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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27화 (12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27화>

    ***

    “아직도?”

    “···예.”

    “너 내가 알려준 비법들은 다 얻다가 팔아 먹었는데?”

    “비법이랄 것도 없어가지고······.”

    궁시렁거려서 도무지 덕산이 녀석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뭐라고?”

    “아니··· 쇤네가 그 비법을 써먹질 못 했습니다요.”

    “하··· 덕산아. 덕산아! 바보 덕산아!”

    “예?”

    “아무래도 내가 널 너무 방치했나 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덕산이 녀석 아직도 전금이랑 손 한 번 못 잡아 봤단다.

    전직(?) 카사노바인 이 몸께서 친히 비법을 전수해줬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건 이제 덕산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직 카사노바의 비법을 갖고도 전금이를 꼬시지 못 했으니 내 명예가 걸린 문제다.

    자.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진단이나 해보자. 어떤데 지금?”

    “진단 내릴 것도 없는뎁쇼.”

    “옛날에 말한 거랑 똑같다고?”

    “예.”

    정말 안 되겠다.

    내가 이 수는 비열해보여서 안 쓰려고 했는데··· 아니, 비열하다기 보다는 너무 노골적이라 안 쓰려고 했거든?

    근데 진짜 어쩔 수 없이 쓴다.

    “갑련 아줌마!”

    나는 갑련 아줌마를 찾았다.

    노비라고 해서 위계질서가 없는 건 아니다.

    사내종들은 질동 할아버지가 관리하지만 알다시피 계집종들은 갑련 아줌마가 관리한다.

    후라이드 치킨 만드는 법을 예전에 알려준 뒤로 지금도 이따금 치킨이 먹고 싶을 땐 치킨을 상에 올리는데, 치킨을 만들어주시는 게 바로 갑련 아줌마기도 하다.

    “예? 찾아 계십니까요.”

    부엌에서 아궁이불을 때고 있었는지 손에 검댕이가 가득 묻은 갑련 아줌마가 튀어나오신다.

    “전금이 어디 갔는지 아시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노비 신분이더라도 나이좀 먹었으면 존댓말을 썼지만 내가 편해서 존댓말을 쓰더라도 듣는 상대 입장에선 불편 할 수 있다는 걸 올초에 깨달았다.

    사석에선 상관이 없지만 공공장소에서 내가 존댓말을 쓰면 내가 욕 먹는 게 아니라 듣는 상대방, 그러니까 노비들이 욕을 먹는다.

    주인이 만만해도 그렇지 몸종들 주제에 존댓말을 듣고 다니냐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지간하면 하오체를 쓴다.

    뭐,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전금이요? 글쎄요. 아마 빨래하러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요.”

    “빨래?”

    “예. 이 시간엔 늘 빨래하러 가니까요.”

    “고맙소.”

    갑련 아줌마에게 감사 인사를 한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덕산이를 이끌고 빨래터로 걸음을 옮겼다.

    “한데 대감마님. 등청은 어찌 하시려고······.”

    등청.

    그러고 보니 전직 카사노바의 자존심 때문에 등청을 잊고 있었네.

    근데 지금 등청이 대순가?

    “덕산아.”

    “예?”

    “지금 등청이 대수냐?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젠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네 잘못 하나도 없다. 다 내 잘 못이다. 그쯤 말하면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할 줄 알았는데··· 후.”

    “···?”

    내 말 뜻을 이해했으면 이미 전금이랑 덕산이는 한 이불 덮고 자는 사이가 됐을 것이다.

    지금처럼 눈에 의문문만 띄운 채 이해를 못 하고 있었으니···하.

    그런 의미에서 노래 한 소절이 떠오른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너의 모습. 시간은 조금씩 덕산이 갈라놓는데··· 어디서부턴지 무엇 때문인지, 작은 전금 손을 잡기도 덕산 두려워······.”

    살짝 개사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빨래터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빨래 하는 아줌마들 사이로 예쁘장한 처자 하나가 보인다.

    그래, 전금이다.

    “전금아!”

    내가 전금일 부르자, 낑낑거리며 빨랫질을 하던 전금이 획-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는 날 보자마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들짝 놀란 전금이가 금세 손을 가지런히 포개고 인사를 올리자 나는 휘적휘적 전금이에게 다가갔다.

    “전금아.”

    “예, 대감마님.”

    “너 빨래 언제 끝나냐?”

    “빨래요? 이제 와가지고··· 아마 반시진은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한가득 담긴 빨래를 흘겼다.

    “빨래는 나중에 하고 너 내 심부름좀 해야겠다.”

    “제가요?”

    전금이가 얼굴이 빨개진 덕산이를 흘긴다.

    덕산이가 있는데 굳이 왜 본인한테 시키나 의아한가 보다.

    하지만 뱁새가 황새의 뜻을 어찌알리?

    “그래.”

    “무슨 심부름이신데 덕산 오라버리는 시키지 않으시구······.”

    “아. 별 건 아니고 저기··· 뭐야. 그거 뭐라 하더라.”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

    “뭐지? 신는 건데? 볏짚으로 만든 거고.”

    “···짚신 말입니까요?”

    아! 그래, 짚신.

    갑자기 생각하려니 기억이 안 났는데 덕산이 녀석.

    내가 제 도와줄 건 아는지 은근슬쩍 내 기억을 상기시켜준다.

    “그래, 짚신. 이번에 보니까 행랑 식구들 짚신이 다 떨어졌더라?”

    현대에는 신발을 취미로 모으지 않는 이상 보통 운동화 2~3켤레를 갖고 있기 마련이고, 그 2~3켤레를 돌아가면서 신지, 굳이 리폼이나 고쳐서 쓰진 않는다.

    하지만 여긴 다르다.

    짚신은 길어야 한 달 쓸 수 있었다.

    그마저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씨에는 보름 쓰면 많이 쓴 정도랄까?

    그래서 일반적으로 노비들이 소비하는(?) 짚신은 10~14켤레 정도다.

    대부분의 집에선 노비들이 짚신을 꼬아서 만들게 하지만 나는 직접 사서 신긴다.

    잠깐 삼천포로 새자면, 그건 내가 착한아이 증후군 같은 강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내 입장에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노비들이 볏짚 꼬아서 짚신 만들고 있을 시간에, 다른 일 시키는 게 더 효과적이잖나.

    뭐, 어쨌든.

    “저번에 사놓은 거 남았을 텐데요?”

    “아니! 전금이 너!”

    “네?!”

    “너 언제부터 나한테 말대꾸 그렇게 꼬박꼬박 했어? 너 그런 노비 아니었잖아?”

    “···소, 송구해요.”

    “지금 내가 다 짚신 사다가 쓸 때가 있으니까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거 아냐.”

    “네··· 몇 켤레나 사오면 될까요?”

    “한 120켤레쯤 사와.”

    “1, 120켤레 씩이나요?”

    정확한 수량은 생각을 안 해놔서 아무말 대잔치처럼, 아무말처럼 내뱉은 건데 생각해보니 120켤레는 많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야······.

    힐끗.

    전금이 바라보고 헤헤 거리고 있는 이 녀석을 도와줄 수가 있지.

    “응. 근데 120켤레면 너 혼자 못 들고 오잖아?”

    “그렇죠.”

    “마침 덕산이도 지금 할 거 없던 참이니까 같이 좀 다녀와라. 덕산아 너가 전금이 좀 도와줄 수 있지?”

    “네?! 네네네! 가, 가능합니다요.”

    “그럼 얼른 다녀와.”

    덕산이가 희희낙락해서는 전금의 뒤를 쫓아가려 할 때쯤.

    나는 덕산이의 팔을 낚아채고 조용히 속삭였다.

    “제발 이번엔 진도좀 나가자 덕산아. 응?”

    “네. 헤헤헤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쫄래쫄래 전금의 뒤를 쫓는 덕산이를 한숨을 내쉬며 바라봤다.

    “아! 맞다, 출근!”

    늦었다, 늦었어.

    나는 난리법석을 떨어대면서 말에 올랐다.

    아니, 말에 오르려고 할 때였다.

    뇌리를 번뜩 스치고 가는 게 있었따.

    ‘이것도 생각해보니까 내가 상산데 늦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잖아?’

    초조한 것도 잠시.

    나는 마음을 편히 먹고 전금이가 놓고간 빨래를 집까지 배송(?) 해놓고, 아주 느긋하게 등청을 했다.

    ***

    그 시각 사헌부.

    사헌부 뜰에는 직책에 따라 일렬횡대로 늘어선 장관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제 곧 묘시말(오전7시)로 대사헌께서 등청을 할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보기 드문 광경이라거나 특이한 모습은 아니었다.

    사헌부처럼 기강이 강한 곳은 어딜가나 상관의 등청을 먼저 나와 기다리곤 하니까.

    째깍째깍-.

    16세기.

    시계란 게 있을 턱이 없을 텐데도, 사헌부 관원들이 직책에 따라 일렬횡대로 도열한 사헌부 뜰에는 째깍째깍 초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째깍째깍 초시계 돌아가는 소리를 제외하면 정적만 감도는 와중에 민망한 듯 이가신이 헛기침을 터뜨리며 말했다.

    “대감께서 좀 늦으시는 듯 합니다. 이런 적은 없으셨는데······.”

    이가신의 말은 처직이 받았다.

    “들어가서 일들 보지요.”

    “하지만 대감께서 아직 등청 전이잖습니까?”

    “대감께서 늘 저희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굳이 이럴 필요 없다고 하시잖습니까? 가뜩이나 지금 성상소에서 전하의 하교가 떨어진지라 논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닌 걸요.”

    처직의 말에 이가신은 대감이 하시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아니, 이러고 있을 필요도 없다니까요? 무슨 의전이 이리 과합니까? 다들 얼른 들어가서 일들 보세요.

    처직의 말처럼 대감은 등청 전 인사 받기를 비효율적이라며 거부하셨다.

    하지만 그걸 어찌 곧이곧대로 믿고 인사를 안 할 수 있겠는가?

    “후···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정적 속에서 일식경이 흘렀다.

    ***

    “성상소에서요?”

    느긋한 마음으로 등청을 했다.

    원래 등청은 묘시말까진데 그보다 반시진 정도 더 늦고 말았다.

    그런데도 관원들 모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집무실로 들어가는 날 붙잡은 건 장령 안처직이었다.

    상성소에 형님의 하교가 떨어졌단다.

    “예.”

    “배녹사. 들었죠?”

    “예. 속히 모두 제좌청에 모이시라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어제 급하게 퇴청하면서 정리를 미처 못 한 책상을 대충 정리하면서 안처직을 바라봤다.

    “그래서 무슨 내용의 하교입니까?”

    “예흥청의 인사 문제 때문인 듯 합니다.”

    “예흥청 인사?”

    “예. 전하께서 예흥청의 장관을 사헌부에서 천거하시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안처직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다지만··· 음.

    진도가 엄청 빠른데?

    덕산이 녀석은 비교도 안 될 진도 빼기다.

    모두 알다시피 난 형님의 부탁대로 상소문을 올렸다.

    아주 흔쾌히 올렸다.

    망설임은 1도 없었다.

    상소문을 올려서 논박을 당하거나 속된 말로 망신을 당하는 것도 잃을 게 많은 지식인들 입장에서지 나는 잃을 것도 없다.

    그래서 더 흔쾌히 올려드린 건데 벌써 기관 이름까지 정하고 인사까지 천거를 받는다니······.

    이성 간의 연애로 치면 만난지 이틀 만에 함께 아침을 맞는것과 흡사하다.

    ‘뭐, 형님이 뭔가에 몰두 하시는 거니까 나쁠 건 없지.’

    24살 쳐먹은 놈··· 아니다. 조선의 인생까지 합하면 26살이라고 치자.

    그래. 어쨌든 26살 쳐먹은 놈이 인생을 논한다면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목표다.

    왜 사회초년생들이 인생에 노잼 시기가 왔다고 투덜거릴까?

    취준생들이 보기엔 배부른 소리일 노잼 시기.

    사회초년생들의 최종 목표는 늘 한결 같았다.

    학생 땐 성적.

    수험생 땐 등급.

    대학생 땐 스펙.

    졸업 후에는 취직.

    그리고 결국 취직을 한 그들은 목표를 달성한 셈이 된다.

    또 다른 목표를 잡는다면 인생의 노잼 시기는 어떻게든 극복 할 수 있지만, 사실 모든 사람이 열정적으로, 그래서 또렷한 목표 의식을 직장 생활 중 갖기란 어렵다.

    그럼 또 이게 악순환의 반복이다.

    슬럼프가 오고 무기력해지고··· 등등.

    이렇듯 26살 밖에 안 쳐먹은 내가 감히 인생을 논하자면, 사람의 생에서 이 목표 의식이란 참 중요하다.

    목표 의식은 열정을 갖게 하고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형님도 마찬가지다.

    바로 얼마 전까지 시름시름 앓던 형님이 드디어 뭔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게 예술이란 점에서 일부 신하들은 경악을 금치 못 할지 몰라도 내 생각은 다르다.

    이 예흥청을 시작으로 성취감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면 정말 머지않아 형님이 바라마지 않던 성군 소리를 온백성에게 듣게 될 것이었다.

    “근데 왜 하필 사헌부에?”

    온백성이 형님을 바라보며 성군대왕(?) 천천세를 외쳐대는 모습에 흐뭇해지던 것도 잠시.

    나는 문득 든 의아함에 안처직에게 물었다.

    인사 추천은 보통 이조에서 받곤 하니까.

    물론 문무백관들에게 “누가 괜찮겠는가?” 추천을 받는 건 있어도 원칙적으로는 이조에서 받는다.

    예흥청의 기관 특성상 예조에 속할 게 분명하니 차라리 예조에서 추천 받는다면 이해라도 가련만 사헌부랑은 업무가 아예 안 겹치는데도 사헌부에서 추천을 받겠다니 의아 할 수 밖에 없었다.

    “음··· 소인의 주관적인 생각이긴 하오나 공길을 이번 연회에 소개시킨 것도 대감이시옵고, 또한 공길패의 연극을 진두지휘한 것도 바로 대감이시니 전하께서 분부는 ‘사헌부에서 천거하라’하셨지만 대감께서 추천해주시길 바라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아.”

    설득 당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일리가 있긴 한데··· 근데 말이지?

    “딱히 추천할 사람이 없는데······.”

    문제는 추천할 사람이 없다.

    모두 알다시피 조선에서의 내 인맥풀은 엄청 좁은 편이거든.

    “아!”

    “···?”

    고민하던 나는 순간 요근래 뜸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요근래 뜸했던 누군가가 누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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