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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38화 (13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38화>

    ***

    나는 새삼스레 느꼈다.

    세상엔 나쁜 놈이 참 많다는 걸 말이다.

    배웠고, 배움을 토대로 출세했고, 출세해서 권력을 얻었다.

    사람 욕심 끝이 없다지만, 최소한 베풀진 못 해도 여기 말로 침학(侵虐)은 안 해야지.

    그게 맞는 거잖아?

    그런데 이건 뭐 침학 정도가 아니다. 아예 백성들한테 빨대 꽃고 쪽쪽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들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모든 관리들이 그런 건 아닐 것이었다.

    나처럼··· 아, 나라고 하면 좀 자기자랑 같긴 한데, 어쨌든.

    나같이 할 일 똑부러지게 하는 관리들이 다수일 터였다.

    하지만 흙탕물을 미꾸라지 백마리가 흐리나?

    미꾸라지 한 두 마리만 1급 청정수에 풀어놔도 금방 흙탕물이 되고 만다.

    전국 팔도에 탐관오리 한 둘이 백성들을 침학해도 그 여파가 장난 아니게 커진다는 말이다.

    당장 은진에서만 해도 피해자가 열이 더 나왔다.

    거짓말 아니다. 진짜로 열 명이 추가로 나왔다. 일남과 정옥을 포함하면 모두 열 두 명이 은진현감 정태경과 아전들에게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이 일을 겪고 나니 생각이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뭐랄까··· 내가 너무 평화로운 일상에서 지내다 보니 여기 사람들의 고충은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랄까?

    나는 잘 먹고 잘 사는데 저 사람들은 엄청 고통을 받는구나 하는··· 아, 설명이 안 되네.

    다그닥 다그닥.

    “정말 괜찮으시겠사옵니까?”

    턱을 괸 채 상념에 잠겨있는 나를 일깨운 건, 이젠 최고의 파트너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손발을 맞춘 안처직이었다.

    “뭐가요.”

    “그··· 정태경 말이옵니다.”

    “거세한 거?”

    차마 상스러워서 예, 라고 답은 못 하겠는지 안처직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홧김에 저지른 일인 게 맞긴 한데··· 책임은 져야죠. 회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조정에 전해지면 보통 파장이 아닐 것이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통 파장이 아니겠지.

    무려 산사람 고추를··· 크흠. 잘라버렸는데.

    사실 거세 당한 건 정태경 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에 대한 여죄를 추궁하다 보니 새로운 범죄 정황들이 포착됐다.

    두 사람의 범죄 정황은 아니고, 또 다른 아전 김을현이라는 사람에 대한 범죄였는데 정태경처럼 지위를 이용해 과부를 윤간했다.

    자, 윤간이다.

    본인 친구들을 불러서 윤간을 했고, 피해자에게는 입막음을 시켰다.

    이게 제일 악질적이었는데 입막음을 말로만 시킨 게 아니라, 예의 과부의 자식을 걸고 넘어지면서 협박을 했다.

    한마디로 어디가서 입 놀리면 자식놈 불효 저지르게 만든다, 라는 협박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식놈 불효가 무슨 뜻이겠나.

    어미보다 먼저 세상 뜨게 해서 불효자로 만들겠단 뜻이지, 뭐.

    이 새끼도 거세를 시켜버렸다. 거세를 시키고도 분이 안 풀려서 곤장을 연달아서 20대를 치게 했다.

    보통 곤장 100대형이 떨어져도 그 곤장을 연달아 치는 경우는 없다.

    마찬가지로 20대형을 선고 받아도 20대를 연달아 치진 않는다.

    당연히 안 되는 걸 내가 바득바득 우겨서 연달아 20대를 치게 만든데 모자라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정태경처럼 거세를 시켜버렸으니 안처직으로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날 보좌하기 위해 함께 따라 내려온 셈인데 대사헌인 내가 형벌을 남용하는 걸 옆에서 막진 못할망정 집행하도록 방관했으니, 어쩌면 나보다 안처직이 더 욕 먹을지도 모른다.

    원래 사람이란 게 높은 권력자가 비리를 저지르면 그 권력자를 욕하기 보다, 수행한 사람들을 욕하곤 하잖는가.

    본의 아니게 안처직이나 이성동에게 피해를 준 것 같긴 한데, 맹세코 두 사람에게 해가 가게 할 일은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보람은 있었잖아요?”

    진지한 분위기는 질색이다. 나는 고개를 돌린 채 고갯짓을 했다.

    일단의 사람들이 우릴 뒤따라오고 있었는데, 이번에 은진에서 구제한 피해자 열 두명이었다.

    한사코 됐다고 만류해도 은진 밖까지 안전(?)하게 배웅해드리겠답시고 따라오고들 계신다.

    “그렇긴 합니다.”

    저 사람들 덕에라도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다. 탄핵하면 탄핵받고, 욕하면 욕먹고, 뭐 그런 거지.

    다만 뭔가 욕심은 생겼다.

    아, 욕심이라고 하면 뭔가 이상하고 이 사회 구조를 좀 바꾸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생겼다고나 할까?

    뭐, 나 혼자 악 쓴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공주에서는 최대한 형벌을 남용하는 일이 없으셔야 하옵니다······.”

    안처직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딴에는 걱정스러워서 한 말이겠지만 솔직히 그럴 자신이 없거든.

    ‘자제하긴 해야하는데······.’

    조정은 이미 난리가 나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

    요즘 장안의 화제가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 어사로 내려간 대사헌의 활약(?)이었다.

    병가를 냈다던 대사헌이 어사를 겸한 행대를 위해 충청도에 내려갔다는 사실만 해도 화제가 됐지만, 진짜 화제는 직후에 그가 올린 서계(보고서) 때문이었다.

    대사헌은 형벌을 마구잡이로 남용했다.

    어떻게 보면 권력 남용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었고, 법의 형평성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둘 이상 모였다 하면 그 일을 수군거리기 바빴고, 그건 식자들이 모였다는 성균관도 마찬가지였다.

    성균관 명륜당.

    “이러다가 정말 큰 일 치르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어사로 내려가신 건 이해를 한다만··· 허. 장형을 그리 집행하다니.

    “장형은 둘째치고 고자를 만들어버렸다지 않은가.”

    “고자?”

    “그래. 은진현감 정태경이를······.”

    수업이 끝나고 책을 정리하던 서경덕은 동기생들의 속닥거림에 귀를 기울였다가 이내 냉소했다.

    ‘하여간 할 짓도 지지리 없나보군.’

    저들은 시국을 걱정한답시고 담론을 하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제삼자가 볼 때는 담론이 아니라 여염집 아낙들의 수다에 지나지 않았다.

    저 시간에 책을 보고, 저 시간에 공부를 하고, 저 시간에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한다면 참으로 생산적일 텐데.

    ‘하긴. 그런 생각을 했다면 애당초 뒷담화나 하고 있진 않겠지.’

    경덕은 고개를 저었다.

    저런 모자란 것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산다는 것도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더 창피한 일은 저 모지리들이 동문수학하는 동기라는 점이었다.

    저러고선 어디 기방이나 계집들 앞에 가서는 성균관 유생이랍시고 거들먹거리고 다닐 게 아닌가?

    “쯧즛.”

    성균관에 들어온 지 어언 1년.

    이미 지난 1년간 성균관에 배움을 위한 학생만 있는 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저런 것들은 알아서 놔두면 자연스레 도태하기 마련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발길을 돌리던 그때였다.

    “유소(儒疏)라도 올려야 되는 거 아닌가?”

    “유소?”

    “그래. 이건 보통 일이 아니잖나. 엄연히 국법이란 게 있는데······.”

    “하지만 대사헌이 어디 보통 대사헌인가. 종친에 공신에, 금상의 총애까지 받는 태(太)사헌일세, 태사헌. 태사헌을 탄핵했다가 무슨 욕을 당하려고?”

    “맞네. 저번에 이예경이도 옳은 소리를 했다가 출재(퇴학) 조치를 당하지 않았나. 그 일이 있고 나서 성균관 분위기도 개판이 됐는데······.”

    “그때 이예경이는 좀 과한 감이 있었지. 하지만 이번은 다르잖나. 중신들은 금상의 눈치 때문에 바른 소릴 못 하고, 정승이란 작자들은 모두 임금의 꼭두각시가 된 지 오래라 아예 입하나 뻥긋 안 하고 있고, 재야에 뜻있는 선비들은 모두 탄압 당했으니 누가 과연 옳은 소릴 하겠나.”

    “저번처럼 우리만 유소를 올렸다간 역풍을 맞을 텐데?”

    “사학(동학,서학,남학,중학)과 연대 하자는 말인가?”

    “그래. 저번에 이예경은 너무 조급한 감이 있었네. 움직일 거면 함께 움직여야지, 성균관 혼자만 움직이지 않았나. 뒤늦게 사학이 움직이려고 할 땐 이미 출재 조치를 당하고 난 뒤였으니 구심점이 사라져서 힘을 낼 수도 없었고. 하지만 사학하고 같이 유소를 올리면 어찌 일이 생기겠나. 전부 출재 조치 시킬 수도 없을 텐데.”

    “하긴, 일리가 있구만.”

    저희들끼리 속닥거리며 북치고 장구치는 동기생들에 서경덕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본인이 저것들을 과대평가했다.

    저것들은 대가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 분명했다.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이예경의 출재 조치는 직언을 올렸다는 이유로 탄압을 당한 게 된다.

    백번 양보해서 그게 탄압이 맞다고 치자.

    태학(太學)이라고도 불리는 성균관이다. 금상은 그런 성균관을 탄압한 임금이 된다. 그런데 사학과 연대한다고 봐줄까?

    ‘미친놈들.’

    확실히 저것들은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사학과 연대한다는 게 무슨 대단한 책략이라도 된다는 양 굴 리가 없거든.

    절레절레.

    경덕이 고개만 휘휘 젓고 명륜당을 뜨려는 그때였다.

    “어이, 화담(서경덕의 호).”

    예의 대가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동기생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예의 동기생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어깨를 둘렀다.

    경덕은 더럽다는 듯 동기생의 어깨를 털어냈다.

    “아, 이 친구. 하하. 한데 어디가는 겐가?”

    “공부 하러.”

    “수업은 끝나지 않았나.”

    “공부에 끝이 어딨나? 경전에서 말하길 망구(여든 한 살)의 노인도 배울 게 태산 같다고 했는데 하물며 나같은 샌님이야 공부할 게 태산이 아니라 태천이지.”

    “아니, 이 친구··· 하하. 농도 할 줄 알았나?”

    “농 아닌데. 그리고 이것좀 놓지?”

    “그러지 말고 우리 얘기좀 들어보게.”

    “공부하러 가야 되네.”

    “아니··· 그, 지금 공부가 중요하나? 시국이 이런데?”

    “시국이 어쨌다는 건데?”

    “이 친구, 순 샌님이구만. 지금 시국이 어떤지도 모른단 말인가? 지금 말일세 충청도에서······.”

    “알아. 근데 그게 뭐?”

    “알고도 이런단 말인가?”

    “나라꼴 잘 돌아가는데 무슨 시국이 어떻고 저쩌고란 말인가?”

    “허, 잘 돌아간다?”

    “그럼, 잘 돌아가고 있지. 자네들 같이 무지한 것들도 성균관 유생이랍시고 청금복(일종의 교복)입고선 거들먹거리면서 다니지 않나. 나라꼴이 얼마나 잘 돌아가면 자네들 같이 무식한 것들도 식자랍시고 청금복 입고 돌아다니겠나. 안 그래?”

    “무, 무지한 것들? 하. 말 다했는가?”

    “덜 했는데. 더 할까?”

    예의 동기생이 발끈하려 하자, 또 다른 이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

    “서헌(西憲). 관두게. 이 친구, 시국은 눈꼽만큼도 관심없고 오직 출세에만 눈이 멀지 않았나. 그러니 저번에도 그리 뒷통수를 쳐댔지.”

    이예경과 다른 이들이 출재를 당할 때, 경덕은 그것들이 출재 당해도 마땅한 것들이라는 상소를 올렸었다.

    그 뒤로 당연히 성균관 내에서는 변절자로 낙인 찍혔고,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다.

    물론 괘념치는 않았다.

    머저리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면, 세상 신경 안 쓸 일이 뭐가 있겠나.

    다만, 그와 별개로 기분은 나쁘다.

    “뒷통수? 내가 뒷통수를 쳤다?”

    “그래. 청금복이 아까운 건 우리가 아니라 바로 자네 아닌가. 임금께 아첨하고, 권력에 아첨하는 것이 유학하는 자의 도리인가?”

    “아첨을 했다?”

    “됐네. 차라리 불씨(부처)한테 유학(儒學)을 바라지, 원. 이만가세, 가. 개가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멀어져가는 동기생들에 경덕은 어이가 없었다.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게, 이것들 성균관에 있어야 할 게 아니라 예흥청에 있어야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동기생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불의를 보고도 방관하는 것도 일종의 범죄 공모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저런 머저리들이 성균관에 버젓이 활개치고 다니는데, 그래서 또 개소리를 유소랍시고 올리려고 하려는데, 그걸 보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이 또한 임금께 불충이고, 나라에 죄 지은 역적이다.

    ‘개자식들, 이 기회에 내가 유소란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마.’

    씩씩거린 경덕은 집으로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먹을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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