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28화>
***
창녕아!”
이제는 도승지가 아니고 홍문관 대제학이 된 김감의 저택을 찾았다.
내가 왔다는 소리에 버선발로 마중을 나온 창녕이가 그 작은 다리를 잽싸게 놀려 와락 품에 안긴다.
“숙부님!”
“잘 있었지?”
안부를 묻자 창녕이 큰 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여운 녀석.
“네!”
“어디보자······.”
와락 안긴 창녕을 떼어놓고 녀석을 새삼 훑었다.
내가 창녕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한 달 전이다.
요새는 일이 바빠서 잘 못 놀아주고 있는데, 그새 키가 더 자란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크면 이 숙부하고도 맞먹겠는데?”
“헤헤헤. 숙부님, 오늘은 뭐하고 놀아요?”
“오늘? 글쎄. 오늘은 놀려고 온 게 아닌데.”
“새로운 놀이로 놀아요. 이제 경찰과 도둑은 질렸어요.”
내가 한
달 전 쯤 와서 놀아줬을 때 한 게임이 경찰과 도둑이다.
근데 경찰과 도둑이 질렸다고 말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경찰과 도둑을 하면서 놀았던 모양이다.
그게 웬만하면 질릴 수가 없는 게임인데 말이다.
뭐, 어쨌든.
놀아주고 싶어도 오늘은 놀러온 게 아니다.
그럼 뭐하러 온 거냐고?
“아이고, 대사헌 대감.”
지금 막 사랑방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건 풍원위 임숭재.
그래, 맞다.
풍원위 임숭재.
내가 예흥청에 추천할 사람으로 떠오른 게 바로 숭재 씨였다.
근데 왜 김감의 집으로 온거냐면··· 간단해.
임숭재가 김감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으차. 잠깐만.”
나는 품에 안겨서 도무지 떨어지질 않으려 하는 창녕이를 떼어놓고 풍원위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풍원위. 못 본 새 신수가 훤해졌습니다.”
“하하하. 대감만 하겠습니까? 정말 신수가 훤하십니다.”
“숙부님, 숙부님.”
풍원위와 안부 인사를 하고 있는 사이 창녕이 끼어들었다.
“사헌부의 일보다 창녕대군과 놀아주는 일이 더 피곤하시겠습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도 내가 좋아서 놀아주는 거니까, 뭐······.
나는 몸을 낮췄다.
내가 몸을 낮추자 창녕이 익숙한 듯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목마다. 창녕을 목마 태운 채로 어깨를 들썩거리자 녀석은 헤실헤실 웃기 바쁘다.
그리고 이틈에,
“한데 풍원위는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자택에 안 있고?”
“남촌에 있는 저희집 보다는 북촌에 있는 대제학의 집이 대감의 집과 더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여기 머물고 있으면 한 번 쯤은 들르실 줄 알았는데 매정하게도 한 번 들르질 않으시더군요.”
“하하. 모르시다시피 제가 공사가 다망했던지라······.”
“이럴 줄 알았으면 전하께 간청드려 대감의 출사를 막을 걸 그랬습니다. 같이 놀 사람이 없어요, 놀 사람이. 보다시피 이리 시간만 축내고 있으니 이게 사람이 사는 것인지··· 그렇습니다.”
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요. 풍원위한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창녕을 흘긴 숭재가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역시나 떨어지지 않으려는지 아귀에 힘을 팍 주는 창녕과 함께 나는 사랑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풍원위는 흔쾌히 상선을 내어줬다.
“우리 사이가 뭐, 초면도 아니고··· 막말로 서로 껄끄럽거나 어려운 사이도 아니니 내 허심탄회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친한 사이에 말을 돌리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편히 하십시오.”
“들으셨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 전하께서 예흥청이란 관청을 새로 만드시려 하십니다.”
“예흥청이요? 아··· 그러고 보니 얼핏 들은 것도 같습니다.”
들어봤으면 대화가 좀더 수월하겠다.
나는 전하께서 성상소를 통해 사헌부에 인사 천거를 분부했고,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서 풍원위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다소 놀란 기색이던 풍원위.
“하오나 대감께서 아시다시피 소인은 부마도위이옵니다.”
부마는 출사를 못 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대군인 나도 출사를 할 순 없다.
“압니다.”
“그런데 어찌··· 보통 파장이 아닐 텐데요.”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죠?”
“예.”
“저는 천생(天生)이란 건 믿지 않습니다.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젊은 거지는 무시하지 마라.”
“···?”
사람 인생이란 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젊은 거지는 더더욱 무시하지 말란 뜻인데 표정을 보니 처음 듣는 말인가 보다.
“음.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딱히 전생의 업보 때문에 현생에서 고귀한 삶을 살거나 천한 삶을 산다는 걸 믿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불가의 윤회(환생)를 이름이군요.”
“네. 하지만 재능은 믿습니다. 사람은 각기 다른 재능이 있다고 보거든요. 물론 본인이 타고 난 재능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극소수겠지만, 어쨌건 이 재능이란 건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천생은 있다고 본다는 거죠.”
“흠.”
“제가 딱 예흥청 장관으로 추천할 만한 사람을 떠올렸을 때 생각난 게 바로 풍원위였습니다. 풍원위가 또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 더하지 않습니까?”
“아··· 그렇긴 한데.”
여전히 난감한 표정을 짓는 풍원위다.
왜 그런지 모르지 않는다.
내가 지금 풍원위랑 알고 지낸 세월이 고작 2년 밖에(?) 안 됐다곤 하지만, 출사 하기 전까진 맨날 붙어다녔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공명심이란 게 있다.
출사가 사회적으로 차단된 부마라고 다를까?
오히려 부마라서 공명심이 더 클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숭재 씨도 출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여론이 걱정되는 거죠?”
끄덕.
“말씀드렸다시피 소인이 부마도위다 보니··· 게다가 시골의 선비들은 소인을 간신이라 부르옵니다. 일부는 아버님과 함께 싸잡아 부자간신이라 부르기도 한다지요. 대감께 해가 되는 일이니 다른 이를 천거하시는 게 합당한 듯 하옵니다.”
풍원위의 말에 괜한 오기가 생긴다.
무슨 오기냐고?
임숭재와 임사홍을 부자간신이라 부르는 사람들에 대한 오기.
또 나한테 해가 되는 일이라 하고 싶은 일도 반려하려는 임숭재에 대한 측은지심도 든다.
“그건 걱정마시구요. 아무튼 한다는 걸로 알면 되지요?”
“아니, 그건 아니옵고 다만······.”
“풍원위도 옛날에 술먹으면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부마가 아니었다면 저 선비들처럼 출사해서 부모께 효하고 어사화 머리에 꽃고 금의환향해서 가문을 빛내고 싶은 적이 있었다구요. 하면 됩니다.”
“음. 하면 안 하겠다고는 말씀 드리지 않겠사옵니다.”
“오케이··· 가 아니라 좋습니다.”
풍원위의 입에서 하겠다는 대답도 들었으니 망설일 게 없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궐로 달려가서 형님한테 숭재 씨를 천거하겠다는 말을······.
“숙부님. 숙부님. 놀아요.”
···하려고 했는데 일단 창녕이랑 좀 놀아주고 가야겠다.
***
성균관에 또 비보가 날아들었다.
올해 들어 비보가 십수차례 날아들었지만 이만한 비보는 또 없었다.
이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태학생 이예경(李禮卿)은 ‘천거’라는 부분에선 도저히 참지 못 하겠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분노를 한껏 드러냈다.
“어찌 간신적자가 출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세상이 변했기로서니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그의 선동에 모든 태학생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시국이 어수선하다 보니 말 한 마디 내뱉기가 어려운 것이리라.
하지만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자네의 말이 옳네. 다른 건 모두 생각의 차이라 할 수 있지만 이건 도무지··· 진성대군이 임금의 총애를 받고 출사까지 하더니 이제는 간신적자를 지친(至親)이라고 일컬으면서 조정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지 않겠나. 있을 수 없는 일일세.”
한 번 봇물 터지기가 어렵지 두 번 터지는 건 쉽다.
예의 태학생의 성토와 함께 임사홍과 임숭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새어나왔다.
“맞네. 여태 전하께서 하신 일들은 비록 파격적이거나 과격하긴 했어도 수긍하기 어려운 것들은 아니었네. 노신들을 간적으로 몰아 내치긴 했지만 모두를 죽임하진 않았으니 우리가 어찌 그 일을 성토하겠는가? 하지만 이번 일은 다르네. 조정에 간신이 어찌 둘 씩이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허재(虛才)의 말처럼 지금은 둘이겠지만 둘이 셋이 되고 셋이 넷이 되고 머잖아 넷은 마흔이 될 걸세. 부자간신처럼 전횡을 일삼을 테고 조정을 잡아 먹으려 들 테지. 그리되면 종묘(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말 걸세.”
임사홍과 임숭재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거세질 즈음.
“한데 어찌 진성대군은 임숭재를 천거했다고 합니까?”
모두가 Yes를 외치던 중에 No는 아닐지라도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 목소리로 부자간신(?)을 성토하던 이들이 고개를 획! 하고 돌렸다.
의문을 표한 사람은 생각보단 젋어 보였다.
많이 쳐줘도 약관(스물)정도였고 사실 어리게 본다면 이제 막 학문에 뜻을 둔 지학(열다섯)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누구였더라?”
태학생들을 선동(?)했던 이예경의 물음에 허재라는 호로 불렸던 이가 말했다.
“이번에 하재생(일종의 특례입학)으로 입학한 아이일세.”
“그 동안 왜 못 봤지?”
의문을 표하는 이예경에 역시 허재라 불린 유생이 속삭이듯 답했다.
“원체 싸가지가 없는 놈일세.”
“싸가지가?”
“보면 알 걸세.”
“으음. 이름이 무엇인가?”
“통성명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크흠. 그래. 진성대군이 어찌 임숭재를 천거한 것이냐 물었나?”
“예.”
“간단한 이치가 아닌가. 진성대군은 본시 임숭재와 어울려 지낸 세월이 오래다. 임숭재를 가리켜 지친이라고 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허물이 없는 사이면 지친이라고 까지 하겠는가? 그런데 이제 사헌부의 장관으로 있으면서 예흥청의 장관을 천거할 때가 되니 비로소 임숭재를 천거한 것이 아니겠나?”
“그런 건 삼척동자도 생각할 것 같은데요.”
“뭐라?”
“그런 간단한 이치는 진성대군도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임숭재를 천거했냐는 겁니다, 내 말은.”
“아니, 그러니까 지친이기 때문에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비난이 일 걸 아는데도 천거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예요.”
이예경은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런 놈은 처음이다.
“됐습니다. 그럼 이만.”
고개만 까닥거리고 멀어져가는 하재생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이예경이 이내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도대체 저놈 이름이 무언가?”
“그··· 통상 싸가지로 불리는데 이름은 서경덕이라 하는 아이일세.”
“서경덕? 그 놈, 이름 한 번 고약하다.”
“이제 열여섯인데 뭘 알겠나? 하던 얘기나 마저하세.”
“아, 그래. 그러니까 지금······.”
“지금?”
“하.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기억하나?”
“조정에 간신이 둘 이상 되면 종묘가 쑥대밭이 될 날도 머지 않았음을 성토하고 있었네.”
“아. 그래, 그랬지. 좌우지간 비록 시국이 어수선하고 임금이 무섭더라도 바른 말을 아끼고 아첨하는 말만 한다면 장차 출사 해서 어찌 이름을 떨칠 수 있겠나? 떨친다 한들 임사홍과 임숭재처럼 간신으로 떨치지 않겠는가?”
유생들 모두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재 자네의 말처럼 전하께선 비록 지금까진 과한 감은 있었어도 수긍하는 정치를 펼치셨었네. 노신들을 내친 일? 자네 말처럼 수긍이 어렵지 않아. 시국이 오죽 어수선했는가.”
“···”
“광대를 대비마마의 탄신 연회에 부른 일? 선대(광대)가 연회에 나서는 건 예삿일도 아닌데 하물며 저자의 광대가 서는 것이 무에 대수겠나. 선상기(잔치에 차출되는 지방 기생)라 보면 되는 게지. 종친을 출사케 한 일? 이조차도 전하의 말씀처럼 대군의 공적이 아주 없지도 않네. 반대할 명분이 없단 뜻이지. 하지만······.”
“···”
“하지만 임숭재는 다르네. 임희재(임사홍의 장남) 같은 분 때문에라도 사홍을 욕보이고 싶진 않네만 견부견자라 했네. 임금을 귀신 같이 홀려 정치를 망치는 게 바로 숭재였음인데 어찌 출사케 하겠나? 지금 이걸 반대치 않고 좌시한다면 훗날은 조정에 간신만 득시글 할 걸세. 그리되면 이 나라도 파국이겠지.”
“어찌하면 좋겠는가?”
“장안에 선비란 자들이 없어진 지 오래일세. 선비란 무엇인가. 임금의 실정을 바로잡고 백성을 교화하는 자들이 곧 선비라 불리는 걸세. 지금 장안에 그런 자들은 없으니 우리라도 나서야지.”
“혹 전하께서 역정을 내신다면?”
“전하의 진노가 두려워 일을 삼간다면 장차 출사한 뒤에는 어찌 정사를 도모하겠나.”
끄덕끄덕.
“연판에 수결하여 연명소부터 올림세.”
“좋은 생각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