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44화>
***
자, 퀴즈다.
4월 1일이 무슨 날일까?
맞다. 만우절이다. 이 날 만은 거짓말이 합법(?)이 된다.
절대 그럴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저명 인사들도 이 날 만은 위트있는 거짓말로 평소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중들에게 친숙히 다가가기도 한다.
이 만우절은 21세기에만 존재하던 풍습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에도 존재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싶지? 나도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막 대군으로 첫 걸음을 떼던(?) 1년차때.
첫눈이 왔다.
그러더니 대뜸 형님이 날 더러 왕을 하라지 뭔가?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린가 하고 자초지종을 물으니 첫눈 오는 날은 거짓말이 합법(?)이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첫눈 오는 날이 조선판 만우절인 셈이었다.
작년은 형님에게 당했지만 올해만큼은 당할 수 없었다.
나는 첫눈이 오기를 벼르고 별렀다.
올해는 첫눈이 좀 늦게 온 편이었다. 보통은 11월에 오곤 하는데, 겨울 절기의 하나인 대설(大雪) 동안 눈소식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와야 할 눈이 안 오니 이 또한 천재지변이라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던데, 뭐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대설을 지나 12월 14일.
드디어 늦은 첫 눈이 오기 시작했다.
“흐흐흐.”
작년에 형님께 당한 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다.
날 더러 왕을 하라니, 그게 말인가 막걸린가?
형님은 당황스러워서 허둥거리는 날 보고 낄낄 웃으셨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 차례다. 이번엔 내가 형님을 골려 드릴 차례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등청하자마자 오늘 처리할 업무도 뚝딱 해결했고, 첫 눈이 오는 것도 확인했다.
비누?
뭐, 그건 덕복이가 알아서 잘 하고 있고······.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지금 비누로 남긴 이문이 어마무시하다.
얼마였댔지, 뭐 이제 2000개 정도 팔았을 따름인데 인건비와 제조 비용을 제외하고도 십만석 이상의 이문이 발생했단다.
근데 내가 이문 남기고자 한 건 아니니까, 이건 차후 처리하도록 하고, 일단은 만우절 거짓말이 우선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작년에 당한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이불을 퍽퍽 걷어차곤 한다.
“저 먼저 퇴청합니다.”
혹시라도 눈이 그칠새라 슬쩍 눈이 오나, 안 오나 확인한 나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자 서둘러 외투를 챙겼다.
“예.”
안처직과 다른 관리들의 배웅을 받은 나는 환복도 하지 않은 채 곧장 입궐했다.
내관에 의하면 형님은 경연 후,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간식을 들고 계시단다.
“후후.”
지금이 적기다.
경연을 마치고 간식과 함께 평온히 하루의 절반을 보내고 있던 형님은 내가 준비해온 거짓말을 듣자마자 놀라 까무러치실 것이다.
문앞에 서자 대전내관이, ‘전하. 대사헌 드셨사옵니다.’ 아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형님께서 ‘들라하라’ 라는 분부가 떨어지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어제꼈다.
“전하!”
그리고 최대한 다급한 어조로 형님을 불렀다.
간식으로 떡을 들고 계셨던지 떡을 입에 막 넣으려던 형님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고 날 바라보셨다.
“큰 일 났사옵니다! 큰 일!”
“큰 일? 어인 일인데 진성이 네가 이리 호들갑이란 말이냐.”
“허··· 지금 이게, 보통 큰 일이 아니라가지고 말이··· 말이 안 나옵니다.”
“일단 진정을 하거라, 진정을. 자, 물도 좀 들고.”
형님이 건네는 물 한 잔을 벌컥 들이킨 나는 연신 심호흡을 해댔다.
“어인 일인데 숨까지 헐떡거리면서 달려온 것이냐?”
“그게 남쪽에서··· 남쪽에서!”
“남쪽에서?”
“왜구가 출몰했다고 하옵니다!”
“뭐라! 왜구?”
“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형님은 어딘가로 튀어나갈 기세였다.
편전으로 뛰쳐나갈 생각이셨겠지.
“얼마나? 아니, 어디에? 어디에 상륙했다고 하더냐? 또 백성들은 얼마나 상했다고 하더냐?”
“아직 그것까진 파악이 안 되고 있사온데··· 실은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사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라니?”
“잠시만 나와보시옵소서.”
형님과 나는 전각을 나왔다.
당연히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
고개를 갸웃거리는 형님에 나는 펑펑 내리고 있는 눈과 소복히 쌓인 눈을 가리켰다.
“올해 첫 눈이 내렸사옵니다.”
“첫 눈이 내린 것이 어찌 왜구가 출몰한 것보다 더 큰··· 아.”
이내 거짓말임을 간파했는지 형님은 연신 피식거렸다.
“첫 눈이 참 예쁘게 내리지 않습니까? 제가 또 이렇게 예쁘게 내리는 눈은 처음 봅니다. 하핫.”
능글맞게 웃자 형님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작년에 당한 걸 올해 설욕했구나. 하. 깜빡 속아 넘어갔다. 나는 또 정말인 줄 알았잖느냐.”
“흐헤헤.”
“그래도 다행이다. 늦었어도 눈이 내리긴 했으니······.”
아까도 말했지만 여긴 날씨의 이상을 임금의 탓으로 몰아가곤 했다.
갑자기 우박이 내리거나.
비가 안 오거나.
와야 할 눈이 안 오거나.
모두 임금의 실정 때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이라 믿는 것이다.
형님의 말씀처럼 뒤늦게나마 눈이 내렸으니 다행은 다행이다.
“첫 눈이 펑펑 오고 있으니 내년은 풍년이겠습니다.”
여긴 그런 속담이 있었다.
한 해의 끝에 눈이 펑펑 내리면 그 다음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사실인진 모르겠는데, 그냥 그런 말들이 있다.
“풍년이면 좋겠구나.”
“그러면 바랄 게 없겠죠.”
우리는 나란히 서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구경했다.
날은 추웠지만 쌓이는 눈을 보면 마음은 포근해지는 기분이 느껴지던 그때였다.
“전하! 전하!”
형님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도승지였던 김감이 홍문관 대제학으로 영전하고, 공석이 된 도승지에 새로이 제수된 권균(權鈞)이었다.
“도승지가 아니냐.”
“큰 일 났사옵니다······.”
큰 일 났다는 권균의 말에 형님은 날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래? 무슨 큰 일?”
“이게, 그러니까··· 지금······.”
“차근차근. 천천히. 숨을 좀 고르고 말해보아라.”
“남쪽에서··· 그러니까 지금 남쪽에서······.”
“하핫. 그래, 남쪽에서?”
“그, 제주목사가 장계를 보내왔사온데······.”
“장계를 보내왔는데?”
“저, 정체불명의 황당선(국적불명 선박)을 나포했다고 하옵니다!”
황당선을 나포했다는 권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푸하하하하!”
“···?”
“한 발 늦었느니라.”
“어, 어인 말씀이시온지······.”
“이미 대사헌이 첫 눈을 맞아서 농을 했으니 한 발 늦은 게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그게 무슨······.”
권균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나와 형님을 번갈아 쳐다봤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내 깜빡 속아 넘어 갔을 텐데, 아쉽구나. 한데 도승지에게도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내 미처 몰랐다. 늘 과묵하더니. 하핫.”
선뜻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신지 권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 내 도승지의 새로운 면을 봤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전하.”
“음?”
권균은 소매에서 두루마기 하나를 꺼내보였다.
장계가 분명했다.
“···농이 아니옵니다.”
***
따뜻한 아랫목에서 뒹굴며 등을 지지고 있던 대정현감(大靜縣監) 이분숭(李蕡崧)은 관비가 조반을 들고 아침때를 알리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둥근 소반에 담긴 음식들에 이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간벽지인 탐라.
아니, 아예 바다 건너에 있는 곳이니 산간벽지 정도가 아니다.
부임하다가 배가 난파 당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고, 거친 섬사람들이 난동을 피우면 현감직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자리였으며, 간혹 왜구가 출몰하기라도 한다면 출동을 해야 하니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지만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장점이 수두룩했다.
일단 조정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감시가 소홀하다.
이건 수령으로서 이점 중의 이점이었다.
툭 하면 수령을 탄핵하고, 툭 하면 수령을 겁박하는 대간의 눈도 피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이 대간 놈들은 본인들이 받으면 선물이고, 남이 받으면 뇌물이다.
공물을 조금만 뒤로 빼돌려도 본인들이 하면 관행이고, 남이 하면 비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탐라라는 산간벽지에서는 탄핵 받을 일이 드물 수 밖에 없었다.
역시나 오지라는 단점이 있긴 하다만 풍광도 좋고, 시간 때우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달까?
게다가 무슨 사건이 터져도 기호지방 이었어봐라.
형조에서 들쑤시고, 사헌부에서 들쑤시고, 의금부에서 들쑤실 게 뻔하다.
꼭 그게 아니어도 감영에서 사람을 보내 수사도 하고, 혹 살인사건이라면 검시도 철저히 해야한다.
한데 이 탐라?
사건이 터져도 대충 조작해서 장계를 올려보내면 그만이다.
조정에서 어찌 사태를 파악할 거란 말인가?
설혹 살인 사건이 나더라도, 그래서 의심쩍은 정황이 수두룩 빽빽이더라도 제놈들이 사람을 내려보낼 건데, 어쩔 건데?
똑같이 수령에 대한 추문이 나돌더라도, 조정의 감시가 소홀한 탐라에서 나는 것과 경기도에서 나는 것은 그 규모부터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사방이 꽉 막혀 있다 보니 입단속 하기도 훨씬 손쉬웠고.
하지만 이것들보다 가장 큰 이점은 먹을거리였다.
내륙에서는 하도 비싸서 엄두도 못 내는 해산물들.
이 해산물들을 마구 입에 넣을 수가 있었다. 해안가를 돌다 물질하는 잠녀(해녀)가 있으면 슬쩍 맛 좀 보겠다며 ‘선물’로 받을 수가 있었고, 꼭 그게 아니어도 가만히만 있으면 알아서들 ‘선물’을 바친다.
전복이니 조개니 꽃게니··· 다양한 종류의 해산물들을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늘 식사 때가 기다려졌다.
관비가 아침때라는 걸 알리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호오.”
마침내 관비가 소반을 들고 방안에 들였다.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생선찜이다. 무슨 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생선을 보니 갈치같다.
그 옆에는 생전복과 배를 떡 까고 누워있는 게장도 보였다.
꿀꺽!
이런 게 행복아니겠나?
그렇게 분숭이 막 수저를 들던 그때였다.
“사또! 사또 나리!”
익숙한 호방의 목소리였다.
“꼭두새벽부터 호방이 어인 일이신가?”
“그게, 해안에 좌초된 황당선이 있습니다요.”
밑도끝도 없는 말에 분숭은 눈살을 찌푸렸다.
“좌초된 황당선?”
“예.”
“문정은?”
“아직······.”
“문정도 안 하고 뭘 했단 말인가.”
“얼른 사또 나리께 알려야 된다는 생각에······.”
개뿔.
문정하다가 일 터질까봐 미룬 게 분명했다.
인상을 구긴 분숭은 소반을 흘겨보다가 수저를 내려놨다.
어지간하면 밥부터 들겠지만, 황당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중국배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만약 중국배가 아니라 왜구의 선박이 좌초한 거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조정에서는 그를 힐책할 게 분명했다.
인명 피해는 없더라도, 왜구가 연안까지 들어올 동안 감시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소리니까.
분숭은 제발 황당선이 왜구의 선박은 아니길 바라며 좌초된 배가 있다는 용머리 해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용머리 해안.
용머리 해안으로 향하는 동안 분숭은 내심 왜구의 배가 아니길 바랐으면서도 중국배일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었다.
요새 왜구가 출몰한 적도 없지만, 왜구는 제주의 지형에 빠삭하다.
그런데 왜구가 용머리 해안 앞바다에서 좌초됐다?
그럴 가능성보다는 제주의 지형과 해류에 익숙지 못 한 중국 선박이 일본이나 유구로 향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좌초됐다는 가능성이 더 컸다.
그리고 중국배라면 일이 생겨서 귀찮아지긴 할지언정 큰 일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용머리 해안에 좌초된 황당선은 중국배 같진 않았다.
“저, 저게 어느 나라 배인가?”
호방에게 묻자 호방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왜선도 아니고 당선(중국배)도 아닌 것이··· 아니, 좌초된 게 언제쯤이라던가?”
“일대에서 고기잡던 배가 쾅! 소리 듣고 가보니 좌초돼있다고 진술했사온데 그게 오늘 동 트기 전 무렵이랍니다요.”
“동 트기 전?”
“예.”
“배에서 움직임은 없었고?”
“없었습니다요. 속히 문정을 해야지 않을는지······.”
그 정돈 안다.
중국배라면 분숭 자신도 거리낌 없이 문정을 했을 것이다.
사정은 왜선이었어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진짜 황당선이었다. 생김새도 생김새지만 미지(未知)의 선박이라는 데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선뜻 문정을 할 수가 없었다.
“호, 호방이 가보아라.”
“소, 소인이 말입니까요?”
“문정을 수령이 하는 걸 보았단 말이냐? 만약 저 배에 왜구가 잔뜩 타고 있다면, 그래서 내가 문정을 하러갔다가 날 사로 잡는다면 지휘는 누가 한단 말이냐?”
“···”
“얼른!”
호방이 울상이 된 채 군사 몇 명을 대동한 채 황당선으로 향하자, 분숭은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