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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43화 (14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43화>

    ***

    “정말 방교(자퇴)를 할 셈인가?”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의 물음에 경덕은 그럴 필요가 전연 없음에도 뭔가 결연에 가득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하지만 하재생(특례입학)으로 들어온 게 바로 엊그제의 일이나 다름이 없거늘 어찌 그러는가.”

    연신 걱정스럽다는 뜻을 내비치는 학록에 경덕은 빙그레 웃었다.

    “학문에 뜻이 있고 없고는 거처가 정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네만··· 말했다시피 이제 하재생으로 들어왔네. 자네라면 약관의 나이에 능히 대과에 급제 할 터인데··· 허어.”

    자신을 높이 평가해주는 학록이 고마웠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학록이 재차 물었다.

    “하면 방교하고 송악(개성)으로 돌아가려고?”

    “아뇨.”

    “송악으로 돌아가려는 것도 아니라면 좀 더 다녀보지 그러나. 듣자하니 동기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던데 그 때문인가? 만약 그게 문제라면 내 손을 써줌세.”

    경덕은 피식 웃었다.

    그런 샌님들 따위의 따돌림이 무에 대수겠는가.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재고해 볼 생각 없는가? 남들은 못 들어와서 안달인 성균관이거늘······.”

    맞다.

    남들은 못 들어와서 안달인 성균관이다.

    일단 성균관에 들어오면 전부는 아니지만 미래가 보장돼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여기서 쌓은 인맥이 훗날 정치를 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성균관을 다녔다는 건 살면서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될 일을 전혀 없다.

    다만 경덕의 뜻은 확고했다.

    여기선 배울 게 없다.

    “남들이 못 들어와서 안달인 성균관이라 내심 기대를 하고 들어온 건데 별 건 없더군요.”

    “뭐, 자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내 더 말릴 순 없겠지. 한데······.”

    학록이 고개를 돌렸다.

    싱글벙글인 서경덕과 다르게 반석평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자네는 어찌 방교를 하려는 겐가?”

    “저는······.”

    “설마 이 친구 따라서는 아닐 테고.”

    “···맞습니다.”

    “허.”

    “둘이서 어디 스승이라도 구했나?”

    대답은 서경덕이 대신했다.

    “구했지요.”

    “스승님 함자가 어찌 되는데?”

    “그것까지 말씀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 흠흠. 뭐, 그건 그렇지만. 걱정돼서 그러네, 걱정돼서. 굳이 성균관을 박차고 나간다니까······.”

    학록은 아무래도 석평과 자신이 벌이는 일이 젊은 날의 객기인 줄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절대 객기가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아무튼 처리가 된 걸로 알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알겠네.”

    성균관을 나온 둘은 곧장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사헌부였다.

    “기대되지 않는가?”

    사헌부 앞에선 경덕은 숨을 크게 들이쉬곤 석평에게 물었다.

    석평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기대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오늘이 바로 스승님께 첫 강학을 받는 영광스런 날이 아니겠나. 하하하. 자, 들어가보세.”

    ***

    객기왕성(?)한 두 친구들의 방문을 받은지 열흘이 지났다.

    달라진 건 없었다.

    굳이 꼽자면······.

    제좌청.

    “···하니 지금 오현공이 벌이는 패악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합니다. 속히 사간원과 통(通)하여 죄를 밝히는 것이 좋을 듯 하옵고······.”

    힐끗.

    아침 회의를 이어나가던 와중 안처직은 말을 하다 말고 곁눈질을 했다.

    “저기, 대감······.”

    “예?”

    “이 치들은······.”

    안처직이 말한 이치들.

    서경덕과 반석평이다.

    내가 둘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소인을 교(敎)하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엉뚱한 말로 날 당혹케 했던 서경덕.

    한마디로 본인을 제자로 받아달란 말이었다.

    당연히 안 된다고 했다.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내가 비록 장곤 선생님께 가르침을 잘 받아서 이제 선비들하고 대화할 때 뭐, 막히는 거라던가 고사를 들먹여도 못 알아먹는다던가, 그런 불상사는 없다지만 솔직히 학식 자체로 따지면 내가 서경덕보다 아래일 거다.

    명색이 성균관 학생이었으니까.

    게다가 알고보니 나이도 열일곱이란다. 만으로 치면 열여섯의 나이고.

    그런데 성균관에 버젓이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이게 무슨 말인줄 아나?

    보통 천재가 아니란 소리다.

    어린 나이에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인 성균관에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남들은 서른살 쳐먹고도 못 들어오는 성균관에,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말이다.

    이건 21세기로 치면 초~중학생이 서울대에 들어가서 이미 학사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준비 중인 것과 다름 없다.

    그런 천재를 내가 가르친다?

    말이 안 되잖아, 이게.

    그래서 안 된다고 했다. 절대 안 된다고. 난 누굴 가르칠 만한 능력도 없거니와 지식도 없다고.

    근데 된단다.

    내가 안 된다는데, 서경덕은 계속 된단다. 그러면서 안 받아주면 계속 찾아오겠단다.

    으름장에 학을 뗐지만 받아 줄 순 없었다. 당연히 안 되겠다고 했고, 설마 찾아오겠어? 싶은 마음과 함께 돌려보냈다.

    그런데.

    다음 날, 진짜 찾아왔다. 찾아와서는 흡사 석고대죄를 청하는 대신들처럼 집앞에 진을 치고 계속 ‘소인을 교하여 주시옵소서.’외쳐댔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사흘 뒤도 마찬가지였고, 나흘 뒤도 마찬가지였으며,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찾아왔다.

    한국인 특징이 뭔가?

    다들 알다시피 남 눈치 오지게 보는 거다.

    새파랗게 젊은 학생이 우리집 앞에 진을 치고 몇 날 며칠 동안을 가르쳐달라고 생발광을 해대는데 소문이 안 퍼지겠나?

    갖가지 루머가 확산될 조짐이 보였다.

    그 조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서경덕은 방교까지 했단다. 한마디로 학교를 나왔단 소리다.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출학을 결심했는데 안 받아주시면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매맞아 뒈질거란다.

    후··· 매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어떻게 또 거절하나?

    또 거절했다가 365일 찾아오면 어쩌고?

    결국 승낙을 해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안처직이 말한 이치들이다. 원래는 집에서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서경덕이 그럴 필요가 없단다. 그저 내가 하는 모습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큰 가르침이 될 거라나?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어떻게 하긴 뭘 어째.

    나야 하던대로만 하면 되니 안 귀찮고 좋아서 그러라고 했지.

    근데 좀 후회가 된다. 회의장까지 찾아와서 날 지켜볼 줄은 몰랐거든.

    이건 무슨 광신도도 아니고 말이야.

    “아아. 반당(일종의 호위무사)이라고 생각하고 신경쓰지 마세요.”

    “아, 예··· 에, 그러니까··· 그게, 어디까지 했었지요?”

    “사간원하고 통해서 탄핵하자 까지 했습니다.”

    “아. 송구합니다. 흠흠. 이제 사간원에 공문을 보내고, 사간원에서도 나름의 조치를 하게 한 연후에 두 기관이 함께 탄핵을 하여 온당한 처벌을 받도록 함이 좋을 듯 하옵고······.”

    안처직이 계속해서 내용을 읊었나가던 즈음.

    스리슬쩍 옆으로 다가온 서경덕이 귀엣말을 건넸다.

    “장령께서 언급한 자도 탐관오리 같은데, 스승님께서 생각하시기에 탐관오리를 박멸할 방법은 어떤 게 있으신 것 같사옵니까?”

    “굳이 지금 묻게?”

    “···송구하오나 궁금하여······.”

    “탐관오리를 어떻게 박멸하냐. 사람 마음 간사한 건 다 똑같은데. 뭐, 인간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가능은 하겠네.”

    “아··· 역시. 그렇겠사옵니다.”

    슬쩍 곁눈질을 하자 메모를 하고 있다.

    무슨, 이런 것도 메모를 하나 몰라.

    궁시렁거리고 있던 즈음, 이번에는 반석평이 물었다.

    “하오면 스승님. 박멸은 어렵다 치더라도 줄이는 방법에는 어떤 게 있겠습니까?”

    하··· 참을 인(忍)을 딱 세 번만 되뇌자.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일벌백계하면 되지. 법이 약하니까 탐관오리들이 자꾸 고개를 들이미는거 아냐. 돈 조금 받아 쳐먹은 걸로도 참형 때리면 누가 나쁜 짓 하겠냐?”

    “그건 그렇겠사옵니다.”

    그나마 반석평은 정상인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끼리끼리라고, 이런 걸 무슨 대단한 선문답이라도 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걸 보면 역시 그 친구에 그 친구 따라온 그 친구답다.

    ***

    오늘은 대설(大雪)이었다.

    엊그제 반란을 진압한 것 같은데 벌써 올해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실감이 안 된다.

    이제 한 달만 더 있으면 나도 조선인이 된 지(?) 3년차가 된다.

    시간 참 빨라.

    좌우지간 절기마다 쉰다는 건 말해줬을 거다.

    당연히 대설인 오늘도 쉰다. 쉬는 날이지만 쉴 수는 없었다.

    내가 겸업하고 있는 게 한 두 개가 아니잖나.

    오늘은 더더욱 쉴 수가 없었다.

    그새 사전 예약이 6천명을 돌파한 비누 판매가 오늘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생산된 비누의 물량은 500개였다.

    더 뽑는다면 뽑을 순 있었지만 일부러 소량만 생산하게 했다.

    일종의 프리미엄 소비품인데, 한 번에 마구 뿌릴 순 없잖은가.

    “스승님.”

    판매 장소는 비누 공장이었다. 사실 서울에서 외곽에 있는 곳이긴 하지만, 사전예약한 손님들 대부분이 종들을 시켜 사갈테니 굳이 판매 장소가 외곽이건 시내건 상관은 없었다.

    그걸 증명하듯 비누 공장 앞에 세운 천막에는 인파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두 제 주인들이 예약한 비누를 찾으러 온 종이거나 심부름꾼들이었다.

    그렇게 9시가 땡치면 판매를 시작하려는데, 서경덕이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날 부른다.

    시도때도 없이 이것저것 캐물어서 귀찮기가 말년 병장의 그것만큼이나 귀찮은 서경덕이지만, 미운 정도 정은 정이라고, 그새 정이 들었는지 밉지만은 않게 보인다.

    “왜.”

    물론 대하는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럽다.

    굳이 사제지간이라서가 아니라, 정이 들었건 안 들었건 날 귀찮게 하는 대상이란 점에서 말투가 고울 리가 없잖나.

    “굳이 스승님께서 예까지 행차하셔야겠사옵니까?”

    “내가 얼굴 마담인데 그럼 나와야지.”

    사실 오늘 사전예약한 손님들 중, 절반은 종이나 심부름꾼을 따로 보내서 비누를 받아가지만 나머지 절반은 본인들이 직접 왔다.

    왜 직접 왔겠나?

    거짓말 않고 날 보러 온 거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여염집 규방에 내 소문이 긍정적으로 퍼진 탓이 큰 것 같다.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규방에 퍼진 내 이미지는 나쁜 남자···? 뭐, 그런 이미지 같다.

    나쁜 남자한테 끌리는 건 조선이건 한국이건 똑같은지 내 얼굴 보겠답시고 이 엄동설한에 옷을 꽁꽁 싸매고 기다리고들 있다.

    이놈의 인기란.

    “하오나 어찌 이런 천한 일까지······.”

    “넌 사람이 괜찮아 보일만하면 꼭 씹선비 같아지더라.”

    씹선비.

    내가 서경덕이 꼰대짓(?) 할 때마다 부르는 표현이었다.

    물론 비하의 목적은 없다. 미운 정 어린 별명이랄까?

    “하지만 천한 걸 천하다 말하지 어찌 말하겠습니까?”

    “직업에 귀천이 어딨냐?”

    “없습니까?”

    “없지. 내가 여기 나와서 물건 파는 게 천해보이냐?”

    “아뇨.”

    “근데 왜 자꾸 뭐라 그래.”

    “이해가 안 돼서··· 어차피 그 사전 예약인지 뭔지를 모두 하고 이제 물건을 수령하고 갈 사람들인데, 그거라면 저기 덕복이한테 맡겨도 될 문제 아니겠습니까?”

    “사장은 덕복인데 비누 공장 세운 사람은 나야. 여기 몰려온 사람들중에 절반은 내가 영업 뛰어서 끌고온 손님들인데, 개시 첫 날부터 내가 없으면 뭐가 되냐?”

    “으음. 근데 이 비누는 왜 이렇게 비싸게 파는 것입니까?”

    말했지, 이 녀석 시도때도 없이 질문한다고?

    근데 그 질문이 매번 같을 때가 있다. 이 질문도 내가 벌써 3번째 듣는다.

    “사치를 장려하기 위해서라고 했잖아, 이 자식아.”

    “사치를 장려하면 뭐가 이로운데요?”

    “돈이 돌지.”

    “돈이 돌면요?”

    “그제도 말해주지 않았냐?”

    “쉬이 이해가 안 가서 말이옵니다. 스승님께선 시중에 돈이 풀리면 이롭다고 하셨사옵니다. 근데 돈이 풀리는 것과 국고가 가득 차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나는 어떻게 더 쉽게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 적당한 게 떠올랐다.

    “너네집에 너네 가족 다 먹고도 남을 쌀 100석이 있다고 치자. 이건 저축분이지?”

    “예.”

    “근데 이 100석이 계속 너네집 창고에만 있어. 어떻게 되겠냐?”

    “썩거나 쥐가 갉아 먹어서 쓸 수가 없게 되겠지요.”

    “근데 그 100석을 너네 동네 사람들한테 나눠주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배불리 먹겠지요? 하지만 그럴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이란 게 스승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간사하여 기근이 들어도 함부로 곳간을 풀질 않는데······.”

    “공짜로는 당연히 안 주겠지. 근데 너네 동네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머슴으로 들어갈 테니까 1석만 달라고 하면?”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줄 수도 있을 듯 하옵니다.”

    “그럼 머슴으로 들어간 그 동네 사람은 1석으로 배불리 먹고 살겠지?”

    “그렇겠지요.”

    “어차피 썩거나 쥐가 갉아먹을 쌀이 이렇게 순환하게 되잖아.”

    “···?”

    “이해 안 되냐?”

    “예.”

    나는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쪼그려앉았다. 그러고는 작은 막대기 하나를 들어 슥삭슥삭 뭔가를 그렸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자, 봐. 이게 너네집에 있는 쌀이고, 이게 그 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머릿수야?”

    “예.”

    “여기서······.”

    그렇게 설명을 이어나가던 쯤.

    덕복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대감마님. 사시초(巳時初, 9시)입니다요.”

    “벌써?”

    “예. 문 열깝쇼?”

    스승 놀이보단 비누 판매가 우선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님들 얼른 안으로 뫼셔라.”

    “예!”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 일단 물건부터 팔자.”

    경덕에게 그렇게 말한 나는 덕복을 뒤따랐다.

    드디어 비누 판매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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