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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40화 (14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40화>

    ***

    나는 새삼 또 한 번 느꼈다.

    세상에는 나쁜 놈이 많은 게 아니라 사람 본성 자체가 악하다는 걸 말이다.

    내가 애당초 어사행을 자초하게 된 계기.

    그래, 맞다.

    공주목 저수지 지대 사건.

    이걸 해결하면서 느꼈다.

    은진현감 정태경이나 아전 김점박은 이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그나마 은진현은 올바른 정신 상태의 아전이 얼마간 있어서 고을 전체가 썩어 문드러진 정도는 아니었는데, 공주목은 달랐다.

    그마저도 공주목사 김율이 사전에 눈치채고 조사를 진행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억울한 사람이 수백은 나올 뻔 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일단 한숨부터 내쉬고, 후······.

    은진에서 피해자들의 전송을 받으며 공주로 떠났다.

    공주에 도착하자마자 관아에 좌기해서 조사를 시작했는데 이건 뭐······.

    저수지 지대 사건의 주범인 서경종은 그렇다고 치자.

    근데 그 곁가지로 사건들이 끊임없이 낚여 올라왔다.

    관미 착곡··· 이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원래 모든 고을의 창고에는 곡식이 얼마간 비축되어 있다.

    용도는 여러 가지다.

    기근이 들었을 때.

    환곡을 위해서.

    그리고 전쟁을 대비해서.

    부목 정도의 크기라면 이 세 가지 사안 때문에 못 해도 200석은 비축이 되어 있어야 맞았다.

    공주목은 장부상 210석이 있었다.

    실제로 조사를 해보니 210석보다 많은 223석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름 놨었다. 아, 그래도 여긴 은진 보다는 사정이 괜찮겠구나··· 하고.

    괜찮긴 개뿔이 괜찮.

    “아전들이 관미를 갖고 장난을 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창고를 연 김에 확인해 보시지요.”

    서경종 사건만 조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내게 문득 이성동이 의견을 개진해왔다.

    사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창고는 열었지만 그래서 장부와 직접 대조도 해봤지만 곡식 꾸러미를 살펴보진 않았다.

    그래서 랜덤으로 몇 석 뜯어봤다.

    한데 하, 스바시바······.

    아, 오해는 말자. 욕한 거 아니고 러시아 말 한 거다. 감사합니다가 러시아어로 스바시바거든.

    존나 스바시바!

    뜯어본 곡식들에 모래가 섞여있었다. 깜짝 놀라서 223석을 다 뜯어보게 했는데 역시 스바시바!

    223석 모두 모래가 섞여 있었다.

    이 223석은 시쳇말로 목민들의 목숨값이었다.

    만일의 상황이 닥쳤을 때.

    뭐, 기근이 들었다거나··· 전쟁이 났다거나 했을 때 이 관미로 목민들을 살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상적인 게 단 한 개도 없었다.

    죄 모래가 섞여 있었다.

    이건 보통 스케일 큰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 사건이면 목사가 관여했을 수도 있다고 판단 김율을 추궁하고 심문했는데 다행이라면 다행히 김율은 관여한 바가 없었다.

    아니, 관미 223석에 모두 모래가 섞였는데 목사가 모를 수도 있다고?

    의아해 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럴만도 한 게 김율이 부임한 것이 고작 몇 달 되지도 않았다.

    은진현감 정태경처럼 고분고분 아전들의 뇌물 쳐받아먹고 그들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굴면 신경전이고 기싸움이고 할 게 없지만, 김율처럼 원칙적으로 행정을 집행하려는 사또들은 선제적으로 부임 후, 아전들과 기싸움부터 해야한다.

    이런 사실을 목사가 모르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긴 했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랄까?

    다만 신경전을 하고 있었건 안 하고 있었건.

    그래서 신경전에서 이겼건 졌건.

    관미 223석에 모래가 섞였고 상당수를 버려야만 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목사 김율을 처벌치 않을 수는 없었다.

    어쨌건 고을의 사정에 어두웠다는 말이니까.

    좌우지간, 한 고을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관미가 이럴진대 무기고?

    사용 빈도가 잦은 환도나 다른 무구들은 그럭저럭 깨끗한 편이었지만 갑주나 화살 촉은 녹이 슬어서 사용 할 수가 없어 보였다.

    사정은 화약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질었는데 보통 이런 화약은 화포에 넣고 불을 붙이자마자 폭발해버리고 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공주목에는 뭔 사채업자만 있는지 다들 고리대에 눈이 멀어 있었다.

    담합까지 해서 이율을 정하고 갚지 못 하면 자매(스스로 노비가 됨)하게 만든다.

    물론 이중에 최고 악질(?)은 저수지 지대 사건의 주범 서경종이었다.

    정태경이나 김점박이는 그래도 찔리는 건 있었는지, 서로에게만 잘못을 미뤘는데 이놈은 문초 내내 바락바락 목청을 드높이면서 본인은 잘못한 게 없고, 있다면 석한리 마을 사람들이 저질렀다는 역겨운 변명을 해댔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이놈에게 최고 악질이란 타이틀을 붙여준 건 아니다.

    나쁜 짓은 이놈 혼자 다 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1~2가지의 나쁜 일을 하고 있다면 이놈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나쁜 짓 5~6개를 저지르고 뻔뻔스럽게 제 잘못이 없다고 변명을 한 것이다.

    아, 이 새끼가 무슨 나쁜짓을 저질렀냐면 말······.

    하, 아니다.

    말을 말자. 다시 회상하려니 빡쳐서 안 되겠다. 나만 빡치면 될 일을 여러분까지 빡칠 순 없잖아?

    뭐, 좌우지간 그럼 어떻게 됐냐고?

    형벌의 남용을 자제해야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서경종에게는 곤장 30대를 집행했고, 아전 A와 B에게는 20대, C와 D에게는 각각 10대씩 집행해버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서울로 압송.

    여기서 가장 안타까운 건 김율이었다.

    김율은 어사의 직권으로 파직시켰는데 따지고 보면 김율이 지은 죄는 없다.

    공주목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래서 아직 업무에 적응하는 과정에 있었을 테고, 또 아까 말한 신경전도 있었을 테니까.

    거기다 아전들과 척지면 사또 생활 암울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서경종을 잡아들인 것도 김율이니 억울한 건, 김율 밖에 없었다.

    문제는 과정이 어쨌건 저지른 직무유기다.

    아까 말한 관미나 화약 문제는 웃어 넘어 갈 문제가 아니잖나.

    뭐,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서 서계에 김율의 선처를 바라긴 했다만··· 어찌 될진 모르겠다.

    자세한 건 조정에서 논의하겠지.

    아, 조정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긴장된다.

    악당들 때려 잡은 건데 왜 긴장 되냐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형벌을 남용했잖은가.

    이게··· 음. 은진에서는 피해자들한테 감사 인사 받은 보람 때문에 ‘피해자 구제한 거면 됐지’라는 마인드 였고, 공주목에서는 하도 어처구니 없을 만큼 나쁜 놈들이 많아서 ‘이 정도 집행은 괜찮잖아?’ 합리화 한 터라 두렵고 자시고 할 게 없었지만 막상 서울이 가까워지자 긴장감이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어떤 욕을 쳐먹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옴팡지게 쳐먹을 것 같다. 안 그래도 날 벼르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테니까.

    하다못해 서울의 분위기를 미리 전해 들었더라면 이렇게 긴장되지도 않겠는데 공식적인 문서만 오고 간 터라 그쪽 상황을 전해 들을 겨를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수원쯤 다다르자 입이 바싹 마르고 손에는 땀이 흥건해진다.

    그리고 머잖아 도착한 서울땅.

    오랜만에 서울땅을 밞았지만 그 기분을 만끽할 새는 없었다.

    귀환 인사와 업무 보고가 우선이거든.

    하, 스바시바. 긴장된다!

    ***

    ···라는 내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왜냐고?

    “···그래서 공주목에서는 서계를 올린대로 김율을 파직하였사옵고 공주목 아전 서경종과 박승경, 조칠송, 이영후 등은 모두 대전(경국대전)의 원악향리조에 근거하여 처벌하였나이다. 다만 김율은 사또로서 소임에 소홀하여 직무유기를 하긴 했사오나······.”

    귀환 인사와 함께 업무 보고를 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형님이 그만하라는 듯 손을 번쩍 들어올려보이는 제스처를 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사성은 굳이 대사헌이 귀환한 지금 그 일을 따져 묻겠다는 것인가?”

    “따져 묻겠다는 것은 아니옵고··· 다만 전하의 하문이 있으신 뒤에 성균관의 사기가 꺾였사옵니다. 신이 학식은 부족하고 인품은 용렬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사오나 대사성의 직임을 맡고 있으므로 태학생들의 여망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으니 죽기를 각오하고 여쭙는 것이옵나이다.”

    모두 알다시피 서울 땅을 밞자마자 입궐했다.

    공교롭게도 회의 중이었던지 전하께서도 중신들과 함께 편전에 계셨다. 당연히 나도 목적지를 강녕전에서 편전으로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입실을 했고, 짤막한 귀환 인사와 보고를 드렸다.

    근데··· 이 분위기 어쩔건데?

    보다시피 흉흉하다 못 해 곳곳에서 스파크가 튀는 느낌이다.

    “그 일은 차제에 논하자 하지 않았던가?”

    “···송구하오나 태학생들이 벌써 며칠 째 비답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비답?

    무슨 비답인진 몰랐지만 대충 정황을 보건대 좋지 않은 상황인 건 분명해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살벌할 리가 없잖아?

    “겁박인가?”

    “신이 어찌··· 누차 성상을 번거롭게 하는 말씀이옵니다만, 신은 대사성의 직임에 있으므로 태학생의 여망을 위로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그것이 소신의 책무기도 하기 때문이옵니다. 그런 곡절에서 서운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 어찌 신이 전하를 겁박하는 것이겠사옵니까?”

    “과연 서경덕의 말처럼 태학생들의 기강이 문란해진지 오래구만. 그리 한가하단 말이냐?”

    “···”

    “송구하오나 이는 비단 태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옵니다. 신 또한 여러 사람에게 질문을 받고 있사온데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 했사옵니다.”

    대사성 김전에 이어 이번에는 장곤 선생님의 사부이신 김굉필까지.

    “전하께서 하문한 바가 없었다면 장안이 어찌 이리 소란스럽겠사옵니까? 여염집은 물론 아낙들도 빨래터에서 전하의 하문을 논하고 있다 하니, 이것이 공부하는 학생들만의 걱정이겠나이까. 신은 대사성 이전에 한 사람의 선비로서······.”

    쓰윽-.

    “됐다.”

    김전의 입을 막은 형님은 날 바라보셨다.

    “대사헌이 무사히 귀환하였고 또한 탐관을 징치하여 공을 세운 채 돌아왔으니 그 일은 차제에 논하도록 하겠다. 다시는 거론말라.”

    무슨 일이길래 저럴까 싶었다.

    물론 찔리는 게 전혀 없진 않았다.

    형벌을 남용한 일.

    아마 그거 때문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편전 분위기가 이렇게 살벌할 리가 없거든.

    ‘장령 말대로 공주목에서는 자제좀 할 걸······.’

    후회가 막심했지만 뒤늦게 후회하면 뭐하나.

    라고 생각하던 그때.

    “하오나 만백성이 앎을 공부한다는 것은 자칫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온데 저번적에 전하께서 그런 분부를 하셨으니 신들이 어찌 대답을 듣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만백성이 앎을 공부한다.

    이 말은 이 시대에선 통용 될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나도 개똥이한테는 공부해라 저거해라. 잔소리하지만, 덕산이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다.

    ‘근데 저거 내가 형님께 한 소리 같은데.’

    형님과 술을 마시면서 수다를 떨다가 500년 후의 조선.

    그러니까, 21세기 대한민국을 대충 형님께 설명드린 적이 있었다.

    맨정신이라면 못 하겠지만 술에 취해서 대강 ‘그런 율도국이 있다더라’ 라는 식으로, 그곳 백성들은 모두가 공부하고 왕을 투표로 뽑는다는 말을 드린 적이 있었다.

    형님께선 왕을 투표로 뽑는다는 것 보다 백성들 모두가 공부한다는 게 신기하셨는지 연신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을 여쭈셨고, 나는 상세히 답해드린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의무교육도 설명한 적이 있었고.

    다만 이 말을 드린 게 1년 전의 일이다.

    근데 갑자기 왜 이 이야기가 나온 거지?

    고민하던 찰나.

    쾅!

    노기 띤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신 형님이 날 바라보셨다.

    “무식은 잘못이 아니지만 무지는 잘못이다. 대사성은 어찌 무지를 자꾸 드러낸단 말이냐? 대사헌!”

    “에? 예! 형님!”

    갑작스레 호명을 당한 나는 깜짝 놀라 공석임도 잊고 ‘전하’ 라는 호칭 대신 ‘형님’ 이라 부르고 말았다. 하지만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담을 순 없는 법.

    고개를 조아린 채 가만히 있자, 형님이 대사성 김전을 삿대질하며 말했다.

    “만백성이 앎을 공부하는 것이란 무엇이더냐? 대사헌이 한 번 말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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