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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31화 (13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31화>

    ***

    “하오나 대감··· 그건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닐는지······.”

    속사포처럼 내뱉고 나니 편전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그 적막을 깬 건, 성균관이라는 대학의 총장이라 할 수 있는 대사성 김전이었다.

    그는 내 말이 너무 과하다 여겼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과한 처사요?”

    “지금 성균관의 태학생들이 사태를 잘 파악하지 못 해 언행이 과격하고 광직(직무를 게을리 함)하긴 했지만 그게 참람하고 망령된 일은 아닙니다··· 태학생들을 출재시키고 형벌을 가한다면 지금 당장은 속이 후련할지 모르겠지만 정사에는 큰 손상이 있을 수 있으므로 태학생을 벌주는 것은 가한 일이 아니겠습니다.”

    나는 김전을 이해했다.

    말했다시피 그는 성균관이라는 대학의 총장이다.

    총장이 학생을 지키는 건 당연하다.

    ‘그림만 보면 꼭 학생운동 탄압하는 안기부 같네.’

    민주화를 열망하고 군부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들고 일어섰던 학생들을 독재 정권의 최일선에 서서 남산으로 끌고 갔던 안기부 말이다.

    그래서 김전의 말을 듣고 있으면 뭔가 나쁜 놈이 된 기분이다.

    다만.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왜 태학생은 죄가 있어도 벌을 주면 안 되는 것입니까? 고작 태학생이라서요? 장차 나라의 대들보가 될 자들이라서?”

    나는 콧방귀를 꼈다.

    사실 어느 대학이나 먹고 노는 대학생은 있기 마련이다.

    오히려 좋은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에 일종의 보상 심리로 놀고 먹는 놀자(?) 대학생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내 기준에서 씹선비 이예경과 그 똘마니들은 놀자 대학생들이다.

    고작 이런 일로 그런 걸 어떻게 판단하냐고?

    후··· 여러분들.

    나도 이제 조선 생활만 2년 차다.

    2년이란 게 많은 시간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심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많은 게 변한다.

    당장 군대를 봐라.

    어리바리했던 신병이 2년 지나면 어떻게 되나?

    움직이기도 싫어한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여긴 조정이다. 내가 비록 공신이고 형님의 아우라지만, 조정에서의 논리는 핏줄 보다 근거가 우선이다.

    진성대군으로 편전에 들었을 땐 잘 몰랐지만 사헌부 대사헌으로 편전에 드니 안 보이던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입궐하기 전에 나도 사전 조사라는 걸 좀 했다.

    논리와 근거란 게 별 건가?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들면 논리와 근거는 충분히 작용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라의 대들보가 절간을 차지하고 술이나 퍼마신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김전의 되물음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태학생들의 비리가 묵인되는 건, 어른들의 이런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장차 나라의 간성이 될 엘리트들이니 잠깐의 비리는 눈 감아주고, 조금 잘못해도 보듬어버리고, 잘했다고만 하는 풍조들 말이다.

    이해는 한다.

    그들 모두 차기 권력자들이기도 하거니와 전국 팔도에서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엘리트 집합소이기도 하고, 각 문중에서 배출한 인재들이기 때문에 어지간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따끔한 훈계로만 그치기 때문이었다.

    “제가 입궐하기 전에 성균관 태학생들의 비리를 좀 조사해봤습니다.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더군요. 방금 말씀드린 절간이 어딘 줄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회암사(會巖寺)랍디다.”

    회암사라는 말에 김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간다.

    선비들은 부처를 불씨라 낮잡아 부르고, 스님들은 국민 취급도 안 한다.

    생산적인 활동을 전혀 안 하고 동량질로 빌어먹는다고.

    하지만 모든 사대부 집안 사람들이 스님을 무시하고 부처를 불씨라면서 신성모독만 하는 건 아니었다.

    불교를 믿는 집안도 많았다.

    남자들은 탐탁지 않아해도 아녀자들은 줄곧 찾으며 시주를 하거나 가문의 영광을 부처님께 빌곤 했었다.

    네가 어떻게 아냐고?

    당장 여울 씨만 해도 이 절간에 출입을 하시거든.

    그런데.

    음. 그런데 말이다.

    이 회암사가 어떤 절인 줄 아나?

    쉽게 말하면 왕실 사찰이다.

    물론 왕실에서 직접적으로 운영하는 건 아니지만, 왕실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찰이란 말이다.

    아무리 부처를 불씨라 억압하는 벼슬아치들이라 해도 이 왕실 사찰의 스님들을 함부로 하진 않는다.

    정승집 노비가 몰락한 양반집 주인보다 더 끗발이 높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런데 이 태학생들이 회암사에 출입해서 술파티를 벌였다는 말을 들었으니 대사성 김전으로서는 아득해 질 수 밖에······.

    “하, 하오나 금시초문이옵니다.”

    “그런 거 보면 참 회암사 스님들이 대단합디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다고 쉬쉬하고 있는 거 보면 말이죠. 이뿐인 줄 압니까? 내 참 입 밖으로 꺼내기도 민망한데··· 단체로 기생들 끼고 모꼬지(소풍)를 갔답디다. 이게 전부 태학생들이라고 쉬쉬해서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거지, 아마 이 정돈 새발의 필 겁니다.”

    사실 사전 조사를 하면서 살짝 놀랐다.

    사전 조사라고 해도 편전에 입궐하기 까지의 그 텀은 반시진도 채 안 됐다.

    한마디로 1시간만에 조사한 게 이 정도란 뜻이다.

    제대로 파헤치면 아마 감당이 안 될걸?

    “이렇게 놀고 먹으면서 성균관의 품위를 깎는 태학생이 절반은 될 텐데 과한 처사요? 과한 처사가 아니죠. 지금까지 눈 감아 준 것만 해도 큰 혜택을 준 겁니다. 근데 이번에도 또 눈 감아주면요?”

    “···”

    “똥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고만 다닐 겁니다.”

    김전은 대꾸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지.

    제 학교 학생들의 비행 정황이 이렇게 명명백백한데 총장이라고 무슨 변호를 더 하겠나?

    “그리고 전하.”

    “으, 으응?”

    “전하도 말이십니다. 너무 너그러우십니다.”

    “내, 내가 말인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치켜 뜨는 형님에,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네. 알아보니까 성균관 태학생들 비행 저지르고 다니는 거 전하께서도 알고 계셨다던데 말입니다.”

    “아··· 그래, 알고는 있었지. 나도 듣는 귀라는 게 있으니 말이다.”

    “한데 그걸 왜 묵인하셨습니까?”

    “그게··· 묵인이 아니라 뭐랄까··· 조정대신들이 벌써부터 태학생들의 기를 꺾으면 안 되고, 또 장차 나라의 대들보가 될 인재들인데 임금의 도량을 베풂이 온당하다고 해서··· 나는 그래가지고······.”

    “충분히 베푸셨는데 또 베푸시면 아마 기세만 등등해 질 것입니다. 호의를 아주 권리로 알고 있어, 이것들이.”

    “대, 대사헌. 어, 어전입니다.”

    “아니, 어전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가 화딱지 안 나게 생겼······.”

    어전.

    아, 맞다.

    흥분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여기 편전이었지······.

    슬쩍 곁눈질로 분위기를 살펴보니 모두 경악을 금치 못 하는 눈치들이다.

    그들의 반응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내 직책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럴 땐 화제를 전환해야 한다.

    털썩!

    “전하. 성균관을 감사(監事)하여 이예경과 같이 무도한 자들은 출재시키시옵고 또한 더 이상은 임금으로서 아량을 베풀기 보다 위험을 떨치시어 그들을 벌주소서. 그리해야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잡힐 듯 하옵니다.”

    “그, 그래. 그래야 할 것 같도다.”

    ***

    회의가 끝이 났다.

    대신들은 공손히 인사를 올린 채 편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막 진성마저 눈인사를 건네고 편전을 빠져나갈 즈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진성이 원래 저리 단호했던가?’

    그가 알던 진성은 단호함과는 거리가 먼 위인이었다.

    심성이 여리고 너무 선해서 걱정이 되던 아이였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풍원위와 상선에게 듣기로는 한낱 노비들에게까지 존대를 한다고 들었다.

    물론 노비들에게 존대 하는 걸 탓하는 게 아니다.

    중궁 또한 진성처럼 온순하고 모든 사람과 두루 화평(和平)히 지내려는 면이 있어, 아랫사람 대하기를 어른 대하듯 했다.

    본인을 수발드는 궁녀들에게까지 존대를 할 정도니 말 다했다.

    하지만 중궁이 궁녀들에게 존대를 하는 것과 상전이 노비들에게 존대를 하는 건 의미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처음 이 일화를 들은 융이 오죽 노비 년놈들이 진성을 만만히 봤으면, 제 상전이 존대를 하는데도 가만 있나 싶어 벌을 내리려고 하자, 그걸 마다한 것도 진성이었다.

    “제가 편해서 하는 겁니다.”

    라면서.

    어떨 때보면 너무 온순해서 답답하기까지 할 정도였던 아이가 이처럼 단호히 태학생들을 내치라는 말을 하다니······.

    “상선. 혹 진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진성의 단호함에 놀란 건 상선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는 융의 말을 인지하지 못 하다가 뒤늦게 그 말을 받았다.

    “···신이 알기로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한데··· 허어.”

    의아했지만 사람이 물러터진 것 보단 이게 더 낫다.

    자고로 이런 난세를 살아가려면 사람이 단호한 면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 식솔들을 보전 할 수가 있으니까.

    “아차.”

    “하명하실 일이 계시옵니까?”

    “내 진성과 낮 것을 들 참이었는데 깜빡했구나. 멀리가진 않았을 테니 속히 데려오라.”

    “예.”

    ***

    물의(?)를 일으킨 당사자들은 모두 출재 처분을 당했다.

    고작이라면 고작 일 수 있는 시위 정도로 퇴학을 당할 줄은 몰랐는지 모두 얼이 나간 채로 짐싸는 모습이 고소하기 짝이 없었다.

    근데 뭐 어쩌겠나.

    후회는 아무리 늦어도 늦고 잘못을 했으면 합당한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인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태학생들 편의를 너무 많이 봐준 감이 없잖아 있었다.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학생이니 봐주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엘리트들이니까 봐주셈.

    학생땐 그럴 수 있으니까 봐주셈.

    아주 별에 별 명분으로 봐준 일들이 많았더랬다.

    그 결과?

    앞에서 말한 것처럼 퇴학 처분.

    게다가 알고 보니 형님도 태학생들에게 쌓인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더란다.

    이거 해주면 저거 해달라 떼쓰고 저거 해주면 다시 이거 해달라고 떼쓰고··· 임금이라 이건 하지 말래서 안 하면 이제 저건 하지 말라하고······.

    지금까지는 성현의 말씀을 공부하는 학생들이고 장차 나라의 대들보가 될 자들이라는 충언을 듣고 참고 넘겼지만, 내 말을 듣고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셨단다.

    그래서 내쫓아버린 거고.

    이 일이 있고 사학의 유생들도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웬 걸?

    아무 일도 없었다.

    이건 여담인데 아무 일도 없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균관 태학생들의 상소문이 있었다.

    이름이 뭐랬더라··· 아!

    서경덕이랬나?

    좌우지간 이예경과 서른 명의 아이들(?)을 출재 처분 시키자, 사학에선 동요하는 기색이 보였다.

    사실 사학 뿐만이 아니라 당국인 성균관에서도 동요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러한 때.

    성균관에 속한 이 서경덕이라는 태학생이 다른 이들과 함께 상소문을 흘렸다.

    물을 흐리는 자들이 학내에 있으면 공부 할 수가 없는데 드디어 합당한 벌을 받고 쫓겨 났으니 다행이라는 취지의 상소문이었다.

    어쨌든 성균관 태학생 출재 사건은 별 탈 없이 지나갔고, 계절도 바뀌었다.

    아재 개그 식으로 말한다면 하늘이 마비되는 가을이 온 것이다.

    가을이 되면서 가장 크게 바뀐 게 둘 있었다.

    하나는 예흥청이 설치된 것이다.

    당연히 관직도 신설됐다.

    장관의 관직명은 제예(提藝).

    이름 그대로 예술을 이끈다는 뜻이었다.

    예흥청 제예에는 예정대로 풍원위가 제수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드디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누 공장이 완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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