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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36화 (136/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36화>

***

은진현감 잡아들일 만반의 준비는 갖췄다.

증인도 확보했다.

증거?

음. 내가 저번에도 한 번 말 한 기억이 나는데 여긴 무죄추정의 원칙 따윈 통용되지 않는 사회다.

극단적인 예로 나같이 법적인 권한이 있는 사람이 정황을 토대로 너 용의자 맞지?

지목하면 그 사람은 이제 죄인이 된다.

물론 수사를 병행하긴 하지만··· 사실 수사라고 별 건 없다.

XX고을의 원님에 대한 추문이 나돌면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다짜고짜 관아로 쳐들어가서 어사 출도를 알린다.

2차적으로 봉명(奉命)하고 있음을 알린 다음 증거를 모으면 이게 바로 증거 수집이고 수사가 된다.

어때, 참 좋은 세······.

아, 그건 아니겠네.

어쨌든 선구속 후증거 수집이란 소리다.

왜 이런 원시적이면서도 비인권적인 방법을 쓰냐고?

이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긴 하거든.

그리고 인권.

범죄자한테 인권이 어딨나?

“한데, 대감. 앞전에 말씀해주신 건 정말로다가··· 헤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연신 손바닥을 비벼대며 비굴하게 웃고 있는 이 사람.

이 사람은 진천현감 송태정(宋兌淨)이다.

본인이 탄핵 예정인 것도 모른 채 진천에서 사또 놀이나 하고 있어야 할 송태정이 왜 은진에 나랑 같이 있냐고 묻는다면 아주 간단하다.

애당초 검사가 범죄 현장에 출동(?) 하는 일도 없다만 설령 출동한다 한들 혼자 가는 거 봤나?

형사들 대동하잖나.

비슷한 거다.

여긴 범죄자들의 저항이 있을 수도 있거든.

실제로 내가 거짓말을 조금 보탠다면 파견된 암행어사중 10할 중에 5할은 정상적으로 귀환을 못 한다.

3할은 호랑이나 산적 만나서 못 하고, 2할은 사건 발생한 곳에서 쓱싹 당해버려서.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수사 지원을 요청했다.

맨입으로 요청해도 당연히 들어줘야하지만, 원활한 수사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딜을 좀 했다.

무슨 딜?

“왜요, 내가 한 입으로 두 말할 사람 같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옵고 다만 확인 차원에서··· 헤헤헤.”

“걱정마세요. 파직 정도로 그치게 힘 쓸 테니까.”

“헤헤, 감사하옵니다, 대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또가 됐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에게 내가 딜을 한 건, 처벌 수위를 낮추는··· 그래, 사법거래의 일종이었다.

근데 사실상 따지고 보면 낮춘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은 본인이 삭탈관직에 처해질 줄 알고 있는데··· 나는 애당초 탄핵소에 파직을 건의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금 멍청하다고 삭탈관직에 처해지진 않거든.

뭐, 사또가 세상물정에 어두우신 덕분에 군사들을 대거 동원 받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됐고, 준비나 하세요.”

“예!”

송태정이 곧 데려온 군사들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진천현의 군사들은 비록 별충위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다르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폼은 살아 있었다.

준비가 끝나자 나는 역원에서 빌려온 말에 올랐다.

내가 말에 오르자 내 눈치를 살짝 살핀 송태정이 외쳤다.

“대어사 출도시다. 가자!”

대사헌이랑 암행어사를 합쳐서 대어사라고 한 것 같은데··· 후, 모르겠다.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쯧쯧.’

***

은진현 동헌.

은진의 아전인 김점박은 실로 오랜만에 개좌(출근)한 현감에 뜨끔했다.

왠지 모르지만 어떤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아니.

아전밥 15년 세월이 뭔가 불길한 일이 있음을 예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동헌 뜰에 들자 현감 정태경의 낯빛이 어둡기 그지 없었다.

웃는 낯은 아니어도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쥐어 짜내서 치부 할 수 있을지 골몰만 하던 모습과는 상반된 표정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송태정은 좌중을 쓱- 훑어봤다.

그러다가 김점박과 눈이 마주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방은 소문을 들었는가.”

“소문이라굽쇼?”

“못 들었어?”

어쩐지 서리가 잔뜩 낀 사또에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짚이는 건 전혀 없었다.

‘또 트집이신가.’

가끔 있는 일이긴 했다.

사실 이게 더 가능성 있었다.

그는 은진의 아전이다.

아니, 아전이기 이전에 조상대대로 은진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호에 가깝다.

적어도 은진에 무슨 소문이 나돌고 있다면 그가 모를 까닭이 없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치켜뜨는 점박의 행동에서 분기가 치밀어오르는지 송태정의 얼굴이 금방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주먹 쥔 손은 부르르 떨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내 이방이 내게 도움 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라서 참고 넘어가려 했는데 말일세?”

“···예.”

“계속 시치미만 떼니 어이가 없구만.”

“어찌 그러시는지 말씀을 해주시면 소인이 후딱 처리하겠습니다요.”

“정말 소문 못 들었단 말인가?”

“예. 결단코 못 들었습니다요. 사또도 알다시피 제가 이래뵈도 은진의 기안(제사 달력)이란 기안은 모두 꿰차고 있사옵고, 하다못해 불법적으로 화전하는 무지렁이들 집에 수저가 몇 개인지 까지도 알고 있사온데··· 뭐, 경위가 어찌됐든 어떤 소문이길래 사또게서 이리 노하셨는지 모르겠사오나 금시초문인 건 확실합지요.”

“은진현감 정태경이가 색마라는 소문.”

“예?”

“밤마다 처녀의 봉긋 솟은 봉우리를 끼고 자지 않으면 잠을 설친다는 소문.”

“아니, 어떤 놈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이게 다가 아닐세.”

“···”

“젊은 처녀의 음기를 보충하지 않으면 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에 밤마다 젊은 처녀의 음기를 보충한다는 소문. 하··· 내가 무슨 요괴라도 된단 말인가?”

“어찌 그런 소문이······.”

“정말 몰라서 묻나? 이게 다 이방 뒤 봐주다가 나온 소문 아닌가 말이야!”

버럭 호통치는 사또에 점박은 화들짝 놀랐다.

뒤를 봐주다니!

무슨 그런 큰 일 날 소리를 백주대낮에, 그것도 동헌 뜰에서 한단 말인가.

점박은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친한 아전들을 제외하면 사또의 큰 일날 소리를 들은 귀는 없어보였다.

뒤를 봐주다가 나온 소문.

금방 한 사건이 떠오른다.

그놈이 소문의 주체임이 분명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은 그런 소문이 날 줄은 추호도 몰랐사옵니다.”

“허. 소문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고을 사람들이 내 선정비를 세운 게 바로 작년 일일세, 작년! 한데 선정비가 세워진 지 1년도 안 돼서 그런 소문이 돌아봐. 아니, 그전에. 소문이 조정에도 들어간다고 생각해보게. 어찌 되겠어? 사람이 말이야, 머리는 장식인가?”

사실 정황상 이 일의 모든 원인은 사또에게 있었다.

멍청한 사또 놈이 애꿎은 계집년을 욕심내지만 않았어도 그런 소문은 돌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일단은 현감의 말처럼 수습을 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너무 노여워마시옵소서. 대충 소문의 근원이 어딘지 알 듯 하옵니다.”

“그래?”

“소인이 잘 수습 할 터이니 사또께서는 마음 푹 놓고 계십시오.”

“크흠. 잘 하게, 잘!”

거드럭거리며 대청을 내려가는 정태경을 바라보던 점박은 바드득 이를 갈았다.

그놈 때문에 이게 무슨 수모란 말인가.

곤궁한 형편이 눈에 밞혀서 적당히 밞아줬더니 결국 사달이 났다.

송사를 걸지 않나 이제는 소문을 부풀려서 내질 않나······.

아예 기어오르지도 못 할 만큼 아주 곤죽을 내줄 참으로 점박은 성큼성큼 관아를 나섰다.

“암행어사 출도다!”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말이다.

***

호가호위란 말이 있다.

알다시피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서 객기를 부린다는 뜻인데.

송태정.

이건 뭐, 여우 정도가 아니라 거의 구미호 급의 호가호위다.

뭐, 어쨌든 어사가 출도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 이분 말대로 지금 막! 어사께서 출도했습니다. 모두 동작 그만. 어, 거기. 어, 그래. 거기 나 빤히 쳐다보는 당신. 그래, 당신!”

사또는 통상 구군복을 입기 마련이다.

그게 근무복이거든.

근데 지금 대청을 내려와 뜰을 가로지르던 저 사람.

저 사람은 일반 도포만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놈이 아전 김점박과 해쳐먹은(?) 은진현감 정태경이란 사실을 말이다.

이건 형사··· 아니, 어사의 직감이다.

“동작 그만이란 말 안 들려? 움직이지 말라니까 자꾸 슬금슬금 움직이려 드네.”

어사가 군사들까지 대동하고 출도했는데 튀려는 건 당연히 아닐 터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그건 불가능 하지.

다만 하도 놀라서 그런지,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당혹스러울만도 하긴 한데··· 그래도 나는 분명 움직이지 말라고 했었다. 근데도 움직인 건 정태경이잖아?

잘못을 했으면 어떻게 해야한다?

‘맞아야지.’

슬쩍 송태정에게 눈치를 주자, 송태정은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어사께서 봉명을 받잡고 내려오셨으니 손속에 사정을 둬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매우 쳐라!”

군사들이 우르르 달려가 정태경에게 매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살짝 뒷걸음질 친 정도로 매질이라고 하면 과한 감이 없잖아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내 생각도 같다.

근데 이건 정말로 동작 그만이라는 내 말을 어겨서 매질을 가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기선 제압이다.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저항을 하거나 도주를 할 수도 있으니까.

퍽! 퍽!

정태경에게 무자비한 매질이 가해지는 사이.

나는 관아 대문에 넋이 나간 채로 우두커니 서있는 아전에게 다가갔다.

-그 아전 놈은 오른쪽 볼 아래 큼지막한 점이 있습지요.

주막에서 만난 증인은 분명 김점박의 용모를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었다.

그리고 넋이 나간 채로 우두커니 서있는 저 아전 놈의 오른쪽 볼 아래 큼지막한 점이 있다.

“당신이 김점박?”

끄덕.

“끄덕? 허. 아직 상황 파악 못 했네. 이 새끼도 일단 팹시다.”

다시 정태경에게 명하자, 이번에는 정태경이 손수 소매를 걷어 붙이고 나섰다.

사실 어사 출도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라고 배우긴 했는데··· 알게 뭐람.

범인만 잘 잡아 들이면 되지.

그런 의미에서.

“고을 장부부터 좀 볼까요?”

정태경을 대신해 동헌에 좌기한 나는 장부를 요구했다.

내게 지목 당한 아전은 아직도 매를 흠씬 맞고 있는 정태경과 김점박에 얼어 붙은 채로 고개를 조아린 채 후다닥 뛰어나갔다.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으므로 이성동이 함께 따라간 건 당연지사였다.

고을의 장부란 게 한 두 가지가 아닐 터였다.

흩어진 문서를 연도 별로, 날짜 별로 정리할 필요도 있고.

막간을 이용한 나는 진술을 받기 위해 피해자 일남과 그의 장녀 정옥을 불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일남과 처자 하나가 동헌으로 들어섰다.

괜히 가해자들이랑 삼자대면을 하면 불안해할까 싶어 가해자들은 헛간에 가둬두고 진술을 받았다.

근데 이건 뭐, 진술을 받으면 받을수록 헛간에 가둬둔 가해자들을 돼지우리에 가둬두고 싶어진다.

아, 물론··· 어떤 일이든 양쪽 입장을 듣는게 맞는 거긴 한데.

이 새끼들은 이거 아주 그냥 사람 새끼들이 아니다.

“장령.”

“예, 대감.”

“헛간에 있는 것들 딱 곤장 열 대만 치고 진술 받읍시다.”

“예? 고, 곤장을 말이옵니까?”

“네. 손속에 사정 두지 말고 후딱 치고 진술 받게요.”

“아, 알겠사옵니다.”

안처직이 빠져나가자 나는 일남을 바라봤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그는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뭐라 위로해주고 싶긴 했는데, 딱히 위로 할 말이 없어 관둔 나는 동헌을 빠져나왔다.

저쪽 세상이나 이쪽 세상이나 없는 사람들에게 주옥 같은 건 매한가지인 세상.

담배 한 대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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