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35화 (13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35화>

    ***

    여긴 은진현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은진현에 딱 하나 있다는 주막.

    주막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문전성시인 걸 보면, 불경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경기(無景氣)에 가까운 조선에서도 요식업은 제법 장사가 되는가 싶지만, 국밥을 툭툭 내던지듯 놓고 가는 주모의 서비스 마인드는 영 아니올씨다다.

    후루룩-.

    “음. 맛있네.”

    맛은 있으니까 봐준다··· 맛까지 없었으면 상 엎었······.

    “맛이 정갈하고 또한 구수하니 서울에선 맛 볼 수 없는 탕반(국밥) 같습니다.”

    주모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던 안처직도 나와 동일한 생각인지 호평과 함께 허겁지겁 국밥을 입에 밀어 넣는다.

    펄펄 끓는 솥단지에서 나온 국밥이라 여간 뜨거운 게 아닌지 후··· 하.

    다소 경박스러우면서도 복스럽게 먹는 안처직을 보면, 21세기에서는 지금처럼 법조계 쪽 보다는 인터넷 방송을 했으면 아주 잘했을 것 같다.

    나는 점점 줄어가는 안처직의 그릇에 내 국밥을 조금 더 덜어줬다.

    안처직이 국밥을 복스럽게 먹는 모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안처직이나 이성동이나··· 집 나와서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건, 알다시피 나 때문이기도 하다.

    관례대로 말단 관원을 행대로 보냈으면 될 일을 내가 자처해버렸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내 식사량은 이곳 사람들 보다 현저히 적다.

    21세기에서 먹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조선 생활 2년차 임에도 위는 아직 적응이 덜 됐다.

    여기 사람들은 밥을 무슨 고봉으로 먹는다.

    국밥도 말이 국밥이지, 찌개용 냄비에 밥을 들이부은 수준의 양이다.

    근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 글쎄. 정말이라니까?”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어?”

    “그래. 거짓부렁 같은데?”

    “아니! 내가 자네들한테 비싼 밥 먹고 왜 거짓부렁을 늘어놔? 뭐 득 될게 있다고.”

    안처직에게 내 국밥을 덜어주던 나는 귀를 종긋 세웠다.

    암행어사.

    역알못인 나도 들어본 단어였고 TV프로그램에서 종종 주인공이 암행어사로 분해서 탐관오리를 때려 잡는 일도 있었으니, 친숙하다면 친숙한 용어가 바로 암행어사란 용어였다.

    암행어사란 말만 딱 들어보면 진짜 뭔가 있어보인다.

    악당들 때려잡고, 탐관오리들 때려잡고··· 부정부패한 놈들한테 백성들을 구제해주는, 뭐랄까··· 정의의 사도 같달까?

    근데 이건 미디어 매체가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이다.

    왜, 현실에서도 그러잖나.

    소방관들이 겉으로 볼 땐 엄청 멋있어보이지만, 실상은 격무에 시달리는 것처럼.

    마찬가지다.

    TV에선 암행어사들이 “암행어사 출도야!” 외치면서 탐관오리들 때려 잡는 자극적인 장면만 보여주지, 수사 과정은 안 보여주거든.

    근데 이 수사 과정이 완전 아날로그하다.

    어떻게 하길래 그러냐면······.

    “그럼 정말 사또가?”

    “쉿! 이 사람이 큰 일 나려고!”

    최상의 경우는 소문을 근거로 잠복(?) 수사를 한다.

    예컨대 XX고을의 XX사또가 관고의 재물들을 착복했다더라.

    라는 소문을 근거로 증인을 확보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최상의 경우고, 보통의 경우에는 지금처럼 길가다가 우연히 만난 민초들의 대화에서 단서를 얻는다.

    나는 옆에서 소곤거리며 대화를 하고 있는 주막 손님들의 대화에 직감적으로 구린 사건이 있음을 느꼈다.

    왜, 형사의 감이라고 하잖나?

    그런 거랑 비슷하다.

    “대감.”

    안처직도 나와 같은 감을 느꼈는지 허겁지겁 퍼먹던 국밥을 내려놓고··· 아니, 그새 다 먹었구나.

    그릇이 깨끗이 비워져있다.

    “냄새가 나죠?”

    “예.”

    나는 안처직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안처직은 익숙한 듯 상에 올라간 있는 술병을 흔들거렸다.

    “좀 많이 남았는 걸.”

    “나는 못 먹겠네.”

    “나도 배가 불러서 더 이상은 못 먹겠수다.”

    “하··· 어쩐다. 아까워서.”

    이성동과 내가 발연기를 시전하자, 안처직 역시 또 다른 발연기를 시전했다.

    “이보시오들.”

    “응?”

    “술이 좀 남았는데 들겠소? 우린 배가 불러서.”

    “보부상들이 술을 마다하나?”

    의아한 듯 묻는 상대에 안처직은 껄껄 웃었다.

    “오는 길에 몇 잔 걸쳤더니 술 생각도 달아나더군. 그래서 먹겠소, 말겠소?”

    “공술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 고맙소.”

    자, 아주 중요한 사건의 증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과의 1차적인 접촉은 끝났다.

    하지만 여기서 다짜고짜 “아까 사또가 어쩌고 저쩌고 하던데 무슨 소리요?” 묻는 건, 초짜들이나 하던 짓이다.

    우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명태값을 얼마 받지도 못 했구만.”

    “시국이 어수선하다 하니 수가 있겠소.”

    “자네는?”

    안처직의 물음에 이성동이 답했다.

    “나는 뭐··· 그럭저럭 남겨는 먹었지.”

    “얼마나 남겨 먹었는데 그래?”

    “같이 다닌다고 남의 장사 수완을 말해줄 수가 있나.”

    “매정한 사람 같으니. 나는 아주 개털일세, 개털.”

    “왜? 행상 간 고을에서 문제라도 있었소?”

    “사또 새끼가 아주··· 아니, 말을 마세. 내 울화통이 터져서······.”

    “아니,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이제와서 무슨. 무슨 일인데?”

    “아, 글쎄 내가 진천현에 가서 봇짐을 푸는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또의 비리 행각을 화두로 삼고 대화에 집중했다.

    사실 진천현감이 좀 멍청해서 고을 사람 여럿 고생시키긴 했어도 행인들 돈이나 털어먹는 탐관오리는 아니었다만··· 수사의 과정이니 이해해주겠지.

    “그럼 그걸 다 떼먹혔다고?”

    “다는 아니지. 근데 빚내서 봇짐 들고 다니는 팔자에 그 정도 털려먹었으면 거의 개털 됐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 아닌가?”

    안처직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내 차례다.

    “그··· 들어보니까 말이오. 내가 저기 어디야. 서울에 연줄이 좀 있어. 그 연줄이 좀 길게 있지.”

    “그런데?”

    “내가 듣자하니 형 씨의 사정이 아주 딱해서 그러는데 그 누구더라 진성··· 누구지? 종친이라던데.”

    “진성대군?”

    “그래, 진.성.대.군. 그.분. 이 막 사.헌.부.에 부.임.해.서 일.처.리.를 하.시.는.데······.”

    국어책 읽는 것처럼 들리는 건 여러분들의 착각이다.

    “하시는데?”

    “민초들의 억울함하고 원통함을 그리도 잘 풀어준다고 하시더군! 내 사촌 누이도 억울한 일 당했다가 그분한테 달려가서 하소연하니 당장 들어주셨다던데?”

    “그게 참말인가?”

    “내가 왜 거짓부렁을 늘어놔? 참말이지.”

    “어떻게 된 건데? 자세히 좀 말해보게.”

    나는 침까지 튀겨가며 내 금칠(?)을 했다.

    그렇게 자화자찬을 늘어놓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예의 옆 평상의 손님 하나가 은근슬쩍 끼어든다.

    “거, 형 씨가 말씀한 게 모두 사실이오?”

    낚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미끼가 바늘을 물었을 때 얼마나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낚아 채느냐의 문제다.

    나는 조급한 마음과 달리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사실이라니까? 왜, 형 씨도 고민이 있소?”

    “아니, 내 고민은 아니고··· 이웃집이 좀 사정이 딱해서.”

    “무슨 사정인데? 들어나 봅시다.”

    “입이 무거우신가?”

    “보부상이라고 입이 가벼우란 법 있나? 무겁지, 그럼.”

    “그러니까 말이오.”

    손님이 전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듣다보니 누가 떠오른다.

    김진조.

    그나저나 김진조는 노비 생활 잘 하고 있으려나?

    물론 은진현감이 김진조처럼 백성들을 부역에 마구 동원하고, 막무가내로 물고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

    그 정도로 막돼먹었으면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사헌부에서 행대를 파견했을 테니까.

    다만 돈을 있는대로 받아 쳐먹고 있었다.

    공적인 일을 처리할 때는 무조건 뇌물.

    뇌물이 없으면 세월아 네월아란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어이가 없는 건 말이오.”

    나는 귀를 종긋 세웠다.

    “실은··· 이번에 그 집에서 송사를 벌인 게 땅 때문이거든.”

    “땅? 무슨 땅?”

    “자세히 말하긴 뭐하고··· 아전 중에 김점박이란 놈이 있는데 이놈이 그 집 땅을 강탈했거든.”

    “그 집은 눈 뜬 채로 강탈 당했고?”

    “그럴 리가 있나. 갖가지 명목에··· 지난 번 환곡한 거 얼른 갚으라고 재촉하는데다가 또 그 집 형 씨가 까막눈이오. 아전이 수결하면 환곡도 없는 걸로 해주고 3년간 면세해준다고 하니 옳다구나 수결했지.”

    “아니, 아무리 까막눈이어도 그렇지··· 의심 정돈 했을 거 아니오?”

    “했지. 그래서 그 집 형씨가 이 문서가 도대체 뭔데 수결하면 환곡도 없는 걸로 해주고, 3년간 면세 혜택까지 주는 거냐고 하니 궁방전에 편입 되는 거라고 했다던가?”

    “궁방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사실 사기란 게 21세기에만 있는 것 같지만 이 시대에도 화제가 되지 않아서 그러지, 왕왕 있는 게 사기 사건이었다.

    사기란 게 조금만 의심하면 알아차릴 수 있는 건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듯 귀신 같이 사기 치려는 놈에겐 서연고 나온 엘리트들도 못 당한다.

    이 궁방전이 그렇다.

    궁방전은 왕실 종친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내 땅은 모두 궁방전이다.

    당연히 면세 혜택이 있고.

    근데 이 땅을 소작 짓는 사람들에게도 면세 혜택이 주어진다.

    그래서 각종 비리가 판을 치는데, 장부상 궁방전에 편입 시켜놓고 혜택만 누리고는 입을 씻는 경우다.

    아전은 궁방전에 편입 되는 거라면서 설득을 했을 테고, 없는 살림의 피해자는 나랏일 하는 아전이 하는 말인데다 면세 혜택이란 말에 혹해 수결을 했을 테지.

    뭐, 결국은 사람 욕심이 부른 화근이라고 할 순 있지만 가해자가 돌 맞을 놈이지, 피해자가 돌 맞을 놈인가?

    “아무튼 뒤늦게 그 집 주인이 알고 저번에 환곡한 거 다 갚을 테니, 땅 돌려달라고 하소연했는데 아전 놈이 그런 일 없다고 잡아 떼지 뭐요.”

    “허.”

    “법대로 하라나 뭐라나··· 근데 아까 말했잖소. 사또 놈이 뇌물 안 갖다 바치면 세월아 네월아라고. 그리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도 아니고, 아전 놈이 벌인 일을 억만금 갖다 준다 한들 사또 놈이 처리 해주겠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이런 자잘한(?) 사기는 아전 혼자서도 벌일 수 있는 일이지만, 사또의 묵인 없인 불가능하다.

    묵인 없이 가능했다면 이번에 지나쳐온 고을 아전들도 다 개차반들 밖에 없었겠지.

    사또도 아전에게 뇌물을 받아 먹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근데 또 그 집 딸내미가 반반해. 반면 사또 놈은 여색을 어찌나 밝히는지··· 쯧쯧.”

    말끝을 흐리며 대신 쯧쯧 혀를 차는 모습에서 굳이 뒷 말은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뇌물 대신 다른 걸 요구 했을 테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쩌긴. 사또 놈이 마수를 뻗치니까, 그 집 딸내미는 지 애비 몰래 동헌 뒷문으로 들어간 거지.”

    “사정이 아무리 딱해도 그건 좀 그렇지 않소?”

    “그 집 형편을 형 씨가 몰라 그래. 그 집 마누라는 역병 때 앓아 죽었고, 애비는 그 땅 하나로 근근이 얘들 먹여 살린 건데 딸린 입이 한 둘인 줄 아쇼? 무려 여덟이야, 여덟. 그 딸내미가 장녀니까, 밑으로 동생만 일곱이란 소리지. 형편이 어려워서 혼기 꽉 찼는데도 시집도 못 간 거 아니요. 눈 한 번 딱 감으면 땅 돌려받을 줄 알았던 게지. 쯧쯧. 딱한 것.”

    돌려받을 줄 알았던 게지?

    “못 돌려 받았단 거요?”

    “돌려 받았으면 사또가 개새끼긴 해도 고을 사람들이 야차라고 손가락질 할까. 아예 입 딱 닫고 있다지 뭐요. 시부랄놈.”

    나는 안처직과 눈빛을 주고 받았다.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어쩔 수 있나요.’

    사인을 주고 받은 나는 은밀하게 소매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승명패를 조심스럽게 꺼내 예의 진술인에게 보여줬다.

    역시나 진술인은 화들짝··· 아니, 아예 놀라 까무러칠 기세였다.

    “쉿. 내가 사실 보부상이 아니라 이번에 승명패 받고 내려온 어산데. 형 씨가··· 아니지. 그대가 도움을 좀 줘야겠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