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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29화 (12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29화>

    ***

    “이것들이 기어코 사달을······.”

    성균관 태학생들이 연명해서 소(疏)를 올렸다.

    별 생각없이 연명소를 읽던 융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반사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악력이 주어지자 연명소는 형편없이 구겨졌다. 형편없이 구겨진 연명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융이 툭 내던지듯 말했다.

    “대사성은 지금 어디에 있다더냐?”

    “태학(성균관)에 있는 줄로 아옵니다.”

    “당장 불러들이라.”

    “예.”

    상선이 허둥거리며 침소를 빠져나가자 융은 서안(책상)을 거세게 내려쳤다.

    순간적으로 손 끝에 얼얼한 감각은 느껴졌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

    이것들이 아직도 임 가(家) 부자를 간신으로 취급한다.

    진짜 간신들은 얼마 전, 진성의 도움을 받아 모두 내쳤는데도 말이다.

    대군의 출사로 전례를 깼는데 또 한 번 전례를 깨는 것은 후세에 본이 될 수 없다.

    이게 그들의 주장이다.

    물론 이건 문제 될 게 없다.

    오히려 혹자들이 본다면 충정 어린 상소라 할지도 몰랐다.

    다만.

    임숭재에 대한 세간의 평이 가혹하고 후하지 못 한데 그런 자를 어찌 전례를 깨면서 까지 예흥청의 장관에 앉힐 수 있겠냐는 게 그들이 정말로 주장하는 바였다.

    하지만 진성의 천거는 타당했다.

    적재적소에 관원을 배치해서 정사를 도모하는 것.

    그게 바로 진성의 주장이었고 진성의 주장대로 임숭재는 비록 부마의 신분이더라도 예악에 능하다.

    차라리 사헌부의 천거가 공정하지 못 하다고 한다면 화라도 나지 않으려만 전례 운운하면서, 거기에 세간의 평까지 언급하면서 연명소를 올려대니 분노하지 않고 버틸 재간이 있을까?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아직도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가 인정받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역란이 일었을 때, 잠시 폐군 신분이 됐었던 자신에 대한 충성을 다한 것은 그들이 간신이라 말하는 두 부자인데도 말이다.

    “후.”

    분노에 치를 떤지 얼마나 지났을까.

    “전하.”

    상선이었다.

    “대사성과 함께 입궐한 것인가? 어서 들라.”

    “그게 아니옵고······.”

    “뭔가?”

    “송구하오나 지금 사헌부에··· 그 입에 담기 망측하여······.”

    “무슨 일인데 그리 머뭇거린단 말이냐. 속히 말해보라.”

    “···태학생들이 사헌부로 몰려갔다 하옵니다.”

    “뭐라?”

    이성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아니, 뭔가 머릿속에서 투툭- 소리와 함께 이성의 끈이 끊어진 느낌이었다.

    “이것들이 이제는 만만한 진성에게······.”

    그게 분명했다.

    서슬 퍼런 자신에 감히 광화문에서 읍소할 자신(自信)이 없으니 임숭재를 천거한 진성에게 이 일을 따지러 가는 게 분명했다.

    그 여리디 여린 아이에게 말이다.

    태학생들의 갑작스런 방문에 진성은 어버버거리다가 모욕만 당할 게 분명했다.

    착하고 이타적이며 배려심이 깊은 아이지만, 사실 경전에는 어둡지 않던가.

    한데 샌님들이라 해도 태학생은 태학생이다.

    한평생 경전을 공부한 그 오만방자한 놈들이 어찌 진성을 욕 보일지 눈에 훤했다.

    “상선은 속히 내금위장을 불러서 금군 예순을 선별케 하라. 내 직접 이들을 이끌고 사헌부로 갈 것이다.”

    “그리 전하겠나이다.”

    서둘러 침소를 빠져나가는 상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융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사람대 사람의 관계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건들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리고 진성이 그중 하나다.

    ***

    사헌부.

    오늘은 지각을 안 했다.

    아침 일찍 씻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 해가 뜨기도 전에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일을 초친 건 의외의 소식 때문이었다.

    글쎄··· 후.

    아니, 글쎄 이 빌어먹을 태학생 놈들이 내 천거에 불만을 품고 연명소를 올렸다지 뭔가.

    풍원위는 그릇이 좁고 사람이 간사해서 예흥청의 장관에 어울리지 않는다나 뭐라나.

    게다가 부마도위라서 전례를 깰 수 없다나 뭐라나?

    소식은 이른 아침 사헌부의 천거를 받고 예흥청 장관에 내정 된 풍원위에게도 전해졌는지, 풍원위는 아침 댓바람부터 날 찾아왔다.

    연신 자책하는 풍원위에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음. 너무 심려치 마십쇼. 원래 태학생들 기질이 불 같잖습니까.”

    “소인 때문에 대감까지 싸잡아 비난을 당하게 생겼으니 실로 대감 뵐 면목이 없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대감의 말씀을 반려하는 게 맞았는데 괜히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린답시고 대감을 번거롭게 만들게 됐습니다.”

    “프로불편러들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 없습니다.”

    “예?”

    “심성이 배배 꼬인 사람들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단 뜻입니다.”

    “하지만··· 후.”

    풍원위가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나도 화가 나는데 당사자는 오죽 답답하고 화가 날까 싶었다.

    사실 인생은 XX 마이웨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타인의 비난을 받으면 마음에 상처를 입기 마련인데, 이건 비난 정도가 아니다.

    저 새낀 그럴 그릇도 안 되니 아예 시키지도 마셈!

    이라는 강력한 의사 표현의 일환이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까지 깔 필요가 있나.’

    연거푸 한숨만 내쉬는 풍원위만 보니 더 마음이 쓰라리다.

    차라리 예흥청 장관에 제수가 되고, 일을 못 해서 이런 소요가 일어난 거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제수 되기 전부터 이런 욕을 듣고 있으니······.

    아니 뭐 따지고 보면 일종의 장관 내정자의 청문회라고 생각하면 쉬우려나?

    여러모로 욕 엄청 먹긴 하던데 말이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던 것 같사옵니다. 소인이 전하께 잘 말씀 아뢰보겠습니다.”

    “뭘 말씀드려요?”

    “예흥청 장관 일 말입니다.”

    “안 한다고 하시려는 참입니까?”

    “아무래도 그 편이 전하와 대감께 나을 듯 합니다.”

    이번엔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해보지도 않고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합니까? 태학생들이 뭐라고 하건 말건. 풍원위가 예흥청 일 잘해내면 되잖아요. 그럼 태학생들만 뻘줌해질텐데, 뭐하러 시작도 하기 전에 관둡니까? 막말로 풍원위가 뇌물을 받아 먹은 것도 아니고. 안 그래요?”

    “···”

    “일단 집에 돌아가계세요. 괜히 연명소로 마음 쓰지 말구요. 제가 일 마치는 대로 입궐해보겠습니다.”

    “여러모로 대감께서 마음 써주시니 기운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늘 해맑게 웃고 다니던 풍원위가 어깨가 축 쳐진 채로 걸어 나가는 모습에 씁쓸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참, 못 됐다.

    나는 집무실 바깥까지 풍원위를 배웅했다.

    역시나 어깨가 축 쳐진 채로 사헌부를 빠져나가는 풍원위를 보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일단 전하를 만나 뵙고 이번 일에 대해 상의를 하는 게······.

    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돌리던 그때였다.

    웅성웅성.

    밖이 소란스럽다.

    소란스럽다는 표현 앞에 ‘무척’이라는 부사가 붙을 만큼의 소란스러움이었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사헌부를 막 나서자.

    “어찌 부마께서 청탁하여 천거를 받을 수 있단 말이옵니까?”

    “지금 아무리 국기가 문란해졌기로서니 부마가 출사 함은 전례를 깨는 파격적인 일인데 예흥청 장관의 물망에 올랐음에 읍소하며 사양하긴 커녕 사태를 좌시만 하신단 말이옵니까?”

    “소인을 포함한 태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지금 사헌부에 몰려와 진을 친 까닭은 진실로 의빈(부마)의 장래가 걱정되기 때문인데, 지금 사헌부에서 나오시는 모습이 마치 관청에서 퇴궐하는 고관대작의 모습과 같으니 과연 예흥청 장관에 천거 될만 하신 풍모신 듯 하옵니다.”

    기관총처럼 귀에 딱딱 박히는 소리들.

    “어우.”

    아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본인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 풍원위가 보였다.

    나 지금 당황했소. 라는 표정이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써있다.

    사헌부에 속한 사령과 군사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수적으로 열세인지라 그들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대감!”

    어안이 벙벙한 채 일련의 소요사태를 지켜만 보고 있던 그때.

    장령 안처직이 허둥지둥 뛰어왔다.

    그는 황급히 사헌부 밖의 동태를 살피다가 날 안으로 이끌었다.

    “도대체 뭡니까, 저게?”

    “태학생들인 듯 하옵니다.”

    “태학생? 성균관 샌님들 말입니까?”

    “예.”

    “근데 왜 성균관 샌님들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건 소인도 잘 모르겠사오나 지금은 나가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장령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와중에도 소요는 점점 커져만 갔다.

    “입이 있으시다면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성균관 샌님들이 단 한 사람.

    풍원위에게 비난을 쏟아내고 있었다. 반면 풍원위는 이도저도 못한 채 어버버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것들 지금 단체로 실성이라도 했답니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와서··· 허.”

    내가 저번에 고관대작들을 난신이라 지목하고 모조리 쓸어버렸을 때 깨달은 게 있다.

    어차피 쓸어버릴 것들은 진작에 쓸어버리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점이었다.

    지금 사헌부 밖에 있는 것들도 그렇다.

    단체로 실성을 해도 유분수지, 이건 실성 정도가 아니다.

    집단최면에 걸린 것 마냥 성토만 쏟아내고 있다.

    여기가 사헌부란 걸 알면 저딴 짓은 절대 못 할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풍원위 대감을 천거한 일 때문 같사온데······.”

    “그거라면 저놈들이 연명소를 올리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비답도 안 내려주셨는데 이게 무슨 돼먹지 못 한··· 허, 참.”

    “···일단 소인이 잠재워 볼 터이니 안에 계시옵소서.”

    안처직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뭔가 저놈들을 피하는 모양새잖아?

    뭐, 그래.

    내가 꿀릴 게 있고, 잘못한 게 있으면 저놈들을 피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나?

    내가 뭘 잘못했나?

    숭재 씨를 천거한 게 잘못이라면··· 그래서 저놈들이 저렇게 진을 치고 있는 거라면 더더욱 피할 수가 없지.

    날 말리는 안처직을 뿌리친 나는 성큼성큼 사헌부 밖으로 향했다.

    내가 나오자 풍원위는 내심 안도하는 기색이었고, 유생들은 이번 사태의 다른 원인 제공자(?)인 내가 나타나자 적의를 한껏 드러냈다.

    그래도 내가 종친인 건 잊지 않았는지, 앞전의 풍원위 때처럼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나타나자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대감. 소인들이 아뢰는 말을 들어주시옵소서.”

    어딘가 걍팍하게 생긴 유생이다.

    나이는 30대쯤?

    “누가 입이라도 틀어 막았나? 내가 말 못 하게 입 막은 것도 아닌데 허락은 무슨.”

    개소리 지껄여보라 말하자, 30대의 유생이 개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한다.

    “소인들이 듣건대, 며칠 전 전하께서 사헌부에 하교를 하심에 예흥청의 장관으로 의빈대감을 천거하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자고로 사람은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와서는 진을 치고 막말을 내뱉는데 가는 말이 고울 리 없었다.

    “그래서 뭐? 뭐 어쩌라고?”

    이런 대답은 생각지도 못 했는지 예의 유생은 잠시 당혹한 낯빛을 띠다가 이내 신색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하라는 말씀은 아니오나 다만 소인들은 진심으로 사직(조정)이 걱정되는 마음에 이처럼 무례를 무릅쓰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니 이제 아뢰려는 말씀들이 바로 그것이옵니다.”

    나는 계속해보라는 듯 조용히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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