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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34화 (13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34화>

    ***

    사건 보고를 받은 나는 달리 부를 명칭도 없어서 이 사건의 이름을 ‘저수지 지대 사건’이라 명명했다.

    저수지 지대 사건은 큰 일이라면 큰 일이고 작다면 작은 일이었다.

    쉬쉬한다면 얼마든지 쉬쉬 할 수 있고, 키우려면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사건이랄까?

    근데 쉬쉬하고 싶지는 않았다.

    새삼 정의감이 불타올라서는 아니고··· 이 관복에 수놓아진 해태가 정의와 선악을 상징하는 동물인데 대사헌으로서 탱자탱자 놀고만 있는 게 너무 미안해서였다.

    모처럼만의 사건이니 키우려면 확실히 키우는 게 좋겠지.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몇 명입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공주목 아전들 셋이 연루되었고 주동자는 서경종이라는 자로 경인년(1470년) 출생이옵고 집안 대대로 공주의 유지였던 것 같사옵니다.”

    “단자(집안 내력)가 어떻길래요?”

    “증조부는 고려조에 벼슬을 지낸 것 까지 확인이 되옵고 다만 조부 서종상 부터는 공주목에서 아전으로 생계를 이은 듯 하옵니다.”

    내가 굳이 단자를 물은 건 사건을 좀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였다.

    일단 서경종의 집안은 대대로 공주목의 유지였던 것 같다.

    그 이력이 서경종 대에까지 내려왔고.

    “근데 고소인들이 말한 땅은 뭡니까?”

    이 사건은 공주목사 김율(金硉)에 의해 그 전말이 드러났다.

    김율은 사건 당사자들을 불러다 문초했는데 다만 양측의 주장이 판이하게 달랐다고 한다.

    서경종 측은 그 저수지에 본인의 사유지가 걸쳐 있으므로 지대를 받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 될 게 전혀 없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명의의 땅문서를 함께 제출했다.

    반면 석한리 마을 사람들 측은 서경종이 말한 사유지는 수십년 전부터 무주지로, 몇 년 전 관에서 목민들을 동원해 땅을 개간하고 둔전(屯田)으로 삼았는데 막상 개간한 땅이 황폐해 얼마 안 가 폐전한 뒤로는 무주지로 남았다고 주장했다.

    무주지였던 땅을 관에서 개간해 일시적으로 둔전에 편입시키긴 했지만 말했다시피 찰나에 불과했고, 그 땅이 다시 버려졌기 때문에 본인들이 사용하는 건 큰 탈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석한리 마을 사람들은 버려진 땅을 마을 공동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명문(법적인 근거가 되는 공문서)을 제출했다.

    땅문서와 명문의 대립.

    사실 골치 아픈 일이었지만 대충 사이즈가 나왔다.

    ‘아전 새끼들이 해먹은 것 같은데.’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댔던가.

    반대로 대사헌 반년이면 딱 봐도 견적이 나와버린다.

    내가 탱자탱자 놀면서 꿀을 빨았던 건 사실이지만, 꿀을 빨았다고 해서 내가 부하 직원들이 올리는 보고서 조차 휙- 보지도 않고 던져버리는 직무유기를 했다는 건 아니다.

    내 선에서 처리할 사안이 별로 없어서 꿀을 빨았던 것이지, 부하 직원들이 올리는 보고에 결재는 늘 했었다.

    그리고 결재를 하려면 당연하지만 보고서를 일단 읽어야 한다.

    읽지도 않고 결재를 어떻게 해?

    반년간의 보고서 결재 경험을 토대로 비춰본다면, 이번 저수지 지대 사건처럼 뭔가 뒤가 구린(?) 냄새가 나는 사건들일수록 권력자가 개입한 일이 많았다.

    상식적으로 그렇잖아.

    민초들이 권력자를 상대로 을질을 하겠나, 아니면 권력자가 민초들 상대로 갑질을 하겠나?

    견적이 딱 나오잖아.

    ‘사유지는 이미 서경종이가 김율이 부임하기 전에 땅을 꿀꺽할 생각으로 목민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둔전으로 편입시켰을 거고······.’

    이미 서경종의 유죄를 확신하고서 추정을 하는 건 무리아니냐고?

    일단 첫째.

    여긴 무죄추정원칙이 없다.

    그리고 두 번째.

    조선 생활 겨우(?) 2년차인 내가 이런 말 한다는 게 우습다만, 사실 무주지로 있는 땅을 개간하고 둔전으로 편입시켰는데 다시 방치 시켜 놓는 경우는 진짜 없다.

    아예 없다고 확신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선 그렇다.

    왜냐고?

    여기 나온 사례처럼 개간은 백성들을 동원하는 게 일반적이다.

    당연히 원성이 뒤따르니 만큼 둔전에 편입시키기 위한 부역이라도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다.

    토질 검사 정도는 해놓고, 여기가 둔전을 가꿀만 하겠다는 판단이 들면 그제야 비로소 부민을 동원하는 것이다.

    그것도 농한기에만.

    그런데 애써 개간해서 둔전으로 편입시킨 땅이 알고 보니 황폐하더라. 그래서 방치를 했더라.

    이건 이치상 맞지가 않다.

    그리고 세 번째.

    그래.

    백번 양보해서 위의 사례가 있을 법한 사례라고 치자.

    그래서 정말로 땅이 황폐해서 폐전을 했다 치자고.

    근데 둔전은 모두 알다시피 관전(官田)이다.

    현대로 치자면 지방자치단체에서 공적인 용도로 매입한 땅이 몇 년 지나고 보니 자치단체의 고위 관계자 명의로 바뀌어 있는 것과 흡사하다.

    이게 말이 안 되잖은가.

    애써 개간한 땅을, 애써 둔전으로 편입시킨 땅이 몇 년 지나고 보니 일개 아전의 사유지로 등재돼 있다는 것이 말이다.

    뭐, 어쨌든.

    ‘명문은 이 사실을 모르는 김율이 내준 거겠고.’

    명문은 법적인 근거가 되는 공문서의 일종이었다.

    석한리 마을 사람들이 제출한 명문은, 마을 사람들이 지금은 무주지가 된 옛 둔전을 공동으로 사용해도 되냐는 소지(청원)에 대한 일종의 관의 공식 답변이었다.

    관에서 석한리 마을 사람들이 저수지를 만들 줄은 미처 몰랐겠지만 어쨌든 관에서 사용해도 된다는 보증을 해줬다는 소리다.

    당연히 석한리 마을 사람들은 이 명문을 믿고 십시일반 푼돈을 모아 저수지를 만들었을 테고, 지금껏 잘 운영해왔었겠지.

    서경종이 석한리에 지어진 저수지에 본인의 사유지가 걸쳐 있다는 트집을 잡으며 지대를 요구하기 전까진 말이다.

    억측 아니냐고?

    언더도그마(Underdogma)란 말이 있다.

    약자가 힘이 없다는 이유로 강자 보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고, 강자는 힘이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모순이자 착각이다.

    이 언더도그마처럼 내 추측은 억측일지도 몰랐다.

    서경종에 비해 힘이 없는 석한리 마을 사람들이라고 선하다고 할 순 없고, 석한리 마을 사람들에 비해 힘이 있다고 해서 서경종이 악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근데 정황이 그래.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있달까?

    “김율이 문초한 기록좀 봅시다.”

    안처직이 문건 하나를 건넸다.

    내가 안처직에게 들은 전말과 별 다를 바는 없었다.

    다만 이 문건으로 구린 내가 강하게 풍긴다는 것 정도는 확신 할 수 있었다.

    “이거 나만 구린 냄새 납니까?”

    “···”

    무언이 곧 긍정일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것 같다.

    나는 어떻게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건 사건이 완전히 처리 된 게 아니다. 심증만 있었고, 김율도 확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윗선으로 이관 시킨 것이다.

    아마, 지금 쯤이면 형조에 전달이 됐겠지.

    다만 형조라고 다를까?

    형조에서도 정황과 심증만 있으니, 결국 이런 정상적인 루트를 타면 서경종이는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커보였다.

    내가 그래도 아까 말했다시피 명색이 해태가 수놓인 관복을 입고 있는 대사헌인데 밥값은 해야지.

    미꾸라지 새끼가 법망을 빠져나가도록 놔둘 순 없잖아?

    그런 의미에서!

    “자.”

    손뼉을 치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자 모두의 시선이 나한테로 쏠렸다.

    “출장 준비 하죠.”

    ***

    검찰에서 수사관을 파견하듯 사헌부에서도 행대라는 수사관을 파견한다.

    통상 사건 지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하는 이 행대는 사헌부의 말단들을 보내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내가 갈 참이었다.

    역시 화끈하신 우리 형님은 내가 사건 지역으로 내려가겠다는 말에 바로 윤허도 해주셨다.

    “의아한 일이 있으면 파헤쳐 억울한 피해자가 없게 하는 것이 바로 국가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억울한 피해자가 있다면 국가가 존대한들 어디에 쓰겠는가? 내 대사헌 이역에게 승명패(임금의 명을 수행하는 신하에게 내리던 패)를 내리고, 또한 행대하러 가는 대사헌 이역, 장령 안처직, 감찰 이성동에게는 겸어사의 직함또한 함께 내리니 만일 가는 길에 수령의 불법이 있거든 적발하라. 내려가는 길목의 수령 중에 평안한 정치만 꾀하는 이만 있겠는가?”

    이런 멋진 멘트와 함께 말이다.

    뭐, 아무튼 공주목 사건의 전말을 파헤칠 생각으로 자처했던 출장에는 어사의 직분까지 더해졌다.

    딱히 귀찮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려가는 길에 실적 하나 더 채우면 좋지, 뭐.

    그래도 만반의 준비는 갖춰야 했다.

    공주목에 행대만 하러 간다면 준비고 나발이고 필요가 없겠지만 대사헌으로서, 또한 어사로서 내려가는 길이니 기밀을 요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고?

    고속도로에서 단속하는 암행 순찰차가 휘황찬란한 거 봤나?

    자고로 단속은 은밀함 속에서 이뤄져야 하는 법이다.

    때문에 나와 장령 안처직, 감찰 이성동은 어사로서 공주목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병가(病暇)를 낸 걸로 처리됐다.

    한 기관에서 세 사람 씩이나 병가를 냈다니 의아해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겠지만, 의아해하는 게 더 낫다.

    만약 우리가 어사의 직분을 겸하고 내려간다는 게 사방팔방 알려지면, 내려가는 길목에 만에 하나 있을 범법 수령의 귀에도 들어갈 게 아닌가?

    그런 수령들이 있다면 미리 증거 인멸을 할 우려가 매우 크다.

    신속하면서도 은밀해야 했기에 수행원도 적은 편이었다.

    아까 말한 장령 안처직과 이성동이 사헌부 관원의 전체였고, 이외에 짐꾼겸 호위로 금군 넷이 붙여졌다.

    이 시대에서 여행은 때론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거든.

    호위는 필수다.

    보부상으로 위장한 우리는 곧바로 남하했다.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다음 양재역(말죽거리)를 통과했고, 거기서 승명패를 내보이고 말을 갈아타 수원으로 곧장 내려갔다.

    수원에서는 다시 청호면(지금의 오산시)까지 내달렸고, 거기서 말을 틀어서 이천으로 향했다.

    굳이 길을 돌아간 까닭은 우리가 어사의 직분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당연히 팔도 방방곡곡의 고을 현황을 모조리 살펴 볼 순 없겠지만 이왕 어사의 직분을 겸한 거, 경기 남부와 충청 북부 지방 정도는 살펴볼 참으로 길을 우회한 것이었다.

    이천에서 여주까지 갔다가, 별 일이 없자 다시 말을 돌려 진천현(鎭川縣)까지 내달렸다.

    말이 좀 힘에 부쳐하는 것 같길래 인근 역원에서 말을 갈아탔고, 거기서 곧장 남하해서 청주와 회덕현(지금의 대전)과 진잠현(지금의 대전)을 거쳤다.

    길을 뱅글뱅글 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충청과 경기 전역을 싹 훑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여정이었지만 다행히 별 탈은 없었다.

    아, 물론 아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아니고······.

    진천이었나.

    그래, 맞다. 진천.

    잠깐 들렀던 진천현감이 멍청해서 백성들이 고생하는 건 좀 있었다.

    근데 수령쯤 되는 위치인데 멍청한 거면··· 솔직히 이것도 탄핵 사유감이다.

    함께간 안처직, 이성동 두 사람과 상의해서 탄핵하기로 결정을 했다.

    아직 본인이 탄핵 될 걸 모르는 멍청한 현감은 아직도 멍청한 짓을 하고 계시겠지만······.

    이거 빼고는 별 탈 없었다.

    다만.

    사건은, 그래도 별 탈 없이 나라꼴이 잘 돌아가서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들렀던 은진현(지금의 논산시)에서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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