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30화>
***
“···한 것이니 대감의 출사는 논외로 칠 수 있다지만 이번 일은 어찌 좌시 할 수 있단 말이옵니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내가 시계가 없어서 모르겠다.
공대생이었다면 뚝딱 만들었을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공대에 진학이나 할 걸.
내가 공대생은 아니라 시계는 뚝딱 못 만들지만 체감상 10분 정도는 흐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여담으로 말이지?
나는 씹선비란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모르다시피 나는 역사를 잘 알지 못 했기 때문에 선비에 대한 어떤 환상 같은 게 있었다.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란 환상.
그들을 희화한 게 바로 씹선비란 표현 아닌가.
그래서 딱히 즐겨 쓰진 않았다만 이번에는 좀 쓰겠다, 이 씹선비란 말.
저 씹선비는 장장 10분이 넘도록 혼자 떠들어댔다.
이러쿵 저러쿵.
그래서 저래서.
개소리를 10분 동안 많이도 늘어놨지만 요지는 결국 풍원위는 관직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게 저 씹선비의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부마를 천거하면 파장이 일 걸 알면서도 왜 풍원위를 천거했냐는 비난까지 곁들였다.
돌려까기로 말이다.
그리고 그 10분이 넘는 개소리들에 대한 내 대답은 이거다.
“그래서?”
“예?”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끝인가?”
“에··· 아, 예. 끝나긴 했사옵니다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씹선비의 말을 10분이 넘도록 들었다.
괜히 중간에 끊으면 학생들을 탄압(?)한다 뭐다 말이 나올 것 같아서 꾹 참고 들은 것이다.
하지만 할 말 끝났다니 참을 필요 없다.
이제부터는 솔직히 정당방위다.
개소리를 10분 넘게 들어준 데 대한 정당방위.
“이예경이라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나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서 당장이라도 샌님들에게 달려들 것처럼 보이는 군사들을 흘겼다.
당장이라도 샌님들에게 달려들 것처럼 보이는 군사들에게, 정당방위 차원에서 당장 저놈부터 포박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면 지는 기분이다.
뭐랄까··· 음.
뭔가 반박 할 말이 없어서 무력으로 잠재우려는 모양새잖아?
그러니까 그건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일단 팩트로 조진다.
“그대는 우국충정에서 이런 언행을 일삼는 거라고 했다. 맞나?”
“그렇사옵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소인들이 어찌 대감을 찾아왔겠사옵니까.”
그래, 인정.
어지간한 용기가 없었다면 못 찾아왔을테지.
하지만.
“근데 말이지.”
“말씀하시옵소서.”
“나는 왜 역란이 발생했을 때 그 어디에서도 그대 이름을 듣지 못 했지?”
“예?”
“그렇잖아. 이렇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기특하신 태학생들이시니 분명 역란이 발생했을 때 뭔가 액션을······.”
흥분에서 말이 헛나왔다.
“아니, 뭔가 행동을 취했을 텐데··· 그리고 행동을 취했더라면 분명히 내가 그대 이름을 들었을 텐데, 난 듣지 못 했거든.”
“그것은 말이옵니다. 그러니까······.”
응, 반박 못 해.
“그리고, 지금 풍원위가 부마로서 출사를 하는 건가? 풍원위는 공신일세. 이 법전에 엄밀히 공신은 우대하라는 명목이 있는데 지금 그대들이 하고 있는 건? 그대들이 하는 말과 그대들이 말하는 전례와 근본이 공신을 우대하라는 법전보다 우위에 있는 명분인가? 아니, 그전에. 공신을 우대하긴 커녕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탄압하는 건 뭔데? 이 무슨 경우란 말일세.”
“대감. 지금 대감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무슨 의미인지 소인들도 모르지는 않사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뭐? 좌의정(임사홍)은 자네들 눈에 간신이고 그 자제 되시는 우리 풍원위도 그 피를 물려 받아서 간신이 분명한데 간신이 조정에 나오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설마하니 내가 이 씹썬비가 가진 저의를 노골적으로 밝힐 줄 몰랐는지, 씹선비 이예경은 당황한 눈치였다.
“그것이 아니오라······.”
“그대들 눈엔 좌의정이 간신 같지? 그래서 얼마 전에 내가 족친 난신들이 충신 같고? 아주 절세의 충신들 납셨어, 그래? 충신들이란 작자들이 역모가 있을 땐 입을 꾹 다물고 말이야? 그게 충신이면 세상에 충신 아닌 사람 없겠어.”
“···”
“그리고 이게 가장 기분이 나쁜데······.”
꿀꺽.
“내가 사적인 친분 때문에 풍원위를 추천했다고? 풍원위의 청탁을 내가 들어준 거라고?”
사실 이게 가장 빡치는 일이었다.
물론 나도 사람이라서 아주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풍원위라는 사람이 예흥청의 장관으로 적합했기 때문에 추천을 했던 것이다.
친분을 떠나서 말이다.
그런데 날 아주 그냥 호로의 개잡놈 뇌물수수나 하는 탐관오리로 묘사하는데 안 빡치고 배겨?
내가 이번에 그 누구야.
이름도 까먹었네.
아!
삭녕군수 김진조를 얼마나 혐오했는데.
“일 잘 하는 사람을 추천한 거지 개인적인 친분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자, 이만하면 어느 정도는 팩트로 조진 것 같다.
이제 할 말은 다 했으니 군사들에게 얼른 저것들 내쫓고 소금이나 팍팍 치라고 하려던 그때!
“주상 전하 납시오!”
때아닌 상선의 가갈에 나는 물론이거니와 장내의 모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 했다.
***
형님이 등장하고 씹선비들은 강제 해산(?)을 당했다.
직언이니 전례니 운운하더니 금군의 창칼은 무서웠나 보다.
“모두 돌아가 학업에 정진하라.”
라는 형님의 한마디에 씹선비들 위로만 먹구름이 드리운 건지 끽소리도 못 하고 터덜터덜 성균관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내 아까도 말했다시피 어차피 고개를 빼들 놈들은 미리 잘근잘근 밞아 놓는 게 낫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이미 머리를 쑥 내밀었던 놈들이니 지금은 괜찮아도 언젠간 뒷통수를 칠 게 분명했다.
풍원위가 예흥청 장관에 제수가 될 때건 아니면 실정을 했을 때건··· 이놈들은 언젠가 분명 또 한 번 대가리를 내밀 것이었다.
내가 어지간하면 그 정도는 봐주려고 했는데 오늘 꼬락서니를 보니 도저히 봐줄 수가 없겠더라.
이 자식들이 제놈들만 대가리에 먹물 주입 시킨 줄 안다니까?
풍원위는 뭐 일자무식인가?
부마라서 그렇지 두뇌는 제법 명석하다.
그건 내가 보장 할 수 있다.
근데 제놈들 말만 맞다고 외쳐대고, 능력있는 사람을 부마라서 안 된다, 간신 아들 놈이라 안 된다 외쳐대고 있으니 이런 놈들은 자고로 매가 약이지, 암.
말했다시피 그걸 최근에 깨달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가 약인 이 씹선비들을 어떻게 요리 할 거냐고?
음,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난 이 씹선비들과 다르게 아주 신사적이다.
물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폭력은 반대하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건 아니고, 맞을 짓 하면 맞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만 이런 놈들은 때려봤자 내 손만 아플 것 같았다.
그럼 뭐가 남냐.
혀다.
세치 혀 잘못놀리면 골로 간다는 말도 있다지만 어떨 땐 칼보다 무서운 게 이 세치 혀다.
나는 요즘 대사헌이 되면서 이 말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세치 혀를 놀려대면서 풍원위를 모욕주고 날 청탁이나 받는, 그래서 아주 못 돼 쳐먹은 탐관오리로 묘사를 해놨으니 나도 이 혀로 모욕을 줄 심산이다.
한 대 쳐 맞았는데도 계속 가만히만 있으면 나랑 풍원위를 아주 가마니로 알 테니까.
그리고 한 번 가마니로 찍히면 두 번 가마니 취급 받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이전에는 몰라서 그랬다고 치지만 이제 조선 생활 2년찬데 적어도 가마니 취급은 받지 말아야지?
***
편전.
원래 장안에 화제가 있거나 긴한 사안들이 있으면 재상들에게는 패초가 전해진다.
이번 일도 같다.
사헌부에 진을 친 성균관 학생들이 강제 해산되자마자 재상들에게는 속히 입궐하라는 패초가 전해졌다.
나한테는 반가운 소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씹선비들을 혀로 조질 수 있는 대표적인 공식 석상이 바로 편전이니까.
“대사성.”
형님의 부름에 대사성 김전(金詮)은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암. 황망해야지.
“예, 전하.”
“지금 경이 대사성으로서 성균관의 학생들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는데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할 말이 있는가?”
“···입이 열 개 인들 무슨 말을 아뢰겠나이까?”
“그래야 할 것이다. 경들도 모두 들어서 알겠지만 성균관에서 권당(시위)을 행했다. 전례대로 잘못된 점이 있어 공관(성균관을 비우고 시위하는 일)을 한 거라면 내 어찌 경들을 불렀겠냐마는 이제는 내 비답을 내리기도 전에 사헌부에 진을 치고 일국의 대군이자 대신을 능멸하였으니 내 참으로 민망할 지경이다. 하물며 이번에 태학생들을 선동한 소두(시위 대표자)가 이예경이니 나라의 장래가 암담하기 짝이 없다.”
형님이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예경의 꼰대질+씹선비질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다짜고짜 사헌부에 진부터 쳤겠지만.
“이예경이라면 일전에······.”
역시나 낯익은 이름인지 영의정 허침이 중얼거렸다.
“맞다. 내 경회루에서 연회를 자주 베푸니 태학생들이 학업에 정진 할 수 없다고 공관을 주도한 자다.”
모르다시피(?) 경회루 바로 옆이 성균관이다.
사실 담장으로 막아져있어서 엄밀히 따지면 바로 옆이라고도 할 순 없다.
“내 그래서 경회루의 담장을 높게 쌓아올려 학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는데도 계속 연명을 한 자지.”
“으음.”
“그런데 이제는 이런 일까지 일어났으니 과연 성균관이 나라의 간성들이 모인 곳이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패초를 보낸 것은 어찌하면 좋을까 싶어 일을 논하고자 보낸 것이니 모두들 허심탄회하게 말들 해보······.”
드디어다.
드디어 형님이 공평하게 발언권을 주시려는 모양이다.
나는 형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형님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사헌은 이번 일을 당하고 마음에 서운함이 컸을 텐데··· 그래, 말해보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나라에서 성균관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기르는 것은 전하께서 말씀하신 간성(인재)을 키우기 위함이옵니다.”
“실로 이치에 맞는 말이다.”
“그래서 성균관의 유생들이 불만이 있으면 나라에서도 최대한 편의를 봐주려 노력한 것이옵고, 또한 나라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그들은 적극적으로 정사에 참여했사옵니다.”
“그랬지.”
“때론 직언하고 때론 시정을 요구하고 때론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던 게 바로 그들이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나라를 위한 우국에서 나온 것들이었사옵니다. 다만.”
“다만?”
“이번 시위에 참가한 유생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옵니다. 이들은 우국을 위해 시위에 동참하고 사헌부에 진을 쳤다고 진술했지만 이게 어찌 나라를 위한 일이란 말이옵니까? 명색이 나라의 간성이 되고자 하는 자들인데 아무리 저희들 마음에 들지 않기로서니 국법의 지엄함도 모르고 법을 어길 수 있겠사옵니까?”
“음.”
“소신은 사람에겐 각기 다른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옛날에 세종대왕께서 황희를 끝끝내 비호하고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은 것이 무슨 까닭이겠사옵니까? 그를 대체할 자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옵니다. 임숭재의 일도 같사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예흥청의 장관에 임숭재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천거한 것이옵니다. 그가 예악에 능하고 또한 이를 증진 시킬 만한 적임자라 생각했기 때문이옵니다. 한데 명색이 나라의 간성이란 작자들이 한다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 아니겠사옵니까? 부마라서 안 된다. 임사홍의 자제라 안 된다.”
내가 설마 실명을 거론할 준 몰랐는지 좌의정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터뜨렸다.
“···”
“직언이란 형평의 원칙을 지켜야 직언이옵니다. 만약 저들의 주장대로 임숭재가 부마라서 출사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소신 또한 종친으로서 출사 할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한데 저들은 어땠사옵니까? 소신의 출사에는 아무런 의견도 표명하지 않았사옵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이겠사옵니까? 전하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고, 신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옵니다. 저희가 두려워 하는 권력자의 출사는 눈 감으면서, 저희가 두렵지 않은 자의 출사는 눈 감지 않는다면 이게 어찌 정의고 직언이겠사옵니까?”
“···”
“직언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젊은 유생으로서 기개를 높이진 못 할망정 권력의 눈치만 봤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니 이들이 장차 나라의 간성이 된다면, 그래서 조정에 한자리씩 차지한다면 그 조정이 어찌 돌아갈지는 안 봐도 훤하옵니다. 그런 자들은 있느니만 못 하니······.”
나는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번에 내뱉을 말은 파장이 좀 클 테니까.
그리고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모두 출재(퇴학)시키시옵고, 종친과 의빈을 모욕한 죄를 물어 유형에 처하도록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