 그 관계도 괜찮은 편이었다.

    반대로 금황과 명의 관계는 파탄일로에 놓였으니 성종의 손자인 자신을 명에서 박대하진 않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고국을 떠나 망망대해를 떠돈지 어언 5개월.

    그 과정에서 1척의 배가 폭우를 만나 난파됐고,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1척의 배는 해적을 만나 나포가 됐고 여기서는 40명에 가까운 이들을 잃었다.

    남은 1척의 배에 110명을 태운 채 다시 망망대해를 2개월간 떠돌았다.

    그래도 여형과 무리들은 희망을 잃진 않았다.

    명에만 도착하면 어떻게든 목숨을 구명할 길이 있을 것이고, 명 황제의 위엄을 빌려서라도 형제들을 구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다.

    폭풍을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해적과 폭우를 피해 고산국(대만) 일대에 기항한 무리는 물물교환을 통해 물자를 실은 뒤, 곧장 북상했다.

    고산국에서 20일을 북상했으니, 여형과 그 가신들은 못 해도 태주(지금의 타이저우) 일대라고 판단했으나 착각이었다.

    연안을 따라 북상하고 있다는 판단과 다르게 배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들이 태주라고 판단한 곳은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기질이 억세고 온순하지 못 했다.

    여형 무리를 적이라 판단하고 군사를 풀었고, 결국 여형 무리는 허둥지둥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폭풍우를 만난 건 그 즈음이었다.

    다행히 배가 난파 당하지는 않았지만 해로를 잃고 말았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비축해둔 물자가 다 떨어졌을 쯤이니 못 해도 보름은 지났으리라.

    멀리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형과 무리들은 육지를 보고 환호했다. 드디어 명나라에 도착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엉뚱한 나라일수도 있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작은 배를 내려보내 정탐을 했다. 물론 사람들의 눈길을 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야밤에 정탐을 했지만, 일단 명나라는 확실해 보였다.

    명나라 같다는 정탐선의 보고에 여형은 뱃머리를 육지로 돌렸다.

    다만 짙어진 새벽 안개와 익숙지 못 한 해안 지형에 배가 좌초되고 말았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배를 더 쓸 순 없어보였다.

    여기가 명나라가 아니라면 꼼짝없이 갇힐 텐데······.

    여형과 그 가신들은 일단 배에서 내려 주변을 돌아봤다. 그 과정에서 원주민을 마주치긴 했는데 여형 무리를 보고 기겁한 원주민 때문에 대화를 나눠 볼 순 없었다.

    그때.

    저 멀리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어림잡아 기십이 넘는 군사들과 함께 말이다. 복장도 뭔가 이상했다.

    명나라 같다는 정탐선의 보고와 달리 군사들의 복장이 명군 같진 않아보였다.

    명조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해적섬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한 여형 무리는 서둘러 배로 돌아갔다.

    여태 한 번도 쓰지 않은 무구를 챙겼고, 완전 무장을 한 채 그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어린 여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몇 개월 전.

    해적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가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단의 무리가 배 안으로 접근하는 게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해적이면 어떡하죠?”

    긴장되는 마음에 여형은 가신단의 우두머리인 범구화(范句和)에게 물었다.

    “해적일지라도 아주 무도하진 않을 테니 저희의 사정을 설명한다면 공(公)과 저희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을 것이옵니다.”

    여형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지만 해적은 무도하기 때문에 해적이다.

    구화는 슬그머니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단의 무리가 배 안으로 들어왔다.

    ***

    조선판 만우절을 맞아 큰 마음 먹고 거짓말을 했는데 거짓말이 현실이 됐다.

    말이 씨가 된다고,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거짓말이 정체불명의 황당선이 제주에 좌초됐다는 사실이 돼버린 것이다.

    아, 정체불명의 황당선은 안남선.

    그러니까, 베트남 국적의 선박이란다.

    제주목사의 장계에 의하면 문정을 해보니 중국으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오키나와로 떠내려갔고, 오키나와에서 다시 중국으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서 제주로 오게 됐다는데······.

    음. 뜬금없지만 오키나와 가는 거 재고좀 해봐야겠는 걸?

    생각해보면 너무 성급하긴 했어.

    물론 베트남->중국과 한국->오키나와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 할 순 없지만 어쨌든 폭풍 한 번 만나면 X 될 수가 있다는 소리가 아니면 뭔가.

    다음달이 출산 예정일인데 애비 없는 고아로 만들 수도 없고··· 흠.

    그래, 확실히 재고좀 해봐야겠다.

    “동지사(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가 출발하기 전이었다면 함께 명으로 달려 보냈을 텐데 시기가 적절치 못 하니 일단 서울로 호송을 시키는 게 좋겠는고?”

    아, 뻘생각 하다 보니 여기가 편전인 걸 잊었다.

    오키나와 가는 부분 재고하는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본업에 충실하자.

    흠흠.

    “제주목사에 의하면 이미 쓰던 배도 난파 당했고 물자도 다 떨어졌다고 하니 도성에 불러 자초지종을 자세히 캐묻는 편이 온당할 듯 하옵니다.”

    “문정 내용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함부로 도성에 들이는 건 과한 처사가 아닐는지요?”

    “해적일 가능성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음.”

    “하지만 전조에도 안남인이 화산에 정착한 예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건 또 처음듣는다.

    귀를 기울이자, 예흥청 제예 숭재 씨가 말을 이어나간다.

    “장계에 의하면 안남의 왕자라던데 전조때 안남인으로서 입조한 이용상(화산이씨 시조)처럼 박해를 피해 온 것일 수가 있사옵니다.”

    “근거는?”

    “일국의 왕자가 본국을 떠날 일이 얼마나 되겠사옵니까?”

    “제예의 말씀이 지당하긴 하나, 다만 죄를 짓고 떠나온 것일 수도 있지 않겠소?”

    김굉필의 합당한 지적이었다.

    “죄지은 사람을 추종하는 무리가 어찌 기백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풍습이 예부터 어질고 혹 표류한 자를 보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내는 예가 있는데, 만약 박해를 피해 온 것이라면 서둘러 호송하여 중국에 돌려보내는 것이 가한 줄로 아뢰옵나이다.”

    의견이 상반된다.

    사실 김굉필의 말이나 숭재 씨의 말이나 틀린 건 없다.

    여긴 일국의 수도다.

    서울특별시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여긴 왕이 기거하는 수도다.

    허락을 받지 않으면 일본인이나 여진족도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다.

    함부로 도성에 들였다가 난리라도 일으키면 그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같은 맥락에서 만일, 아주 만에 하나라도 그 안남인들이 해적인데 도성에 들였다간 큰 일이 날 수 있다는 지적을 우회적으로 하는 것이니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숭재 씨의 말도 틀린 건 없다.

    인도주의적인 문제를 거론한 거니까.

    정말 박해를 피해 온 거라면 도성에 기거하게 한 뒤에 중국으로 돌려보내면 되는 문제잖나.

    ‘근데 나 베트남어는 하나도 모르는데.’

    물론 할 줄 아는 게 몇몇 개 있긴 하다.

    신 짜오(Xin chào, 안녕하세요)

    깜 언(Cám ơn, 감사합니다)

    땀 비엣(Tạm biệt, 안녕히 가세요)

    꼼 사오(Không sao, 괜찮습니다)

    이 정도?

    물론 이 정도로 회화는 안 된다.

    ‘서양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서양인이라고 모두 영어를 쓰는 건 아닐 테지만, 영어가 만국공용어인건 21세기나 지금이나 같지 않나?

    배 타는 사람들이면 만국공용어인 영어 정돈 쓸 줄 알테고··· 그럼 내 영어 실력을 뽐낼 절호의 췐스가 됐을 텐데 아쉽다, 아쉬워.

    이럴 줄 알았으면 베트남어 공부도좀 해둘 걸 생각하던 그때.

    “대사헌의 견해는 어떠한가?”

    또 갑자기 지목당했다.

    뻘 생각을 하다가 지목 당했기에 놀람이 더욱 컸지만 나는 최대한 침착을 유지한 채 되물었다.

    “어떤 견해를 말씀하시는지?”

    “속히 도성에 호송하여 중국에 돌려 보내는 편이 좋겠는가, 아니면 제주에 사람을 내려보내 배를 고쳐준 연후에 물자를 채워서 돌려보내는 편이 이롭겠는가?”

    조정 의견이 숭재 씨 견해와 김굉필의 견해로 상반되고 있는데··· 사실 난 숭재 씨 의견을 지지한다.

    인도주의적 차원인 문제가 아니라, 나쁠 게 전혀 없어 보이거든.

    게다가 필사된 제주목사의 장계를 읽어보면 정황상 해적 같아 보이진 않았다.

    “장계에 의하면 대정현감이 문정하러 갔을 때 저항 의지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가?”

    “그랬지.”

    “해적이었다면 저항을 했을 수도 있는데 관군인 거 눈치 채고 투항했다고 하니 적의는 없는 것 같고··· 뭐, 도성에 들어올 땐 무장을 해제 시키면 될 문제고··· 염탐이란 문제가 있긴 한데 안남인이 조선을 염탐해서 무슨 득 될 게 있겠습니까?”

    안전불감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팩트다.

    일본과 여진족의 서울 왕래를 제한 시키는 건 염탐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남?

    비행기 타고도 베트남까지 대여섯시간이 걸린다. 배타고 가면 못 해도 몇 개월은 걸릴 텐데 조선을 염탐해서 뭐하겠나?

    물론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거다.

    “그리고 저희 나라도 슬슬 교역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교역?”

    금시초문이란 듯 되묻는 형님에 나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1년 전에 내가 형님께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사치를 장려해야 하고 교역을 늘려야 한다고 말씀 드렸거늘······.

    “예. 설마 전하께서는 교역을 명나라와 일본, 유구국, 여진족 정도로 국한 시킬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끔뻑끔뻑.

    눈만 끔뻑거리는 형님을 보니 그럴 생각이셨나 보다.

    이거, 아무래도 오늘 특훈(?) 들어가야겠다.

    서경덕, 반석평 외 제자 한 명 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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