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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39화 (13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39화>

    ***

    강녕전.

    “대체 얼마나 남았다는 건가?”

    초췌한 몰골의 융이 상선에게 물었다.

    상선은 난감한 표정으로 융의 서안을 바라봤다.

    “이제 3개 읽어보셨사옵니다······.”

    “그러니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 게 아닌가.”

    “족히 20개는 더······.”

    “20개나?”

    융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예.”

    “하.”

    한숨을 내쉰 융은 서안 위에 올라간 두루마리들을 바라보며 진저리를 쳤다.

    “됐다, 모두 치우라.”

    “하오나······.”

    “보나마나 뻔하지 않더냐. 뻔한 상소를 내 뭐하러 읽겠느냐?”

    뻔한 상소.

    사실 상소란 게 십중팔구는 잔소리에 가까운 말들을 길게 늘려 쓴 문장에 지나지 않지만, 이번에 승정원에서 올려보낸 상소들은 아예 엿 찍어내듯 판박이들이었다.

    형벌을 남용하는 건 제아무리 대사헌이라 할지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엄히 그 책임을 묻거나 자초지종을 밝혀 억울한 이가 없게 하소서.

    십중팔구는 이런 내용의 글귀들이었다.

    비슷한 내용의 상소들을 안 그래도 엊그제부터 서른 개는 족히 봤다.

    그런데 안 봐도 똑같은 내용일 텐데 굳이 봐서 뭐한단 말인가?

    봤자, 힘만 빠질 뿐이다.

    ‘도대체 그게 뭐가 불만이라고··· 쯧.’

    상선이 주섬주섬 서안 위에 있는 상소들을 치우기 시작하자, 융은 가볍게 혀를 찼다.

    잘한 이는 상을 받는다.

    반대로 잘못한 이는 벌을 받는다.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물론 진성이 법적인 테두리를 살짝··· 아아아아주 사아아아알짝. 벗어나긴 했다만··· 무고한 사람을 잡아다 족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감정 있는 사람을 누명 씌워 옥고를 치르게 한 것도 아니며, 지나는 고을 마다 수령들을 핍박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탐관오리에게 가하는 징벌이었다.

    탐관오리.

    실로 나라에는 백해무익한 벌레 같은 것들이었다.

    오죽하면 공자는 백성을 괴롭히는 학정과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라고 하셨겠고, 세종대왕께서 지방관들이 진충보국(盡忠報國) 하는 일은 백성을 침학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진충보국이라고 까지 하셨을까.

    그런 탐관오리를 징벌한 일이었다.

    호랑이 보다 무섭고, 진충보국은커녕 나라를 좀먹는 벌레들을 향한 징벌 말이다.

    형벌을 남용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어사의 직권까지 주지 않았던가.

    곤장 몇 대 때린 게 형벌을 남용한 거라면 어사들이 탐관오리를 만나 봉고파직(직권으로 파면시킴)시키는 건, 왕권에 대한 월권이란 말인가?

    참, 알다가도 모를 샌님들이었다. 그러니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상소나 올리면서 임금의 신경을 건들······.

    “음?”

    문득 눈에 들어온 글귀에 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옵니까?”

    “그것좀 이리 줘보아라.”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한무더기의 상소를 한가득 안은 상선이 난감한 표정으로 묻자, 융은 맨 위의 상소문을 잽싸게 낚아챘다.

    “이건 누가 올린 글이라더냐?”

    “으음··· 성균관 유생 서경덕이 올린 상소 같사옵니다.”

    “성균관에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지금 올라온 비슷한 내용의 상소문 태반이 성균관에서 올라온 건데 이건 겉봉에 쓰인 제목부터가 남다르다.

    학궁불학혁파소(論學宮不學革罷疏).

    ‘성균관의 배우지 않음에 대한 혁파소라.’

    제목부터가 눈에 확 띄는 건데 왜 이제 봤는지 의문이다.

    “예. 일전에 이예경의 무리들이 출재 당할 때도 그들이 배움이 모자라고, 또한 유소랍시고 성상의 심기를 자꾸 건드린다면서 전하의 뜻에 동조한 유생이옵니다.”

    “서경덕이라.”

    얼핏 들어본 이름 같긴 하다만 기억에는 없다.

    하지만 어린 유생이 기특하긴 하다.

    융은 자극적인 제목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한껏 안고 겉봉을 뜯었다.

    1.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총명과 학예(學藝)를 가까이 하려는 마음이 깊으시니 이것은 온나라의 복입니다. 다만 소신이 근간에 나도는 말들을 들어보건대 지금 사헌부가 풍속을 순화시키고 부패를 바로 잡긴 커녕 오히려 권력을 남용하여 형벌을 마구주고, 풍속을 퇴폐시키고 있다하니 아찔하고 어지러운 마음에 글월을 올립니다. 지금 신이 사헌부를 언급했습니다만 소문의 주체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텐데, 바로 진성대군 이역이옵고 대사헌 이역입니다. 아아. 과연 그들의 말대로 우리나라의 풍속은 퇴폐했습니다. 온당한 일을 칭찬하진 못할망정 욕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나라를 평안케 하려면 법리와 감사와 수령이 각기 그 임무를 다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각기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면 민생을 고단하게 하는 일은 없다고 성현들이 말씀하셨습니다. 법리(法吏)란 무엇입니까. 법리(法理)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지금 학궁에 나도는 소문에 의하면 진성대군 이역이 이제 법관당상이 되었는데도 법을 준수하지 않고 오히려 형벌을 남용한다고 욕보이고 있는 것인데, 계도와 교화에 한 가지 기준을 만들어 백사람에게 적용 할 순 없는 것입니다.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전(경국대전)이 존재하는 까닭은 이를 근거로 탐관을 처벌하고 억울한 이가 없게 하라는 지침이지,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며 탐관을 벌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성대군 이역이 비록 형벌을 남용하긴 했으나, 앞서 말한대로 백 사람의 탐관오리에게 어찌 한 가지 처벌을 고집해 벌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정이 이러하므로 사헌부를 욕보이는 자들은 모두 스스로 떳떳하지 못 하는 자들이고, 언제라도 대사헌에게 비리가 발각될까 걱정되어 수군거리는 것 뿐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2.

    「···하였으니 다른 소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학궁의 여론을 신이 가만히 들여다보매 아주 성토를 하다 못 해 들고 일어날 기세이니 이것은 어인 영문이겠습니까? 이들은 태학생의 본분을 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릇된 가치관으로 시국을 걱정하는 것이 태학생의 도리겠습니까? 이는 그들이 장차 백성을 평안케 하려는 마음보다, 후세에 이름을 떨치고 자자손손 영예를 입게 하려는 흉악한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온당한 일을 칭찬하진 않고 오히려 폄하하며 수군거리기만 하겠습니까. 이에 신이 집에 돌아가 곰곰이 먹을 갈며 생각해보매, 과격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사오나 학궁이 학궁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태초의 학궁은 경전을 마음으로 깨우치고, 성현의 행동을 마음으로 본받았는데 지금의 학궁을 보면 경전은 말로만 외우고, 성현의 행동은 모방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국을 걱정한답시고 모여서, 학문을 갈고 닦으려는 자들은 ‘생각이 없다’, ‘나라 걱정은 하지 않고 권력에 아첨한다’, ‘보국(保國)은커녕 보신(保身)에 눈이 멀었으니 탐관의 전형이다.’ 욕보이고 있으니,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도 그들의 눈치 때문에 동조를 하게 됩니다. 이는 학궁의 기본 질서가 문란해졌다는 뜻을 말합니다. 하다못해 연소자가 연장자에게 깍듯이 예를 다하는 건 당연하다고 하지만, 과연 토론을 할 때도 깍듯이 예를 갖추고 대해야겠습니까? 지금 학궁은 존재 정의를 스스로 말살시키고 있고, 청금복을 수의로 만들고 있습니다. 신이 옛 시대를 살아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성균관은 문사를 배양하는 곳으로 옛날에는 성균관에 사표가 될 만한 위인들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지금 성균관의 유생들을 본다면 모두 좋은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고서 서책은 대충 몸종에게 맡기고 다니니 성균관에서 유풍을 떨친 게 과연 언제겠습니까? 성균관을 혁파하십시오. 첫째로······.」

    융은 장문의 상소문을 접었다. 상소문을 접은 그는 상선에게 상소문을 건네줬다.

    “상선도 한 번 읽어보거라.”

    어리둥절한 상선이 곧 경덕의 상소문을 읽기 시작했다.

    머잖아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급변했다.

    “아니, 이건······.”

    상선은 얼이 나간 표정으로 손에 쥐어진 상소문을 내려다봤다.

    「···하므로 이와 같은 이유로 성균관의 존재 가치는 상실 된 것입니다. 성균관을 헐어버리고 그 위에 예흥청의 건물을 새로 지으십시오. 지금 성균관 유생들이 하는 짓이 딱 예흥청의 우인(광대)들이 하는 짓이니 말입니다.」

    이건 거의 미쳤다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상소문이었다.

    상스럽지만, 그래서 감히 미친의 미자도 꺼내서는 안 되는 게 궁중의 법도라지만, 그것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

    실성했다는 표현은 너무 점잖고, 딱 미쳤다.

    미쳤다라는 표현이 적합했다. 그만큼 성균관 유생 서경덕이 올린 상소문은 과격했고 도를 넘은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데 어찌······.’

    이상하게 임금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싱글벙글한 모습이, 요근래 보지 못 한 웃음이었다.

    “맹랑하고 과격하지 않은가?”

    임금도 미쳤다라는 표현을 맹랑하고 과격하다라고 순화한 듯 했다.

    상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짧게 주억거렸다.

    “···예.”

    “맹랑하고 과격해. 하지만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재상들에게 패초를 보내도록 하라. 성균관을 헐어버리고 그 위에 예흥청 건물을 새로 올리는 일을 논하도록 해야겠다.”

    “예?”

    “듣지 못 하였는가. 패초를 보내도록 하라.”

    “아, 알겠사옵니다.”

    허둥지둥 전각을 빠져나가는 상선에 융은 히죽 웃었다.

    그의 시야에 서경덕이란 이름 석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경덕이라. 재밌는 이로다.”

    ***

    편전.

    이미 장내에는 수십명이 넘는 중신들이 시립해 있었지만 그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성균관을 헐어버리고 그 위에 예흥청의 청사를 새로 짓겠다니··· 이들로서는 임금의 의중을 파악 할 수가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융이었다.

    “어찌 말들이 없는가.”

    “···”

    총신 임사홍도 지금만큼은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만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어인 분부신지······.”

    예흥청 제예에 제수되었던 임숭재였다.

    “내 이 상소를 읽고 가만 생각해보니 말이다··· 아. 상선은, 필사한 걸 모두 들려주도록 하라.”

    “예.”

    상선이 다른 내관들과 함께 필사한 서경덕의 상소문을 재상들에게 쥐어주었다.

    의문문을 띄운 채 상소문을 읽어나가던 중신들의 표정은 앞전 상선의 그것과 흡사했다.

    “어찌 학궁을 헐어버리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지······.”

    미친 상소문이란 생각은 대사성 김전에겐 더욱 강하게 느껴졌는지, 그는 어전임도 잊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위치를 자각하고선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상소문의 주인이 바로 성균관의 태학생이다.”

    “···”

    “지금 성균관의 태학생들이 하는 짓이 딱 예흥청의 우인들이 하는 꼴과 흡사하니 차라리 헐어버리고 그 위에 예흥청을 지어 올리라는 게 상소의 골자기도 하지.”

    “···”

    “내 그래서 경들을 불러 하문한 것이다. 나는 제법 괜찮은 생각 같은데.”

    중신들은 뜨악하는 표정으로 어좌를 올려다봤다.

    학궁을 헐고 그 자리에 예흥청을 짓는다는 게 괜찮은 발상이라니······.

    “하오나······.”

    아찔한 마음이 들었는지 대사성 김전이 입을 열었다. 다만 융은 거수와 함께 그 입을 틀어막았다.

    “대사성이 하려는 말이 무언지 잘 안다.”

    “···”

    “내 정말로 성균관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예흥청을 지으란 명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럴진대 이 상소의 주인은 정말 그런 심산으로 이런 글귀를 적어 올렸겠는가?”

    자리한 재상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긴 했다.

    “다만 성균관의 분위기가 예전만 못 하다는 말들은 부왕 때부터 있던 소리다. 아니 그러한가, 대사성?”

    “그, 그러하옵니다.”

    “서경덕이란 유생이 과격하게 표현하긴 했다만, 어찌 틀림이 있겠는가. 그래서, 내 이 어린 유생의 상소문을 읽고 깊게 생각을 하게됐다.”

    꿀꺽.

    “예전에 진성이 비슷한 소리를 한 적이 있는데 말이야.”

    “···”

    억겁과 같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융이 입을 열었다.

    “왜 만백성이 앎을 공부하지 못 하는 것인가?”

    “어인 말씀이신지······.”

    “말그대로다. 앎이란 모두가 가진 욕구인데 지금 팔도를 뒤져보면 앎을 공부하는 자들은 제한적이다. 어찌 그래야만 하는가?”

    “하오나 고을마다 향교가 있사옵고 또한······.”

    “향교를 노비가 출입할 수 있다던가?”

    학노(學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아주 상식적으로 불가한 일이었다.

    “···”

    “과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백성이 공부하여 교화되는 걸 이르는 것이다. 어떤가?”

    만백성이 공부하여 교화된다.

    수십년 생을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 한 문제가 주어진다면, 그 해답을 냉큼 떠올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화두가 던져졌음에도 편전이 얼어붙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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