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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37화 (13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37화>

    ***

    동헌에 좌기한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소인은 진정 억울하옵니다······.”

    모두 알겠지만 이놈은 곤장을 맞고 동헌 뜰에 내팽개쳐진 정태경이다.

    곤장을 맞을 때부터 억울하다를 입에 달고 있더니 맞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보통은 한 대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지 않나?

    엉덩이가 너덜너덜해질 만큼 맞았는데도 정신이 덜 들었어, 아주.

    괘씸죄로 곤장 10대를 추가로 집행(?) 하고 싶지만 나는 어사다.

    이미 신문도 전에 죄인에게 곤장 10대를 때렸다.

    당연히 법에 저촉되는 일인데, 괘씸죄랍시고 또 때려서 법을 어길 순 없다.

    “그래. 현감은 억울하다 치고. 우리 이방 나리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연신 억울하다고 외쳐대는 정태경과 달리 이방 김점박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묵비권이란 게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이방은 억울한 거 없습니까? 이 모든 게 오해라거나.”

    “사실은······.”

    “사실은?”

    “사실 소인도 조금 억울하긴 하옵니다··· 아! 물론 소인이 저지른 죄가 없다는 게 아니옵니다. 다만 모든 일의 발단은 사또께 있음인데 소인까지 싸잡아 죄인 취급을 받으니······.”

    “뭐? 이놈아! 내 어찌 이 모든 일의 발단이란 말이냐! 네놈이 날 사주해서 애꿎은 일남이의 땅을 강탈한 일을 묵인하도록 하지 않았더냐! 억울하면 내가 더 억울하지, 네놈이 뭐가 억울해!”

    탕탕!

    치고 박고 싸울 기세인 두 사람에 나는 환기 차원에서 등채를 내려쳤다.

    “지금 장난 하는 줄 아나?”

    “히끅.”

    정태경과 김점박을 노려본 나는 손을 내밀었다.

    장령 안처직이 자연스럽게 문서 하나를 내 손에 올려주었다.

    진술서다.

    아, 두 사람에게 받은 진술서는 당연히 아니고.

    두놈이 곤장 맞을 때, 막간을 이용해 일남과 정옥에게서 받은 진술서다.

    자, 그럼 누굴 먼저 조져볼까.

    “대감. 정말 억울하옵니다······.”

    옳거니, 너부터.

    “정태경. 그대는 김점박이 일남의 땅을 무단으로 강탈할 때 이를 알고서 묵인 한 거, 맞나?”

    “···예. 하오나 점박이 말하기를 분명 별 일은 없을 것이옵고 일남에게도 해가 가는 일은 아니라고 하여······.”

    “됐고. 김점박.”

    “에? 예! 대감.”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그 더러운 상판을 번쩍 들어올리는 김점박.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사건에선 이 새끼가 제일 악질이다.

    하지만 난 어사다.

    사건이 명명백백하더라도 일단 형식적인 절차 정도는 밞아야 한다.

    “왜 일남에게 위조된 매매문서를 궁방전에 편입되는 문서라 속이고 수결시킨 건가?”

    “그건 말이옵니다··· 그게······.”

    “이해하기 어려운가 본데. 좀 쉽게 설명해볼까? 왜, 일남의 땅을 강탈했는가?”

    “모두 소인의 불찰이긴 하오나 소인은 그저 조상님께 효(孝) 하려는 마음에··· 이 효심 때문에 일을 그르쳤으니 그 죄는 달게 받겠사오나 다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일의 발단은 사또께 있음이옵니다······.”

    “아니! 이놈아! 네놈이 또 날 끌어들인단 말이냐! 대감! 아니옵니다. 절대! 절대 아니옵니다! 저놈이 풍수지리에 미혹 당해서 일남의 땅을 강탈한 것이옵니다!”

    정태경의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풍수지리?”

    내가 반응하자 정태경은 옳다구나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듣고나니 어이가 없었다.

    아니, 허무했다.

    나는 점박이 치부를 위해 일남의 땅을 강탈한 줄 알았다.

    물론 좀 의아하긴 했었다.

    점박이 땅이 옥토도 아니고 오히려 비탈진 산길 초입에 있는 밭이었거든.

    게다가 인적도 드문 곳이었다.

    그런 곳을 왜?

    했었는데··· 욕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새끼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단다.

    한 번이면 그런가 보구나 하고 넘길 텐데 그게 두어번 반복되니 묏자리 때문이라 여겨 기존에 알고 지내던 풍수지리가에게 문의했고 묘의 터가 문제라는 답변을 받게 된다.

    나름 효심이 깊었던(?) 점박은 아비의 묏자리를 이장하기 위해 알아보고, 그러다 우연히 일남에게서 강탈했던 그 땅이 풍수지리가가 말한 최고의 명당자리임을 알게됐다.

    그 뒤?

    그 뒤에는 다들 알다시피 궁방전이랍시고 속이고 땅을 강탈했지, 뭐.

    “하, 하지만 그건 말씀드렸다시피 효심이 지극했기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옵니다··· 하지만 사또의 일을 생각해보시옵소서. 사또는 정옥을 동헌으로 끌어들여 수청을 들게 하지 않았겠사옵니까?”

    아, 이런 걸 두고 오십보 백보.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도긴개긴.

    이라고 하는 건가 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고 있다.

    그런다고 본인의 죄가 경감되진 않을 텐데.

    “그대 아버지는 그 뒤로 꿈에 나오시던가?”

    할 말을 잃은 나는 한참 뒤에 반문했다.

    “다행히 나오지 않고 계시옵니다.”

    “잘 됐네.”

    “아? 예. 헤헤.”

    “자식 농사 잘 지은 덕에 그대 아버님은 저승에서 아주 꿀잠 주무시겠군. 효심이 아주 대단해. 그 효심, 진짜 존경해.”

    “감사하옵니다.”

    “이거, 이럴 게 아니라 전하께 건의도 드려야겠어. 은진에 효자 났다고. 그래서 효자비 하나 세워줘야겠다고. 이런 효자가 세상천지에 어딨나, 그래?”

    “···”

    “근데.”

    “···”

    “효자비는 둘째치고 저승에서 잘 주무시고 계실 아버님은 자식 생각을 많이 안하시나 봐. 자식놈 덕분에 두 발 편히 뻗고 주무시고 계실텐데.”

    “예? 어인 말씀이신지······.”

    “쉽게 말해줄까?”

    “예. 소인이 무지하여 도통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야 이 개새끼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고 자빠졌냐?”

    “···?”

    “장령! 안 장령!”

    “에! 예, 대감!”

    “저 개새끼 당장 집어 쳐넣어. 뭐, 풍수지리? 묏자리? 개새끼가 사람이 할 짓, 못 할 짓 정도가 있지··· 아버지 묏자리 옮긴다고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가정을 파탄내? 뭐해요! 당장 집어 쳐넣지 않고!”

    “아, 예!”

    안처직이 군사들을 동원해 김점박을 끌고나갔다.

    지금껏 상황 파악 못 하고 혀 놀려대더니 질질 끌려가게 되니까 살려달라 애걸복걸하는 꼴이 가관도 아니다.

    “안 장령!”

    “예?”

    “생각해보니까 쳐넣는 것 가지고는 안 되겠네. 곤장 10대 더 때리고 쳐넣어요. 절차고 나발이고 뒷일은 내가 책임 질 테니까.”

    “알겠사옵니다.”

    연신 씩씩거렸지만 분이 안 풀린다.

    말이 돼?

    고작 묏자리 하나 옮긴다고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가정을 파탄 내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이건.

    나는 또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줄 알았다.

    하다못해 탐욕에 눈이 먼 인사라거나.

    차라리 탐욕 때문이면 말이라도 안 하지.

    근데··· 하, 무슨 말문이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진이 다 빠졌지만 여기서 끝낼 순 없었다.

    아직 한 사람 더 남았잖는가.

    찌릿.

    “히끅.”

    “죄인은 내가 조사좀 해보니까······.”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조사고 나발이고 필요 없었다.

    아전들을 시켜 가져오게 한 장부 몇 번 대조해보니까 여죄가 아주 산더미더만?

    근데 그것들은 내가 처리하기엔 진이 너무 빠진 상태다.

    아무래도 그건 나중에 의금부에서 맡도록 해야겠고 남은 건, 야심한 밤에 말만한 처자를 동헌으로 부른 건데······.

    이건 뭐 대뜸 왜 그랬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정태경.”

    “예!”

    “김점박이 풍수에 미혹돼서 일남의 땅을 강탈한 걸 알고 있던 거면 이미 알고서 묵인했단 소린데.”

    “하오나 소인은 억울하옵니다······.”

    “억울하다.”

    “예.”

    “그럼 왜 피해자 딸한테 사건 무마 시켜줄 테니 밤에 찾아오라고 시켰나?”

    “그건······.”

    “얼토당토 않은 변명 할 거면 관두고. 괜히 서로 힘 빼면서 심문할 필욘 없잖아?”

    “소,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순간 정옥의 미색에 빠져서······.”

    “억울하다더니?”

    “···”

    “혼기가 꽉 찼는데도 시집을 못 갔어. 왜 못 갔는 줄 알어?”

    “···”

    “밑에 딸린 동생이 줄줄이야.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거의 그 친구가 어머니처럼 동생들 보살피더구만. 없는 살림에 조금이라도 동생들 배불리 먹이려고 어디 초상 난 집마다 찾아가서 곡비(삯을 받고 울어주던 일) 일도 하고, 길쌈은 뭐 손이 부르터져라 했고··· 그렇게 세상 열심히 사는 애를 데려다가 그러고 싶었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아니, 묻잖아. 세상 열심히 사는 애를 데려다가, 약점 하나 잡아놓고 지위를 이용해서 그러고 싶었냐고.”

    “···”

    “그러고 싶었으니까 말이 없는 거지?”

    “아니, 그건 아니온데··· 그저 송구스러운 마음에······.”

    “내가 지금 어사로 당신 잡아 가두니까 송구 운운하는 거지, 안 나타났어 봐. 송구? 송구했겠어? 진심에서 우러나는 반성이 아니라 죄를 모면하려고 반성하는 게 송군가?”

    “···”

    내가 대사헌이 되면서 법 공부를 조금 했다.

    사실 조금이 아니지.

    하던 경전 공부도 중단하고 법 공부만 했으니까.

    사실 그게 맞는 거기도 하고.

    대사헌이 어떻게 보면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경우는, 강간에 가깝다.

    오히려 권위를 이용한 강간이기에 그 죄가 더욱 큰 편이다.

    이 정도면 장형 100대가 떨어진다.

    참고로 장형은 10대만 맞아도 제대로 걷지 못 하고, 20대 맞으면 병신불구가 된다.

    방금 김점박이나 정태경이가 곤장 10대를 맞고도 나름 멀쩡(?) 한 건 손속에 아주 쬐금 사정을 둬서 그런 거지, 제대로 맞으면 얄짤없다.

    근데 100대다, 100대.

    뒈지란 소리나 다름이 없는 형벌이다.

    물론 100대를 연달아 쳐서 죽게 하는 경우는 없고 대부분 나눠서 치긴 한다만, 어쨌든.

    “어사의 직권으로 그대 정태경을 파직하고, 모든 창고들은 봉고(관아 창고들을 잠굼)하며, 일의 전후를 본 어사가 헤아려 본 바 강간에 해당하니······.”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사실 원칙대로라면 내가 어사라곤 하지만 강간죄에 대한 형벌인 장형 100대를 집행하긴 좀 어렵다.

    형조로 이관하거나 의금부에서 다루도록 해야한다.

    근데 왠지 그러고 싶지 않달까?

    형조나 의금부에서 다루도록 하면 이 개새끼가 곤장 쳐맞는 모습을 이 고을 사람들은 못 보는 거잖은가.

    “강간에 해당하니 오늘 술시(오후7시~9시)에 관아 앞에서 장형 30대를 집행토록 하겠다. 남은 70대분은 서울에 압송된 뒤 처분토록 한다.”

    “대, 대감! 3, 30대라니요! 사, 살려주시옵소서!”

    “항소하겠다는 건가?”

    “그, 그게 아니오라······.”

    “이 감찰(이성동).”

    “예, 대감.”

    “죄인 놈이 방금 전까진 제 입으로 죄를 뉘우치고 있다고, 송구하니 어쩌니 하더니만 지금 하는 말을 들어보면 결국 죄를 모면하기 위한 술수였음이 드러난 것이나 진배없다. 괘씸하기 짝이 없으니 형을 집행하기 전에 저놈의 양물부터 거세토록 하라.”

    “야, 양물이라 하오시면······.”

    나는 이성동의 그곳을 가리켰다.

    “하오나 그런 형벌은 대명률은 물론 대전에도 없는······.”

    “책임은 내가 진다니까?”

    말했다시피 내가 여기 법 공부를 좀 했다.

    지금 내가 무책임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나도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고 하는 말들이다.

    내가 내린 명들은 결국 형벌의 남용이다.

    어사라지만, 대사헌이라지만 나 또한 결국은 관리다.

    근데 관리가 죄인에 대한 형벌을 함부로 적용했을 땐, 역으로 장형 100대를 맞게된다.

    죄인이 형벌을 받다가 죽었을 경우에는 영구히 관리로 등용되지도 못 한다.

    사실상 사회적인 매장이랄까?

    그러니 만큼 내가 내린 명들은, 그래서 이성동에게 말한 ‘책임은 내가 진다니까?’라는 말들은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 각오를 하고 하는 말들이었다.

    물론 나는 정의의 사도나 정의감 투철한 사람은 아니다.

    마블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들은 더더욱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을 내린 건, 비록 형벌을 남용했다는 비판과 그로인한 처벌을 받을 순 있을지언정 이로 말미암아 피해자들의 원통한 마음을 조금은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울 돌아가서 욕 먹으면?

    그건 일단 그때가서 생각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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